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 일상의 여백
세간에 유포된 파멸적 작가상
여러분 안녕하십니까?ㅡ라고 책의 서두를 시작하는 것도 어쩐지 어색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편지가 아니니까요), 아무튼 덕분에 나는 꽤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먼저 전하고 싶습니다. 머리가 썩 좋지 않은 대신에 다행스럽게도 몸만은 튼튼한 편입니다. 아니, 그건 얼토당토 않은 착각이고요.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군.
그건 그렇고 지금까지도 세상 사람들은 작가에 대한 일반적인 선입견 같은 걸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작가라는 작자들은 밤을 새우기 일쑤고, 줄창 단골 술집에 드나들면서 술이나 퍼마시고, 가정은 거의 돌보지 않으며, 게다가 지병(持病) 하나둘쯤은 누구나 갖게 마련이고, 원고 마감일만 되면 호텔 같은 곳에 틀어박혀서 머리칼을 마구 쥐어뜯고 있는 족속이라고 믿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밤에는 대게 열 시에 잠자리에 들고, 아침에는 여섯 시에 일어나 매일 조깅을 하며, 한 번도 원고 마감일을 넘긴 적이 없다"고 말하면, 깜짝 놀라며 '아 그런 문인도 있습니까?' 하는 표정을 짓는 이도 적지 않다(다시 덧붙이지만, 일찍부터 나는 숙취라든가 변비, 두통, 어깨 결리는 것은 태어나서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다).
내가 그런 말을 하면 사람들은 자신이 상상하고 있는 작가에 대한 신화적(神話的) 이미지가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모양이다. 실망하는 표정을 보면 미안한 생각이 들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세간에 유포되어 있는 그러한 파멸적 작가상은 '베레모를 쓴 화가' 라든가 '시가를 입에 문 자본가'와 같은 수준의, 리얼리티가 결여된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 작가들 모두가 그런 해이한 생활을 한다면, 작가는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되어 평균 연령은 아마 50대에서 그칠 것 같다.
하긴 그중에서 그러한 거칠고도 다채로운 생활방식을 경향적으로 좋아하는 사람. 혹은 과감하게 실천에 옮기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소설(私小說)'이라고 할 수 있는 현실 생활을 말하자면, 생활의 일부분을 조금씩 잘라서 파는 소설 스타일이 주류를 차지하던 옛날이라면 또 모를까, 내가 알고 있는 요즈음 대부분의 전업 작가는 그런 무질서한 생활은 하지 않는다.
소설을 쓰는 것은 대체로 검소하고 과묵한 작업이다. 일찍이 조이스 캐롤 오츠가 "조용하고 단정하게 작업을 하는 사람은 그다지 뉴스거리가 되지 못한다"라고 말한 것처럼.
"하지만 작가가 지나치게 건강하면 병적인 집념(이른바 강박관념 같은 것)이 싹 사라져 버려서 문학이라는 게 성립되지 않는 것 아닙니까" 하고 지적하는 사람도 물론 있다.
그러나 나에게 그 질문에 대답하라고 한다면 이렇게 얘기하겠다. "그 정도로 쉽게 사라져 버릴 정도의 가벼운 어두움이라면 그런 것은 처음부터 문학으로 승화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대체로 '건강' 하게 되는 것과, '건강한 편이 된다는 것은 비슷한 뜻이지만 뉘앙스가 다른 문제이다. 때문에 이 두 가지를 혼동하게 되면 얘기가 약간 까다로워진다. 건전한 신체에서 거무틱틱하게 깃들이는 불건전한 영혼도 엄연히 존재한다고 나는 생각 한다.
그런 이유로, 이 책의 기본적인 메시지는, "첫째가 건강이고, 둘째가 문체(文體)"이다. 그게 어떻게 됐다는 말은 아니지만, 우선 이 정도로 그치고 다음으로 넘어가기로 하겠다. 별로 할말은 없지만 말이다.
보스턴 마라톤에는 뭔가 특별한 멋이 있다
마라톤에 참가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상당히 불가사의한 체험이다.이를 경험 하는 것과 경험하지 않는 것과는 인생 그 자체의 색깔도 조금은 달라져 버리는 것 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 정도다. 종교적인 체험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거기에는 뭔가 인간 존재에 깊숙이 와닿는 것이 있다.
