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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주 이루카 호텔의 꿈을 꾼다.
꿈속에서 나는 거기에 포함되어 있다. 즉 일종의 계속되는 상황으로 나는 그 호텔 안에 포함되어 있다. 꿈은 분명 그러한 계속성을 제시하고 있다. 꿈속에서의 이루카 호텔의 모습은 일그러져 있다. 아주 길쭉한 것이다. 어찌나 길쭉한지 그것은 호텔이라기보단 지붕이 있는 긴 다리처럼 보인다. 그 다리는 태고로부터 우주의 종국에 이르기까지 길쭉하게 뻗어있다. 그리고 나는 거기에 포함돼 있다. 거기에선 누군가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나를 위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호텔 그 자체가 나를 포함하고 있다. 나는 그 고동 소리나 온기를 또렷이 느낄 수가 있다. 나는 꿈속에선 그 호텔의 일부이다.
그런 꿈이다.
잠을 깬다. 여기가 어디지? 하고 나는 생각한다. 생각할 뿐 아니라 실제로 입밖에 내어 나 자신에게 그렇게 묻는다.
「여기가 어디지?」하고. 하지만 그건 무의미한 물음이다. 물을 것까지도 없이 대답은 처음부터 알고 있다. 여기는 나의 인생이기 때문이다. 나의 생활, 나라고 하는 현실 존재의 부속물, 특별히 인정한 기억이 없는데도 어느 틈엔가 나의 속성으로서 존재하게 된 몇 가지의 사항, 사물, 상황, 옆에서 여자가 잠자고 있는 수도 있다. 하지만 대개는 나 혼자다. 방 바로 맞은편을 달리는 고속도로의 진동 소리와 베갯머리의 유리잔(바닥엔 5밀리미터쯤 위스키가 남아있다)과 적의를 품은 ㅡ아니, 그건 단순한 무관심인지도 모르지만ㅡ 티끌투성이의 아침 햇살, 때론 비가 내리고 있다. 잔에 위스키가 남아있으면 그걸 마신다. 그리고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면서 이루카 호텔의 일을 생각한다.
팔다리를 천천히 뻗어본다. 그리곤 자신이 그저 자신일 뿐이며 어디에도 포함되어 있지는 않다는 것을 확인한다. 나는 어디에도 포함돼 있지는 않다. 하지만 꿈속의 감촉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거기에선 내가 손을 뻗치려고 하면 거기에 호응해서 나를 포함한 전체상이 움직인다.
물을 이용한 자잘한 구조를 갖춘 장치처럼 하나씩 하나씩 서서히 주의깊게 한단계 한단계 아주 희미한 소리를 내면서 그것은 차례차례 반응해 간다. 내가 귀를 기울이면 그것이 진행해 가는 방향을 들을 수가 있다.
나는 귀를 기울인다. 그리곤 누군가의 조용한 흐느낌 소리를 듣는다. 아주 조용한 소리, 어둠 속 깊숙한 어딘가로부터 들려오는 흐느낌. 누군가가 나 때문에 울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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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사나이'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을. 나로서도 이제는 알겠다. 그녀의 목적은 나를 거기로 인도하는 데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운명과 같은 것이었다. 마치 몰로다브 강이 바다로 이르는 것 같이. 나는 처마의 빗방울을 보면서 그 일을 생각한다. 운명.
내가 이루카 호텔의 꿈을 꾸게끔 되었을 때에 우선 떠올린 것은 그녀에 대해서였다. 그녀가 다시 나를 요구하고 있다. 하고 나는 문득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선 왜 이렇게 몇번이고 꿈을 꾸는 건가? 그녀, 나는 그녀의 이름조차 모르는 것이다. 그녀와 함께 몇달 동안인가 살았는데도 나는 그녀에 대해서 실질적으론 무엇 하나 알지를 못하는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건 그녀가 어느 고급 콜걸 클럽에 들어가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클럽은 회원제로 신원이 확실한 제대로 규격에 맞는 고객밖엔 상대하지 않았다. 최고급의 창녀다.
그녀에겐 물론 이름이 없는 건 아니었다. 사실 말이지, 그녀는 몇 개나 이름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녀에겐 이름이 없었다.
그녀의 소지품 ㅡ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 없었지만ㅡ의 어느 것에도 이름은 들어 있지 않았다. 정기권도 면허증도 그레디트 카드도 갖고 있지 않았다. 조그만 수첩을 하나 갖고 있었지만. 거기에는 영문 모를 암호가 볼펜으로 지저분하게 적혀져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존재에는 시작할 만한 것이 없었다. 창부는 이름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들은 이름을 갖지 않는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어떻든 나는 그녀에 대해선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어디서 태어났는지도, 나이가 몇 살인지도, 생일조차 알지 못한다. 학력도 알지 못한다. 가족이 있는지 어떤지조차 알지 못한다.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녀는 비처럼 어디선가 와서는 어디론가로 사라지고 만 것이다.
다만 기억만을 남겨 놓고,
하지만 지금 나는 나의 주위에서 그녀의 기억이 또다시 어떤 종류의 현실성을 띠기 시작하고 있는 것을 느낀다. 나는 이렇게 느끼는 것이다. 그녀는 이루카 호텔이라는 상황을 통해서 나를 부르고 있다, 라고, 그렇다, 그녀는 이제 또다시 나를 찾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루카 호텔에 다시 한번 포함되는 것으로써만 그녀와 다시 한번 해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녀는 거기서 나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낙수물을 쳐다보면서 자신이 무엇엔가에 포함된다는 일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그리고 누군가가 나 때문에 울고 있는 일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그것은 몹시 먼 세계의 일인 것처럼 느껴진다. 결국 그건 꿈인 것이다. 손을 제아무리 길게 내뻗어도, 제아무리 빨리 달린다 해도, 나는 거기에 당도할 수 없을 것만 같다.
'어째서 누군가가 나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가?'
아니지, 그래도, 그녀는 나를 찾고 있는 것이다. 저 이루카 호텔의 어딘가에서, 그리고 나도 역시 마음의 어느 구석에선가 그것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 장소에 포함될 것을, 그 기묘하고도 치명적인 장소에 포함될 것을.
