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의우물

교훈적인 이야기

2011. 7. 15. 20:08



나는 교훈이 들어 있는 이야기를 비교적 좋아한다. 그렇다고 뭐 내가 특별히 교훈적인 인간이라는 뜻은 아니다. 교훈이라는 것이 성립되는 양상을 비교적 좋아한다는 뜻일 뿐이다. 내 마누라의 언니는 학생 시절에 호리 타츠오의 <바람은 일다>(호리 타츠오가 1926년에서 1928년에 걸쳐 발표한 장편 소설로ㅡ 약혼녀인 아야코의 병과 죽음을 통하여 시인이 친인으로서의 각성에 이른다는 내용이다. 호리 타츠오 자신도 결핵으로 절명했다.)를 읽고, '건강이란 소중한 것이라고 느꼈습니다'란 독후감을 써 냈더니 선생님이 폭소를 터뜨렸다고 하는데 - 그 얘기를 듣고는 나 역시 그만 웃고 말았지만 - 이건 웃는 쪽이 잘못이다. 만약 그녀가 <바람은 일다>를 읽고 건강의 중요성을 통감할 수 있었다면, 그건 틀림없는 문학의 힘이다. 웃어서는 안된다. 그런 입장에서 다시 한 번 <바람은 일다>를 읽어 보면, 반드시 '음-'하고 수긍이 가는 부분이 몇 군데쯤 있을 것이다. 교훈이라는 것은 어떤 경우에는 유형에 순응하고 마는 일도 있지만, 또 어떤 경우에는 다른 의미에서의 유형을 무너뜨리는 힘을 함축하고 있는 일도 있는 것이다.
내게도 종종 소설을 일고 난 감상문을 쓴 편지가 독자로부터 오는데, '무라카미 씨의 소설적 감성은 -'이라든가, '이런 언어의 사용은 -'이라든가, '이 작품을 읽은 느낌은 -'하는 게 대부분이고, '나는 무라카미 씨의 소설을 읽고 이런 교훈을 얻었습니다'는 내용은 한 통도 없다. 모두가 그래야 할 필요는 없겠지만, 한 통쯤은 있어도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나는 무라카미 씨의 소설을 읽고, 병약한 어머님을 좀더 잘 모셔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라는가, '나는 무라카미 씨의 소설을 일고 돈이 전부가 아님을 깨달았습니다'라든가 말이다. 하긴 무리일지도 모르겠지만. 교훈이란 일반적으로 그렇게 생각되어지고 있는 것처럼 딱딱한 게 아니다. 어떠한 일에도 반드시 교훈은 있고, 그것은 천편일률적인 형태를 띠고 있지는 않다. 내리는 비 속에도 교훈이 있고, 옆집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카로라 스프린터에도 교훈이 있다. 그렇다고 억지로 찾아내려는 노력을 할 필요는 없지만 있으면 있는 대로 상당히 흥미로운 것이다.
옛날, 학생 시절에 학교에서 <쯔레즈레구사>(14세기 중엽 가마쿠라시대의 수필 문학, 작가는 겸호법사. 일본 최고의 수필 문학 중 하나로 일컬어진다.)를 공부할 때, 선생님이 '현대인의 감각으로 보면 작자의 설교적, 교훈적 의도가 약간은 풍기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말씀을 하여, 그때는 '흠, 그런가'하고 생각했는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 교훈적인 부분만이 머리에 또렷하게 남아 있으니 기묘한 일이다. <쯔레즈레구사>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작품을 예로 들어도 유려한 문장이나 치밀한 심리 묘사는 읽을 당시에는 감탄스러워도 세월이 흐르고 나면 싸그리 잊혀지고, 아주 사소한 것일지는 모르겠으나 좌우지간 효율적인 종류의 일만을 부분적으로 기억하고 있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런 경향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아무것도 기억에 남아 있지 않는 것보다 나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옛날에 어떤 편집자가 재미있는 일화를 들려 주었다. 그 얘기는 꽤 교훈적인 얘기인데, 너무나 교훈이 많아 나는 아직도 정리를 다 못하고 있다. 케이스 스터디로써 이 자리에서 재현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