42킬로미터를 실제로 달리고 있을 때는, '도대체 내가 왜 일부러 이런 지독한 꼴을 자처하는 거지? 이래 봤자 좋은 일은 하나도 없지 않은가? 아니, 오히려 몸에 해로울 뿐이지(발톱이 벗겨지고, 물집도 생긴다. 그 다음날에는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도 힘이 든다)' 하고 상당히 진지하게 스스로에게 캐묻는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결승점에 뛰어 들어가 한숨 돌린 다음 건네어진 차가운 캔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뜨거운 욕조에 잠긴 채로 바늘 끝으로 발바닥에 부풀 어오른 물집을 따낼 무렵에는, '자아, 이젠 다음 레이스에서는 더 분발해야지' 하고 다시 마라톤에 대한 의욕으로 불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건 도대체 어떤 심리 작용일까? 인간에게는 이따금 자신을 알 수 없는 극한 상황까지 몰고 가보려는 내재된 욕망 같은 것이 있는 것일까?
나로서는 그런 감정의 발생 이유까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이런 감흥은 마라톤 코스를 완주했을 때만이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것이다. 이상한 일이지만, 가령 마라톤 하프 코스를 달렸을 때에는 그런 흥분을 느낄 수 없다. 그저 '21킬로미 터를 마음껏 달린다'는 것뿐인데 왜 그런 차이가 날까.
물론 마라톤 하프 코스도 고통스럽긴 하지만, 그건 달리기가 끝나면 곧장 해소되어 버리는 그런 종류의 괴로움이다. 하지만 마라톤 풀 코스를 끝까지 달리고 나면 , 인간이(적어도 나는)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신경에 거슬리는 자잘한 마음의 '앙금'같은 것이 뱃속에 가득히 남게 된다.
제대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자신이 바로 조금 전까지 극한 상황에서 맛보았던 그 '괴로움 같은것'과 조만간 다시 한번 대면해서, 그 나름대로 어떤 매듭이 지어지는 걸 봐야 한다고 느끼게 된다. '다시 한번 되풀이해야만 한다. 그것도 좀 더 잘할 수 있게 되풀이할 필요가 있다' 는 식으로.
그렇기 때문에 아마도 나는 지칠 대로 지치고 파김치가 되면서까지 포기하는 일 없이 그럭저럭 12년동안이나 끈질기게 마라톤 전 코스를 계속 달리는 것이리라. 물론 뭔가 해결을 볼 수 있을 만한 것은 전혀 찾지 못했지만 말이다.
'마조히즘'적이라고 사람들은 말할지도 모르지만, 결코 그런 것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틀림없이 호기심과 비슷한 종류의 것일게다. 계속해서 횟수를 늘여가고 한계를 조금씩 올려감으로써 자신 속에 잠재해 있는, 자기가 아직 모르는 것을 좀더 자세히 보고 싶고, 햇빛이 비치는 곳으로 끌어내 보고 싶다는‥‥‥.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까, 이 생각은 평소 내가 장편 소설에 대해 품고 있는 생각과 거의 비슷하다. 어느 날 갑자기, '자아, 이제부터 장편 소설을 쓰자'고 생각한다. 책상 앞에 앉는다. 그리고 몇 개월이나 몇 년 동안 숨막히게, 신경을 극단적인 한계로까지 집중시켜 가면서 장편 소설을 하나 써낸다.
그때마다 걸레를 쥐어짠 것처럼 기진맥진하여, '아아, 너무 힘들었어. 이제 당분간은 이런 짓은 하지 않을거야' 하고 뼈저리게 생각한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면, '아냐, 이번에야말로' 하고 생각하고 다시 싫증도 나지 않는 듯 책상 앞에 앉아서, 또 다시 장편 소설을 쓰기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써도, 아무리 많이 써도 역시 마음의 '앙금' 이 뱃속에 무겁게 가라앉는다.
그에 비하면 단편 소설이라는 건 10킬로미터 레이스나, 길어 보았자 겨우 하프 마라톤 정도의 것이다. 물론 단편 소설에는 단편 소설만의 독자적인 역할이 있고 , 그 나름대로의 생각이나 즐거움이 있다.