하지만 이루카 호텔로 돌아가는 건 간단한 일이 아니다. 전화로 방을 예약하고, 비행기를 타고 삿포로에 가면 그걸로 끝날 일은 아닌 것이다. 그것은 호텔인 동시에 하나의 상황인 것이다. 그것은 호텔이라는 형태를 취한 상황인 것이다. 이루카 호텔로 돌아간다는 것은, 과거의 그림자와 다시 한 번 상대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나는 견딜 수 없이 우울한 상념에 사로잡혔다. 그렇다, 나는 이 4년 동안, 그 냉랭하고 어둑시근한 그림자를 없애버리는 일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루카 호텔로 돌아간다는 것은 내가 이 4년 동안 조용히 부지런히 모아온 모두를 송두리째 포기하고 없애버리려고 하는 일인 것이다. 물론 나는 그다지 대수로운 것을 손에 넣은 것은 아니다. 그 것의 대부분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잠정적이고 편의적인 잡동사니였다. 하지만 나는 내 나름으로 최선을 다했으며, 그 같은 잡동사니를 제법 그럴싸하게 짝을 맞춰 가지고 현실과 자신을 연결하고, 내 나름의 조촐한 가치관에 기초한 새로운 생활을 쌓아 온 것이다. 다시 한 번 전의 텅 빈 자리로 되돌아 가라는 것인가? 창문을 열고 모든 것을 내동댕이치라는 것인가?
하지만 결국은, 모든 것은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나로선 그것을 알고 있었다. 거기서부터밖엔 시작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침대에 나뒹굴고 천장을 바라보면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단념하자, 하고 나는 생각했다, 단념하자, 무슨 생각을 하건 소용 없다. 그것은 너의 힘을 넘어선 것이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건, 거기서부터밖엔 시작되지 않는 거다. 그러게 마련이다. 이미.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자기 소개.
옛날, 학교에서 자주 했다. 학급이 새로 편성되었을 때, 순번으로 교실 앞쪽에 나가서, 여럿 앞에서 자신에 관해 여러 가지를 지껄인다. 나는 그것이 참으로 질색이었다. 아니, 질색일 뿐만도 아니었다. 나는 그러한 행위 속에서 아무런 의미도 찾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내가 내 자신에 대해 도대체 무엇을 알고 있을까? 내가 내 의식을 통해서 파악하고 있는 나는 진정한 의미의 나일까? 바로 테이프레코드에 취입한 소리가 자신의 소리로 들리지 않는 것처럼, 내가 파악하는 나 자신의 상은, 왜곡되게 인식되어 적당하게 변형되어 만들어진 상은 아닐까? ..... 나는 언제나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자기소개를 할 때마다, 남들 앞에서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될 때마다, 나는 마치 성적표를 멋대로 고쳐 쓰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되었다.
언제나 불안해서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그럴 때, 나는 되도록 해석이나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는 객관적인 사실만을 이야기하도록 마음을 썼지만 (나는 개를 기르고 있습니다. 수영을 좋아합니다. 싫어하는 음식물은 치즈입니다. 등등 ), 그래도 어쩐지 가공의 인간에 대한 가공의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곤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기분으로 다른 여럿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그들도 역시 그들 자신과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나에겐 느껴졌다. 우리들은 모두가 가공의 세계에서 가공의 공기를 마시고 살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튼, 무엇인가 지껄이기로 하자. 자신에 관해 무엇인가 지껄이는 데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된다. 그것이 우선 제1보인 것이다. 올바른 것인지 올바르지 못한 것인지는 나중에 다시 판단하면 된다. 나 자신이 판단해도 되고 다른 누군가가 판단해도 된다. 어떻든간에, 지금은 이야기해야 할 때인 것이다. 그리하여 나도 이야기하는 것을 익히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이제는 치즈를 좋아한다. 언제부터인지는 알지 못하나, 어느 틈엔가 자연히 좋아하게 되었다. 기르고 있던 개는 내가 중학교로 진학한 해에 비를 맞고 폐렴으로 죽었다. 그 후로 개는 한 마리도 기르지 않고 있다. 헤엄치는 일은 지금도 좋아한다.
끝,
하지만 세상사는 그렇게 간단하게는 끝나지 않는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인생에서 찾으려 할 때 (찾지 않는 인간이 있을까?) 인생은 좀더 많은 데이터를 그에게 요구한다. 명확한 도형을 그리기 위한, 보다 많은 점이 요구된다. 그렇게 하지 않고선, 아무런 회답도 절대 나오지 않는 것이다.
데이터 부족으로 회답 불가능, 취소 키를 눌러 주시오.
취소 키를 누른다. 화면이 흐려진다. 교실 안의 인간들이 나에게 물건들을 던지기 시작한다. 좀더 지껄여라. 좀더 자기 이야기를 지껄여라. 하고, 교사는 눈썹을 찌푸리고 있다. 나는 할 말을 잃고, 교단 위에 우두커니 서 있다.
지껄이자, 그러지 않고선,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그것도 되도록 길게, 올바른 것인지 올바르지 못한 것인지는 나중에 다시 생각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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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좋아」하고 그녀는 말한다.
나는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하지만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나는 그녀에게 호의를 품고 있다. 이렇게 둘이서 침대 속에 있으면 아주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가 있다. 나는 그녀의 몸을 녹여주거나 머리칼을 조용히 어루만지거나 하는게 좋은 것이다. 그녀의 작은 잠결의 숨소리를 듣거나 아침이 되어 그녀를 회사로 보내거나 그녀가 계산한 ㅡ그렇게 내가 믿고 있는ㅡ 전화요금 청구서를 받아들거나 커다란 내 파자마를 그녀가 걸치고 있는 걸 보거나 하는 것이 좋은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이란 막상 말하려고 들면 한마디로 잘 표현되지 않는다. 사랑하고 있다는 건 물론 아니고 좋아한다는 것도 아니다.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하지만 어떻든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말이라는게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으로써 그녀가 상심하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된다. 그녀는 그걸 내가 느끼지 못하도록 하고 있지만 그래도 나에겐 느껴진다. 부드러운 피부 위로부터 그녀의 등뼈의 형상을 더듬으면서 나는 그걸 느끼는 것이다, 매우 선명하게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서로 껴안은 채 제목도 알지 못하는 노래를 듣고 있다. 그녀는 내 아랫배에다 살며시 손바닥을 갖다 댄다.
