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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는 즐거움을 주며 우리를 다른 세계로 옮겨놓을 수도 있다. 책을 읽느라 시간과 공간을 잊은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실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독서가 즐거움을 준다는 것, 독서의 목적이 주로 즐거움을 불러 일으키는 일에 있다는 생각은 비교적 최근의 견해다
그 생각은 17세기에는 산발적으로 그리고 18세기에는 좀더 강력하게 통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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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밀 ■ 베티나 폰 아르님, 1810년 ■
 
 
서신 교환인 것처럼 꾸미는 데 능란했던 베티나 폰 아르님이 귄더로데 출신인 그녀의 친구 카롤리네의 이름을 빌려 스스로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사람들은 19세기 초에 살던 '천재적'인 독서광 처녀의 일상적 독서가 어떤 모습인지 상상할 수 있다. 오랫동안 비어있던 베티나의 방을 묘사한 대목은 산만한 독자의 심리적 도표처럼 읽힌다. 그녀가 책을 선택하는 방법과 독서 습관은 모든 시대, 양식, 분야를 두루 섭렵하는 대단히 무정부적인 형태였다.

" 네방은 함대가 좌초한 해안처럼 보이더군. 네가 3개월 동안이나 들여다보지도 않은 채 갖고 있던, 너를 위해 시립 미술관에서 대출해온 2절판 크기의 책 두권을 슐로서가 되돌려 달래. 호머의 책은 바닥에 펼쳐져 있고, 너의 카나리아가 그것을 그냥 놓아두지 않았지. 네가 상상해서 그린 오디세이의 여행 노정이 담긴 지도가 그 옆에 놓여 있고, 색색의 조개껍데기가 담긴 보석상자 주변에는 오징어 눈이 뒤집힌 채로 널려 있었어. 그래서 보기 좋게 엮인 밀짚 깔개에 갈색의 반점을 만들어 놓았지.......,
 
 창턱에 있는 작은 상자 속에서 무엇인가가 파닥거리는 소리를 냈지. 호기심에 차서 상자를 열어보았어. 그러자 나비 두 마리가 날아서 달아나더군. 네가 애벌레였을때 상자 속에 집어 넣은 거겠지, 나는 리스베트와 함께 테라스로 나비를 쫒아냈고, 나비는 그곳에서 꽃이 핀 콩 줄기에 앉아 첫허기를 채웠지. 침대 밑에서 리스베트가 카를 12세의 전기와 성경을 끄집어냈어. 그리고 여자의 손에는 맞지 않는, 프랑스 시가 안쪽에 새겨진 가죽장갑을 끄집어냈어. 이 장갑은 네 배개 밑에 놓여 있었던 것 같아."
 
 베티나의 독서 태도가 실제로 어떤 모습이었을지를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 이리저리 흝어보듯 쳐다보고, 문장 전체를 건너뛰고, 문장을 원래의 의미와는 다르게 읽고, 그것을 오해하고 다시 만들어내고, 계속해서 엮어 나가고, 가능한 한 모든 연상 작용으로 치장하고, 그 책이 전혀 언급하지 않은 결론을 끄집어내고, 글에 대해서 화를 내고, 기뻐하고, 잊어버리고, 표절하고, 책을 어느 한쪽 구석으로 내던지는것"이 그녀가 제멋대로 한 행동에 속한다.
 
이 인용문은 베티나 폰 아르님의 글이 아니고, 150년 이상 지난 후대에 독서가 지닌 '무정부주의적 행위'를 특정짓기 위해서 한스 마그누스 엔첸스베르거가 사용한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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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미가 핀 정원(스카겐 정원에 앉아 있는 화가의 아내) ■ 페테르 세베린 크로이어, 1893년 ■

 
이제 원하기만 하면 어느 곳에서든지 독서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안락의자에 비스듬히 누워서, 침대나 혹은 바닥에 누워서 읽을 수 있는 집이 책 읽기에 가장 좋다. 하지만 야외나 해변가에서, 움직이면서도, 기차와 도시의 전철안에서도 독서는 가능하다. 마차에서, 대로에서, 극장에서, 휴식시간에 카페에서, 해수욕장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동안 가게에서, 일요일 현관 앞에 놓인 안락의자에 앉아서, 심지어 산책을 하면서까지... 책을 읽을 수 있다. 책을 들여다 보는 조용안 눈길은 독서하는 사람을 주위 환경에서 직접 떼어놓은 동시에 그를 이 세상 속에 있게 만드는 친밀감이 넘치는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도시의 소란함 속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도 독자는 방해받지 않고 온전한 정신을 유지할 수 있다.
 
