나는 가족을 사랑한다. 지금 내게 가족이란 삶의 중요한 일부라는 인식을 넘어선 강렬한 소속감을 준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자연스러울 이런 진술을 하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전엔 그렇지 않았다. 그때 나에게 가족이란 '복종할 수밖에 없는 구속이며, 고결함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한 가계에 소속된 채, 서로를 배척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비슷한 존재들이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받는 집단 말이다.
이런 생각은 고추장에 깊숙이 박힌 장아찌처럼 쉽게 꺼내지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내 진정 쉴 곳은 집밖에 없다는, 가족을 둘러싼 즐거운 사회적 합의들을 비웃었다.
사실 그런 종류의 혐오감은 거의 즉물적이고도 조건반사적인 것이었다. 가족은 단지 생물학적 고리 속에 연결돼 있을 뿐이라는 정의는 유치하고도 비린 냄새를 풍긴다.
어쨌든 나는, 세상을 뜨신 아버지에게 인사하러 가는 이따금의 가족 의식에조차 늘 빠졌었다. 추석 같은 명절이 다가오면, 나는 여자들의 명절 공황증과는 또다른 공황상태에 빠졌다.
친척들이 하나둘씩 집에 모이면 나는 제트기처럼 빠른 인사만 교환한 다음, 고치에 싸인 누에처럼 내 방에 틀어박혀 책만 읽었다. 혹은 아예 주차장으로 가 내 차 안, 도피처에서 쓸쓸히 안식하곤 했다. 어머니는 그런 나를 늘 허물하셨다. "네가 어디서 왔겠니? 어느날 근본없이 하늘에서 떨어졌겠니? 땅에서 솟았겠니? 네 형제에게 소홀한 건 네 허벅지 살을 베어내는 것과 같은 거다."
명절이 다가오면 어머니는 그날 모일 식솔들을 위해 집안 식기의 최대치 용량을 가동해 음식을 만들었다.이윽고 어머니는 추석 때, 추수 후 곳간처럼 쌓인 신발들과 온 방마다 어슷어슷 포개 자는 가족들을 보며 포만해하셨다.
다음날, 그들이 척척하고도 소란스러운 인사와 함께 현관 밖으로 떠밀려가면, 둘만 남은 거실에 앉아 어머니는 조용히 말씀하셨다. "이제, 아무도 없구나…."
18년 전, 남편과 어머니를 열흘 간격으로 잃었던 그녀의 외로움을 나는 왜 헤아리지 못했을까? 내가 나이를 먹는 만큼 어머니도 더 나이를 드신 지금에야, 나는 방 벽이 뜯어질 듯 고함 같은 그들의 수다와, 암컷 비비처럼 내게 와서 얼굴을 비비던 조카 아이들의 몸짓과, 매시간 상이 차려지던 번잡함을 사랑하게 되었다. 깨우침은 조금 늦게, 그러나 그나마 다행인 타이밍에 찾아왔다.
나 역시 생명이란 한 가계 안에서 도표를 그리는 가지의 일부라는 깨우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