「달세계의 여인과 결혼해서 훌륭한 달세계인의 아이를 가져와」하고 그녀는 상냥하게 말한다. 「그게 제일이예요」
나는 색다른 인간은 아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평균적인 인간이라곤 할 수 없을지 모르나, 그러나 색다른 인간도 아니다. 나는 내 나름대로 지극히 성실한 인간인 것이다. 매우 직선적이다. 화살처럼 직선적이다. 나는 나로서 극히 필연적으로, 극히 자연스럽게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이제 자명한 사실이어서, 타인이 나라는 존재를 어떻게 파악했다 하더라도 나는 그렇게 신경을 쓰지는 않는다.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본다 하더라도, 그것은 나에게 전혀 관계없는 문제였다. 그것은 '나의 문제' 라기보다는 차라리 '그들의 문제' 인 것이다.
어떤종류의 인간은 나를 실제 이상으로 우둔하다고 생각하며, 어떤 종류의 인간은 나를 실제 이상으로 계산이 빠르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이 아무려면 어떤가. 게다가 「실제 이상으로」라는 표현을, 내가 파악한 나 자신의 상에 비해서 그렇다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의 나는 어쩌면 현실적으로 우둔하며, 어쩌면 계산이 빠르다. 그것은 뭐 어느 쪽이건 좋다. 대수로운 문제가 아니다. 세상에는 오해라는 것은 없다. 사고방식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것이 내 생각이다.
그러나 그것과는 따로, 그 한편에서, 내 안의 그 '성실함'에 끌리는 인간이 있다. 아주 수료가 적기는 하지만, 그래도 확실히 존재한다. 그들 그녀들과 나는 마치 우주의 어두운 공간에 뜨는 두 개의 유성처럼 극히 자연스레 연결되고, 그리고 떨어져 간다. 그들은 내게로 와서 나와 관계하고, 그리고 어느 날 가버린다. 그들은 내 친구가 되고, 연인이 되고, 아내도 된다. 어떤 경우엔 대립하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떻든 간에, 다들 내 곁에서 사라져 간다. 그들은 체념하고, 혹은 절망하고, 혹은 침묵하고(수도 꼭지를 비틀어도 이젠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사라져 간다. 내방에는 두개의 문이 달려 있는데 하나가 입구이고 하나가 출구다. 호환성은 없다. 입구로는 나갈 수가 없고, 출구로는 들어올 수가 없다. 그건 뻔한 일이다. 사람들은 입구로 들어와 출구로 나간다. 어느 누구는 새로운 가능성을 시도하기 위해 나갔으며, 어느 누구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나갔다. 어느 누구는 죽었다. 남은 인간은 한 사람도 없다. 방안에는 아무도 없다. 내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부재를 언제나 인식하고 있다. 사라져 간 사람들을. 그들이 입에 담은 말들이랑, 그들의 숨소리랑, 그들이 읊조린 노래가 방의 이 구석 저 구석에 티끌처럼 떠돌고 있는 게 보인다.
그들이 본 나의 상은 아마도 꽤 정확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나 있는 데로 곧장 찾아와서는, 그리곤 얼마 후 사라져 갔던 것이다. 그들은 내 안의 성실함을 인정하고, 내가 그 성실함을 유지해 가려고 하는 내 나름의 성실성ㅡ이밖의 표현을 생각해낼 수 없는 것이다ㅡ을 인정했다. 그들은 나에 대해 무슨말을 하려고도 했으며, 마음을 열려고도 했다. 그들은 대부분 마음 착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주지는 못했다. 가령 줄 수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나는 언제나 그들에게 가능한 한 많은 것을 주려고 노력했다. 가능한 것은 전부 했다. 나도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려고 했다. 하지만 결국은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사라져 갔다.
그것은 물론 괴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더욱 괴로운 일은, 그들이 들어왔을 때보다 훨씬 더 서글프게 방을 나가는 일이었다. 그들이 몸 안의 무엇인가를 한 단계 마멸시켜 가지고 나가는 일이었다. 나로선 그것을 알 수 있었다. 묘한 이야기지만, 나보다는 그들 쪽이 더 많이 마멸시킨 것처럼 보였다. 어째서 그럴까? 어째서 언제나 내가 남게 되는 것인가? 그리고 어째서 언제나 내 수중엔 마멸한 누군가의 그림자가 남아 있는 것인가? 어째서 그럴까? 알 수 없다.
데이터가 부족한 것이다.
그래서 언제나 해답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무엇인가 결여돼 있는 것이다.
어느날 업무회의를 하고 돌아와 보니, 우편함에 그림 엽서가 들어 있었다. 우주 비행사가 우주복을 입고 달의 표면을 걷고 있는 사진의 그림 엽서였다. 보낸 사람의 이름은 써있지 않았지만, 그것이 누구로부터 온 엽서인지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이제 우리는 더 만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하고 그녀는 적고 있었다. 「저는 아마 가까운 장래에 지구인과 결혼하게 될 것 같으니까요」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데이터 부족으로 회답 불가능. 취소 키를 눌러 주시오,
화면이 흐려진다.
언제까지 이런 일이 계속 되는 것일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이제 서른네 살이다. 언제까지 이것이 계속될 것인가?
