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vetta Steele-Calling You



"브렌다와 상의해 볼게요."




내 인생의 영화 - 바그다드 카페

제작 : 1988년

감독 : 퍼시 애들런
출연 : 마리안 제게브레히트, C.C. 파운더
출시 : SKC

1993년 겨울, 나는 본가를 나와 불광동 허름한 다세대주택가의 반지하방에 살고 있었다.
말이 좋아 원룸이지 주방과 거실, 화장실이 열평 남짓한 공간에 기하학적으로 배치되어 있는 그 집에 돈주고 산 거라곤 대학 선배가 선심쓰듯 10만원에 넘겨준 부피 큰 워드프로세서가 전부였다.
집안 구석구석에 자리한 다섯칸짜리 서랍장과 자개 장식장, 스테인리스 옷걸이 등은 모두 길가에 버려진 이삿짐 속에서 동생과 내가 건진 것들이었다. 방 안에 놓인 살림살이보다 더 궁상스러운 건 내 처지였다.
출판사를 그만두고 홧김에 떠난 여행에서 퇴직금은 바닥이 났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방송작가원의 작가 수업을 받기 위해선 단돈 60만원도 은행대출을 받아야 했다. 결단이 필요했다. 다시 직장을 구해나가든지, 하루라도 빨리 데뷔를 해 원고료를 타든지. 사는 게 하루하루 절체절명의 순간 같았던 그 시절, 나는 영화 <바그다드 카페>를 만났다.

그때, 내 일주일 용돈은 이만원이었다. 그 이만원을 알차게 쓰기 위해 하루에도 몇번씩 조악한 가계부를 써야 했다.
외출지는 작가연수원이 있는 여의도로 한정짓고, 버스값과 커피값만을 쓰기 위해 저녁이면 부리나케 집으로 향했다. 남아도는 게 시간뿐인지라 책보는 게 일인데, 책장 넘어가는 소리가 돈 쏟아붓는 소리 같았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생각해낸 것이 책대여점에서 한물간 책들을 헐값에 사보는 것이었다. 헌책이라도 근간의 것들이 많아 책값의 절반은 물어야 했다.
일주일의 단 한번 외출과 헌책 두세권을 사고, 손에 남겨진 돈은 고작해야 2천원에서 4천원. 영화관 관람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비디오만이 여가생활을 즐길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비디오테이프를 고를 땐 신중의 신중을 기했다.
자칫 비디오테이프 선택을 잘못하면 일주일의 여가생활이 엉망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긴 버릇이 남들의 입을 통하든,
책자를 통하든 몇번씩 좋다고 검증된 비디오테이프만을 선별해 보는 것이었다.
<바그다드 카페> 역시, 그렇게 선별된 비디오테이프였다.

영화의 처음은 기대와 달리 실망스러웠다. 주인공 백인여잔, 보기에도 부담스러울 만큼 크고 둔했으며, 다른 주인공으로 보이는 흑인여잔 눈이 무섭게 번들거리는 데다 신경질적이었다.

영화는 야스민이 커피없는 바그다드 카페로 오고, 오고 나서도 한참을 스토리없이 흘러갔다. 야스민은 몇번이고 ‘문츠크테트너 부인’이라는 어려운 제 이름을 카페 주인 브렌다에게 알리려 했고, 브렌다는 손님인 그녀에게 이유없이 불친절했다.

브렌다의 남편 살은 사소한 말다툼을 빌미삼아 집을 나갔고, 브렌다의 아들과 딸은 속터지게 제 어미 말을 듣지 않았다. 카우보이 차림의 쿡스는 일없이 실실 웃어 괜히 보는 이의 비위를 긁었고, 문신을 새기는 여자는 누구에게도 이름이 안 불려지는 채 말없이 서성이기만 했다.
게다가 커피도 못 끓이는 바텐더는 왜 거기 있는 건지….

그런데 그 와중에 눈길을 끄는 장면이 있었다. 야스민이 1호 방으로 와서 하던 그 행동. 그녀는 단순히 하루 기거할 여인숙에서 제 집처럼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고, 장식을 했다. 먼지가 폴폴 나는 마룻바닥을 무릎까지 꿇고 정성스레 걸레질하던 그녀가 난 왜 그렇게 뭉클했을까.

이후, 장기투숙자로 바뀐 야스민의 별난 행동은 계속된다. 카페의 간판을 닦고, 사무실을 정리하고, 주방을 치우고, 아무도 안아주지 않아 울기만 하던 브렌다의 손자를 어르고, 쿵쾅거리며 화음이 안 맞는 건반을 쉼없이 두드리던 브렌다의 아들의 음악을 감상해주는….

브렌다는 그런 야스민의 행동이 부담스러웠다. 누구에게도 호의를 받아보지 못한 브렌다의 눈에 야스민의 친절은 일상을 뒤흔드는 위협이었다. 어느 날, 브렌다는 야스민에게 거두절미하고 떠나라 소리친다.
그때, 브렌다의 그 고함 뒤에 야스민이 한 대답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브렌다: 당신이 뭔데, 내 아이들과 어울리고, 내 집을 청소해! 야스민: (머뭇대며) …. 나는 그냥 당신이 좋아할 거 같아서….

야스민은 누군가를 기분좋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아무런 죄의식 없이 코카인을 흡입하고 운전도중에도 술병을 불어대던, ‘삶을 장난같이’ 사는 자신의 남편에겐 매몰찬 눈빛과 뺨세례를 날렸으면서도, 도망간 남편을 둔, 반사막의 모래바람 속에서 거친 트럭운전자들에 의해 생계를 꾸려가는 ‘삶을 전쟁같이’ 사는 브렌다에겐 그녀는 한없이 너그럽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즐겁고 싶어서가 아니라, 남이 즐거운 모습을 보기 위해 마술을 익히고, 쇼를 하고, 모델이 된 야스민. 남을 웃기려다 끝내 자신마저 즐거워져버린 야스민. 나는 그녀가 너무 이뻐서 그 밤 울어버렸다.

방영시간을 맞추기 위해 긴 밤을 하얗게 지새우길 수십 수백날. 내 작품 때문에 지금까진 아무도 행복하지 않지만, 나는 야스민 같은 노력을 멈추진 않겠다. 야스민이 떠나고 그 잘 날던 부메랑도 추락하고, 사람들 모두 다시 사는 게 시들해졌다. 과한 바람일까. 내 드라마가 없는 날, 바그다드 카페의 사람들이 야스민을 기다리듯 대중이 나를 기다리게 할 수만 있다면, 더는 바랄 것이 없겠다.

노희경/ 방송작가·<거짓말> <바보같은 사랑>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