오늘날 독신자는 혼자 밥을 먹을 때  재미있는 책을 읽는다는 핑계로 사람들의 시선 끄는 것을 피할 수 있다. 소수의 몇몇 독자는 여전히 도서관 열람실을 선호한다. 열람실에서는 허리를 세운 자세로 책을 앞에 놓고 팔은 책상위에 올려놓고 소리를 내서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완전히 집중해서 책을 읽을 수 있다. 도서관은 혼자 있지만 동시에 사람들과 섞일 수 있는 훌륭한 장소다. 저마다 자신과 관련한 어떤것에 몰두하고 있는, 같은 생각을 품은 사람들의 공동체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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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앙드레 케르테츠 ■ 본 지방의 병원, 1929년 ■


:: 독서는 유쾌한 고립 행위다.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예의 바르게 자신을 접근하기 힘든 존재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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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읽는 여인, 1668/70년 ■ 알테 피나코테크, 독일 뮌헨 ■
 

:: 피터 얀센스 엘링가   1623~1682

      온 신경을 집중해서 당시의 베스트셀러를 읽고 있는 하녀는 관람객에게 등을 보이고 있다. 가사 노동의 의무를 수행하는 대신 그녀는 독서의 즐거움에 몰두한다. 감정의 동요를 체험하는 즐거움은 여자에게 사회적 역할을 달성할 때에는 결코 생겨날 수 없는 새롭고 행복한 자의식을 가져다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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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지를 읽는 푸른 옷의 여인, 1663/64년 ■  레이크스뮈세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


  :: 얀 베르메르  1632~1675
    
    임신한 것처럼 보이는 한 여인이 (눈에 보이지 않는) 창가에 서 있다. 그리고 아마도 남편에게서 온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를 읽고 있다. 뒤쪽 벽에 걸린 네덜란드의 남동 지역을 나타내는 지도는 편지를 보낸 사람을 암시한다. 여인의 입술은 마치 편지의 내용을 읊조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반쯤 벌어져 있다. 읽은 내용을 마음속에 담아두기 위해서 사용하는 집중력 혹은 편지의 내용을 해독하기 위해서 들이는 노고에 대한 암시가, 편지를 읽는 이 여인을 모호하지만 친밀한 분위기로 보호막 처럼 감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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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서하는 처녀, 1850년 ■ 벨베데레 박물관의 오스트리아 회랑, 오스트리아 빈 ■



  :: 프란츠 아이블  1806~1880

      젊은 여자는 독서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다.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블라우스가 어깨에서 미끄러져 내려왔다. 그녀는 가끔씩 가느다란 목걸이를 만지작 거리던 오른손을 가슴에 가져다 댄다. 책이 그녀의 숨을 멈추게 한다. 아주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무슨일이 있더라도 알고 싶어 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독서가 그녀의 감정이입 능력을 자극하고 증가시키기 때문이다. 독서하는 여자의 내면적 흥분은 헝클어진 책 테두리의 모습에 반영되어 있다. 넘겨진 책장은 정확하게 위로 겹쳐 있지 않다. 그리고 책장 사이로 벌어진 미세한 틈새는 빛의 유희에 자신을 내맡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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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서하는 소녀, 1828년 ■ 조형예술미술관, 독일 라이프치히 ■
 

:: 구스타프 아돌프 헤니히 1797~1869

       알베르토 망구엘의 <독서의역사>라는 책 표지 그림으로 널리 알려진 유사 고전주의 화가 구스타프 아돌프 헤니히의  이그림은 간결함을 통해서 효과를 발휘한다. 동시에 이런 간결함은 그림에 현대적 특성을 부여한다. 단색조의 배경으로 인해 그녀의 출신과 책을 읽는 동기에 관한 것을 드러낼 만한 모든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 연관에서 소녀는 벗어나 있다. 남녀 모두에게 무난한 짧은 머리의 검은색은 소녀가 가슴 앞에 든 책 표지에서도 되풀이된다. 겸손하게 내리깐 소녀의 눈과 책 읽는 자세가 무의식적으로 기도서를 떠올리게 만들지만 , 여기에서는 특별한 책이 문제라기 보다는 추상적 관념으로서의 책이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 결론적으로 그림은 암시적으로 그려졌다. 끌어당겨 세운 무릎위에 십자로 포갠 손은 소녀의 좁은 얼굴 특징과 꽉 다문 얇은 입술에서 다시금 나타나는 심한 수줍음을 표현한다.
 
