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북소리
마흔 살이라는 나이는 우리의 인생살이에서 꽤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인생의 고비가 아닐까 하고, 나는 오래전부터(라고는 해도 서른 살이 지난 후부터이지만) 줄곧 생각해 왔다. 특별히 뭔가 실제로 근거가 있어서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다.
또는 마흔 살을 맞이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인지 미리미리 예측하고 있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마흔 살이란 하나의 큰 전환점이어서, 무엇인가를 선택하고 무엇인가를 뒤에 남겨 두고 가는 때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런 정신적인 탈바꿈이 이루어지고 난 후에는 좋든 싫든 다시 돌이킬 수 없다. 시험해 보았지만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으니 다시 이전의 상태로 돌아갑니다, 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세월이란 앞으로만 나아가는 톱니바퀴라고 나는 막연히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정신적인 탈바꿈이란 어쩌면 이런 것이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마흔 살이란 분수령을 넘음으로써, 다시 말해서 한 단계 더 나이를 먹음으로써, 그 이전까지 불가능했던 일들이 가능하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은 그 나름대로 멋진 일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렇게도 생각했다. 새로운 것을 얻는 대신에 그때까지 비교적 쉽게 할 수 있었던 일을 앞으로 할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고
그것은 예감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30대 중반을 지날 무렵부터 그 예감은 나의 몸속에서 조금씩 부풀어갔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변화가 오기 전에, 즉 내 자신 속에서 정신적인 탈바꿈이 이루어지기 전에 뭔가 한가지 보람 있는 일을 남기고 싶었다. 아마도 나는 이제 더이상 이런 종류의 소설은 쓰지 않을 것이다(쓸 수 없을 것이다), 라고 할만한 작품을 써놓고 싶었다.
14p
그 세월은 어떤 의미에서는 잃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은 내 내부의 현실 속에 단단하게 매달려 있다. 나는 그 기억의 존재를 분명하게 몸 어딘가에서 계속 느끼고 있다. 기억의 긴 손이 비현실의 어둠 속 어딘가에서 뻗어 나와 현실의 나를 움켜잡고 있다. 나는 그 질감의 의미를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기억의 질감을 전할 만한 적당한 언어를 알지 못한다. 그것은 어떤 종류의 마음가짐이 그렇듯이, 아마도 비유적인 총체로서 나타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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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이 되려 한다는 것, 그것도 내가 긴 여행을 하게 된 이유 중 하나이다. 하지만 일본을 떠나려고 생각한 데에는 그 밖에도 몇가지 이유가 있었다. 긍정적인 이유도 있었고 부정적인 이유도 있었다. 실제적인 이유도 있었고 형이상학적인 이유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일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고 싶지 않다. 지금에 와서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내게도 그렇고, 아마 독자들에게도 별로 의미없는 일일 것이다. 설령 어떤 이유가 나를 여행으로 내몰았다 하더라도,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 긴 여행을 하게 한 근본적인 원인은 어디론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어느 날 문득 긴 여행을 떠나고 싶어졌던 것이다. 그것은 여행을 떠날 이유로는 이상적인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간단하면서도 충분한 설득력이 있다. 그리고 어떤 일도 일반화하지는 않는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뜨고 귀를 기울여 들어보니 어디선가 멀리서 북소리가 들려왔다. 아득히 먼 곳에서, 아득히 먼 시간 속에서 그 북소리는 울려왔다. 아주 가냘프게, 그리고 그 소리를 듣고 있는 동안, 나는 왠지 긴 여행을 떠나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먼 곳에서 북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그것이 나로 하여금 서둘러 여행을 떠나게 만든 유일한 진짜 이유처럼 생각된다.
17p
온몸의 틈새란 틈새엔 치과의사가 치아 땜질용으로 사용하는 시멘트가 꽉 들어차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어디까지가 육체적 피로이고 어디까지가 시차에서 오는 피로이고 어디까지가 정신적 소모인지, 나는 도무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우리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피폐, 망연자실, 소모.