하지만 단편 소설은 인간의 존재 자체에 깊이 의존해 오는 압도적인 것, 죽음에 이를 만큼 치명적인 것은 -물론 어디까지나 나에게 그렇다는 얘기지만- 없다. 그만큼 '좋은점과 안좋은 점이 반반을' 차지하는 면도 장편 소설에 비하면 훨씬 적다.
닉슨 대통령의 죽음에 관한 단상
한낮에 햇빛이 잘 드는 호텔의 테라스에 앉아서 조용히 책을 읽거나, 샤이나 포크 맥주를 마시거나, 근처에서 배회하는 고양이와 놀거나 하면서 느긋하게 텍사스의 따뜻하고 마음 편안한 봄날을 보냈다. 그렇게 소일하노라면 남부에서 '테라스가 있는 생활'이라는 것은 참으로 여유롭구나 하는 실감이 든다.
조깅을 하면서도 불안한 이유
게다가 퓨마 쪽에서 보자면, 산 속에서 혼자 폴짝 폴짝 뛰고 있는 인간은 '이지 플라이(안성맞춤의 먹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러니 사람을 덮쳐서 잡아먹는 것은 퓨마로서의 '당연한 영업행위'아니겠는가.
하지만 그런 식으로 좋다 나쁘다는 관점으로 떠들다가는 얘기가 다소 까다로워질 것이다.
어쨌든 산 속에서 갑자기 퓨마의 습격을 받아 잡아먹히는 것은 그다지 기분 좋은 사망 방법은 아닐 것 같은 느낌이 든다9그렇다면 어떤 사망 방법이 기분 좋은 것이냐고 물어 온다면 이것도 또한 곤란하다).
지금부터라도 미국의 산 속에서는 가급적 달리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
중국 음식 알레르기
나는 어렸을 때는 편식이 심해서 고생했지만, 커 가면서 여러 종류의 음식을 별로 가리지 않고 먹을 수 있을 만큼은 되었으며, 사실 대개의 음식은 먹으려고 생각하면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 음식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센다가야의 ‘호프겐’ 앞을 지나가기만 해도(우리 집 근처이기 때문에 거의 매일 지나다녔다) 기분이 나빠진다. 요코하마의 중국인 거리는 도저히 걸어 다닐 수가 없고, 중국인 거리는커녕 슈마이 냄새를 맡는 것이 싫어 요코하마 역에서 내리고 싶지 않을 정도로 매우 심각한 알레르기다.
태어나서부터 라면 같은 것은 한 번도 먹어 본 적이 없다. 그런 얘기를 하면 모두들 농담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이건 진짜로 사실이다. 예전에 우연히 중국 음식점에 초대를 받아 가서, 전혀 젓가락을 대지 못한 일도 몇 번인가 있었다.
어쩌다가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이유는 잘 모른다. 아마 어릴 때 겪었던 뭔가가 있지 않을까 생각되지만, 도대체 어디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생각해 낼 수가 없다. 어쩌면 히치콕 감독의 <백색 공포>와 같은 비밀이 숨겨져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단순히 먹어 보지도 않고 까닭 없이 싫어하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그 증거로, 아내는 전혀 중국 음식으로 보이지 않도록 중국 음식을 만들어서 몇 번씩이나 나에게 먹이려고 했지만, 나는 언제나 한 입에 그것을 간파해 버렸다. 어떤 희미한 냄새나 향기가 귓가에서 쾅쾅 하고 징 같은 것을 두들겨대면서 나에게 “이것은 우연히 중국 음식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을 뿐, 어엿한 중국 음식이다”라고 알려주는 것이다.
이런저런 일로 인해. ‘중국 음식 알레르기’를 치료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끈질긴 성격의 소유자인 아내조차도 어쩔 수 없이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그리고 자기가 중국 음식을 먹고 싶을 때는 누군가 다른 사람을 데리고 먹으러 가게 되었다.
얼마전에 아내는 라면이 먹고 싶어져서 점심 때 혼자 하면 가게에 들어가 라면을 먹고 있었다. 그러자 앞 테이블에 앉아 있던 젊은 아가씨가 일해에게 들으라는 듯이. “나이가 들어서도 혼자 라면을 먹으러 오는 여자만은 되고 싶지 않다”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아내는 “그런 말을 듣는 것은 모두 당신이 라면을 먹지 못하는 탓이라구요!” 하고 마구마구 화를 냈다.