나는 서글프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나의 책임인 것이다. 그녀가 내 곁을 떠나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그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로서도 알고 있었고, 나로서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들은 조그마한 기적을 찾고도 있었던 것이다. 하챦은 계기로해서 근본적인 전환이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그러한 것을. 그러나 물론 그러한 것은 찾아오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나가버렸다. 그녀가 없게 되어 나는 쓸쓸한 심정이 되었지만, 그것은 전에도 경험한 적이 있는 쓸쓸함이었다. 그리고 나 자신이 그 쓸쓸함을 제법 잘 견디어낼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나는 길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나는 혐오를 느끼게 되었다. 내장으로부터 검은 액체가 듬뿍 짜내어져 목구멍까지 치밀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나는 세면실 거울 앞에서 서서, 이게 나 자신이다, 하고 생각했다. 이게 너다. 네가 너 자신을 마멸시켜 온 것이다.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더 많이 너는 마멸된 것이다, 하고,
내 얼굴은 여느때보다 훨씬 더 지저분하고, 훨씬 더 나이 들어 보였다. 나는 비누로 천천히 얼굴을 씻고, 로션을 피부에 문지르고, 그 다음에 다시 손을 천천히 씻고, 새 타월로 손과 얼굴을 말끔히 닦았다. 그리고 부엌으로 가서 캔맥주를 마시면서 냉장고 정리를 했다. 시들어 빠진 토마토를 버리고, 맥주병들을 가지런히 해놓고, 용기들을 바꾸어 놓고, 사올 물건의 리스트를 만들었다.
새벽녘에 나는 혼자서 멍청하니 달을 바라보면서, 이것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하고 생각했다. 나는 이윽고 또 어디선가 다른 여자와 해후하게 될 게다. 우리들은 유성처럼 자연스레 연관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다시 헛되이 기적을 기대하며, 시간을 갉아먹으며, 마음을 마멸시키며, 헤어져 가는 것이다.
그것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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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로부터 달표면의 그림엽서가 온 1주일 뒤에 나는 일 때문에 하코다테로 가게 되었다. 여느 때처럼 별로 매력이랄 수는 없는 일이었지만 나는 일의 좋고 싫고를 선택할 만한 처지는 아니었다. 뿐더러 도대체가 나에게 돌아오는 어느 일을 놓고 보아도 거기엔 좋고 싫고를 가릴 만한 차이는 없는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일반적으로 사물이란 것은 가장자리로 가면 갈수록 그 질의 차이가 눈에 띄지 않게 된다. 주파수와 마찬가지다. 어느 한계점을 넘어버리면 인접하는 두 음향의 어느 쪽이 높은가 하는 따위는 거의 분간해 낼 수 없으며 이윽고 분간은커녕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되고 만다.
1979년의 1월부터 6월까지 나는 한권의 책도 읽지 않았다. 신문조차 펼치지 않았다. 음악도 듣지 않았다. TV도 보지 않았으며 라디오도 듣지 않았다. 누구와도 만나지 않았으며, 누구와도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술도 거의 마시지 않았다. 술도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세상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누가 유명해졌으며 누가 죽었는지, 나는 무엇 하나 알지를 못했다. 일체의 정보를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특별히 알고 싶다고도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계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나로서도 느낄 수 있었다. 방 안에 꼼짝않고 있어도 나는 그 움직임을 피부로 느낄 수는 있었다. 하지만 나는 거기에 대해 아무런 흥미도 가질 수 없었다. 모든 것은 미풍처럼 나의 주위를 스쳐 지나갔다.
나는 다만 방바닥에 앉아서 머리 속에 과거를 재현해 대고만 있었다. 이상한 이야기지만 반년 동안 그것을 매일매일 계속해도 나는 권태나 따분함이라는 것을 통 느끼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체험한 그 사건은 너무나도 거대했으며 너무나도 많은 단면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대하고 그리고 사실적이었다. 손을 댈 수 없을 만큼. 그것은 마치 밤의 어둠 속에 솟구쳐 선 모뉴멘트와도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 모뉴멘트는 나 한 사람을 위해 솟구쳐 있었던 것이다.
나는 모든 것을 빠짐없이 검증했다. 나는 그 사건을 통과한 일로 해서 물론 그 나름의 피해를 입고는 있었다. 많은 피가 소리도 없이 흘렀다, 얼마간의 아픔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졌지만, 얼마간의 아픔은 뒤에야 찾아왔다.
그러나 반 년 동안 꼼짝 않고 그 방 안에 계속 틀어박혀 있었던 것은 그 상처 때문은 아니었다. 나는 다만 시간을 필요로 하고 있었을 뿐인 것이다, 그사건에 관련된 모든 것을 구체적으로 ㅡ실제적으로ㅡ 정리하고 검증하는 데에 반 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결코 자페적이 되거나 외적 세계를 완강하게 거부하거나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단순히 그것은 시간적인 문제였다. 다시 한번 자신을 제대로 회복하고 재정비하기 위한 순수한 물리적인 시간이 나에겐 필요했던 것이다.
자신을 재정비한다는 의미와 그 다음의 방향성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기로 했다. 그것은 또 다른 문제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거기에 대해선 다시 다음에 생각하면 된다. 우선 첫째로 평형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나는 고양이하고 조차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런 상태로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금전 면에서의 문제는 없었다. 그런대로 한 반 년 살아갈 수 있을 만큼의 비축은 있었고, 그 다음의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될 일이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봄은 나의 방을 따스하고 평화로운 빛으로 충만하게 했다. 창문으로 들이비치는 햇살이 그리는 빛의 무늬를 매일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태양의 각도가 조금씩 변화해 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봄은 또 내 마음을 갖가지 옛 추억으로 충만하게 했다. 사라져 간 사람들, 죽어버린 사람들.
나는 쌍둥이들에 대한 회상을 했다. 나는 그녀들과 셋이서 얼마동안 지냈었다. 1973년의 일이었다, 분명. 그 무렵 나는 골프장 안에 들어가, 목표도 없이 거닐고, 골퍼들이 잃어버린 볼들을 줍곤 햇다. 봄날의 해질녘은 나에게 그런 정경을 회상하게 했다. 모두 어디로 가버린 것인가?
입구와 출구.
죽어버린 친구와 둘이서 다니던 조그마한 스넥 바 일도 생각났다. 우리는 거기서 하염없이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그것이 이제껏 인생에서 가장 실체가 있는 시간이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묘한 일이다. 거기서 틀어줬던 옛 음악도 생각났다. 우리는 대학생이었다. 우리는 거기서 맥주를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 우리는 그런 장소를 필요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그저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고 밖엔 생각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이제 죽어버렸다.
온갖 것을 끌어안고 그는 죽어갔다.
입구과 출구,
봄은 점점 깊어만 갔다. 바람의 냄새가 달라져 갔다. 밤의 어둠의 색깔도 변화했다. 소리도 다른 울림을 띠게 되었다. 그리하여 계절은 초여름으로 바뀌었다.