25p-26p
내가 결혼 생활에서 배운 인생의 비결은 이런 것이다. 여성은 화를 내고 싶은 일이 있어서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화내고 싶으니까 화를 내는 것이다. 그래서 화내고 싶을때 제대로 화를 내게 하지 않으면, 나중에 더 골치 아픈 일이 생기게된다.
우리의 결혼 생활에서-아마도 다른 사람의 결혼 생활도 많든 적든 대개는 비슷할 것으로 생각하지만-말다툼의 패턴은 항상 정해져 있다. 시작은 달라도 끝나는 방식은 항상 같다.
79p
시간은 구름이 흘러가는 속도에 맞추듯 유유히 흘러간다
116p
뭔가를 열심히 했던 하루 같기도 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은 하루 같기도 하다.
125p
그렇다. 내 소설에는 어두운 비의 냄새와 한밤중의 격렬한 바람소리가 배어있다. 러시아 전선만큼은 아니더라도 그건 그 나름대로 상당히 치열한 전투였던 것이다. 이봐, 그게 아니야. 자네가 파내고 있는 것은 내 시체가 아니란 말이야. 나와 닮았지만 그것은 내가 아니야. 자네는 나에 대해 조금 오해하고 있어. 얼어붙은 시체는 모두 똑같이 보일는지 모르지만. 내가 방황하는 것은 내가 고향을 멀리 떠나왔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방황하는 것은 내가 내 자신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 나는 멀리 내 자신으로부터 떨어진 장소에서 또다시 조금 이동하려 하고 있다. 무한 빼기 약간 또는 무한 더하기 약간, 어느쪽이라도 좋다. 어느쪽이든 마찬가지인 것이다.
169p
나는 어딘가에서 어딘가로 이동해 간다. 시간과 장소. 때때로 그것이 내 마음속에서 무게를 더해 간다. 나 자신과 시간과 장소라는 세 가지 존재의 균형이 무너진다.
177p
낯선 도시에 가면 반드시 대중 술집에 가는 사람이 있듯이, 낯선 도시에 가면 반드시 여자와 자는 사람이 있듯이 나는 낯선 도시에 가면 반드시 달린다. 달릴때의 느낌을 통해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일도 세상에는 있기 때문이다.
208p
언제나 그렇다. 언제나 같다. 소설을 쓰면서 나는 죽고 싶지 않다. 죽고 싶지 않다. 죽고 싶지 않다라고 계속 생각한다. 적어도 그 소설을 무사히 끝마칠 때까지는 절대로 죽고 싶지 않다,
이 소설을 완성하지 않은 채 도중에 죽게 되는 것을 생각하면 나는 눈물이 나올 정도로 분하다. 어쩌면 이것은 문학사에 남을 훌륭한 작품은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이것은 나 자신이다. 좀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 소설을 완성시키지 않으면 내 인생은 정확하게는 이미 내 인생이 아닌 것이다- 장편소설을 쓸 때마다 나는 많든 적든 그런 생각을 하며,
그 생각은 내가 나이를 먹고 소설가로서 경력을 쌓아감에 따라 더욱 강렬해지는 것 같다. 나는 때때로 침대 위에 누워서 숨을 죽인 채 눈을 감고 자신이 죽어가는 모습을 상상하기도 한다. 죽어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하고 상상해 본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한다. 안 돼, 그건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라고,
아침에 눈을 뜨면 우선 주방으로 가서 주전자에 물을 붓고 전기 히터 스위치를 켠다. 커피를 만들기 위해서다. 그리고 물이 끓기를 기다리면서 나는 이렇게 기도한다. "원컨대, 저를 조금만 더 살려 주십시오. 저에게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합니다. 하고, 하지만-그렇다- 나는 대체 누구에게 기도해야 하는 것일까? 신에게 기도 하기에는 나는 지금까지의 인생을 너무 내 멋대로 살아왔다. 운명을 향해 기도하기에는 나는 너무나 자신에게 의지하고 있다. 아무래도 좋다. 누군가에게 가 닿을지도 모른다. 언젠가 어딘가의 우주인에게 감지될 것을 기대하며 산 위에서 여러 방향으로 마구 메세지 전파를 보내고 있는 과학자처럼 어쨓든 나로서는 기도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는 것이다.
