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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몇 살이 되면 잠자는 얼굴도 어른이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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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명은 아니지만, 그건 분명 고열 탓이었다. 아직 완전히 열이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영어사전을 들췄을 리 없다.
더구나 '의붓아버지'라는 단어를 찾아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먼저 'fater-in-law'라는 단어가 나왔다. 법률 따윈 재수없다. 그 아래 'stepfather'가 있었고, '(계부)'라고 적혀 있다. 스텝파더. 왠지 춤만 추고 아무 도움이 안 되는 아버지 같잖아. 하지만 '계부繼父'란 '잇는 아버지'라는 의미지.…….
역시 열이 있었던 거다. 단연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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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가 완전히 이구치 씨가 된다는 건 가족과 친구를 버린다는 뜻이잖아. 용케도 그런 결심을 했네."
입을 다물고 있는 동안 사토시가 대신 대답해 주었다.
"정말 갖고 싶은 게 있다면 그런 거, 간단히 버릴 수 있는 거야, 아마도."
쌍둥이는 살짝 시선을 맞추고는 쓸쓸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건 아주 소중한 뭔가가 빠져 있는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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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삽십오년을 살고서야 겨우 깨달았다. '여자가 무서워', 그 따위 말을 하는 자는 아직 수행이 부족한 것이다.
진짜 무서운 건 오로지 하나.
자식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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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은 진짜 부모를 '엄마, 아빠'라고 부르고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는구나.
왜 나를 '아버지'라 부르는 걸까?
의외로 깊은 뜻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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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에 걸리는 위험한 일을 생업으로 하다보면, ‘귀를 의심하다’,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게 되다’ 같은 관용어에는 도저히 고개를 끄덕일 수 없게 된다. 범죄라는 외줄타기를 할 때 의지할 것이라고는 오로지 자신의 오감밖에 없다. 그러나 이 건에 관한 한 내 귀의 감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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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버지가 팩스 조작법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도 내심 놀랐고, 사무실 한구석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 쓰레기처럼 버려져 있던 그 기계의 정체가 팩스였다는 사실에도 몹시 놀랐다. 그리고 그 팩스가 정확히 작동했다는 사실에는 크게 감동하고 말았다. 전화국은 그 사무실에 팩스가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을까, 하는 쓸데없는 걱정을 했을 정도다. 아버지라면 무허가 회선을 사용할 가능성도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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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없어도 아이들은 자라지만, 아이가 없으면 부모는 자라지 않아. 넌 훌륭히 성장하고 있는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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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문학작품이나 소설, 이야기는 생각하거나 설명하려고 음미하는 것이 아니다. 우선 즐기고 그 다음에 해석, 그것도 자유로운 해석이야말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내가 학교에 다닐 무렵의 교과서에도 '설명하시오', '생각하시오'라고 되어 있었다. 요즘 교과서는 좀 간사해져서, '함께 생각해보자'고 한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마지막에 '시험'이 기다리고 있으니 출구는 하나, 결과는 마찬가지다. 자유롭게 해석하고 자유롭게 감동해서는 안 된다. 아이들은 모두 시험에서 동그라미를 받을 만한 대답을 찾는다. 그리고 당연히 책 읽기가 싫어진다. 그런 의미에서는 어설프게 친절한 '생각해보자'라는 제안 투의 교과서가 훨씬 더 죄가 많은지도 모른다. 이런 걸 교육망국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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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한 번 보고는 넌덜머리가 났다. 얘기를 듣고 있자니 구역질이 나려고 했다. 윤리관이 어떻고, 정의감이 어떻고, 규율 바른 학교생활이 어떻고 떠들어대지만 그건 사람을 차별하고 구별해내려는 엉터리 사상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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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우유 같은 전직 변호사야.”
“무슨 뜻”
“썩어도 도움이 된다는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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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렇게 열세 살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어버린 나는 절절이 생각해본다. 인생이란 결코 드라마틱한 연애나 격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 인생은, 기한이 지나지 않은 건강보험증이나 주택융자금 상환이 이달에 무사히 지불되었다는 은행의 통지서 같은 사소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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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럽게 열세 살 난 아이의 아버지가 되고 나서 나는 문득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여자는 남자가 될 수 없고, 남자는 여자가 될 수 없다. 그래서 남자는 여자에게, 여자는 남자에게 때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잔혹한 짓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남자도 여자도, 누구든 반드시 한 번은 어린애였던 시절이 있으므로, 절대로 어린애에게는 잔혹한 행동을 할 수 없다. 만일 전생이란 것이 정말로 있고, 예를 들어 당신이 그곳에서 새였다면, 당신은 새를 쏘거나 새를 새장에 가두어둘 수 없을 것이다. 그와 같은 것이다.
쌍둥이에게 상처를 주면, 내 과거 속 어린이 시절이 동시에 상처를 입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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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자신이 버린 것으로부터 버림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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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라고 부르지 마. 너무 친해지면 안 돼. 우린 순수한 계약관계이고 거기에 맞춰 행동할 뿐이야. 알겠니? 계약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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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외로운 인간끼리의 관계를 중시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일이 아닌가
"아버지,"
"지금,"
"알았는데,"
"감기란,"
"빨리 안 나아."
"걱정하게 만들려고,"
"오래 끄는 게 아닐까?"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코감기에 걸리는 것도 즐겁다.
그래, 그런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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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인생 공부를 했다고 투덜거리며 밤길을 걸었다. 교훈. 어린아이가 뚫은 구멍은 술로도 여자로도 메울 수 없다. 어디에 뚫린 구멍? 심장에.
미련
내겐 인연이 없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하물며 어린애에게 그런 어린애들에게 미련을 갖다니. 여태 꿈도 꾸어본적이 없다/
미련. 장마철의 습기 찬 공기처럼 축축하게 젖어 끈적끈적한 감정이, 딱딱하게 굳어버린 바륨처럼 내 위장 속에 틀어 앉아있다. 그 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어오르면 위장 속의 그 덩어리가 '미련미련미련' 하고 노래라도 부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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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언제일까?
그건 아무도 모른다. 내일 일을 미리 걱정하지 말라고 하지 않던가.
하늘을 흐르는 강이 어디서 끝나는지 누가 알까. 운명도 미래의 일도 그와 같은 것이다. 가야 할 곳으로 갈 따름이다. 그러니 그때까지는 흘러가면서 즐겁게 살자.
그것으로 우리는 충분히 행복하니까.
소노 사토시 (S)
그리고 아버지
한마디 정도는 해야겠다
너무 재밌는거야
시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