강렬한 색임에도 소녀가 입은 옷의 기하학적 목선과 마찬가지로 암시적으로 그려진 품이 넓고 주름이 잡힌 옷은 대단히 간결하다. 그리고 옷 속에 감추어진 여자의 몸을 예감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그림에서는 모든 외면적 측면과 운동이 배제되었고, 내면으로 전환되었다.
이미 언급한 <독서의역사>라는 책이 이야기의 대상에 관해서 펼쳐 놓은 바로크적으로 풍부하게 넘쳐나는 소재나 동기와는 대조적으로, 무뚝뚝하고 금욕적인 이 표지 인물 그림은 잘못 선택한 그림처럼 보인다. 하지만 방금 세상에서 벗어난 것 같은 그녀의 분위기와 내면성은 독특한 매력을 발산한다. 마치 감수성이 예민한 남녀 독자들이 품은, 세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소원이 그녀에게서 훌륭하게 이루어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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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도회 이후, 1895년 ■  아바디아 박물관, 에스파냐 카탈루냐 몬세라트 ■


:: 라몬 카사스 이 카르보  1866~1932

      즐거운 무도회에서 생긴 긴장감 때문에 기운이 빠져서 간이 침대에 누운 채 긴장을 풀기 위해 들여다보는 것인지도 모르는, 자주 읽어서 헤진 작은 책을 손에 든 젊은 여인의 모습을 카사스는 자신이 삽화를 그리는 주간지 <펠과 플로마>의 선전 화보 주제로 사용했다.

잡지를 위해서 만든 선전 화보는 거대한 분홍색 천으로 휩싸여있고, 아직도 참신해 보이고 모험을 즐길 것 같아 보이는 젊은 여인은 방금 읽은 듯한 편지를 손에 들고 있다. 같은 주제를 변형시켜 그린 두 그림에서 독서는 일종의 정식 만찬 사이에 낀 간식 같은 것이다. 현실 속 삶의 곡예사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사람들이 항상 커다란 장면만 기다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짧은 중간 휴식 시간에도 종종 세상의 취미와 무게에서 생겨난 많은 것이 숨겨져 있다. 그것이 사람들이 삶을 감지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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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잔불 옆에서 책읽기, 1858년 ■ 순수예술협회, 영국 런던 ■
 

  ::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 1834 ~1903

      석유등 불빛 밑에서 커피나 차를 옆에 놓고 책을 걱정스러울 정도로 눈앞에 바짝 댄 채 읽고 있는 여자의 옆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불빛이 충분할 정도로 밝게 비추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책을 읽는 여자가 심한 근시라는 해석만이 남게된다. 어쩌면 그녀는 내용에 아주 집중해 있으며 자신과 책 사이의 거리를 되도록이면 줄이려고 하는 것 같다. 책 읽는 사람과 책이 하나로 녹아드는것, 그들 사이에는 더 이상 어떤 빈 자리도 없다. 이렇게 책을 읽는 여자는 작은 행복을 이루기 위해서 편안한 의자와 등불 그리고 마음을 사로잡는 책만 있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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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앨리스 리들, 1870년 ■ 줄리아 마거릿 캐머런 재단 ■

 

  :: 줄리아 마거릿 캐머런  1815~1879
 
      자녀를 여섯이나 둔 어머니 였던 그녀는 49세에 사진을 배우기 시작했다. 딸이 그녀에게 이런 글이 새겨진 카메라를 선물했다. "고독한 시간에 엄마가 사진을 찍는다면, 그것이 엄마를 즐겁게 할 수도 있을 거야....."  고독한 시간은 없었지만 소일거리가 곧 위대한 예술이 되었다. 캐머런은 사진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키고 사진으로 돈까지 벌 수도 있을 것이라는 예감을 가졌다고 회고록에 쓰고 있다.
 