그러니까 혼자서 묵묵히 라면을 먹고 있는 40대 여성을 어딘가에서 보더라도 너무 흉보지 말아 주길 바란다. 인간에게는 각자 여러 가지로 개인 적인 사정이 있으니까. 그리고 그런 분풀이는 반드시 나에게 오니깐 말이다.
“하지만 라면을 먹지 못하다니, 정말 인생의 커다란 불행이네요. 정말 맛있으니까요”하고 아내는 말한다. 분명히 그렇지도 모른다. 나도 할 수만 있다면 눈앞에 놓인 음식은 무엇이든지 가리지 않고 맛있게 먹고 싶다. 그렇게 되면 이 세계는 좀 더 단순하고 행복한 장소가 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생각해도 ‘중국애나무’ 그림이나 용의 무늬가 그려진 그릇이라든가 그런 걸 보기만 해도 나의 용기는 장마 때의 폭죽처럼 푹 꺼져 버리고 만다.
고생이나 고통이라는 건, 그게 타인의 몸에서 일어나는 한. 인간으로서는 정확히 이해할 수 없는 법이다. 특히 일반적인 종류의 노력이나 고통이 아닌 경우에는 더욱 심한 편이다.
작가마다 다른 작업시계
최근에는 소설을 열심히 쓰고 있기 때문에, 매일 아침 다섯 시경에 일어나 작업에 몰두하다가 밤 아홉시가 지나면 이미 침대에 들어가 잠드는 생활이; 규칙이 되었다. 나의 경우, 장편 소설을 쓰고 있을 때는 아무래도 이 생활 형태가 가장 이상적인 패턴인 모양인지 언제나 대개 그런식으로 되어 버린다. 자연스럽게 졸음이 오고, 자연스럽게 잠이 깬다. 물론 작가에 따라 각자 여러 가지의 작업 패턴이 있다. 언젠가 어떤 출판사가 소유한 산장에서 하시모토 오사무 씨와 일주일 가량 함께 일을 한 적이 있는데, 매일 한 번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말고는 거의 마주친 적이 없었다.
하시모토씨는 밤 아홉 시경부터 서서히 작업을 시작하고, 나는 대체로 그 시간대에는 잠자리에 드니까, 같은 시각에 저녁 식사를 하는 것 외에는 생체 시계가 완벽하게 엇갈렸던 것이다. 우리 두 사람이 교대제로 24시간 편의점이라도 경영하면 편리할지도 모르겠다.
존 어빙과 마이클 길모어의 소설
존 어빙의 대장편 소설인 <서커스의 아들>을 모두 읽고 나면 감상을 쓰겠다고 말해 놓고 깜빡 잊어버렸다. 간단히 쓰겠다. 나는 어쨌든 마지막까지 전부 다 읽었고, 그렇게 긴 소설을 끝까지 싫증내지 않고 재미있게 읽도록 만드는 것은 언제나 그렇지만 참으로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번 이야기는 무대가 처음부터 끝까지 인도였고, 주인공도 인도인, 등장 인물도 모두 인도인으로, 모든 것이 마치 카레처럼 강렬한 소재였다. 게다가 소설이 워낙 길기 때문에, 그 설정이 도중에 약간 골치 아프게 전개되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작가가 의욕적으로 글을 썼다고 한다면 분명히 그렇긴 하다. 존 어빙의 소설에는 늘 마지막 부분에 코끝이 찡해 오는 깊고도 독특한 슬픔이 있는데 (그리고 그게 그의 장편 소설의 매력적인 요소인 것 같다). 이 소설에서는 그런 감정을 기대할 수 없었다.
도난당한 폭스바겐 코라드
12월 5일, 자세한 사정을 얘기하자면 길어지지만, 어쨌든 내 자동차가 도난을 당했다. 집 앞에 세워두었던 나의 폭스바겐 콘라드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대신 그곳에 흰색의 혼다 아코드가 세워져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둑맞았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내가 잠을 자는 동안에 자동차가 혼자서 제 멋대로 어딘가로 가 버릴 이유가 없으니까.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정말 난처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보다 2주일 전에 하버드 광장에서 내 소중한 자전거를 도둑맞았던 참이다. 가로수의 몸통에 체인만 남아 있고 자전거는 깨끗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 전에는 대학의 체육관 사물함이 훼손 당하고 스퀴시용 운동화를 도둑맞기도 했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자동차까지 도둑 맞았으니 정말 참기 힘들 정도로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30분 뒤에 집으로 찾아온 사람은 젊고 키가 큰 여자 경찰관이었다. 나보다 대충 머리 절반쯤은 더 키가 크고 금발이었는데, 얼굴은 롤라 던과 비슷하게 생겼다. 그녀의 임무는 도난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용지에 시리얼 넘버, 연도, 차 색깔 등 필요한 사항을 담담하게 적어 넣고, 그 복사본을 나에게 주면서 다시 연락하겠다고만 말하고 돌아갔다.