아무것도 달라지진 않았다. 언제든 언제든 언제든, 사물의 존재 양식은 같은 것이다. 다만 연호가 바뀌고, 사람이 바뀌어 들어섰을 뿐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없는, 쓰고 버릴 음악은 어느 시대에건 존재 했고, 이제부터 앞날에도 존재하는 것이다. 달이 차고 이지러지는 것처럼.
나는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면서 꽤 긴 시간을 차를 몰았다. 도중에서 롤링 스톤즈의 <브라운 슈거>가 나왔다. 나는 무심코 미소를 지었다. 멋진 곡이었다. 제법인데, 하고 나는 생각했다. 한참을 생각해 보았지만 정확하게는 생각나지 않았다. 하지만 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1971년이건 1972년이건 이제 와선 어는 쪽이건 상관없는 일인 것이다. 왜 그런 일을 일일이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일까?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뿐이었다.
로드 스튜어트와 가일즈 밴드가 나왔다. 그 다음에 아나운서가 여기서 올디즈를 한 곡, 하고 말했다. 레이 찰즈의 <본 투루즈>였다. 그건 구슬픈 곡이었다.「난생 줄곧 잃어버리기만 했어」하고 레이 찰즈가 노래하고 있었다. 「그리고 난 지금 그대를 잃어버리려고 해.」그 노래를 듣고 있자니까, 나는 진정 슬퍼졌다. 나는 진정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때때로 그런 일이 있다. 무엇인가 하챦은 일에 내 마음의 가장 연한 부분이 건드려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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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치우는 작업이나 다름 없었다.
눈이 내리면 나는 그것을 효율성 있게 길 옆으로 치웠다.
한 조각의 양심도 없었고 한조각의 희망도 없었다. 오는 물건을 닥치는 대로 거침 없이 체계적으로 처리해 나갈 따름이었다. 정직하게 말해서 이건 인생의 낭비가 아니냐고 생각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종이와 잉크가 이만큼 낭비되고 있으니 내 인생이 낭비되었다 해도 군소리를 할 것은 아니지 않느냐, 하는 것이 내가 도달한 결론이었다.
우리는 고도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선 낭비가 최대의 미덕인 것이다. 정치가는 그것을 내수의 세련화라고 부른다. 나는 그것을 무의미한 낭비라고 부른다. 사고방식의 차이다. 하지만 비록 사고방식의 차이가 있다 해도 그것이 어떻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인 것이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방글라데시나 수단에 가는 수밖에 없다.
나는 따로 방글라데시에도 수단에도 흥미를 가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묵묵히 일을 계속했다.
사회복귀.
나는 내가 어떤 여자아이와 동침하면 좋은가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누구와 동침할 수 있으며 누구와 동침할 수 없는가도 알고 있었다. 누구와 동침해선 안 되는지도, 나이가 들면 그런 것을 자연히 알게 되는 법이다. 그리고 어디가 끝낼 때인지도 알고 있었다. 그런 것은 아주 자연스럽고 쉬운 일이었다. 아무도 상처받게 하지 않았고, 내쪽도 상처 받지 않았다. 저 조여매는 듯한 마음의 떨림이 없을 뿐이었다.
우리는 말다툼도 한번 하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가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은 끝나고 만 것이다.
그녀가 사라져 갔다는 것은, 내속에 예상 이상의 상실감을 가져왔다. 얼마 동안은 나 자신이 견딜 수 없이 공허하게 느껴졌다. 나는 결국 어디에도 가지 않는다. 모두가 차례차례 사라져가고 나만이 연장된 유예기간 속에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었다. 현실이면서도 현실이 아닌 인생.
하지만 그것이 내가 공허함을 느낀 가장 큰 이유는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내가 마음 밑바닥으로부터는 그녀를 요구하고 있지 않다는 그것이었다. 나는 그녀를 좋아했다. 그녀와 함께 있는 것이 좋았다. 그녀와 둘이 있으면 나는 쾌적한 시간을 보낼 수가 있었다. 온순한 기분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은 나는 그녀를 요구하고는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가 사라지고 난 뒤 나는 그 사실을 명백히 인식했다. 그렇지 결국은 그녀의 옆에 있으면서도 나는 달 위에 있었던 것이다. 옆구리에 그녀의 젖무덤의 감촉을 느끼면서도 내가 진심으로 구하고 있었던 것은 좀더 다른 그 무엇이었던 것이다.
서른넷이 되어 나는 다시금 출발점에 되돌아온 셈이다. 그런데 이제부터 어떻게 하면 좋을까? 먼저 무엇을 하면 좋은가?
생각할 것까지도 없었다.무엇을 하면 좋은가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결론은 훨씬 전부터 딱딱한 구름처럼 내 머리 위에 빠끔하게 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다만 실천으로 옮길 결심을 할 수가 없어서 하루 또 하루하루 미루고 있었을 뿐인 것이다. 이루카 호텔로 가는 것이다. 그것이 출발점인 것이다.
그리고 나는 거기서 그녀를 만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를 이루카 호텔로 이끈 그 고급 창녀 여자아이를. 왜냐하면 키키는 지금 내게 그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독자에게 그녀는 이름을 필요로 하고 있다. 비록 그것이 임시 변통의 이름이었다 해도 그렇다. 그녀의 이름은 키키라고 한다. 나는 그 이름을 뒤에 가서 알게 된다. 그 사정은 뒤에 가서 자세히 쓰겠지만 나는 이 단계에서 그녀에게 그 이름을 부여키로 한다. 그녀는 키키인 것이다. 적어도 어떤 기묘한 좁은 세계 속에서 그녀는 그런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었다. 그리고 키키가 출발점의 키를 쥐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녀를 다시 한번 이 방으로 불러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한번 나가버린 자는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는 이 방으로 그런 일이 가능한지 어떤지 나로서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어떻든 해보는 수밖엔 없는 것이다. 거기서부터 새로운 사이클이 시작되는 것이다.
