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는 즐거움을 주며 우리를 다른 세계로 옮겨놓을 수도 있다. 책을 읽느라 시간과 공간을 잊은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실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독서가 즐거움을 준다는 것, 독서의 목적이 주로 즐거움을 불러 일으키는 일에 있다는 생각은 비교적 최근의 견해다
그 생각은 17세기에는 산발적으로 그리고 18세기에는 좀더 강력하게 통용되었다.
" 네방은 함대가 좌초한 해안처럼 보이더군. 네가 3개월 동안이나 들여다보지도 않은 채 갖고 있던, 너를 위해 시립 미술관에서 대출해온 2절판 크기의 책 두권을 슐로서가 되돌려 달래. 호머의 책은 바닥에 펼쳐져 있고, 너의 카나리아가 그것을 그냥 놓아두지 않았지. 네가 상상해서 그린 오디세이의 여행 노정이 담긴 지도가 그 옆에 놓여 있고, 색색의 조개껍데기가 담긴 보석상자 주변에는 오징어 눈이 뒤집힌 채로 널려 있었어. 그래서 보기 좋게 엮인 밀짚 깔개에 갈색의 반점을 만들어 놓았지.......,
■ 앙드레 케르테츠 ■ 본 지방의 병원, 1929년 ■
:: 피터 얀센스 엘링가 1623~1682
■ 편지를 읽는 푸른 옷의 여인, 1663/64년 ■ 레이크스뮈세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
■ 독서하는 처녀, 1850년 ■ 벨베데레 박물관의 오스트리아 회랑, 오스트리아 빈 ■
:: 프란츠 아이블 1806~1880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독서가 그녀의 감정이입 능력을 자극하고 증가시키기 때문이다. 독서하는 여자의 내면적 흥분은 헝클어진 책 테두리의 모습에 반영되어 있다. 넘겨진 책장은 정확하게 위로 겹쳐 있지 않다. 그리고 책장 사이로 벌어진 미세한 틈새는 빛의 유희에 자신을 내맡기고 있다.
:: 구스타프 아돌프 헤니히 1797~1869
■ 무도회 이후, 1895년 ■ 아바디아 박물관, 에스파냐 카탈루냐 몬세라트 ■
:: 라몬 카사스 이 카르보 1866~1932
즐거운 무도회에서 생긴 긴장감 때문에 기운이 빠져서 간이 침대에 누운 채 긴장을 풀기 위해 들여다보는 것인지도 모르는, 자주 읽어서 헤진 작은 책을 손에 든 젊은 여인의 모습을 카사스는 자신이 삽화를 그리는 주간지 <펠과 플로마>의 선전 화보 주제로 사용했다.
잡지를 위해서 만든 선전 화보는 거대한 분홍색 천으로 휩싸여있고, 아직도 참신해 보이고 모험을 즐길 것 같아 보이는 젊은 여인은 방금 읽은 듯한 편지를 손에 들고 있다. 같은 주제를 변형시켜 그린 두 그림에서 독서는 일종의 정식 만찬 사이에 낀 간식 같은 것이다. 현실 속 삶의 곡예사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사람들이 항상 커다란 장면만 기다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짧은 중간 휴식 시간에도 종종 세상의 취미와 무게에서 생겨난 많은 것이 숨겨져 있다. 그것이 사람들이 삶을 감지하는 순간이다.
■ 등잔불 옆에서 책읽기, 1858년 ■ 순수예술협회, 영국 런던 ■
::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 1834 ~1903
■ 아를의 여인(지누 부인), 1888년 ■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미국 뉴욕 ■
:: 빈센트 반 고흐 1853 ~1890
고흐의 그림에서 그 놀라운 색채가 없다면 이 그림은 사람들을 놀라게 만드는 계시적 성격으로 그들을 이끌지 못했을 것이다. 이 그림에서 놀라운 색채란 바로 비명을 지르는 듯한 배경의 노란색이다. 노란 색은 인물을 어둡게 만들면서 동시에 그녀가 감싸인 것처럼 드러나게 만든다. 고흐는 그 노란색에 대해서, 그가 남자와 여자에게 '영원의 기분'을 부여하고자 한 것이라고 말했다. 예전에는 성인의 후광을 통해 상징되었던 것을 그는 '색의 광채와 진동을 통해서' 재현하려 시도한다고 말했다.
