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친1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부엌이다. 그것이 어디에 있든, 어떤 모양이든, 부엌이기만 하면, 음식을 만들 수 있는 장소이기만 하면 나는 고통스럽지 않다. 기능을 잘 살려 오랜 세월 손때가 묻도록 사용한 부엌이라면 더욱 좋다. 뽀송뽀송하게 마른 깨끗한 행주가 몇 장 걸려 있고 하얀 타일이 반짝 반짝 빛난다. 바닥에 채소 부스러기가 널려 있고, 실내화 밑창이 새카매질 만큼 더러운 그곳은, 유난스럽게 넓어야 좋다. 한 겨울쯤 무난히 넘길 수 있을 만큼 식료품이 가득 채워진 거대한 냉장고가 우뚝 서 있고, 나는 그 은색 문에 기댄다. 튀긴 기름으로 눅진한 가스레인지며 녹슨 부엌칼에서 문득 눈을 돌리면, 창 밖에 서는 별이 쓸쓸하게 빛난다.
나와 부엌이 남는다. 나 혼자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아주 조금 그나마 나은 사상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기진맥진 지쳤을때 나는 문득 생각에 잠긴다
언젠가 죽을 때가오면 부엌에서 숨을 거두고 싶다고 홀로 있어 추운 곳이든 누군가 있어 따스한 곳이든 나는 떨지 않고 똑바로 쳐다보고 싶다. 부엌이면 좋겠는데.. 라고 생각한다
확실하게 존재하였던 가족이란 것이 세월을 두고 한 명 두 명 줄어들어 지금은 나 혼자라 생각하니 눈앞에 있는 모든것이 거짓말 처럼 보였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 태어나고 자란 방에 나 혼자 있다니 놀랍다. 무슨 Sf같다. 우주의 어둠이다. 장례식을 치르고 난 뒤 한 사흘은 멍하게 지냈다. 눈물도 마른 포화 상태의 슬픔이 흔히 동반하는 나른한 짐의 꼬리에 조용한 부엌에 요를 깔았다. 라이너스 처럼 담요를 둘둘 말고 잠든다. 위-잉, 냉장고 소리가 내 고독한 사고를 지켜주었다. 그곳에서는 그럭저럭 평온하게 긴밤이 가고 아침이 와주었다. 다만 별 아래서 잠들고 싶었다. 아침 햇살에 눈뜨고 싶었다. 그 외의 모든 것에는 그저 담담했다.
처음 방문하는 집에서 지금까지 별로 만난 적도 없는 사람과 마주하고 있자니, 왠지 천애 고아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둠 속에서 비에 젖은 밤 풍경이 번져 있는 커다란 유리창, 에 비치는 자신과 눈이 마주친다. 세상에, 나와 핏줄이 닿는 인간은 없고, 어디에 가든 무엇을 하든 모두 가능하다니 아주 호쾌했다. 세상은 이렇게 넓고, 어둠은 이렇게 깊고, 그 한없는 재미와 슬픔을, 나는 요즘 들어서야 비로소 내 이 손으로 이 눈으로 만지고 보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한쪽 눈으로만 세상을 보아왔어, 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잠이 왔다. 타인의 집에서 샤워를 틀어놓고, 뜨거운 물 속에서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하고 생각하였다. 빌린 잠옷으로 옷을 갈아입고, 조용한 실내로 발을 내디뎠다. 차박차박 맨발로 부엌을 다시 한번 보러간다. 역시 멋진 부엌이다. 그리고, 오늘밤 나의 잠자리가 될 그 소파로 다가가, 불을 껐다. 창가에서. 희미한 불빛에 드러난 식물들이 화려한 밤 풍경에 에워싸여 소리 죽여 숨쉬고 있었다. 밤 풍경..비가 그친 지금, 습기를 머금은 투명한 대기 속에서 반짝반짝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담요를 둘둘 말고, 오늘밤도 부엌 옆에서 자는게 우스워 웃었다. 그러나 외롭지는 않았다. 나는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지금까지의 일들과 앞으로의 일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 그런 잠자리만 바라고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옆에 사람이 있으면 외로움이 커지니까. 안 된다. 하지만 부엌이 있고, 식물이 있고. 지붕 아래 사람이 있고, 조용하고...... 최고다. 여긴 최고다. 나는 안심하고 잠들었다.