사진 속의 편지를 읽는 여인은 18세의 앨리스 리들이다. 수학자 찰스 루트위지 도지슨이 여섯 살짜리 여자아이 앨리스와 그녀의 여동생에게 템스 강에서 나룻배를 타면서 환상적인 이야기를 들려주고 나서 세월이 한참 흐른 다음의 모습이다. 그가 해준 이야기의 여주인공 역시 앨리스라는 이름을 지닌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었다. 도지슨은 루이스 캐럴이라는 예명으로 발표한 소설<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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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를의 여인(지누 부인), 1888년 ■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미국 뉴욕 ■


:: 빈센트 반 고흐 1853 ~1890

      프랑스 아를에서 머물던 고흐는 조제프 지누의 카페가르에서 사람들과 자주 어울렸다. 지누의 아내가  고흐를 위해서 이 그림의 모델이 되어 주었다. 그는 45분 동안 모델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고 동생 테오에게 편지를 써 보냈다.
 
샤르댕, 퓌거 그리고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고흐도 삶의 과정 그 자체가 아니라, 삶이 끼치는 영향을 포착해서 그림에 담았다. 시선이 책에서 떨어지고 방금 읽은 것이 독자의 머릿속에서 되울리고 지속되는 순간을. 다만 샤르댕, 퓌거 그리고 후대의 발로통과 달리 고흐가 그린 책 읽는 여자는 그림을 관찰하는 사람에게서 시선을 돌려 알 수 없는 먼곳을 쳐다보고 있다. 손으로 받친 머리는 그녀의 특징을 우수에 젖은 여자로 규정한다. 다른 활동과 마찬가지로 책을 읽는 과정도 자연주의적 묘사에서 벗어나 있다. 화가는 우리에게 오직 한 사람만을 보여준다. 그 인물의 자세와 시선을 통해서 우리는 그녀가 방금 책을 읽었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그 인물이 독서를 할때, 독서는 자족을 느낄 수 있는 한 과정이라는 암시가 생겨난다. 마치 진리를 찾는 행동이 독서를 하는 동안에 벌써 목적지에 도달하기라도 한 것처럼.
 
고흐가 그린 지누의 아내는 널리 퍼진 이런 생각과는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평범한 중년의 우수에 찬 현명한 부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책을 읽는 것은 정신적 삶으로 넘어가는 문지방을 밟고 서 있는 거야. 책은 우리를 정신적 삶으로 안내를 하지. 하지만 독서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야.'

고흐의 그림에서 그 놀라운 색채가 없다면 이 그림은 사람들을 놀라게 만드는 계시적 성격으로 그들을 이끌지 못했을 것이다. 이 그림에서 놀라운 색채란 바로 비명을 지르는 듯한 배경의 노란색이다. 노란 색은 인물을 어둡게 만들면서 동시에 그녀가 감싸인 것처럼 드러나게 만든다. 고흐는 그 노란색에 대해서, 그가 남자와 여자에게 '영원의 기분'을 부여하고자 한 것이라고 말했다. 예전에는 성인의 후광을 통해 상징되었던 것을 그는 '색의 광채와 진동을 통해서' 재현하려 시도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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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릴린 먼로가 <율리시스>를 읽다.1952년  ■ 이브 아널드/매그넘/포커스 에이전시 ■
  

:: 이브 아널드 1913~

     "그녀가 읽었을까. 아니면 읽지 않았을까?" 이런 질문을 자제하기는 상당히 힘들다. 20세기 금발의 섹스
표상인 메릴린 먼로가, 20세기 고급 문화의 표상이며 많은 사람들이 현대소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창조물이라고 평하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읽었을까 혹은 그냥 읽는 척하는 것일까? 왜냐하면 같은 사진집에 연속해서 찍은 다른 사진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사진에서도 메릴린이 읽고 있는 것은 바로 조이스의 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메릴린이 보여주었던 것처럼 <율리시스>를 읽어 보라는 브라운 교수의 권고를 따를 수는 있을 것이다. 즉 차례대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의 이곳저곳을 펼쳐 어느 정도까지만 띄엄띄엄 읽어 내려가는 방식으로, 이처럼 혼란스러운 독서 방식을 메릴린 독서법이라고 명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브라운 교수는 어쨌든 자신의 학생들에게 그런 방식을 권했다.



여자가 책을 지나치게 많이 읽을때 생기는 위험에 관해서


엘케 하이덴라이히

     "독서의 역사에서 여자는 종이에 적힌 단어의 그물 속으로 날아 들어온 작은 파리에 불과했다.  그들은 구경꾼이었다."

