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경남 함양 산골에서 가난한 집안의 칠형제 중 여섯 번째로 태어났다.
내 출생은 그다지 경사스런 일이 아니었다. 뱃으니 낳을뿐, 기대도 기쁨도 없는 출생이었다. 있는 자식도 하루세끼 밥먹이기가 버거운데, 또다시 자식이라니. 모르긴 몰라도 어머닌 날 낳으시고 우셨을 것이다. 암죽 서말이라고, 젖배기가 돈이 더 드는 법 아닌가. 하여, 나는 태어나자마자 강보에 싸인 채 윗목에 올려졌다. 군불 닿지않는 윗목에서 사나흘 있으면 제 스스로 목숨줄이 떨어져나가 집안의 고단을 덜어 줄꺼다, 할머닌 우는 어머니를 밀치고 나를 윗목에 놓고는 누구든 얘를 건사하면 혼쭐이 날거다 하셨다 한다. 나는 한겨울 싸늘한 윗목에서 그렇게 보름을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살아남았다. 기적은 아니었다.
어머니의 사주를 받아 큰 언니가 할머니가 밭에 나가고 들에 나간 시간 생쌀을 씹어 내 입에 넣주었던 것이다. 내 수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나는 이후 집안이 위태로울 때마다 짐처럼 여겨졌다. 내 기억이 확실하다면 네 살무렵엔 효창동 주택가에 어머니가 나를 버리고 돌아서신 적도 있었다. 물론 착하고 여린 어머닌 몇걸음 못가 나를 다시 끌곤 집으로 돌아오셨지만. 그때, 집으로 돌아와 내 등짝 을 후려치며 하시던 어머니 말씀이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다.
'에미가 너 버리고 가는데, 어째 울지도 않느냐'.

이후 나는 마치 나를 버리려했던 가족들에게 복수라도 하듯 정말 지겨우리만치 그들의 속을 썩이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4학년때 담배를 배우고(물론 들키는 바람에 이내 피울 수 없게 됐다), 고등학교 땐 못 먹는 술을 먹어 병원에 입원까지 하고, 툭하면 사고를 쳐 어머니가 학교에 불려다니고, 대학은 전문대를 들어가고, 셀 수도 없이 집을 나가 떠돌고.
내가 기억하는 잘못만 이러한데,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잘못들은 또 얼마나 많겠는가. 이런 연고로 나는 사흘들이 '천하에 쓸데없는 기집애'란 말을 들으며 성장했다. 가족들은 물론 친구들조차도 나를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보았다. 오죽했으면 직장을 들어가 첫월급을 탄 날, 친구가 내 손을 잡고 '니가 사람이 됐구나'하며 울었겠는가. 그 시절은 이제와 내게 좋은 글감들을 제공한다.

나는 한때 내 성장과정에 회의를 품은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내가 만약 가난을 몰랐다면 인생의 고단을 어찌 알았겠는가. 내가 만약 범생이었다면 낙오자들의 울분을 어찌 말할 수 있었겠으며, 실패뒤에 어찌 살아남을 수 있었겠는가. 나는 작가에겐 아픈 기억이 많을수록 좋단 생각이다. 아니, 작가가 아니더라도 그 누구에게나 아픈 기억은 필요하다. 내가 아파야 남의 아픔을 알 수 있고, 패배해야 패배자의 마음을 달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갖는 내게도 후회가 없는 것은 아니다.

어머니 살아계실 때 밥벌이 하는 모습이라도 보여드렸다면 좋았을 것을. 지금, 방황하는 사람들, 그대 들의 방황은 정녕 옳은 것이다. 그러나, 그대의 어머니가 살아있는 그 시기 안에서 부디 방황을 멈추라. 아픈 기억이 아무리 삶의 자양분이 된다해도, 부모에 대한 불효만은 할게 아니다. 대학 때 가출한 날 찾아 학교정문 앞에서 허름한 일상복으로 서 있던 어머니가 언제나 눈에 밟힌다. 그때도 이후에도 왜 난 그 분께 미안하단 말 한마딜 못했을까. 바라건대, 그대들은 부디 이런 기억 갖지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