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미도리와 청교도처럼 보낸 밤
이튿날의 강의에도 미도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어찌 된 일일까, 하 고 나는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전화통화를 한 지 벌써 열흘이 지나 있었다. 집에 전화를 걸어 볼 까도 생각했지만 자신이 전화를 하겠다던 그녀의 말이 생각나 그만 두었다. 그 주의 목요일에 나는 식당에서 나가사와와 마주쳤다. 그는 식사쟁반을 들고 와 내 옆자리에 앉더니, 일전엔 여러 가지로 미안하게 됐다고 사과했다.
"괜찮아요, 나야말로 잘 먹었고" 하고 나는 말했다.
"하긴, 묘한 좀 취직 축하연이었지만요."
"그러게 말이야" 하고 그가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식사를 계속했다.
"하쓰미하곤 화해가 됐어" 하고 그가 말했다.
"그래야겠지요" 하고 나는 말했다.
"네게도 꽤 심한 이야기를 했던 것 같은데?"
"어떻게 된 겁니까, 지금 반성하고 있는 건가요? 어디 몸이 안 좋은 건 아닙니까?"
"그런지도 모르지" 하고 말하고 나서 희미하게 두세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너 하쓰미하고 나와 헤어지라고 충고했다면서?"
"당연하지요."
"뭐, 딴은 그렇긴 해."
"그 여자, 좋은 사람이에요" 하고 나는 된장국을 마시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말 했다.
"알고 있어" 하고 나가사와는 한숨을 내쉬면 말했다.
"내게는 좀 과분하다 싶게 좋은 여자야."
전화가 온 것을 알리는 버저 소리가 났을 때, 나는 죽은 것처럼 깊은 잠에 빠 져 있었다. 그래서 나로서는 무엇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자고 있는 동안에 머리가 물에 잠겨 뇌가 물렁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시계를 보니 여섯 시 십오분이었지만 그것이 오전인지 오후인지 알 수가 없었 다. 며칠의 무슨 요일인가도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마 오후 여섯 시 가 좀 지났을 것이라고 나는 짐작했다. 국기 게양이라는 것도 제법 도움이 되는 것인가 보다.
"와타나베, 지금 한가해요?"
하고 미도리가 물었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지?"
"금요일."
"지금이 오후?"
"당연하죠. 이상한 사람이야. 지금은 오후, 으음, 여섯시 십팔분."
역시 저녁이었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래, 침대에 누워 책을 읽고 있는 동안에 잠에 빠져버린 거다. 금요일 - 하고 나는 재빨리 생각해 보았다. 금요일 밤엔 아르바이트가 없다.
"시간 있어. 어, 지금 어디에 있지?"
"우에노 역. 지금부터 신주쿠로 갈 테니까 거기서 만나지 않겠어요?"
우리는 장소와 시간을 약속하고 전화를 끊었다. DUG에 도착해 보니, 미도리는 이미 카운터 맨 끝자리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 었다. 그녀는 남성용의 구겨진 흰 스텐드 칼라 코트 아래 얇은 황색 스웨터를 입고, 블루진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손목에는 팔지 두 개를 끼고 있었다.
"뭘 마시고 있어?"
"탐 칼린즈"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나는 위스키 소다를 주문하고 나서야, 그녀의 발 밑에 큰 가방이 놓여 있는 것을 깨달았다.
"여행을 갔었어요. 막 돌아오는 길이에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어딜 갔었지?"
"나라와 아오모리."
"한꺼번에?"
하고 나는 깜짝 놀라 물었다.
"설마, 내가 아무리 별난 애라지 만 나라와 아오모리를 한꺼번에 갈 거 같아 요? 따로따로 갔었어요. 두 번으로 나누어서. 나라엔 그와 같이 갔었고, 아오모 리엔 혼자서 훌쩍 다녀왔어요."
나는 위스키 소다를 한 모금 마신 후에, 미도리가 물고 있는 말보로에 불을 붙여 줬다.
"여러 가지로 힘들었지? 장례식이라든가 그런 것 때문에."
"장례식 같은 건 간단해요. 우린 그런 데 익숙해 있거든요. 검은 옷을 입고, 심 각한 얼굴로 앉아 있으면 주위 사람들이 적절히 다 일을 진행해 주니까. 친척 아저씨라든가 동네 사람들이 다들 알아서 술을 사오고, 초밥도 준비하고, 위로도 해주고, 울기도 하고, 떠들기도 하고, 자기 좋을 대로 유품을 나눠 갖기도 하고, 아주 편하지요. 피크닉이나 다름없어요. 날이면 날마다 병간호에 시달리던 때에 비하면 피크닉이에요. 지칠 대로 지쳐서 눈물도 나오지 않는 걸요, 언니도 나도. 기운이 빠져서 눈물도 나오지 않는 거예요, 정말로. 하지만 그러면 주위 사람들 은 이 집 딸들은 차갑다, 눈물도 흘리지 않는다고 흉을 봐요. 그래서 우린 오기 로 더 울지 않지요. 우는 척해도 안 될 건 없지만, 절대로 그러치 않아요. 화가 나니까. 다들 우리가 우는 걸 기대하고 있으니까 더욱 울어 주지 않는 거예요 나와 언니는 그런 점에선 마음이 맞아요. 성격은 꽤 다른데도."
미도리는 팔지 소리를 찰랑찰랑 내면서 웨이터를 불러, 탐 칼린즈를 추가하고 피스타치오 한 접시를 주문했다.