겉으로 보기에 그다지 스릴 있는 일도 아니고, 본인도 특별히 즐겨서 그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형사가 나오는 영화에서는 젊고 미인인 여자 경찰관이 클린트 이스트우드나 멜 깁슨 같은 남성과 콤비를 이루어 스펙터클한 사건들만 맡는데, 현실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현실은 좀 더 현실적이다.
나는 그녀에게 "자동차 도난이 이 부근에서 흔히 있는 일입니까?" 하고 물었다.
"아뇨, 거의 없었던 일입니다. 이 부근에서 자동차를 도난당하는 일은 거의 없어서, 사실은 저도 약간 놀랐어요"하고 믿기지 않는다는 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고는 "안녕"하고 무뚝뚝하게 말을 마친 다음 혼자 순찰차를 타고 유유히 사라져 갔다.
"이 부근에서 자동차를 도난당하는 일은 거의 없다"는 말은 사실인 모양인지, 내가 그 얘기를 했더니 집 주인 스티브도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이상하군요, 여기서는 그런 일이 일어난 리가 없는데, 참 이상하네요"하고 말을 잇지 못했다.
한 블록 앞쪽 거리에 살고 있는 또 다른 스티브는(그는 영화일을 하고 있다)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군요.
나는 여기서 20년 동안 살면서 누군가가 세워 놓은 자동차를 도둑맞았다는 얘기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습니다. 정말 놀랄 만한 이야기네요" 하고 탐정 영화라도 본 듯 감탄하고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은 특별히 부자들이 사는 곳은 아니지만, 그 정도로 범죄와는 무관한 조용하고 평화로운 장소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차 문만 닫고 핸들 키는 빼지도 않고 살 정도로 안심하고 살아왔다.
그러나 믿거나 말거나, 전례가 있든 없든, 감탄을 하든 동정을 해주든 간에, 내 자동차가 도난을 당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내가 경찰에 통보한 다음에 해야만 하는 일은 보험 대리점에 연락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대리점에서는, "뭐요? 차를 도둑맞았어요?(귀찮게 됐군) 그래서요?" 하는 식으로 번거롭고 성가시다는 대응이었다. 친절이나 동정심 같은 건 약에 쓰려 해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경찰 보고서의 사본을 받아 들고 나를 힐끔 바라보고는, "그럼 보험회사에 연락해 두겠습니다" 로 끝이었다. (몇가지 내 개인적인 체험으로 말한다면, 미국에서 가장 기분나쁜 시간을 보내려면 자동차 보험 대리점에 가면 된다. 모두들 정말로 죽기 싫어서 하는 듯이 일하고 있다. 이것은 아메리칸 드림의 종말과 무슨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자동차를 찾을 때까지 렌터카 요금은 하루에 15달러까지 보험으로 보상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인 제이 루빈에게 렌터카 사무실까지 태워다 달라고 부탁했다. 하루에 21달러의 가격으로 포드 에스코크(놀랍게도 에어백이 붙어있어서 좋아했는데, 조수석쪽에는 사이드 미러조차 없었다)를 빌렸다. 렌터카의 창구 직원 남자가, "도난 당한 차의 90퍼센트는 삼사일 이내에 발견됩니다. 종종 '조이 라이드(joy ride,차타는 것을 즐김)'라고 해서 젊은 애들이 타고 다니다가 휘발유가 떨어지면 그냥 버려두고 가거든요, 틀림없이 기다리고 있으면 찾을 수 있을겁니다"하고 위로해 주었다.