:::
모든것은 그저 때늦은 꿈이었던 것이다. 나는 헐리어서 소멸해버린 이루카 호텔의 꿈을 꾸고, 출구로 나가 사라져버린 키키의 꿈을 꾸고 있었을 뿐이다. 분명 거기에선 누군가가 나를 위해 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젠 그것도 끝장나고 말았다. 이미 이 장소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는 않다. 이 이상 여기에서 너는 무엇을 구하려는 것인가?
그렇군, 하고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밖으로 그렇게 혼잣말을 했는지도 모른다. 확실히 그렇다. 여기엔 이젠 아무것도 남아 있지는 않다. 여기엔 내가 구할 아무것도 없다.
나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한동안 물끄러미 카운터 위의 간장병 주둥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랫동안 혼자서 생활하고 있노라면, 별의별 것을 다 물끄러미 바라보게 된다. 때때로 혼잣말을 하게도 된다. 웅성웅성한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게도 된다. 중고 스바루 차에 친밀한 애정을 품게도 된다. 그리고 조금씩 시대에 뒤떨어지게 되어 간다.
그녀는 테이블에 턱을 괴고 내 눈을 보았다. 「미안해요. 묘한 질문을 해서. 하지만 선생님은 어떻게 상처를 받는지 제대로 상상할 수가 없었어요. 선생님은 어떻게 상처를 받는 걸까?」
「키이스 헤링의 배지를 코트에 다는 것처럼 되지.」
그녀는 웃었다. 「그것뿐?」
「내가 말하고 싶은 건」하고 나는 말했다. 「그런 건 만성화 된다구. 일상 생활에 함몰해서 어느 것이 상처인지 알 수 없게 돼 버리는 거야. 하지만 그것은 거기에 있지. 상처라는 건 그런 거야. 이거다 하고 끄집어 내어 보여줄 수도 없는 것이고, 보여줄 수 있는 것이라면 그런 건 대수로운 상처는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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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야기 해봐요」하고 양사나이는 조용한 소리로 말했다.「당신의 이야기를 해봐요. 여기는 당신의 세계야. 사양할 건 아무것도 없어요. 이야기하고 싶은 걸 그대로 천천히 이야기하면 되는 거요. 당신에겐 필시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을 거요」
나는 벽 위의 그림자를 바라보면서 희미한 빛 속에서 내가 놓여져 있는 상황에 대해 그에게 이야기했다.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마음을 열고 정직하게 나 자신에 관해 이야기했다. 긴 시간을 들여 얼음을 녹이듯 천천히 하나하나. 내가 어찌어찌 나의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 하지만 어디에도 갈 수 없다는 것. 어디에도 갈 수 없는 채 나이를 먹고 있다는 것. 누구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는 것. 그러한 마음의 떨림을 상실해 버렸다는 것. 무엇을 찾아야 좋을지를 알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는 것. 나는 나 자신이 재현 관련되어 있는 사물에 대해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거요, 하고 나는 말했다. 내 몸이 자꾸자꾸 굳어져 가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몸의 중심으로부터 조금씩 조금씩 육체조직이 딱딱하게 굳어져 가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두렵다. 내가 간신히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는 건 이 장소뿐인 것이다, 하고 나는 말했다. 나는 자신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 왔다. 여기가 어떤 장소인지 나로선 알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그렇게 느끼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라고.
양사나이는 아무 말없이 내가 하는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는 거의 잠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내가 이야기를 끝내자 그는 눈을 떴다.
「괜찮아요, 걱정할 것 없어요. 당신은 이루카 호텔에 정말로 포함되어 있는 거요」하고 양사나이는 조용히 말했다. 「이제까지도 줄곧 포함돼 있었고, 이제부터도 줄곧 포함돼 있지. 여기가 당신의 장소란 말이오. 그건 변함이 없어요. 당신은 여기에 연결돼있어. 여기가 모든 것에게 연결돼 있어. 여기가 당신을 맺어주는 매듭인 거요」
「모든것?」
「잃어버린 것들. 아직 잃어버리지 않은 것들. 그러한 모든 것인 것이오. 그것들이 여기를 중심으로 모두 연결돼 있는 거요」
나는 양사나이가 한 말에 관해 좀 생각해 보았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나는?」
「당신은 지금까지 여러 가지 것을 잃어왔지. 여러가지 소중한 것을 잃어왔어. 그것이 누구 탓이냐 하는 건 문제가 아냐. 문제는 당신이 그것에 덧붙여 놓은 것에 있지. 당신은 무엇인가를 잃을 적마다 그것에다가 다른 무엇인가를 덧붙여 놓고 와버린 거요. 마치 무슨 표시처럼 말이오. 당신은 그런 일을 하지 않았어야 했어 당신은 자신을 위해 따로 간직해 뒀어야 할 것마저 거기에 두고 와버린 거요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 자신도 조금씩 조금씩 마멸돼 왔던 거요. 왜 그랬을까? 왜 그런 짓을 했던 것일까?」
「모르겠는걸」
「하지만 아마 그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겠지 무슨 숙명 같은거겠지 뭐라고 할까 꼭 맞는 말이 생각나지 않지만.....」
「경향」하고 나는 말해 보았다.
「그래 그거요. '경향' 나는 생각해요. 다시 한 번 인생을 고쳐 산다 하더라도 당신은 필경 또 같은 짓을 할 것이라고. 그것이 경향이라는 거요 그리고 그 경향이라는 건, 어느 지점을 넘어서면 다신 제자리로 돌아올 수 없게 되고 마는 거요. 손을 쓰기엔 늦은 거지, 그런 건 나로서도 어떻게도 해줄 수가 없지. 나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여기를 지키는 일과, 여러 가지 것들을 연결하는 일 뿐이오. 그 이상의 것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난?」하고 나는 아까와 똑 같은 질문을 다시 한 번 해보았다.