나이 든 사람과 둘이서 산다는 것은 아주 불안한 일이다. 건강하면 할수록 더욱 그렇다. 실제로 할머니와 둘이 살때는 그런 생각 할 겨를도 없이 재미있게 지냈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그런 생각이 절실하다. 나는 늘<할머니가 죽는 게> 무서웠다. 내가 집으로 돌아오면 할머니는 텔레비전이 있는 다다미방에서 나와, 어서 오너라 라고 말했다. 귀가가 늦을 때는 항상 케이크를 사들고 들어갔다. 외박이든 무슨 일이든 말만하면 화내지 않는 너그러운
할머니였다. 잠들기 전 우리는 때로는 커피와 함께, 때로는 녹차와 함께 케이크를 먹고, 텔레비전을 보면서 한가로운 한때를 보냈다. 어렸을 적부터 하나도 변한 게 없는 할머니의 방에서, 별 쓰잘데기 없는 세상 이야기며 연예계 이야기, 그 날 하루에 생긴 일들을 두런두런 얘기했다. 그런 때 유이치에 관한 이야기도 들은 듯하다. 아무리 열심히 빠져 있어도, 아무리 술을 마셔 혼곤히 취해 있을 때에도, 나는 오직 하나뿐인 가족을 잊지 않았다. 방 한 구석에서 숨쉬며 살아 있는, 밀려오는 그 소름 끼치는 고적함, 어린애와 노인네가 애써 명랑하게 생활해도 메울 수 없는 공간이 있다는 것을, 나는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일찌감치 깨닫고 말았다. 유이치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암울하고 쓸쓸한 이 산길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오직 한가지가 빛나는 것이란 걸 안때가 언제였을까. 사랑 받으며 컸는데, 늘 외로웠다. 언젠가는 모두가 산산이 흩어져 시간의 어둠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그렇다는 것이 여실히 새겨진 눈으로 걷고 있다. 유이치가 나에게 반응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나는 더부살이 생활에 돌입하였다. 나는 나 자신을 5월이 올 때까지 어영부영 느슨하게 지내도록 놔두었다. 그랬더니 극락처럼 매일이 편안했다. 아르바이트는 빠짐없이 다녔지만, 주부 같은 생활을 하였다. 마음으로 조금씩 빛과 바람이 통하여, 기뻤다. 유이치는 학교와 아르바이트 사이를 오가고, 에리코씨는 주로 밤에 일을 하기 때문에 식구가 한 자리에 모이는 일은 거의 없었다. 처음 한동안 나는 그 열린 생활 공간에서 자는 데 적응하지 못했다. 조금씩이라도 짐을 옮기려, 원래의 내방과 유이치네 집을 오가는 일도 힘들었다. 하지만 금방 익숙해졌다. 그 부엌과 마찬가지로 나는 다나베네 소파를 사랑하였다. 그곳에서는 잠을 만끽할 수 있었다. 풀과 꽃의 숨소리를 들으며, 커튼 너머 밤풍경을 느끼면서 사르르 잠들었다. 지금, 더 이상 원하는 것이 생각하지 않으니 나는 행복했다. 늘 그렇다. 나는 항상 한계점까지 다다르지 않으면 움직이지 못한다. 이번에도 정말 아슬아슬한 시점에서 이렇게 따스한 침대가 주어진 것을, 나는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신에게 감사하고 있다.
어느 날, 나는 아직 남아 있는 짐을 정리하기 위하여 내방으로 갔다. 문을 열 때마다 소름이 끼쳤다. 살지 않은 때부터 그 곳은 마치 다른 사람 같은 얼굴이었다. 소리 하나 없이 어둡고 아무것도 숨쉬지 않았다. 낯익어야 할 모든 것이 마치 모른 척 시치미를 떼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나는 다녀왔습니다란 말보다. 실례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조심조심 들어가고 싶어진다. 할머니가 죽자, 이 집의 시간도 죽었다. 나는 정말 그렇게 느꼈다. 이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집을 나가는 것 외에 무엇하나... 나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냉장고를 닦았다.