자동차를 찾고도 가져올 수 없는 이유
12월 8일, 렌터카 창구 직원의 예언대로 4일 후에 자동차가 발견되었다. 에이본이라는 보스턴 교외의 거리에 버려져있었다. 관할 경찰관이 컴퓨터로 넘버를 체크해서 케임브리지 시 페이어트 가에서 도난 당한 무라카미씨 소유의 자동차라는 것을 확인했다. 전화로 그 소식을 전해 준 것은 케임브리지 경찰서의 경찰관이었다.
"아, 자동차는 겉으로 보기에는 피해가 없다고 합니다"하고 그 경찰관은 자못 따분한 듯이 말했다.
""그것, 참 다행이네요"하고 나는 대답했다. 정말 나로선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부터 그 에이본이라는 거리까지 자동차를 가지러 가면 되는건가요?"
"아닙니다...... 그것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마라카모씨, 사실은 타이어가 한 개도 없어요"하고 경찰관은 (아마) 콧구멍을 후비면서 얼핏 생각이 난 것처럼 덧붙였다 "그리고, 으음, 휠도 하나 없어요. 시동도 전혀 걸리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가지러 가도 자동차를 가지고 돌아올 순 없을 겁니다."
"도대체 뭘 보고 자동차의 어디가 특별히 피해가 없다는거야? 게다가 나는 마라카모가 아니라 무라카미라구!" 하고 그에게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그런 말을 해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점잖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는, 힘없이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 나서 평소에 늘 자동차 수리를 부탁하는 '스트리트 와이즈' 카센터의 보비에게 연락을 해서 래커 차로 자동차를 에이본에서 그곳까지 운반해 달라고 부탁했다.
12월 9일, 골치아픈 수속이 여전히 계속해서 이어졌다.(별로 재미없는 내용이 아니니까, 미국의 자동차 보험에 대해관심이 없는 사람은 이 대목을 건너 뛰고 읽어주기 바란다) 경찰서에 가서 '리커 버리(recovery발견) 증명서'라는 것을 발행 받았다.
그 경찰서는 카프카적인 분위기라고나 할까, 상당히 우울한 장소였지만, 그 장소에 관해 쓰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 것 같으니까 여기서는 상세하게 언급하지 않겠다. 그러고 나서 그 길로 보험 대리점까지 찾아가서 '리커버리 증명서' 복사본을 제출한다. 대리점은 그 증명서를 보험 회사에 팩스로 보내고, 보험회사는 전문 감정인을 '스트리트 와이즈' 갤러지로 보내 내 자동차의 상태 검사를 하고, '어프라이잘(보험금 사정) 통지서'를 작성한다.
그제서야 겨우 자동차의 수리가 시작된다. 아니, 그것뿐만이 아니다.. 규정상 보험회사의 직원이 나에게 약 30분에 걸친 전화 인터뷰를 하는 규정이 있다. 이것은 선서를 하고 하는 정식 녹음인터뷰여서 나의 회답은 모두 법률적으로 유효하다.
인터뷰한 여성은 결코 불친절하지 않았지만, 독감에 걸려서 재채기를 하거나 기침을 하고, 게다가 콧소리였기 때문에 발음을 거의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이것도 말하자면 하나의 지옥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소설을 마무리 짓느라 바빠 죽겠는데......
그러나 그로부터 2주일이 경과한 지금까지도 사태는 전혀 진전되지 않고 있다. 나의 불쌍한 폭스바겐은 여전히 타이어 네 개가 모두 빠진 채 수리 공장에 방치되어 있다. 보험 대리점이 보험 회사에 팩스로 보낸 '리커버리 증명서'가 어딘가에서 홀연히 사라져 버렸기 떄문이다 그래서 보험 회사 직원이 자동차를 검사해서 견적을 내지 않는 한 수리 공장에서는 수리를 하려고 해도 손댈 수 조차 없다.
더군다나 짜증 스러운 듯 미간에 주름을 잡은 대리점 여성은 나에게 차갑게 선고했다. "미스터 모로카미, 자동차가 발견된 그날을 기한으로 해서 렌터카의 요금은 더 이상 지불되지 않으니까 앞으로는 자기 돈으로 내세요"
그래서 나는 항의 했다. "하지만 타이어가 한 개도 없다구요. 게다가 당신이 '리커버리 증명서'를 잃어 버린 탓에 아직도 수리를 못하고 있잖아요"
게다가 나는 모로카미가 아니고, 무라카미다. 그러나 나의 항의는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 계속 렌터카의 대금을 지불하고 있다.