「아까도 말한 것처럼 나도 할 수 있는 데까진 하겠소 당신이 제대로 연결될 수 있도록 해보겠어」하고 양사나이는 말햇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해. 당신도 할 수 있는 데까진 해야 해. 가만히 앉아서 생각에 잠기고만 있어선 안 돼요. 그렇게 했댔자 어디에도 갈 수가 없거든. 알겠는가?」
「알겠어」하고 나는 말했다. 「그래서 난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춤을 추는 거요」하고 양사나이는 말했다.「음악이 울리고 있는 동안은 어떻든 계속 춤을 추는 거야. 내가 하는 이 말을 알아 듣겠는가? '춤을 추는 거야. 계속 춤을 추는 거요.' 왜 춤추느냐 하는 건 생각해선 안 돼. 의미 같은 건 생각해선 안돼. 의미 같은 건 애당초 없는 거요. 그런 걸 생각하기 시작하면 발이 멎어. 한번 발이 멎으면 이미 나로선 어떻게도 도와 주지 못하게 되고 말아. 당신의 연결은 이미 모두가 없어지고 말아. '영원히 없어지고 마는 거요'. 그렇게 되면 당신은 이쪽 세계에서밖엔 살아가지 못하게 되고 말아. 자꾸자꾸 이쪽 세계로 끌려들고 마는 거야. 그러니까 발을 멈추면 안 돼요. 아무리 싱겁기짝이 없더라도, 그런 건 신경 쓰면 안 돼. 제대로 스탭을 밟아 계속 춤을 추어대란 말이오. 그리고 굳어져 버린 것을 조금씩이라도 좋으니 풀어나가는 거요. 아직 늦지 않은 것도 있을 테니까. 쓸 수 있는 것은 전부 쓰는 거요. 최선을 다하는 거요. 두려워할 것 아무것도 없어. 당신은 확실히 지쳐 있어. 지쳐서 겁을 먹고 있어. 누구에게나 그런 때가 있어. 무엇이고 모두 잘못 돼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법이야. 그래서 발이 멎어 버리거든.」
나는 눈을 들어, 다시 벽 위의 그림자를 한참 동안 응시했다.
「하지만 춤을 추는 수밖에 없는 거요」 하고 양사나이는 계속했다.
「그것도 기운차게 훌륭하게 추는 거야, 다들 감탄할 만큼, 그렇게 하면 나도 당신을 도와줄 수 있을는지도 몰라. 그러니 춤을 추는 거요. 음악이 계속되는 한.」
춤을 추는 거야. 음악이 계속되는 한.
사고(思考)가 또 메아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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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으로 돌아와서 또 욕탕에 들어갔다. 이번엔 더는 한기를 느끼지 않았다. 나는 욕조 속에서 천천히 몸을 펴고 시간을 들여서 헝클어진 실타래를 풀 듯 몸의 관절 하나하나를 다독거려 갔다. 손가락 끝도 제대로 움직이도록 했다. 그렇지. 이건 내 몸이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현실적인 세계에 있는 방 안의 실제의 욕조 속에 있다. 특급 열차에 타고 있지도 않다. 기적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이젠 역이름을 읽어낼 필요도 없는 것이다. 무엇을 생각할 필요도 없다.
욕탕에서 나와 침대에 기어들어서 시계를 보니 벌써 열시 반이었다. 어이구 맙소사. 하고 나는 생각했다. 차라리 이젠 잠자는 건 단념하고 산책이나 나갈까 하는 생각조차 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멍하니 하고 있는 중에 돌연 잠이 찾아왔다. 무대의 암전 같은 일순의 급격한 잠이었다. 잠에 빠져든 순간의 일을 나는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거대한 회색 원숭이가 해머를 들고 어디선지 모르게 방으로 들어와 나의 뒷머리를 맘껏 두드린 것이다. 그래서 나는 기절한 것처럼 깊은 잠에 떨어졌다.
그것은 딱딱하고 긴장된 한 잠이었다.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배경음악도 없었다. <문 리버>도 <사랑은 물빛>도 없었다. 그저 단순하고 맛이 없는 잠이었다. 「16의 다음 수는?」 하고 누군가가 물었다.「41」하고 나는 대답했다.「잠들어 있어」하고 회색 원숭이가 말했다. 그렇지, 난 잠들어 있다. 딱딱하디 딱딱한 철구 속에서 나는 몸을 동그랗게 해가지고 다람쥐처럼 깊이 잠들어 있다. 빌딩을 허물 때에 사용하는 그러한 철구. 속이 도려내져 있다. 그 속에서 나는 잠들어 있다. 딱딱하고 긴장하고 단순하고.....
무엇인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기적 소리일까?
아니지 그렇지 않아 틀려, 하고 갈매기들이 말한다.
누군가 철구를 버너로 태워 끊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소리가 난다.
아니지 틀려 그렇지도 않아, 하고 갈매기들은 소리를 모아 말한다. 그리스 극의 코러스처럼.
전화다, 하고 나는 생각한다.
갈매기들은 이젠 없어졌다.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는다. 어째서 갈매기들은 없어져버린 것인가?
나는 손을 뻗어 베갯머리의 전화를 들었다.「예」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찌잉 하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뜨르르르르르르' 하는 소리는 다른 공간에서 울리고 있었다. 문앞의 벨 소리다. 누군가 문앞의 벨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뜨르르르르르르르르'
「문의 벨」하고 나는 소리내어 말해보았다.
하지만 갈매기들은 이젠 없었고 아무도 「정답」하고 칭찬해 주지는 않았다.
'뜨르르르르르르르르'
나는 욕의를 걸치고 입구까지 가서 아무 말도 묻지 않고 문을 열었다. 프런트의 여자아이가 쓱 안으로 들어서더니 문을 닫았다.
회색 원숭이에게 얻어맞은 뒷머리가 욱신거렸다. 이렇게 호되게 두드리지 않아도 좋았으련만, 하고 나는 생각했다. 지독하다. 머리가 움푹 들어가버린 것만 같은 느낌이 들 정도이다.
그녀는 내 욕의를 보고 그리고 내 얼굴을 보았다. 그리곤 눈썹을 찌푸렸다.
「어째서 오후 세시에 자고 있어요?」 하고 그녀는 물었다.
「오후 세시」 하고 나는 되풀이했다. 나로서도 어째서인지는 잘 생각나지 않았다.
「어째설까?」 하고 나는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몇시에 잤는가 도대체?」
나는 생각해 보았다. 생각해 보려고 노력해 보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좋아요, 생각지 말아요」 하고 그녀는 체념한 듯이 말했다.