     두브라브카 우그레시치는 그녀의 책<독서 금지>에서 이렇게 썼다. 과거에만 그랬다고? 지금도 우리여자는 구경꾼이다! 우리는 여전히 이야기의 그물 속으로 뛰어들어간다. 열광을 하면서, 뚜렷한 이성을 지닌 채로, 언어에 대한 열정에 굶주려서. 우리 옆에는 지루해하는 남자들이있다. 우리는 그들을 밀치고 말을 해주어야한다. '이제 한번만이라도 좋으니 그것을 읽어봐요!" 누군가가 우리에게 아름다운 연애편지를 써서 보내면, 우리는 곧 사랑에 빠질 수도 있다.
바로 그 사랑은 언어에서 생명을 얻어 살아가고, 글 쓰는 행위를 통해 생겨나고, 중요한 것으로 간주된다. 사랑, 공포, 늙음, 죽음 - 언어의 그물에서 우리는 필요한 것을 발견하고 기꺼이 그 그물에 걸려든다.

"왜 사람들이 책을 증오하고 두려운 것으로 간주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나요? 책은 땀구멍이 있는 삶의 얼굴을 그대로 보여주죠. 하지만 고루하고 편협한 시민들은 땀구멍도, 머리카락도, 표정도 없는 밀납인형 같은 얼굴을 원해요."

이문장은 1953년에 출간되었고 프랑수아 트뤼포가 영화로 만든 레이 브래드버리의 공상과학소설 <화씨 451도>에서 가져온 인용문이다. 이 소설에서는 소방관이 더 이상 불을 끄지 않는다. 오히려 불을 지르고, 심지어 책까지 태우는 세계가 묘사되어 있다. 책을 소유하거나 읽는 사람은 국가의 공적1호가 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 자리에서 책과 함께 불태워졌다. 소방대장 비티는 은밀하게 책에 매혹되어 있던 몬택에게 말한다. "옆집에 있는 책은 장정된 총과 같네. 그것을 없애게. 총탄을 빼내고, 인간의 정신을 깨부수게."

스탈린을 풍자한 시를 써서 당국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했고 시집이 불태워졌던 시인 오시프 만델스탐이 저절로 머릿속에 떠오른다. 권력자는 만델스탐을 파괴하고 그의 시를 불태울 수 있었지만, 만델스탐의 아내 나데슈다는 모든 시를 외우고 있었고, 그것을 적어서 보관했다. 여자가 시인이 아니고 독자로 머물러 있는 한, 문학영역에서 여자가  해야 하는 역할이란 후손을 위해서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뿐이다. 그녀들은 보물을 집어들고, 우리 후손을 위해서 그것을 보관한다. 그동안 여자에게 사랑이 생기는 경우를 제외하면 사정이 그렇다. 나는 한숨을 쉬면서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사랑이 문학보다 항상 훨씬 강하다는 사실을, 그리고 문학속의 사랑은 삶 속의 사랑보다 훨씬 아름답다. 문학 속의 사랑은 드물기는 하지만 적어도 우리에게 환상을 주기는 하니까...

우리 여자는 이렇게 행동한다. '우리는 나누고, 풀어주고, 우리가 지닌 것 중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가지고서 속물들을 부양한다. 속물들은 그것을 알고 있으며, 그 때문에 우리를 증오한다' 남자는 책읽는 여자를 두려워 한다. 그리고 비토리오 마테오 코르코스의 그림을 세밀하게 들여다 보면, 남자가 두려워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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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토리오 마테오 코르코스 ■  꿈,
1896년




 
이 그림속에는 대단히 정열적인 한 여자가 앉아 있다. 그녀는 지금은 책을 들여다보고 있지 않다.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에는 방금 읽은 노란색 표지의 프랑스 고전작가의 작품집 3권에 나오는 단어, 문장, 생각이 들어있다. 볼테르? 그녀는 소설 <캉디드>를 읽고, "우리는 우리의 정원을 손질해야만 한다"는 말로 귀결되는 철학을 어떻게 생각해야만 할지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아직 만족할 생각이 없다. 그녀에게 만족하라고 요구하는 사람은 하얀 우산의 끝을 머리에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그녀는 전체 사건 뒤에 감추어진 깊은 아이러니를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영리해 보인다. '결국 그들은 우리를 마음대로  놀리려고 하는군. 정원을 손질해야 한다고? 그래. 따끔한 맛을 보여주지'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생각하는 모습이지만, 그녀의 손은 이미 단호함을 드러내고 있고, 그녀의 태도는 마치 달려들 태세를 마친 것 같다.