자동차를 한 대 도난당하는 것이 이처럼 번거로운 결과를 가져다 주리라는 것을 나는 미처 몰랐다. 보험 회사에 전화를 자꾸 걸지 않으면 안 되고, 경찰서나 수리 공장에도 가지 않으면 안 된다. 게다가 관청이나 대학 서무과로 가서 '주차 허가서'를 다시 발급받지 않으면 안된다. 여기저기로 뺑뺑이 돌리듯 뛰어다니게 만들고, 있어도 없다고 따돌림을 당하거나 불친절한 대우를 받거나 하면서 시간이 정신없이 흐르는 탓에 스트레스만 쌓여갔다.
무엇보다 외국이고, 외국어만 통하니까, 화가 치밀어 고함을 치고 싶어도 제대로 고함을 칠 수 없는게 가장 괴로웠다.
'그렇구나, 세상이란 이렇게 골치 아픈 것이구나, 무슨 일이든 모두 경험이야'하고 생각하며 의젓하게 행동하고 싶지만, 실제로는 도저히 그런 생각을 가질 수가 없다. 쓸모 없는 소모인 것이다.
일본에서는 사정이 어떠냐고 친지에게 전화로 물어 보았더니, "일본에서는 자동차를 도둑맞는 일이 없다구"하고 웃어넘겼다. 그 대신 못으로 문짝을 긁어놓거나, 타이어를 펑크내거나 하는 악질적인 장난이 많다고 한다. 하긴 둘 다 모두 마찬 가지니까, 서로서로 조심합시다.
"응차, 응차" 레게 리듬에 취해
자메이카에는 FM 방송국이 상당히 많이 있지만, 어느 방송국의 어떤 프로그램을 틀어도 전부 레게 음악 일색이다. 이 섬에는 레게 음악 외에는 음악이라는 게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실제로 와서 보면 직접 체험할 수 있겠지만, 하여튼 엄청나다.
섬 전체가 '응차, 응차'라는 리듬과 퍼플 헤이즈로 넘쳐 흐른다. 덕분에 눈으로 뒤덮인 보스턴에 돌아와서도 여전히 '응차, 응차'의 리듬이 몸 안에서 끈질기게 계속되고 있다. 쉽게 레게 음악에 젖어버린 것 같다. '응차, 응차'
달리면 살아 있음을 느낀다
하지만 글을 쓸 때도 그렇지만, 사람이 언제나 컨디션이 좋을 순 없다. 오랫동안 뭔가를 계속 하자면 산도 만나고 골짜기도 만나는 법이다. 컨디션이 나쁠 때는 나쁜대로 자신의 페이스를 냉정하고 정확하게 파악하여 그 범위 안에서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 나가는 것도 중요한 능력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무리하지 않고, 고개를 치켜들고 꾸준히 참고 해나간다면, 다시 조금씩 컨디션이 되돌아오는 법이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가슴 아픈 상처들
'어째서 일본인들은 정신적으로 심각한 상처를 입은 어린이들을 돌보기 위한 정신과 의사나 카운셀러를 충분히 확보하지 않는지 모르겠어요.그건 매우 중요한 일이 잖아요. 별 필요도 없는 사람들이 줄줄이 따라올 정도라면 그런 전문가를 데리고 가야 하는 것아녜요?'
유별난 집주인
그러나 솔직히 말해, 한달에 두 번씩 납짝 업드려 나무 바닥에 왁스칠을 하는 건 괴로웠어요. 스티브, 당신이 우리집에 올 때마다 심각한 얼굴을 하고 가만히 바닥을 바라보는 바람에, 나로서는 열심히 문질러 닦지 않을 수 없었다구요.
나의 오랜 친구, 피터
나는 이따금 지금도 , 조용히 숲 속으로 사라져 버린 야생의 수고양이 피터를 생각한다. 피터 생각을 하면, 내가 아직 젊고 가난하고, 두려운 것을 모르고, 대체 앞으로 무엇을 하면 좋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던 시절의 일이 떠오른다. 그 당시에 만난 수많은 사람들 역시 떠오른다. 그 사람들은 모두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생각한다. 그 중의 한 사람은 지금도 나의 아내이며, “여보. 장롱 서랍을 빼냈으면 제발 제대로 끼워 넣어요” 하고 저쪽에서 외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