"장례식이 끝나고 다들 돌아간 뒤에 언니와 둘이서 우린 새벽까지 청주를 마 셨어요. 큰 병으로 한병 반정도. 그리고 주위 사람들의 욕을 있는 대로 다 했지 요. 그 녀석은 바보 천치다, 개똥이다, 비루먹은 개다, 돼지다, 위선자다, 도둑놈 이다, 하고 마냥 지껄였어요. 그랬더니 가슴이 후련해지더군요."
"그랬겠지."
"그리고 잔뜩 취해서 잠자리에 들어 푹 잤어요. 정신없이. 도중에 전화가 걸려 와도 아예 무시하고 쿨쿨 잔 거예요. 그리고 잠에서 깨어나 둘이서 초밥을 시켜 다 먹으며, 의논해서 결정했어요. 당분간 가게문을 닫고 서로가 하고 싶은 일을 해 보자고. 지금까지 우리는 너무 애써 왔으니까 그 정도는 해도 되잖겠어요? 그래서 언니는 그 이와 둘이서 마음 편히 지내고, 난 그와 둘이서 2박 3일 정도 여행을 하면서 실컷 즐겨나 보자고 생각한 거예요."
미도리는 그렇게 말하고는 잠시 입을 다물고 귀 언저리를 뻑뻑 긁었다.
"미안해요, 말이 거칠어서."
"괜찮아. 그래서 나라에 간 거로군."
"그래요, 옛날부터 난 나라가 좋았어요."
"그래서 실컷 즐겼어?"
"아니 한 번도..."
하고 그녀는 대답한 후 한숨을 쉬었다.
"호텔에 도착해 가방을 내던진 순간에 생기가 시작된 거예요, 거침없이."
나는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웃을 일이 아니에요. 예정보다 일주일이나 빨랐다구요. 울고 싶더라니까, 정 말. 여러 가지로 긴장해 있어서 빨라진 것 같아요. 그도 끙끙 화를 내고... 화를 잘 내는 사람이에요, 그는. 하지만 할 수 없잖아요.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렇게 된 것도 아닌데, 게다가 난 양이 많아요, 그게. 통증도 심하고. 처음 이틀 정도는 아무것도 하기 싫어져요. 그러니까 그럴 때는 나와 만나지 말자구요."
"그리고 싶지만 어떻게 그걸 알지?"
하고 나는 물었다.
"그럼 나, 생기기 시작되면 2, 3일 동안 빨간 모자를 쓸게요. 그럼 알 수 있지 않아요?"
하고 미도리가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빨간 모자를 쓰고 있으면 길에서 만나도 못 본척 도망가면 돼요."
"차라리 이 세상 여자들이 모두 그래 주면 좋을 텐데" 하고 나는 말했다.
"그래서 나라에선 뭘했지?"
"할 수 없이 사슴과 놀기도 하고, 여기저기 산책만 하다 돌아왔어요, 정말 엉 망이지 뭐예요. 그와 싸우고는 그 뒤로 지금껏 만나지도 못하고. 뭐, 그렇게 해 서 도쿄로 돌아와 2, 3일 동안 아무 일도 안하고 있다가, 이번엔 혼자서 마음 편 하게 여행이나 다녀 오자고 아오모리에 갔던 거예요. 히로사키에 친구들이 있어 서 한 이틀 동안 오모리에 묵고, 그 뒤에는 시모키타라든가 탓피 등을 돌았어요. 좋은 곳이에요, 굉장히. 나 그 지방 지도의 해설서를 쓴 적이 있거든요, 한 번. 와타나베는 그곳에 가본 적 있어요?"
없다고 나는 말했다.
"그런데" 하고 미도리는 탐 칼린즈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피스타치오의 껍질 을 벗겼다.
"혼자 여행을 하면서 줄곧 와타나베를 생각했어요. 그리고 지금 내 곁에 와타 나베가 있었으면 했어요."
"어째서?"
"어째서?"
하고 되뇌이니 미도리는 허무를 응시하는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바 라보았다.
"어째서라니, 무슨 말이에요, 그게?"
"즉, 어째서 나를 생각해 냈느냐는 거야."
좋아하니까, 그런 거 뻔하지 않아요. 그 밖에 무슨 이유가 있다는 거예요? 도 대체 어느 누가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과 같이 있고 싶다고 생각하는 거죠?"
"하지만 네겐 애인도 있고, 나를 생각할 까닭이 없잖아" 하고 나는 위스키 소 다를 천천히 마시면서 말했다.
"애인이 있다고 해서 자기를 생각하면 안되는 건가?"
"아니, 그런 뜻을 아니지만..."
"봐요, 와타나베" 하고 미도리는 검지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경고해 두지만 지금 내 속엔 한 달분 가량의 이런저런 것들이 쌓이고 엉키어 있어서 부글부글 끓고 있어요, 지독하게. 그러니 더 이상 심한 말은 하지 말아 줘요. 그렇잖으면 나, 여기서 엉엉 울게 될 것 같고, 나 한 번 울기 시작하면 밤 새도록 울어요. 그래도 좋아요? 난 말이에요, 주위와 관계없이 짐승처럼 운다구 요, 정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위스키 소다를 두 잔째 주문하고, 피스타치오를 먹었다. 세이커가 흔들리고 유리잔이 부딪치고 제빙기에서 얼음을 뜨느라 들그락 소리가 나는 뒤꼍에서, 사라 본이 옛 러브 송 을 부르고 있었다.
"하긴 탐폰 사건 이후, 나와 그의 사이는 좀 험악해졌어요" 하고 미도리가 말 했다.
"탐폰 사건?"
"음, 한 달쯤 전에 나와 그, 그리고 그의 친구들 대여섯 명이 함께 술을 마신 적이 있거든요. 그때 내가, 우리 이웃집의 어떤 부인이 재채기를 하는 순간 그 탐폰이 훌렁 빠져 버렸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우습지요?"
