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레닌은 스위스로 가는 것을 한번도 탐탁하게 여겨본 적이 없다. 카레닌은 변화를 싫어했다.
개에게 있어서 시간은 곧은 일직선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며 시간의 흐름도 하나가 지나면 다음 것으로 가는, 점점 멀리 앞으로 가는 중단 없는 운동이 아니었다. 시간의 흐름은 손목시계의 바늘처럼 원운동을 했다. 시계바늘 역시도 미친 듯 앞으로만 가는것이 아니라 같은 궤도를 따라 하루하루 시계판 위에서 원운동을 하기 때문이다. 프라하에서 그들이 새 소파를 사거나 화분의 자리만 옮겨도 카레닌은 분개했다. 그의 시간 감각이 혼란스러워 지기 때문이다. 마치 쉴새없이 시계판의 숫자를 갈았을때 시계바늘이 겪는 혼돈 같은 것이 었다. 하지만 그는 취리히의 아파트에서 금세 과거의 시간 감각, 과거의 습관을 되찾는데 성공했다. 프라하에서처럼 아침이면 그들의 하루를 열어주기 위해 침대 위로 껑충 뛰어올랐고 테레사와 함께 아침 장보기를 했으며 프라하에서와 마찬가지로 매일 산책을 요구했다. 카레닌은 그들 삶의 시계였다. 절망의 순간마다 테레사는 이 개 때문이라도 버텨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녀보다도, 아마도 두브체크나 버리고 떠나온 조국보다도 카레닌은 더 허약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산책에서 돌아오자 전화벨이 울렸다.
외국에 사는 사람은 지구위의 빈 공간을 걷는 사람이다. 그에게는 가족과 직장동료와 친구, 어릴 적부터 알고 있어서 어렵지 않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가진 나라가 모든 인간에게 제공하는 구명줄이 없다. 프라하에서 그녀가 토마스에게 의지하고 산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단지 심적으로만 그랬다. 여기에서는 모든 면에서 그에게 의지하며 살고 있다. 만약 그로부터 버림받는다면 그녀는 여기서 무엇이 될까? 그녀는 일생동안 그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야만 할까? 그녀는 그들의 만남이 처음부터 오류에 근거했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그날 겨드랑이에 끼고 있었던 「안나카레니나」는 토마스를 속이기 위해 그녀가 사용했던 가짜 신분증이었다. 그들은 서로 사랑했음에도 불구 하고 상대방에게 하나의 지옥을 만들었다. 그들이 사랑한 것은 사실이며 이것은 잘못이 그들 자신이나 그들의 행동방식 혹은 감정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공존 불가능성에 기인 한다는 것을 통해 증명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강했고 그녀는 약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문장 중간에서 30초가량 말을 멈추었던 두브체크 같았고 말을 더듬고 숨을 돌리고 말을 잇지 못했던 그녀의 조국과 같았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강해질 줄 알아야 하는 사람 강자가 약자에게 상처를 주기에는 너무 약해졌을때 떠날 줄 알아야 하는 사람은 약자이다. 이것이 그녀가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곤 카레닌의 털복숭이 머리에 뺨을 대고 그녀는 말했다.
「카레닌, 날 원망하지마. 다시 한번 이사를 가야만 하겠다.」
p 86
6시에 자명종이 울렸다. 그때는 카레닌의 시간이었다. 카레닌은 항상 그들보다 먼저 깼지만 섣불리 그들을 성가시게 하지는 않았다. 강아지는 침대에 뛰어올라 그들 몸을 밟으며 콧등을 문지를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자명종 소리를 끈기있게 기다렸다. 두사람은 처음에는 뿌리치고 침대에서 내쫒으려 했으나, 강아지는 주인보다 고집이 세서 자신의 권리를 획득하고야 말았다. 하긴 테레사도 얼마전부터 카레닌의 초대에 이끌려 낮 시간대로 들어가는 것이 불쾌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카레닌에게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은 순수한 행복이었다. 그는 천진난만하게도 아직도 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진심으로 이에 즐거워했다. 반면에 테레사는 밤을 연장하고 싶고 다시 눈을 뜨고 싶지 않은 욕망때문에 마지못해 잠에서 깨어났다.
이제 카레닌은 그의 목걸이와 끈이 걸려 있는 옷걸이를 바라보며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다. 테레사는 목걸이를 채우고 장을 보러 나간다. 그녀는 우유, 빵, 버터를 사고 여느때와 다름없이 토마스를 위해 크루아상 하나를 샀다. 돌아오는 길에 카레닌은 크루아상을 물고 그녀 곁에서 타박타박 따라온다. 아마도 주위 사람의 눈길을 끌고 손가락질 받는 것이 즐거운지 카레닌은 의기 양양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집에 돌아온 카레닌은 토마스가 그를 알아보고 바닥에 엎드려 그를 꾸짖고 입에서 크루아상을 빼앗는 흉내를 내주길 기대하면서 방문턱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러한 장면은 매일매일 반복되었다. 그들은 쫒고 쫒기며 아파트를 뛰어다니다가 카레닌이 식탁밑에 숨어 크루아상을 재빨리 삼켜버릴 5분여 동안을 그렇게 보냈다.