그의 눈을 들여다보고서, 알았다. 그는, 슬퍼하고 있는 것이다. 아까, 소타로가 말했었다. 다나베의 여자 친구는 1년을 사귀었는데도 상대방을 잘 알 수 없어 지겨워졌다고. 다나베는 여자를 만년필이나 뭐 그런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는다고. 나는 유이치를 사랑하지 않으므로 잘 안다. 만년필에 대한 그와 그녀의 생각이 질과 무게에 있어 전혀 달랐던 것이다. 세상에는 만년필을 죽기로 사랑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 점이 너무 슬프다. 사랑하지 않기에 알 수 있는 일이다. "어쩔 수 없었어" 유이치는 나의 침묵이 마음에 걸렸는지 얼굴도 들지 않고 말했다.
"전혀, 네 탓이 아니야" "고마워......" 나는 무슨 까닭인가, 그렇게 말한다. "천만에"라며 그가 웃는다. 나는 지금, 그를 알게 되었다. 한 달 가까이나 같은 곳에 살았는데, 지금 처음으로 그를 알았다. 혹 언젠가 그를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사랑을 하게 되면, 항상 전력으로 질주하는 나지만, 구름 진 하늘 틈 사이로 보이는 별들처럼, 지금 같은 대화를 나눌 때마다, 조금씩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나는 손을 움직이면서 생각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들이 헤어진 것은, 내가 여기 있음이 아닌가. 내가 얼마나 강한지, 지금 당장 혼자 생활로 돌아갈 수 있을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역시, 조만간, 정말 조만간, 이사했다는 엽서를 쓰면서 모순이라고는 생각하지만...... 나가지 않으면.
나는 두 번 다시란 말이 지니는 감상적인 어감과 앞으로의 일들을 한정하는 뉘앙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때 생각난 <두 번 다시>의 그 엄청난 무게와 암울함은 잊기 어려울 만큼 박력이 있었다.
나는 신에 맹세코 그런 일들은 그런대로 담담한 심정으로 대처하고 있다고 여겼었다. 버스의 흔들림에 몸을 맡기고, 하늘 저 멀리로 사라져가는 비행선을 눈으로 좇으면서. 그런데, 막상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눈물이 똑똑 가슴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 아닐까. 놀라웠다. 자신의 신체 기능이 정지되었는가 싶었다. 술에 몹시 취했을 때처럼, 자신과는 무관한 곳에서, 눈물이 송글송글 솟았다. 나는 부끄러워서 얼굴이 새빨개졌다. 스스로도 알 수 있었다. 나는 당황하여 버스에서 내렸다. 떠나는 버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어두컴컴한 뒷골목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나 자신이란 짐 사이에 끼여, 어둠속에서 쭈그리고 엉엉 울었다. 그렇게 울기는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쉴새없이 흐르는 뜨거운 눈물에, 나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거의 한번도 제대로 울지 않았음을 알았다. 슬퍼서가 아니라, 그저 여러 가지 일들로 울고 싶어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들리는 소리에 문득 고개를 들자, 머리 위로 보이는 밝은 창에서 하얀 김이 새어 나왔다. 귀를 기울이자, 안에서 시끌벅적한 소리, 냄비 부딪치는 소리, 그릇들 소리가 들렸다. 주방이다.