"우스운데" 하고 나는 웃으며 동의했다.
"다들 박수를 치며 웃느라고 정신이 없었어요. 그런데 그 사람만 화를 벌컥 냈 어요. 그런 저질스런 이야기를 한다고. 그래서 분위기가 왕창 깨져 버렸어요."
"흐음."
"좋은 사람이지만 그런 것엔 편협해요"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예를 들면 내가 흰색 아닌, 색깔이 있는 속옷을 입으면 화를 내거든요. 편협 하다고 생각되지 않아요, 그런거?"
"으음, 그렇지만 그런 건 기호의 문제니까" 하고 나는 말했다. 나로서는 그런 인물이 미도리를 좋아했다는 것 자체가 놀라움이었지만, 그건 입밖에 내지 않기고 했다.
"자기는 그 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아무 일도 없었어. 줄곧 같았으니까."
그렇게 말하고 나서 약속한 대로 미도리를 생각하면서 마스터베이션을 해 보 았던 일을 떠올렸다. 나는 주위에는 들리지 않게 작은 소리로 미도리에게 그 이 야기를 했다. 미도리는 얼굴을 빛내면서 손가락을 딱 하고 퉁겼다.
"어땠어요? 잘 됐어요?"
"도중에 왠지 창피해져서 그만 뒀어."
"왜, 안돼요?"
"그래."
"유감이군요" 하고 미도리는 곁눈으로 나를 보면서 말했다.
"창피해 하거나 하면 안돼요. 지독하게 야한 생각을 해도 좋으니까. 내가 좋다 는데 꺼릴게 없잖아요. 그래, 다음엔 내가 전화로 말해 줄께요. 아아... 거기 거 기... 아아, 좋아... 더 못 참겠어, 나, 될것같아... 아아, 거긴 말고... 그런 것. 그걸 들으면서 자기가 하는 거야."
"기숙사 전화는 현관 옆 로비에 있어서, 다들 그 앞을 지나 출입하게 되어 있 어" 하고 나는 설명했다.
"그런 데서 마스터베이션을 하고 있다간 사감한테 맞아 죽는다구, 틀림없이."
"그래? 그럼 어쩌지?"
"어쩌긴. 다시 나 혼자 어떻게 해보아야지."
"힘을 내요."
"으음."
"내가 섹시하지 못한거에요, 존재 그 자체가."
"아니, 그런 문제가 아냐" 하고 내가 말했다.
"뭐라고 할까, 이를테면 입장의 문제야."
"난 말이야, 등이 몹시 민감해요, 손으로 살며시 애무해 주면."
"명심해 둘게."
"저, 지금부터 야한 영화 보러 안 갈래요? 끔찍한 SM인데" 하고 미도리는 말 했다. 미도리와 나는 장어 집에 들러 장어를 먹고, 신주쿠에서도 몇 안되는 그런 초 라한 영화관에 들어가, 성인 영화 세편을 연속해서 보았다. 신문을 사서 보니까 SM물은 거기서밖에 상영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까닭을 알 수 없는 이상한 냄새가 나는 영화관이었다. 다행히도 우리가 들어 갔을 때, 바로 그 SM영화가 시작되었다. 직장 여성인 언니와 고교생인 여동생이 치한 몇에게 납치되어 감금당한 채, 변태적인 폭행을 당하는 거였다. 치한들이 여동생을 폭행하겠다고 협박하며, 언니에게 온갖 잔인한 행위를 저지르는 가운 데, 언니는 마침내 완전한 자학성 변태자가 되고, 여동생을 그러한 광경을 강제 로 낱낱이 보고 있다가 머리가 이상해진다는 줄거리였다. 분위기가 지나치게 굴 절되어 암울한 데다 비슷한 장면만 반복되고 있어서, 나는 도중에 좀 지겨워졌 다.
"내가 여동생이라면 저 정도로 미치진 않겠어요. 좀더 열심히 보고 있지" 하고 미도리가 나에게 말했다.
"그럴 거야" 하고 내가 말했다.
"그렇지만 저 동생 말이야, 처녀 고교생 치곤 유두가 너무 검다는 생각 안 들어요?"
"정말."
미도리는 매우 열심히 그 영화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처럼 열성적으로 본다면 입장료쯤은 너끈히 본전을 뽑고도 남을 거라고 나는 감탄했다. 미도리는 무슨 생각이 날 적마다 일일이 그걸 나에게 보고했다.
"어머머, 불쌍해, 저런 짓을 다하다니" 라든가,
"지독해요, 셋에게 한꺼번에 당하면 망가지겠어" 라느니,
"와타나베, 나도 누가 저렇게 한 번 해 주면 좋겠어" 하는 따위였다. 나는 영 화 구경보다 그녀를 지켜보고 있는 쪽이 훨씬 더 재미있었다. 휴식 시간에 장내를 둘러보니, 미도리 이외의 여자 손님은 없는 것 같았다. 가 까이에 앉아 있던 학생같이 보이는 젊은 사내는 미도리를 보자 멀리 자리를 옮 겨갔다.
"저 말이지 와타나베" 하고 미도리가 물었다.
"이런 거 보고 흥분돼요?"
"뭐, 그야 때때로" 하고 내가 말했다.
"이런 영화란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진 거니까."