"그녀가 읽었을까. 아니면 읽지 않았을까?" 이런 질문을 자제하기는 상당히 힘들다. 20세기 금발의 섹스
여자가 책을 지나치게 많이 읽을때 생기는 위험에 관해서
엘케 하이덴라이히
"독서의 역사에서 여자는 종이에 적힌 단어의 그물 속으로 날아 들어온 작은 파리에 불과했다. 그들은 구경꾼이었다."
두브라브카 우그레시치는 그녀의 책<독서 금지>에서 이렇게 썼다. 과거에만 그랬다고? 지금도 우리여자는 구경꾼이다! 우리는 여전히 이야기의 그물 속으로 뛰어들어간다. 열광을 하면서, 뚜렷한 이성을 지닌 채로, 언어에 대한 열정에 굶주려서. 우리 옆에는 지루해하는 남자들이있다. 우리는 그들을 밀치고 말을 해주어야한다. '이제 한번만이라도 좋으니 그것을 읽어봐요!" 누군가가 우리에게 아름다운 연애편지를 써서 보내면, 우리는 곧 사랑에 빠질 수도 있다.
바로 그 사랑은 언어에서 생명을 얻어 살아가고, 글 쓰는 행위를 통해 생겨나고, 중요한 것으로 간주된다. 사랑, 공포, 늙음, 죽음 - 언어의 그물에서 우리는 필요한 것을 발견하고 기꺼이 그 그물에 걸려든다.
"왜 사람들이 책을 증오하고 두려운 것으로 간주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나요? 책은 땀구멍이 있는 삶의 얼굴을 그대로 보여주죠. 하지만 고루하고 편협한 시민들은 땀구멍도, 머리카락도, 표정도 없는 밀납인형 같은 얼굴을 원해요."
이문장은 1953년에 출간되었고 프랑수아 트뤼포가 영화로 만든 레이 브래드버리의 공상과학소설 <화씨 451도>에서 가져온 인용문이다. 이 소설에서는 소방관이 더 이상 불을 끄지 않는다. 오히려 불을 지르고, 심지어 책까지 태우는 세계가 묘사되어 있다. 책을 소유하거나 읽는 사람은 국가의 공적1호가 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 자리에서 책과 함께 불태워졌다. 소방대장 비티는 은밀하게 책에 매혹되어 있던 몬택에게 말한다. "옆집에 있는 책은 장정된 총과 같네. 그것을 없애게. 총탄을 빼내고, 인간의 정신을 깨부수게."
스탈린을 풍자한 시를 써서 당국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했고 시집이 불태워졌던 시인 오시프 만델스탐이 저절로 머릿속에 떠오른다. 권력자는 만델스탐을 파괴하고 그의 시를 불태울 수 있었지만, 만델스탐의 아내 나데슈다는 모든 시를 외우고 있었고, 그것을 적어서 보관했다. 여자가 시인이 아니고 독자로 머물러 있는 한, 문학영역에서 여자가 해야 하는 역할이란 후손을 위해서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뿐이다. 그녀들은 보물을 집어들고, 우리 후손을 위해서 그것을 보관한다. 그동안 여자에게 사랑이 생기는 경우를 제외하면 사정이 그렇다. 나는 한숨을 쉬면서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사랑이 문학보다 항상 훨씬 강하다는 사실을, 그리고 문학속의 사랑은 삶 속의 사랑보다 훨씬 아름답다. 문학 속의 사랑은 드물기는 하지만 적어도 우리에게 환상을 주기는 하니까...
우리 여자는 이렇게 행동한다. '우리는 나누고, 풀어주고, 우리가 지닌 것 중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가지고서 속물들을 부양한다. 속물들은 그것을 알고 있으며, 그 때문에 우리를 증오한다' 남자는 책읽는 여자를 두려워 한다. 그리고 비토리오 마테오 코르코스의 그림을 세밀하게 들여다 보면, 남자가 두려워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 비토리오 마테오 코르코스 ■ 꿈, 1896년
이 그림속에는 대단히 정열적인 한 여자가 앉아 있다. 그녀는 지금은 책을 들여다보고 있지 않다.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에는 방금 읽은 노란색 표지의 프랑스 고전작가의 작품집 3권에 나오는 단어, 문장, 생각이 들어있다. 볼테르? 그녀는 소설 <캉디드>를 읽고, "우리는 우리의 정원을 손질해야만 한다"는 말로 귀결되는 철학을 어떻게 생각해야만 할지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아직 만족할 생각이 없다. 그녀에게 만족하라고 요구하는 사람은 하얀 우산의 끝을 머리에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그녀는 전체 사건 뒤에 감추어진 깊은 아이러니를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영리해 보인다. '결국 그들은 우리를 마음대로 놀리려고 하는군. 정원을 손질해야 한다고? 그래. 따끔한 맛을 보여주지'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생각하는 모습이지만, 그녀의 손은 이미 단호함을 드러내고 있고, 그녀의 태도는 마치 달려들 태세를 마친 것 같다.