나는 주체할 수 없이 우울하고, 그러다 명랑한 기분이 되어, 머리를 감싸고 잠시 웃었다. 그리고 일어나 치맛자락을 털고, 오늘 돌아갈 예정이었던 다나베네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신이여, 아무쪼록 살아갈 수 있도록
아름다운 엄마는 출근전의 한때, 식물에 물을 주고 있었다. "미카게 씨는 장래성이 있어 보여서, 문득 말하고 싶어졌어. 나도 혼자서 유이치를 기르면서 깨닫게 되었지, 힘들고 괴로운 일도 아주아주 많았어. 정말 홀로서기를 하고 싶은 사람은, 뭘 기르는게 좋아. 아이든가, 화분이든가. 그러면 자신의 한계를 알 수 있게 되거든.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야" 노래하듯, 그녀는 그녀의 인생 철학을 말했다. "여러 가지로 힘든 일이 많았나 봐요" 감동한 내가 그렇게 말하자. "뭐, 다 그렇지. 하지만 인생이란 정말 한번은 절망해 봐야 알아. 그래서 정말 버릴 수 없는게 뭔지를 알지 못하면, 재미라는 걸 모르고 어른이 돼버려. 난 그나마 다행이었지" 라고 그녀는 말했다. 어깨까지 늘어진 머리칼이 살랑 살랑 흔들렸다. 싫은 일은 썩어날 정도로 많고, 길은 눈길을 돌리고 싶을 만큼 험하다....... 고 생각되는 날이 얼마나 많았던가. 사랑조차 모든 것을 구원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황혼녘의 햇살을 받으며 가느다란 손으로 초목에 물을 주고 있다. 투명한 물의 흐름으로 무지개가 뜰 것처럼 반짝이는 달큰한 빛 속에서. "알 것 같은 기분이에요" 나는 말했다. "미카게 씨의 순수한 마음이 난 굉장히 마음에 들어. 미카게 씨를 기른 할머니도 틀림없이 멋진 분이었을 거야, 그렇지?" 라고 그의 엄마가 말했다. " 최고의 할머니였어요" 내가 웃고, "좋았겠네" 라며 등뒤에서 그녀가 웃었다.
여기서도, 언제까지 있을 수는 없다. ...잡지로 눈길을 돌리고 나는 생각한다. 휘청 현기증이 일 정도로 괴롭지만, 그건 명백한 일이다. 언젠가 서로 다른 곳에서 이곳을 그리워 할까. 아니면 언젠가 또 같은 부엌에 서는 일도 있을까. 하지만 지금, 이 실력파 엄마와, 저 상냥한 눈의 남자와, 나는 같은 곳에 있다. 그게 지금의 전부다. 휠씬 더 어른이 되면, 많은 일들이 있고, 몇 번이나 좌절하고 몇 번이나 괴로워하고 몇 번이나. 제자리로 돌아온다. 절대로 지지 않는다. 힘을 빼지 않는다.
꿈의 키친. 나는 몇 군데나 그것을 지니리라. 마음속으로, 혹은 실제로. 혹은 여행지에서. 혼자서, 여럿이서, 단둘이서, 내가 사는 모든 장소에서, 분명 여러 군데 지니리라.
키친2, 만월
에리코씨는 이제 없다.
그 광경 속에서, 나는 이번에야말로 정말로 안다. 유이치와 내가 어떻든, 인생이 아무리 길고 아름답든,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만날 수 없다. 오들오들 강가를 걷는 사람들, 차 지붕으로 하얗게 싸이기 시작한 눈, 나무들이 좌우에서 고개를 젓고, 마른 나뭇잎을 흩날린다. 은빛 새시가 차갑게 빛난다. 이윽고 선생이, "사쿠라이 씨! 일어났어? 눈이야, 눈!" 이라고 소란을 떨며 일으키러 오는 소리가 문 너머에서 울린다. 나는, 네라고 대답 하고 일어났다. 옷을 갈아입는다. 다시 현실 속의 하루가 시작된다. 거듭거듭 시작된다.
마지막 날은, 시모다에 있는 프티 호텔에서 프랑스 요리를 취재하였다. 우리는 스태프와 호화판 저녁 식사를 즐기며 뒤풀이를 하였다. 모두들 어찌된 셈인지 일찍 자는 사람들 뿐이라 올빼미 형인 나는 뭔가 미진하여, 각자 자기 방으로 해산한 다음 혼자서 해변으로 산책하러 나갔다 .코트를 단단히 껴입고, 스타킹도 몇 겹 껴 신었는데 외치고 싶을 정도로 춥다. 나는 캔커피를 사서 주머니에 넣고 걸었다. 무척 따뜻하다. 차가운 바람이 윙윙 불어대고, 머리가 짜릿해지는 밤속, 해변으로 이어지는 어두운 계단을 내려갔다.
