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이라는 글자를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카드 섹션 같은 것이었다는 건, 그 시기에서 빠져나와 멀리멀리 걸어가던 어느날 문득 뒤돌아보고서야 알았다. 원래 카드섹션이라는게 그 한복판에 서서 눈앞에 있는 카드 낱장들을 하나하나 볼 때는 대체 이게 뭘 가리키는지 별 의미도 연관도 없어 보이니까. 그래서 더 힘들었던 것 같다. 나의 깊은 우울에 붙일 이유조차 마땅히 없어서. 분명히 못견디게 무거운데 정작 텅 비어 있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뺄 때마다 그 냉흑한 '없음'에 소스라치게 쓸쓸해져 곧잘 친구들과 술을 마시곤 했다.
매번 아주 즐겁게 마셨다. 간을 빼놓고 온 토끼처럼 우울함만 쏙 빼놓고 모든 술자리에 임했다. 그 누구에게도 나의 상태에 관해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은 건 손에 잡히는 이유가 없어서만은 아니었다. 누군가를 붙잡고 울며불며 고통을 호소하는 건 너무 뻔해 보였다. 안그래도 비참한데 뻔하기까지 한건 싫었다. 그냥 그때는 이렇게 힘들어도 티내지 않는 것이, 이렇게 힘들어도 누구에게 기대지 않고 혼자서 꿋꿋하게 '어른다운 방식' 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그 기분이, 세상에게 부릴 수 있는 유일한 자존심이었다. 어렸다. 매우 어렸다. 빈 주머니에 그런 쓸데 없는 똥자존심이라도 욱여넣어야 할 정도로. '감춤'으로써 그것은 나만 아는 은밀한 성장처럼 느껴졌다. 그런 느낌이 거짓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간을 빼놓고 온 토끼도 거짓이니까.
말하지 않았어도 친구들은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 또한 모르는 척 넘겨주는게 가장 '어른 다운 방식'이라고 생각했기에 내가 필요한 순간마다 그저 함께 술을 마셔줬고 마냥 놀아줬다. 그게 또 무척 고마웠다.
p47
공간 전체에 거대한 스카치테이프를 붙였다가 떼어낸 것 같은 방이었다. 군데군데 벗겨지고 빛바랜 색깔들이 가득한 방. 유일하게 스카치테이프를 피한 곳은 책장이었다.
p81
'오늘의 술 유혹'을 이길 수 있는 건 그나마도 어제 마신 술' 밖에 없다.
앞으로도 퇴근길마다 뻗쳐오는 유혹을 이겨내고 술을 안 마시기 위해서라도 늘 어제 마신 사람이 되어야겠다. 그렇다. 오늘의 술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늘 어제 마신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내일을 위해 오늘도 마신다.
p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