"그러니까 그런 장면이 나오면 여기서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의 그게 일제히 스탠드 업? 서른개 마흔 개가 일제히? 그런 걸 생각하면 좀 이상한 기분이 안 들어요?"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하다고 나는 말했다. 두 번째 영화는 비교적 정상적인 영화였다. 그러나 정상적인 만큼 첫 번째 것 보다 더 따분했다. 구순 성애가 너무나 흔히 나오는 영화였는데, 그런 장면마다 효과음이 영화관 내에 크게 울려 펴졌다. 그러한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내가 이 기묘한 혹성 위에서 삶을 보내고 있다는 것에 대해 무엇인가 이상한 감동을 느 꼈다.
"누가 저런 소리를 생각해 냈을까?"
하고 나는 미도리에게 말했다.
"나, 저 소리 좋아해요"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섹스가 진행될 때의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그런 소리가 난다는 걸 난 그때 까지 실제로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침대가 삐꺽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그러한 장 면들이 그칠 줄 모르고 이어져 나갔다. 미도리는 처음엔 재미있어 했으나 차차 지겨워졌던지 그만 나가자고 나를 끌 었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와 심호흡을 했다. 신주쿠 거리의 공기 가 그때처럼 상쾌하게 느껴진 것은 아마 처음이었을 것이다.
"재미있었어"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다음에 또 구경와요."
"몇번봐도 다 그게 그거야" 하고 내가 말했다.
"할 수 없잖아요, 우리도 늘 그게 그거니까."
듣고 보니 사실 그건 그랬다. 영화관에서 나와 우리는 다시 다른 바에 들어가 술을 마셨다. 나는 위스키를 마셨고, 미도리는 뭔지 알 수 없는 칵테일을 서너 잔 마셨다. 그리고는 바에서 나오자 마자 미도리는 나무에 올라가 보고 싶다고 했다.
"이 부근엔 나무 같은 건 없어. 그리고 그렇게 휘청거려선 나무에 못 올라간다 구" 하고 나는 말했다.
"자기는 언제나 분별력 있게 굴면서 사람을 기죽여요, 취하고 싶어서 취한 거 예요. 그것으로 좋은 거 아네요? 취해도 나무쯤은 올라 갈 수 있다구요. 흐응, 높디높은 나무 위에 올라가서 매미처럼 오줌이나 뿌려 주는 거예요."
"지금 화장실에 가고 싶은 거지?"
"그래요."
나는 신주쿠 역의 유료 화장실까지 미도리를 데려가서는, 동전을 내고 그녀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리고 매점에서 석간 신문을 사서 그걸 읽으면서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미도리는 좀처럼 나오질 않았다. 15분이 지나 좀 걱정스러워서, 가보아 야 하나, 하고 생각할 즈음에야 겨우 그녀가 밖으로 나왔다. 얼굴이 조금 창백해 져 있었다.
"미안해요, 안자 있다가 그만 졸아 버렸지 뭐예요"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기분은 어때?"
하고 나는 코트를 입혀 주면서 물었다.
"그렇게 좋진 않아."
"집까지 바래다줄게" 하고 나는 말했다.
"집에 가서 목용하고 푹자면 다 풀릴 거야. 피곤해서 그래."
"집엔 안가요. 지금 집에 돌아가도 아무도 없고, 그런 데서 혼자 자긴 싫어요."
"이런, 그럼 대체 어떻게 할거야?"
하고 내가 물었다.
"이 근처 러브호텔에 들어가서 우리 둘이 껴안고 자는 거야. 아침까지 푹. 그 리고 아침이 되면 여기 아무데서나 아침 식사를 하고 함께 학교에 가요."
"처음부터 그럴려고 날 불러냈나?"
"물론이에요."
"그럼 내가 아니라 그 사람을 불러내야 했잖아. 아무리 봐도 그게 정상이잖아. 애인이란 그럴 때를 위해 있는 거라구."
"하지만 나, 자기와 함께 있고 싶어요."
"그럴 순 없어" 하고 나는 딱 잘라 말했다.
"첫째 난 열두시 까지 기숙사에 돌아가야만 해. 그렇지 않으면 무단외박이 되 니까. 전에 한 번 그랬다가 혼이 났어. 둘째 나 역시 여자와 자면 아무래도 참을 수 없으니까, 그걸 참으면서 까지 끙끙거리긴 싫어. 정말, 무리하게 떼를 쓸지도 모르니까."
"날 때리고, 결박하고 뒤에서?"
"이것 봐, 농담이 아니야, 이건."
"하지만 나 외로워요. 지독하게 외로워요. 나도 미안한 줄은 알지요. 아무것도 주지는 않으면서 온갖 것을 요구만 하고. 제멋대로 지껄이고, 불러내고, 끌고 다 니고. 하지만 내가 그럴 수 있는 상대는 자기밖에 없어. 지금까지 20평생 동안 난 단 한 번도 내 응석이 받아들여진 적이 없었다구요. 아버지도 어머니도 전혀 모른 척했고, 그 사람도 그런 타입이 아니에요. 응석을 부리면 화를 내거든. 그 리곤 싸움을 하죠. 그러니까 이런 말은 정말 자기에게밖에 못해요. 그리고 나, 지금 지칠 대로 지쳐 있어요. 누구한테 선가 귀엽다든가 예쁘다든가 하는 말을 들으면서 잠들고 싶어요. 그저 그것뿐 에요. 눈을 뜨면 완전히 정신을 차리고 있 을 테고, 두 번 다시 이런 일방적인 요구는 하지 않겠어요, 절대로. 아주 착한 애가 될 테니까."
"그래도 곤란해."
"부탁이에요. 그렇지 않으면 나, 여기 주저앉아서 밤새도록 엉엉 울고 있을 거 예요. 그리고 제일 먼저 말을 걸어오는 사람과 자버릴꺼에요."