모래가 싸늘하고 바삭거렸다. 나는 캔커피를 마시면서 해변을 따라 죽 걸었다. 끝없는 어둠에 싸여 있는 바다와, 철썩철썩 파도 소리를 울리는 울퉁불퉁 한 바위자락을 보고 있자니, 왠지 애처롭고 감미로운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도, 즐거운 일과 괴로운 일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가령 유이치가 없어도. 나는 조용히 생각했다. 저 멀리서 등대불이 돌고 있다. 빙글 돌아 이쪽을 향하고, 다시 멀어져, 파도 위로 빛나는 길을 만든다.
그래, 그래 라고 고개를 끄덕이고, 콧물을 흘리며 나는 호텔방으로 돌아갔다. 방에 있는 간이 포트로 물을 끓여놓고,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서 옷을 깨끗이 갈아입고 침대에 앉아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들자, 프론트 보이가 말했다. "전화가 와 있습니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창 밖, 내려다보이는 호텔정원, 어두운 잔디밭, 그리고 하얀 문. 그 너머에는 조금 전까지 거닐었던 싸늘한 해변이 있다, 검은 바다가 꿈틀거리고 있다. 파도 소리가 들린다. "여보세요?" 유이치의 목소리가 날아든다. "겨우 찾아냈네, 고생했다구" "어디서 거는 거야?" 나는 웃었다. 마음이 느긋하게 풀어진다. "도쿄" 라고 유이치가 말했다. 그 말이 모든 것의 대답이라고 느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야. 내일 돌아가" "맛있는 거 많이 먹었어?" "응, 생선회에다 새우에다, 멧돼지고기, 오늘은 프랑스 요리. 며칠 사이에 살이 다 쪘어. 아, 그러고 보니 나, 와사비 절임하고 장어 파이하고 녹차가 꽉꽉 들어 있는 상자를 택배로 부쳤는데. 가지러 가도 괜찮아" "왜 새우하고 생선회는 없는 거야?" 라고 유이치가 말했다. "그런 건 보낼 방법이 없잖아" 라고 말하며 나는 웃었다. "좋아, 내일 역으로 마중 나갈 테니까, 사서 손에 들고 와. 몇시에 도착 한다구?" 유이치가 명랑하게 물었다. 방은 따뜻하고, 끓는 물에서 피어오르는 김이 퍼진다. 나는 도착 시각과 몇 번 홈인지를 설명했다.
달빛 그림자
히토시는 조그만 방울을 전철표를 넣는 지갑에 매달아, 항상 지니고 다녔다. 그것은 우리들 사이가 사랑으로 영글지 않았을 때, 내가 정말 아무 뜻 없이 준 건데, 마지막까지 그의 곁을 떠나지 않는 운명을 짊어졌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수학 여행을 준비하면서, 서로 다른 반이었던 우리는 여행위원으로 알게 되었다. 정작 여행 때는 반별로 반대 코스를 돌게 되어, 내려가는 신칸센만 같이 탔다. 홈에서 우리는 장난을 치면서 헤어짐이 아쉬워 악수를 하였다. 나는 그때 집에서 기르는 고양이 목에서 떨어진 방울이 주머니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이 문득 생각나, 작별 선물, 이라며 건넸다. 그는 이게 뭐야, 라고 웃기는 했지만 함부로 다루지 않고 소중하게 손수건에 쌌다. 그 나이 또래의 남자아이한테는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라서 나는 무척 놀랐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그것이 나한테 받은 특별한 것이라 해도, 그가 바르게 자라 다른 사람한테 받은 물건을 함부로 다루지 못한다해도, 순간적으로 그렇게 한 태도에 나는 상당히 호감을 품었다. 그리하여 방울은 마음을 통하게 했다. 만날 수 없는 여행 내내, 서로 방울에 신경이 쏠려 있었다. 