나는 몇년 전부터 책 읽는 여자의 그림을 수집하고 있다. 그중 하나는 내가 앉아서 책을 읽곤 하는 소파 위에 걸려 있다. 그것은 하랄트 메츠케스의 그림인데 촌각을 다투면서 책을 읽는 것처럼 보이는 젊은 여자가 그려져 있다. 그녀는 창가에 앉아 있다. 밖은 칠흑처럼 어둡다. 하지만 지평선에 있는 한 줄기 광선이 곧 동이 틀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 하랄트 메츠케스 ■ 창가에서 독서하는 여자, 2001년 ■
나는 소파에 앉아서 책을 읽는다. 나는 책 자체가 된다. 나는 30~40쪽을 읽기만 하면 된다 그러고 나서 눈을 들면 이미 날이 다시 밝아있을 것이다. 다음과 같이 말한 몽테스키외처럼 지나친 주장을 할 생각이 전혀 없다. "한시간 동안 책을 읽고 난 다음에도 사라지지않을 만큼 엄청난 슬픔을 나는 아직 겪어보지 못했다.". 한 시간의 독서는 정확하게 한시간 동안은 슬픔을 잊게 해 준다. 독서가 끝난 다음에는 다시 슬픔이 찾아올 것이다. 어쩌면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그동안에 날이 샐 수도 있다. 이렇듯 신앙처럼 희망을 품는다는 사실로 인해서 독서하는 사람은 위험한 존재가 되는 것일까? 그런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힘이 책속에는 있기 때문이다. 여자에게 책을 읽는 것이 허용된 것은 이제 겨우 수십 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직도 모든 지역의 모든 여자에게 독서가 허용된 것은 아니다.
"사람은 삶을 통해서 배우며, 독서를 통해서 배운다"라고 귄터데 브로인은 말한다. " 그리고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은 항상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한 통찰력을 주기 때문에 사람들은 삶에 대해서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게 된다. 독서를 하면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삶도 함께 사는 것이다." 나는 그 말을 보충해서 말하겠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사랑을 느끼고 함께 사랑한다'고...
광적으로 책을 읽는 것은 삶을 위태롭게 만들 수도 있다. 카를로스 마리아 도밍게스의 <종이 집>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1998년 초 블루마 레논은 소호의 한 책방에서 아주 오래된 판본의 에밀리 디킨스 시집을 사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가 두 번째 시를 막 읽으려고 하는 순간, 첫번째 길 모퉁이에서 자동차에 치였다." 독서는 생명을 위험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나와 다른 사람을 위험속으로 빠뜨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예감한다.
공원을 거닐면서 책을 읽고, 마지 못해서 유모차를 끌어 당기지만, 책에 푹 빠져 있어서 아이가 오래전에 유모차에서 떨어졌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유모를 풍자한 만화 <책 읽기를 좋아하는 보모>를 떠올린다. 그 경우 아이 어머니가 보모를 심하게 질책을 한다고 해도, 나는 그 어머니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이 말하는 일반적인 삶의 계획과 들어맞지 않는 무엇인가가 그녀의 머릿속에서 생겨나기 때문에, 책 읽는 여자에게 경고하는 말들이 생겨났던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가끔 꿈을 꾼다. 최후의 심판 날의 동이 트고, 위대한 정복자와 법률학자가 자신들에게 주어질 보상을 받기 위해서 올 때-그들이 쓰게 될 월계관과 월계수 가지. 그들의 이름이 영원히 마모되지 않을 대리석에 새겨져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전능하신 신께서 우리가 팔에 책을 끼고서 걸어가는 것을 보시게 되면, 그때 그분은 베드로 쪽으로 몸을 돌려 질투심이 전혀 없는 상태라고는 하기 힘든 어조로 말씀하실 것이다. '보아라, 이들은 더 이상 어떤 보상도 필요하지 않아. 이곳 천국에서는 그들에게 어떤 것도 줄 수 없어. 그들은 책 읽는 것을 아주 좋아했지.'"
■ 하랄트 메츠케스 ■ 여자 학자들, 2001년
■ 레오 코피 갤러리, 독일 베를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