나는 어쩔 수 없이 기숙사에 전화를 걸어 나가사와를 바꿔 달라고 했다. 그리 고 내가 기숙사에 돌아와 있는 것처럼 손을 써 줄 수 없겠는가 하고 부탁했다. 여자 애와 지금 같이 있거든요, 하고 나는 말했다. 알았어, 그런 일이라면 기꺼 이 힘이 되어 주지, 하고 그는 흔쾌히 대답했다.
"명패를 재실 쪽으로 바꿔 놓을 테니까 걱정 말고 놀다와. 내일 아침 내 방 창 문으로 해서 들어오면 될 거야" 하고 그는 말했다.
"미안합니다. 신세는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고 나서 나는 전화를 끊었다.
"잘 됐어?"
하고 미도리가 물었다.
"그럭저럭" 하고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디스코라도 추러 가요."
"너 피곤하잖아?"
"그런 거라면 전혀 관계없다구요."
확실히 춤을 추고 있는 동안에, 미도리는 조금씩 기운을 회복해 가는 것 같았 다. 위스키 코크를 두 잔 더 마시더니, 이마에 땀이 밸 때까지 춤을 추었다.
"아주 즐거워" 하고 미도리는 테이블에 앉아 한숨을 돌리면서 말했다.
"이렇게 춤을 추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야. 몸을 움직이니까 정신도 해방되는 것 같아요."
"너야 늘 해방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렇지도 못해" 하고 그녀는 방긋 웃고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건 그렇구, 기운이 나니까 배고 고프네요. 피자라도 먹을래요?"
나는 내가 잘 가는 피자 하우스로 그녀를 안내한 후, 생맥주와 안초비 피자를 주문했다. 나는 그다지 배가 고프지 않았기 때문에 열두 조각중 넷만을 먹고, 나 머지는 미도리가 모두 먹어치웠다.
"꽤 회복이 빠르군. 조금 전까지만 해도 창백하고 휘청거리더니" 하고 나는 어 이가 없어 말했다.
"응석을 받아 주었기 때문이야"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그래서 받침대가 필요 없게 된거에요. 그런데 이 피자 정말 맛있군요."
"저, 정말 집에 지금 아무도 없어?"
"그래요, 언니도 친구 집에서 자고 온다고 했어요. 언니는 겁이 많아서 내가 없으면 혼자 못 자요."
"러브 호텔 같은 덴 가지 말자" 하고 내가 말했다.
"그런 데 가봤자 허무해질 뿐이야. 그런 거 집어치우고 너희 집으로 가자. 내 가 덮은 이불 정도야 있겠지?"
미도리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우리 집으로 가요."
우린 야마노테선 전철을 타고 오쓰카까지 가서, 고바야시 서점의 셔터를 올렸 다. 셔터에는 휴업중이란 쪽지가 붙어 있었다. 셔터는 오랫동안 올려지지 않았던 모양으로, 어두운 점포 안에는 오래된 종이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서가의 절반쯤이 비어 있었고, 잡지는 거의 가 반품할 양으로 묶여져 있었다. 처음 보았을 때보다 점포는 어 휑해 보였고 쓸쓸하게 느껴졌다. 마치 파도에 의해 밀어붙여진 해변의 폐선처럼 보였다.
"가게를 계속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지?"
하고 내가 물었다.
"팔기로 했어요" 하고 미도리가 쓸쓸히 말했다.
"팔아서 언니와 그 돈을 반으로 나눌 거예요. 그리고 누구의 보호도 받지 않고 몸 하나로 살아갈 거예요. 언니는 내년에 결혼하고 나는 앞으로 3년 남짓 대학 에 다니면 돼요. 그만한 돈은 될 거예요. 아르바이트도 할거고, 가게가 팔리면 어디 아파트라도 빌려서 당분간 언니와 둘이 살려고 해요."
"가겐 팔릴 것 같아?"
"그럴 것 같아요. 아는 사람 중에 털실 가게를 열겠다는 사람이 얼마 전부터 여길 팔지 않겠느냐는 이야기가 있었어요"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하지만 우리 아버지가 너무 불쌍해요. 그렇게 열심히 일해서 가게를 장만하 고, 빚을 조금씩 갚으며, 갖은 애를 다 썼는데 결국 남은 것이란 거의 아무것도 없잖아요. 마치 물거품이 스러지듯 사라진 거예요."
"네가 남아 있잖아" 하고 나는 말했다.
"나?"
하고 미도리는 반문하더니 야릇하게 웃었다. 그리고 깊이 숨을 들이킨 후 토해 냈다.
"그만 위로 올라가요. 여긴 추워요."
2층으로 올라가자 그녀는 나를 식탁 앞에 앉혀놓고 목욕물을 끓였다. 그 사이 나는 주전자에 물을 끓이고 엽차를 만들었다. 그리고 목욕물이 데워질 때까지 그녀와 나는 식탁을 사이에 두로 마주앉아 엽차를 마셨다. 그녀는 탁자 위에 턱을 괴고 한동안 내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시계가 똑 딱거리는 소리와, 냉장고 온도 조절 장치의 돌아가다 멈추다 하는 소리 이외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시계는 이미 자정 가까이를 가리키고 있었다.
"와타나베,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니까 자기 꽤 재미있게 생겼네요" 하고 미 도리가 말했다.
"그런가" 하고 나는 조금은 기분이 상해서 대꾸했다.
"나 역시 얼굴이 잘생긴 사름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자기 얼굴은 뭐랄까, 자꾸 보고 있으면 차츰 이 사람이면 됐다 싶어지거든요."
"나 자신도 가끔 날 그렇게 생각하지. 뭐, 그런 대로 됐다고 말이야."