나는 방울이 울릴 때마다 나와, 내가 있었던 여행 전의 나날을 알게 모르게 떠올렸고, 나는 먼 하늘 아래서 울리고 있을 방울과, 방울과 함께 있는 사람을 생각하며 지냈다. 돌아와서 일대 연애가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어언 4년 동안, 방울은 모든 낮과 밤, 모든 사건을 함께 하였다. 첫키스, 말다툼, 개이고 비 오고 눈 온 날들, 함께 지낸 첫 밤, 모든 웃음과 눈물, 좋아했던 음악과 텔레비전 프로그램, 둘이서 있었던 모든 시간을 공유하면서, 히토시가 지갑 대신 그 전철표 지갑을 내미는 손과 함께, 늘 딸랑딸랑 조그맣고 투명한 소리로 울렸다. 귓전을 맴도는 사랑스런, 사랑스런 소리다. 그런 기분이 들었다는 말 따위, 나중이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소녀의 감상이다. 그러나 나는 말한다. 그런 기분이 들었다고. 늘 이상했다. 히토시는 때로 아무리 빤히 쳐다보고 있어도 그 자리에 없는 듯한 기분이었다. 자고 있을 때도, 나는 어째서인가 몇 번이나 그의 심장에 귀를 갖다 대지 않을 수 없었다. 웃는 얼굴이 너무도 환하게 빛나면 눈동자를 조아리고 보았다. 그는 늘 그 분위기와 표정에 어떤 유의 투명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허망하고 불안하게 느껴지는 것이라고 줄곧 생각하고 있었는데, 만약 그게 예감이었다면 이 얼마나 애처로운 일인가. 애인을 잃은 것은 긴 인생, 그래봐야 20년 정도지만.. 도저히 옛날 같은 시점으로 세계를 볼 수가 없다. 머리가 불안정하게 떠올랐다가는 가라앉아 침착하지 못하고 멍하니 늘 괴롭다. 사람에 따라서는 평생에 한번도 하지 않아도 좋을 일(임신 중절, 물장사, 큰 병치레 등) 중 하나에 이러하게 참가하게 된 것을, 그저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그야 우리는 젊었고, 인생의 마지막 사랑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우리는 두 사람 사이에서 난생 처음으로 여러 가지 드라마를 보았다. 사람과 사람이 깊이 관여하여 보게 되는, 다양한 사건들의 축적을 확인하면서, 하나하나 알아가면서 4년을 쌓아갔다. 지금은 튼 소리로 말할 수 있다. 하느님 바보. 나는 히토시를 죽도록 사랑 했습니다.
마치 마음 저 깊은 곳에서 본능의 빛이 반짝이며 나가라고 명령한 것처럼, 망설이지 않았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때 운명은 한 단도 헛디딜 수 없는 사다리였다. 단 한 장면을 빼놓아도 끝까지 올라갈 수 없다. 그리고 오히려 헛디디는 편이 쉬웠다. 그럼에도 나를 움직이고 있었던 것은 아마 죽어가는 마음속의 빛이었으리라. 그런건 없는 편이 차라리 편히 잠들 수 있다고 여겼던 어둠 속의 빛이었다.
두꺼운 옷을 입고 자전거를 타고 갔다. 봄이 정말 오리란 믿음을 주는 따스한 빛에 에워싸인 한낮이었다 막 태어난 바람이 불어와 기분이 상쾌했다. 가로수에도 어린 연두빛 잎사귀가 돋아 있었다. 하늘에는 엷은 하늘색 구름이 저 먼 도시 너머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 싱그러움에 나는 파삭파삭 메말라 있는 자신의 내부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내 마음에는 도무지 봄의 훈풍이 불어들지 않는다. 비누 방울처럼 미끌미끌 표면에 비칠 뿐이다. 사람들은 모두 봄빛에 머리칼을 흩날리며 행복하게 스쳐지나간다. 모든 것이 숨을 쉬고, 부드러운 햇살의 보호를 받으면서 찬란함을 더해 간다. 생명력으로 넘치는 아름다운 풍경속에서 내 마음은 메마른 겨울 길과, 새벽녘의 강가를 그리워한다. 이대로, 사라져 버리고 싶다고 생각한다.