이 불확실하고 폭력적이며 불완전한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 주변에는 실제로 여러 형태의 죽음이 넘쳐나고 있으므로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무사히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아니, 그런 건
214p-215p
내가 원하는 것은 영원한 삶도 아니고 불멸의 걸작도 아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바로 지금 현재의 일이다. 이 소설을 다 쓸때까지 어떻게든 살아 있게만 해달라는 것 뿐이다.
216p-217p
세상에는 말은 하지 않고 혼자서만 화를 내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
440p
일본으로 돌아와서 한동안 나는 거의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왠지 머리가 멍해 있었다. 마치 중력이 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한달가량 나는 하는 일 없이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나는 내가 있는 곳에서의 내 자격에 대해 이것저것 생각했다. 매일 집 주위를 돌고 책을 읽고 오랜만에 다른 사람들과 술도 마시고 농담도 하고 온천에도 갔다. 그러나 책상 앞에 앉아도 글이 떠오르지 않는다. 쓰기 시작했던 단편소설은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아침에 일어나 워드 프로세서를 켜고 화면을 지그시 노려보지만 전혀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다.유럽에서 보낸 3년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이런저런 일을 겪은 후 결국 본래의 위치로 돌아온 것 일 뿐 달라진 건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나는 말하자면 상실된 상황에서 이 나라를 떠났다. 그리고 마흔 살이 되어 돌아온 지금도 여전히 그때처럼 나는 상실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무력감은 무력감으로서, 피폐는 피폐로서 그대로 남아 있다, 두 마리 벌, 조르지오와 카를로는 지금도 어딘가 몸을 숨기고 있다. 그들이 예언했던 것처럼 그저 나이만 먹었을 뿐이고 아무것도 해결되지는 않은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한다. 다시 한 번 본래의 위치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만도 다행이 아닌가, 훨씬 안 좋은 상황이 될 수도 있었다, 라고. 그렇다, 나는 낙관적인 인간인 것이다.
나는 말하자면 자신의 중력을 안정시키기 위해 이 책을 썼다. 지금까지 쓴 스케치를 모아 새로운 글을 덧붙여서 한 권의 책으로 만들었다. 완성되기까지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걸렸고 예정했던 것보다 훨씬 두꺼운 책이 되어 버렸다.
글을 쓴다는 건 참 좋은 일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정말 좋은 일이다. 처음에 가졌던 자기의 사고방식에서 무언가를 '삭제'하고 거기에 무언가를 '삽입'하고 '복사'하고 '이동'하여 새롭게 '저장' 할 수 있다. 이런 일을 몇번이고 되풀이하면, 나라는 인간의 사고나 혹은 존재 그 자체가 얼마나 일시적이고 과도적인 것인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만들어낸 책 자체도 과도적이고 일시적인 것이다. 불완전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물론 불완전할지도 모르지만 내가 과도적이고 일시적이라고 한 것은 그런 것을 의미하는게 아니다.
내게는 지금도 간혹 먼 북소리가 들린다. 조용한 오후에 귀를 기울이면 그 울림이 귀에서 느껴질 때가 있다. 막무가내로 다시 여행을 떠나고 싶어질 때도 있다. 하지만 나는 문득 이렇게도 생각한다. 지금 여기에 있는 과도적이고 일시적인 나 자신이, 그리고 나의 행위 자체가, 말하자면 여행이라는 행위가 아닐까 하고,
그리고 나는 어디든지 갈 수 있고 동시에 어디에도 갈 수 없는 것이다.
500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