"나, 지금 나쁘게 말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난 말이지, 감정 표현이 아주 서툴 러요. 그래서 자주 오해를 받지요.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자기를 좋아한다는 거 야. 이 말은 조금 전에도 했던가요?"
"했어" 하고 나는 말했다.
"말하자면 나도 조금씩 남자에 대해 배우고 있는 거예요."
미도리는 말보로 담배를 들고 오더니 한 개비를 꺼내 피웠다.
"최초가 제로라면 배울 것도 많은 법이지."
"그럴 테지."
"아 그래요. 우리 아버지한테 향을 피워 주겠어요?"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나는 그녀 뒤를 따라 영정이 있는 방으로 가서 향을 피우고 합장을 했다.
"나 말이야, 얼마 전에 아버지 사진 앞에서 옷을 홀랑 다 벗었댔어요. 다 벗고 알몸을 보여 드렸어요, 요가 식으로 앉아서. 아버지, 이게 젖이고, 이게 배꼽이고..."
"그건 또 왜?"
하고 나는 아연해서 물었다.
"그저 보여 드리고 싶었어요. 내 존재의 절반은 아버지의 정자잖아요? 보여 드리면 어때요. 이게 당신의 딸이라고. 저 좀 취한 탓도 있었지만."
"흐음."
"그때 언니가 들어오더니 기겁을 하더군요. 내가 아버지 영정 앞에서 홀랑 벗 고 서 있었으니 기겁을 할 수밖에..."
"으음, 그랬겠지."
"그래서 내 뜻을 설명해 줬어요. 이러이러하다고. 그러니 언니도 내 옆에 앉아 옷을 벗고 아버지한테 보여 드리라고. 하지만 언니는 벗지 않았어요. 어이가 없 다는 얼굴을 하고 나가 버리더군요. 그런 면에서 언니는 너무 보수적이에요."
"비교적 정상인 거야" 하고 내가 말했다.
"음, 자기는 우리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했어요?"
"난 초면인 사람을 대하는 데 퍽 어설픈 편이야. 그런데 그분과는 둘이 있어도 고통스럽지 않았어. 그런 대로 부담스럽지 않았으니까. 여러 가지로 이야기도 했고."
"무슨 이야기를 했어요?"
"에우리피데스."
미도리는 몹시 즐겁다는 듯 깔깔댔다.
"정말 별스럽군요. 죽음을 앞두고 고통을 겪고 있는 초면의 병자에게 난데없이 에우리피데스 이야기를 하다니! 아마도 그런 사람은 없을 거예요."
"아버지 영정 앞에서 벌거벗는 딸도 아마 없을 거야."
미도리는 깔깔거리며 웃더니 불간이 종을 땡 하고 쳤다.
"아버지 편히 쉬세요. 우린 지금부터 즐겁게 지낼 테니까 안심하고 주무세요. 이젠 고통스럽지 않지요? 돌아가셨으니까 아프지도 않을 거예요. 아직도 아프시 면 하느님한테 대드세요. 이건 너무하지 않느냐고요. 천당에서 어머니 만나 사이 좋게 지내세요. 소변 시중을 들 때 그걸 보았는데, 정말 훌륭했어요. 그러니 힘 내세요. 그럼 편히 주무세요" 우리는 교대로 목욕을 하고 파자마로 갈아입었다. 나는 미도리의 아버지가 몇 번밖에 사용 안한, 새것과 다름없는 파자마를 입었다. 조금 작은 듯했으나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미도리는 불단이 있는 방에 내 이불을 펴주었다.
"불단 앞인데 무섭지 않아요?"
하고 미도리가 물었다.
"무섭지 않아. 아무것도 나쁜 짓을 한 게 없으니까" 하고 나는 웃으면서 말했 다.
"하지만 내가 잠들 때 까진 곁에 있으면서 안아 줘요, 응?"
"좋아."
나는 미도리의 작은 침대 가장자리에서 몇 번이나 굴러 떨어질 뻔하면서도, 줄곧 그녀를 안고 있었다. 미도리는 내 가슴팍에 코를 밀어붙이고, 내 허리에 손 을 감고 있었다. 나는 오른손을 그녀의 등으로 돌리고, 왼손으론 침대를 잡은 채 떨어지지 않도록 받치고 있었다. 성적으로 달아오를 상황은 전혀 아니었다. 내 코앞엔 머리가 있었고, 그 짧게 컷한 머리카락이 내 코를 간지럽혔다.
"저, 저, 뭔가 말해 줘요" 하고 미도리가 내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말했다.
"무슨 이야기?"
"뭐라도 좋아요. 내 기분이 좋아질 만한 것."
"미도리" 하고 그녀가 말했다.
"이름을 불러 줘요."
"너무 사랑스러워, 미도리" 하고 나는 고쳐 말했다.
"너무 라니 얼마만큼?"
"산이 무너져 바다가 메워질 만큼 사랑스러워."
미도리는 얼굴을 들더니 나를 보았다.
"자긴 정말 표현 방법이 아주 독특해요."
"네게서 그런 말을 들으니 흐뭇한데" 하고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더 멋진 말을 해줘요."
"네가 나무 좋아 미도리."
"얼마만큼 좋아?"
"봄철의 곰만큼."
"봄철의 곰?"
하고 미도리가 또 얼굴을 들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봄철의 곰이라니?"
"봄철의 들판을 네가 혼자 거닐고 있으면 말이지, 저쪽에서 벨벳같이 털이 부 드럽고 눈이 똘망똘망한 새끼 곰이 다가오는 거야. 그리고 네게 이러는 거야. 안 녕하세요 아저씨. 나와 함께 뒹굴기 안하겠어요? 하고. 그래서 너와 새끼 곰은 부둥켜안고 클로버가 무성한 언덕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온종일 노는 거야. 그거 참 멋지지?"