나는 몇년 전부터 책 읽는 여자의 그림을 수집하고 있다. 그중 하나는 내가 앉아서 책을 읽곤 하는 소파 위에 걸려 있다. 그것은 하랄트 메츠케스의 그림인데 촌각을 다투면서 책을 읽는 것처럼 보이는 젊은 여자가 그려져 있다. 그녀는 창가에 앉아 있다. 밖은 칠흑처럼 어둡다. 하지만 지평선에 있는 한 줄기 광선이 곧 동이 틀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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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랄트 메츠케스 ■ 창가에서 독서하는 여자, 2001년 ■


나는 소파에 앉아서 책을 읽는다. 나는 책 자체가 된다. 나는 30~40쪽을 읽기만 하면 된다 그러고 나서 눈을 들면 이미 날이 다시 밝아있을 것이다. 다음과 같이 말한 몽테스키외처럼 지나친 주장을 할 생각이 전혀 없다. "한시간 동안 책을 읽고 난 다음에도 사라지지않을 만큼 엄청난 슬픔을 나는 아직 겪어보지 못했다.". 한 시간의 독서는 정확하게 한시간 동안은 슬픔을 잊게 해 준다. 독서가 끝난 다음에는 다시 슬픔이 찾아올 것이다. 어쩌면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그동안에 날이 샐 수도 있다. 이렇듯 신앙처럼 희망을 품는다는 사실로 인해서 독서하는 사람은 위험한 존재가 되는 것일까? 그런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힘이 책속에는 있기 때문이다. 여자에게 책을 읽는 것이 허용된 것은 이제 겨우 수십 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직도 모든 지역의 모든 여자에게 독서가 허용된 것은 아니다.

"사람은 삶을 통해서 배우며, 독서를 통해서 배운다"라고 귄터데 브로인은 말한다. " 그리고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은 항상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한 통찰력을 주기 때문에 사람들은 삶에 대해서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게 된다. 독서를 하면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삶도 함께 사는 것이다." 나는 그 말을 보충해서 말하겠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사랑을 느끼고 함께 사랑한다'고...

광적으로 책을 읽는 것은 삶을 위태롭게 만들 수도 있다. 카를로스 마리아 도밍게스의 <종이 집>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1998년 초 블루마 레논은 소호의 한 책방에서 아주 오래된 판본의 에밀리 디킨스 시집을 사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가 두 번째 시를 막 읽으려고 하는 순간, 첫번째 길 모퉁이에서 자동차에 치였다."  독서는 생명을 위험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나와 다른 사람을 위험속으로 빠뜨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예감한다.

공원을 거닐면서 책을 읽고, 마지 못해서 유모차를 끌어 당기지만, 책에 푹 빠져 있어서 아이가 오래전에 유모차에서 떨어졌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유모를 풍자한 만화 <책 읽기를 좋아하는 보모>를 떠올린다. 그 경우 아이 어머니가 보모를 심하게 질책을 한다고 해도, 나는 그 어머니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이 말하는 일반적인 삶의 계획과 들어맞지 않는 무엇인가가 그녀의 머릿속에서 생겨나기 때문에, 책 읽는 여자에게 경고하는 말들이 생겨났던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가끔 꿈을 꾼다. 최후의 심판 날의 동이 트고, 위대한 정복자와 법률학자가 자신들에게 주어질 보상을 받기 위해서 올 때-그들이 쓰게 될 월계관과 월계수 가지. 그들의 이름이 영원히 마모되지 않을 대리석에 새겨져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전능하신 신께서 우리가 팔에 책을 끼고서 걸어가는 것을 보시게 되면, 그때 그분은 베드로 쪽으로 몸을 돌려 질투심이 전혀 없는 상태라고는 하기 힘든 어조로 말씀하실 것이다. '보아라, 이들은 더 이상 어떤 보상도 필요하지 않아. 이곳 천국에서는 그들에게 어떤 것도 줄 수 없어. 그들은 책 읽는 것을 아주 좋아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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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랄트 메츠케스 ■ 여자 학자들, 2001년
■ 레오 코피 갤러리, 독일 베를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