빛이 애처러울 정도로 선명하게 거리를 비추고 있다. 구름 그림자가 거리를 빛과 그림자로 나누며 천천히 움직인다. 평화로운 오후다.
강물 소리가 희미하게 달리고 헤어짐이 아쉬웠다. 그리고 다리. 다리가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이별의 장소가 되었다. 물이 콸콸 소리를 내며 춥게 흐르고, 강바람이 정신이 반짝 깨일 듯한 싸늘함으로 불어댔다. 선명한 물소리와 온 하늘 가득한 별 속에서 짧은 키스를 나누고, 즐거웠던 겨울 방학을 생각하면서 둘은 웃으며 헤어졌다. 밤 속으로 딸랑딸랑 방울 소리가 멀어져 갔다. 나도 히토시도 자상했다. 우리는 심한 싸움도 했고, 잠시 바람을 피우기도 하였다. 욕망과 사랑의 균형에 괴로워한 적도 있다, 너무 어려서 서로에서 상처를 입힌 일도 더러 있었다. 그러니까 늘 그렇게 행복했던 것은 아니다. 품이 많이 든 세월이었다. 그래도 4년이다. 그 중에서도 그 날은 끝나는게 두려울 정도로 완벽한 하루였다. 겨울의 아름답고 투명한 대기 속, 모든 것이 너무도 아름답고 부드러운 하루의 여운처럼, 돌아본 히토시의 검은 재킷이 어둠에 녹아드는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이 장면은 울면서 몇 번이나 되새긴 장면이다. 아니 생각날 때마다 눈물이 나왔다. 다리를 건너 쫓아가서, 가면 안된다고 데리고 돌아오는 꿈을 몇 번이나, 몇 번이나 꾸었다. 꿈속에서 히토시는, 네가 못가게 말린 덕분에 죽지 않았어, 라며 웃었다. 한낮에 이렇게 문득 떠올리면서도, 울지 않을 수 있게 된 것이 왠지 서글프다. 한없이 먼 그가, 점점 더 멀리로 가버리는 것만 같다.
그래도 혼자 걸어가는 그에게 말을 걸기가 왠지 미안한 기분이었다. 타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몹시 지쳐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똑바로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다. 추억이 추억으로 보이는 곳으로 하루라도 빨리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달려도 그 길은 멀고, 앞길을 생각하면 오싹 소름이 끼칠정도로 외로웠다.
"지금이 가장 힘들 때에요. 죽는 것보다 더 힘들지도 모르죠. 하지만 아마 더 이상은 힘들지 않을 거에요. 그 사람의 한계는 변하지 않으니까. 언젠가 또 감기 걸려서, 지금처럼 아플 일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본인만 건강하면 평생, 없을 거예요. 그래, 그렇게 되어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지겨워서 넌더리가 날 수도 있겠지만, 이까짓쯤하고 생각하면 덜 힘들지 않을까?"
나는 행복해지고 싶다. 오랜 시간, 강바닥을 헤매는 고통보다는, 손에 쥔 한줌 사금에 마음을 빼앗긴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지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히토시. 나는 이제 이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 시시각각 걸음을 서두른다. 시간의 흐름은 막을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다. 나는 갑니다. 한 차례 여행이 끝나고, 또 다른 여행이 시작된다. 다시 만나는 사람이 있고, 만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나도 모르게 사라지는 사람, 스쳐 지나가는 사람. 나는 인사를 나두며 점점 투명해지는 듯한 기분입니다.
흐르는 강을 바라보면서, 살지 않으면 안됩니다. 저 어린 시절의 흔적만이, 항상 당신 곁에 있기를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손을 흔들어주어서, 고마워요. 몇 번이나, 몇 번이나, 흔들어준 손,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