"정말 멋져."
"그만큼 네가 좋아."
미도리는 깊숙이 내 품에 안겨 왔다.
"최고" 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만큼 내가 좋으면 내 말을 뭐든지 들어주겠죠? 화 안내죠?"
"그럼."
"그리고 날 언제까지나 소중히 생각해 줘요."
"물론"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그녀의 짧고 부드러운, 사내 애 같은 머리카 락을 쓸어 주었다.
"걱정마, 모든게 다 잘 될 테니까."
"하지만 겁이 나요, 나"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미도리의 어깨를 가볍게 안고 있자니, 어느 사이엔가 그녀의 어깨가 규칙적으 로 오르내리기 시작했고 가지런한 숨소리도 들려 왔기에, 나는 조용히 침대에서 빠져나와 부엌으로 가서 맥주를 마셨다. 나는 전혀 잠이 오지 않아서 책이라도 읽을까 하였지만, 주위를 둘러보아도 책 같은 게 얼른 눈에 띄지 않았다. 미도리의 방으로 가서 책꽂이의 책이라도 찾아볼까 했지만, 발소리가 그녀를 깨우게 될까봐 그만 두었다. 한참 멍하니 맥주를 마시는 동안에 아, 그래, 이 집은 책방이지,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전 등을 켜고 문고본을 살펴보았다. 읽을 만 한 것이 별로 없었고, 태반은 벌써 읽은 것들이었다. 하지만 뭔가 읽을 거리가 필요했기에 오랜 재고로 등표지가 변색돼 버린 헤르 만 헤세의 수레바퀴 밑에서를 고르고, 책값에 해당되는 돈을 카운터에 놓았다. 적어도 그 만큼은 고바야시 서전에 재고가 줄어든 셈이다. 나는 맥주를 마시면서 부엌 테이블에 앉아 그 책을 내리 읽었다. 처음으로 수 레바퀴 밑에서를 읽은 것은 중학교에 들어가던 해였다. 그리고 8년후, 나는 여자 의 집 부엌에서 한밤중에, 그것도 여자 친구의 죽은 아버지가 생전에 입었던 사 이즈가 작은 파자마를 입은 채 같은 제목의 책을 읽고 있는 것이다. 무엇인가 참 기묘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만일 그러한 상황에 놓이지 않았다면, 내가 수레바퀴 밑에서를 다시 읽는 일이란 없었을 것이다. 수레바퀴 밑에서는 진부한 데가 있기는 하지만 나쁘지는 않은 소설이었다. 나 는 밤이 깊어 정적 어린 부엌에서 나름대로 제법 즐기며 그 소설을 한 줄 한 줄 천천히 읽어 갔다. 선반 위에 먼지 쌓인 브랜디가 한병 있기에 커피 잔에 조금 따라 마셨다. 브랜디는 몸을 따뜻하게 해주긴 하였지만 잠을 가져다주진 않았다. 세 시 조금 전에 조용히 미도리를 살피러 갔지만, 그녀는 상당히 고단했던 모 양으로 푹 잠이 들어 있었다. 창밖에 서 있는 상점가의 가로등이 달빛처럼 희 뿌옇게 방안을 비추고 있었고, 그 빛에 등을 돌린 자세로 그녀는 자고 있었다. 미도리의 몸은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미동조차 없었다. 귀를 가까이 대어 보 니 숨결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부친을 꼭 닮은 자세라고 나는 생각했다. 침대 옆엔 여행 가방이 그대로 놓여 있었고, 흰 코트가 의자 등받이에 걸려 있었다. 책상 위는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고, 그 앞의 벽엔 스누피가 그려진 달력 이 걸려 있었다. 나는 창문이 커튼을 조금 열고 인적 없는 상가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상점마 다 다 셔터가 내려져 있었고, 술집 앞에 줄지어 있는 자동 판매기들만이 몸을 움츠린 모습으로 날이 새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장거리 트럭의 윙윙거리는 타이 어 소리가 이따금 주변의 공기를 무겁게 진동시켰다. 나는 부엌으로 돌아가 브 랜디를 한 잔 더 마신 다음 계속 수레바퀴 밑에서를 읽었다. 그 책을 다 읽어갈 무렵, 하늘은 이미 밝아 오고 있었다. 나는 물을 끓여 인스 턴트 커피를 마시고, 테이블 위에 있던 메모지 에 볼펜으로 편지를 썼다. 브랜디 를 조금 실례했다, 수레바퀴 밑에서를 샀다, 날이 밝았으니 돌아간다, 안녕, 이라 고 나는 썼다. 그리고 조금 망설이다가 잠들어 있는 너는 정말 사랑스러웠어 하 고 덧붙여 썼다. 그리고 나서 커피 잔을 씻고, 부엌 전 등을 끄고, 계단을 내려 와 조용히 셔터를 열고 밖으로 나왔다. 이웃 사람들이 보면 수상하게 여기지 않을까, 하고 걱정을 했지만, 아침 여섯 시 이전에 거리에 나와 있는 사람은 없었다. 까마귀가 지붕 위에 앉아 주변을 노려보듯 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미도리 방의 핑크색 커튼이 드리워진 창문 을 잠깐 올려다 본 뒤 전철역까지 걸어갔고, 종점에서 내려 기숙사까지 또 걸었 다. 아침 식사를 하는 대중 식당이 문을 열었기에 거기서 따뜻한 밥과 된장국, 그 리고 배추 절임과 계란 후라이를 먹었다. 그리고 기숙사 뒤켠으로 돌아가 1층의 나가사와의 방 창문을 가볍게 노크했다. 나가사와는 금방 창문을 열어 주었고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커피라도 마실 텐가?"