그러나 이번에 이러한 아침 의식을 기다린 것은 헛수고였다.
식탁위에는 트랜지스터가 놓여 있었고, 토마스는 그것을 듣고 있었다.
p153
두 사람은 개를 바라보며 카레닌이 웃고 있는 동안에는 비록 시한부 생명이지만 살아갈 이유가 있다고 중얼거렸다. 이튿날 그의 병세가 호전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식사를 했다. 두 사람 모두 한시간의 자유를 누리면서 개를 산책시키는 것이 바로 이 순간이었다. 개도 이를 알고 있었으며 평소에는 미리부터 조바심을 내며 그들 주위를 껑충거리며 맴돌았는데, 이번에는 테레사가 개 목걸이를 매도 카레닌은 움직이지 않고 두 사람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개 앞에 우뚝 서서 자신들의 유쾌한 기분을 개에게 전달하기 위해 명랑한 표정을 지어보이려고(개를위해, 개때문에) 애썼다. 잠시 후 그들이 안쓰럽게 보였는지 개는 세 발로 절룩거리며 다가와 개 목걸이를 매라는 시늉을 했다.
「테레사, 당신이 카메라를 싫어하는 것은 알지만 오늘만은 카메라를 가져가지!」
테레사는 그의 말에 따랐다. 그녀는 벽장을 열고 한구석에서 처박혀 있는 카메라를 찾았다. 토마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나중에 이 사진을 보면 무척 기쁠꺼야. 카레닌이 우리의 삶의 한때 한 부분이었으니까」
「뭐라고요, 한때라고요?」 하고 테레사는 뱀에 물린 듯 화들짝 놀랐다. 카메라가 장롱속에 있는데도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사진을 찍지 않을래요. 나중에는 카레닌이 없을 거라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아요. 당신이 벌써부터 과거형으로 말하다니!」
「날 원망하지 마!」 하고 토마스는 말했다.
「원망하지 않아요」 하고 테레사가 부드럽게 말햇다. 「나역시도 카레닌을 과거형으로 생각하는 내 모습에 얼마나 많이 놀랐는지! 그리고 그런 나자신을 얼마나 나무랐는지! 그 때문에 카메라를 가져가지 않겠다는 거예요」
그들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길을 걸었다. 침묵하는 것이 카레닌을 과거형으로 생각하지 않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들은 카레닌으로부터 눈을 떼지 않았고 항상 붙어 있었다. 그들은 카레닌이 미소짓는 순간을 포착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미소짓지 않았다. 그는 세 발로 걷기만 할 따름이었다.
「오로지 우리를 위해서 밖에 나온 거예요. 카레닌은 산책할 생각이 없었던 거예요. 단지 우리를 즐겁게 해주려고 온 거예요」 그녀가 한 말은 슬픈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르게 그들은 행복했다. 그들이 행복한 것은 슬픔을 무릅쓰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 슬픔 덕분에 그러했던 것이다. 두사람은 손을 잡고 걸었고, 두사람 눈앞에는 똑같은 이미지가 떠올랐다. 그들이 지나온 10년의 삶을 몸으로 구현하는 절름발이 개
P332
인간과 개 사이의 사랑은 전원적이다.
그것은 이미 알고 있는 것들 속에서 뱅뱅 도는 삶인 것이다. 그 단조로움이 권태가 아니라 행복이다. 그것은 갈등이나 가슴이 메어지는 장면, 발전 같은 것이 없는 사랑이다.
카레닌은 토마스와 테레사 주위에 반복에 근거한 삶의 원을 그었고 두사람도 같은 일을 해주길 기대하는 것이다.
카레닌이 개가 아니라 인간이었다면 틀림없이 테레사에게 오래 전에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봐, 매일같이 입에 크루아상을 물고 다니는 게 더 이상 재미가 없어. 뭔가 다른 것을 찾아줄 수 있겠어?」 이 말에는 인간에 대한 모든 심판이 담겨져 있다.
인간의 시간은 원형으로 돌지 않고 직선으로 나아간다. 행복은 반복의 욕구이기에, 인간이 행복할 수 없다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렇다 행복은 반복의 욕구이다.
p340
함께 자고 싶은 사람은 많을 수 있지만. 함께 잠들고 싶은 사람은 세상에 단 한 명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