라고 그는 말했지만 나는 사양했다. 그리고 인사를 하 고 내 방으로 돌아가, 이를 닦고는 바지를 벗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을 감았 다.. 이윽고 꿈도 없는, 무거운 납덩이와 같은 잠이 찾아들었다. 나는 매주 나오코에게 편지를 보냈고, 그녀에게서도 몇 통인가의 편지가 왔다. 그리 긴 편지는 아니었다. 11월에 드니 점점 아침 저녁으로 더 추워져 간다고 편지에 씌어 있었다. 당신이 도쿄로 돌아가 여기에서 없어져 버린 것과 가을이 깊어진 것이 거의 동시였기 때문에, 내 몸 한구석의 휑하니 빈 구멍이 나 버린 듯한 기분은 당신 이 없어진 탓인지 계절의 탓인지 얼마동안은 제대로 분간을 못했어요. 레이코 언니와는 자주 당신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이 편지에 안부 전해 달라 는 부탁도 받았고, 레이코 언니는 언제나 다름없이 내게 친절해 대해 주고 있 어요. 그녀가 없었던들 여기의 생활을 내가 견뎌 낼 수 있었을까 의문스러워요. 외로워지면 나는 울어 버려요. 울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라고 레이코 언니는 말하지요. 하지만 외로움이란 정말 괴로운 것이에요. 내가 외로워하고 있으면 밤 의 어두움 속에서 온갖 사람들이 말을 걸어오곤 해요. 밤에 나무들이 바람 곁에 사각사각 소리를 내듯 온갖 사람들이 내게 말을 걸어 와요. 이미 저승사람이 된 기트키나 언니와도 그럴 때 많은 이야기를 하지요. 그들 역시 외로워서 말상대 를 찾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외롭고 고통스러운 밤엔 자주 당신의 편지를 되읽곤 해요. 밖에서 들 어오는 대부분의 것은 나의 머리를 혼란시키지만, 당신이 써서 보내 주는 당신 주변의 세계만은 나를 더 없이 편안하게 해줘요. 이상하죠, 왜 그런지 모르겠어 요. 그래서 나는 몇 번이나 다시 읽게 되고, 레이코 언니도 마찬가지로 몇 번은 다시 읽어요. 그리고 그 내용을 두고 둘이서 이야길 하곤 해요. 미도리의 부친에 관한 이야기가 난 퍽 좋았어요. 우린 일주일에 한 번씩 오는 당신의 편지를, 몇 안되는 우리 오락 중의 하나로 - 편지는 여기선 오락이에요 - 항상 즐겁게 기다 리고 있어요. 나도 되도록 시간을 내서 편지를 쓰려고 애는 쓰지만, 편지지를 대하기만 하 면 마음이 곧 가라앉고 말아요. 이 편지도 지금 온갖 힘을 다해 쓰고 있는 거예 요. 답장을 보내지 않는다고 레이코 언니에게 꾸지람을 들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 줘요. 난 당신에게 말하고 싶은 일, 전하고 싶은 말들이 많아요. 하지만 그것들이 글이 되어 나와 주질 않아요. 그래서 나는 편지 쓰기가 여간 고통스럽지 않답니다. 미도리라는 여자는 재미있는 사람인 것 같아요. 그 편지를 읽은 후 그녀가 당 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 같다고 말하니까, 레이코 언니는 당연하지, 나도 와타 나베를 좋아하는걸 하고 말했어요. 우린 요즘 매일같이 송이버섯도 캐고 밤도 주워서, 그걸 먹고 있어요. 밤밥이 나 송이버섯 밥이 계속 되고 있지만, 아주 맛이 있고 물리지도 않아요. 그러나 레이코 언니는 여전히 조금밖에 안 먹고, 담배만 계속 피우고 있어요, 새들도 토 끼들도 잘 있어요, 안녕. 나의 스무살 생일이 3일 지난 뒤에 나오코로부터 소포가 왔다. 그 속에는 포 도색의 라운드 스웨터와 편지가 들어 있었다.
"생일 축하해요" 하고 나오코는 적고 있었다. 당신의 스무살이 행복하기를 빌고 있어요. 나의 스무 살은 어쩐지 엉망으로 끝날 것 같지만, 당신이 내 몫까지 모두 행복해진 다면 더 이상이 기쁨이 없을 것 같아요. 이건 진심이에요. 이 스웨터는 레이코 언니와 내가 반반씩 짠거에요. 나 혼자서 했더라면 아마 내년 발렌타인 데이까지 걸렸을 거예요. 잘 짜여진 절반이 그녀의 솜씨고, 잘 못 짜여진 절반이 내 솜씨 에요. 레이코 언니는 무엇을 해도 솜씨가 좋아서, 그녀를 보고 있으려면 나 스스로가 한심하게만 느껴져요. 내가 남에게 자랑할 수 있는 것이란 결코 아무것도 없 으니까요. 안녕, 건강해요.
레이코가 쓴 짧은 메시지도 들어 있었다.
잘 있어요? 당신에게 나오코는 최고의 행복과 같은 존재일지 모르지만, 내게 는 그저 손재주 없는 쓸모 없는 여자에 지나지 않아요. 그래도 뭐, 간신히 때 맞 춰 스웨터를 완성시켰어요. 어때요, 멋지죠? 색깔과 모양은 둘이서 결정했어요. 생일을 축하해요.
상실의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