나는 침대속에 들어가 등받이에 기대어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주름 하나 없는 하얀 블라우스, 감색의 타이트한 스커트, 스타킹에 감싸인 날씬한 다리, 그녀도 역시 회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탓으로 그녀는 마치 낡은 사진 속의 상(像)같아 보였다. 그런 것을 바라보고 있다는 건 멋진 일이었다. 자신이 무엇엔가에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나는 발기마저 느낀다. 그것도 나쁘지 않다. 회색하늘, 죽도록 졸리운 오후 세 시의 발기.
나는 꽤 오래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뒤돌아서 나를 보았지만 나는 그래도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째서 그렇게 물끄러미 바라봐요?」하고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수영학교에 질투하고 있는 거야」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약간 고개를 갸웃하고, 그리곤 미소를 지었다. 「이상한 사람」하고 그녀는 말했다.
「이상하진 않아」하고 나는 말했다.
「다만 약간 혼란해 있을 뿐이야. 사고를 정지할 필요가 있어」
그녀는 내곁에 다가서서 내 이마로 손을 가져왔다.
「뭐, 열은 없는 것 같아요」하고 그녀는 말했다.「푹 자요. 좋은 꿈을 꾸고」
그녀가 줄곧 여기에 있어 주었으면 하고 나는 생각했다. 잠들어 있는 동안 줄곧 옆에 있어 주었으면 하고, 하지만 그것은 무리한 이야기였다. 그래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그녀가 밝은 청색의 윗도리를 걸치고 방에서 나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나가버리자, 엇갈리듯 또 회색 원숭이가 해머를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괜찮다니까 그런 짓 하지 않아도 틀림없이 잠들 수 있어」하고 나는 말하려 했다. 하지만 제대로 말해지지 않았다. 그리고 또 일격이 가해졌다.
「25의 다음은?」하고 누군가가 질문했다.「71」하고 나는 말했다.
「잠들었군」하고 회색 원숭이가 말했다. 당연하겠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렇게 강하게 쳤잖아. 잠들 건 뻔한 일이잖아, 하고. 혼수 상태라고 하는 게 정확한 어휘이다. 그리고 어둠이 찾아왔다.
정리할 필요가 있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매듭, 하고 나는 그런 카오스의 중심에서 스스로를 향해 물었다. 그리곤 조용히 입 밖에 내어 말해 보았다. 내가 찾고, 양사나이가 잇는다.
나로선 그것이 어떤 일인지 충분히 이해되지 않았다. 너무나 비유적인 표현이다. 하지만 아마 그것은 비유적으로밖엔 표현할 수 없는 종류의 일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왜냐하면 양사나이가 비유적 표현을 사용해서 나를 희롱하고 즐긴다는 그런 일은 아무래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필시 그는 그러한 말로 밖에 그것을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형태로밖엔 나에게 표시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저 양사나이의 시계를 통해서ㅡ그의 배전반을 통해서ㅡ 온갖 것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하고 그는 말했었다. 그리고 그 연결에 혼란이 생겨난 것이라고. 어째서 혼란이 생겨났는가? 내가 제대로 무엇인가를 찾을 수 없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매듭이 제대로 가능하지 못하게 되어 버린 것이다. 혼란해 있는 것이다.
나는 술을 마시고, 눈 앞의 재떨이를 잠시 동안 바라보았다.
그래서 키키는 어떻게 되었는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꿈 속에서 그녀의 존재를 느낀 것이다, 그녀가 나를 여기로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나에게 무엇인가를 구하고 있었다. 바로 그렇기에 나는 이루카 호텔로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는 이젠 내 귀엔 도달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메시지는 차단되어 있었다. 무선기의 플러그가 빠져버린 것처럼,
어째서 이것 저것이 이다지도 막연해진 것일까?
이음매가 혼란해졌기 때문이다, 틀림없이. 나는 자신이 무엇을 구하고 있는 것인지 명확히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리고 양사나이의 도움을 빌어 사물을 하나 하나 연결해 가는 것이다, 상황이 제아무리 막연해 보이더라도, 하나 하나 견디고 참을성 있게 풀어 나갈밖에 없는 것이다. 풀어놓고, 그리고 연결한다. 나는 상황을 회복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어디에도 붙잡을 데가 없다. 나는 높다란 벽에 달라붙어 있다. 주위의 벽은 거울처럼 미끌미끌하기만 하다. 나는 어디에도 손을 뻗칠 수가 없다. 붙잡을 데가 없다. 나는 어리벙벙해 있다.
나는 술을 몇 병인가 마시고, 계산을 치르고 밖으로 나섰다. 하늘에서 커다란 눈조각이 서서히 흩어날리고 있었다. 눈이 본격적으로 내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눈 탓으로 거리의 음향은 여느 때와는 다르게 들렸다. 나는 취기를 식히기 위해 그 블럭을 휙 일주했다.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나는 내 발을 바라보면서 걸었다. 안되겠다. 나는 나 자신이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어느 쪽을 향하면 좋을지조차 알지 못한다. 녹슬어 버린 것이다. 녹슬어서 굳어진 것이다. 이렇게 혼자서 있으면, 점점 나 자신이 상실되어 가는 것만 같은 느낌이다. 정말,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아무튼 어디서부터인지 시작해야 한다. 저 프런트의 여자아이는 어떨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그녀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 나와 그녀 사이에는 무엇인지 마음이 상통하는 데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가령 그녀와 함께 자고 싶다면 잘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래서 어떻게 될 것인가, 거기서부터 어디로 갈 수 있는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어디로도 갈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내가 더 잃어버릴 뿐일 것이다. 왜냐하면 나로선 나 자신이 무엇을 구하고 있는 것인지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 자신이 무엇을 구하고 있는지가 파악되지 못하고 있는 한은, 헤어진 아내가 말하는 것처럼 나는 온갖 상처를 입게 될 것이다.
나는 그 블럭을 일주하고, 그리고 또다시 일주했다. 눈은 조용히 계속 내리고 있었다, 눈은 나의 코트에 떨어져 잠시 헤매고, 그리고 사라져 갔다, 나는 걸어가면서 머리 속을 계속 정리해 나갔다. 사람들은 하얀 입김을 밤의 어둠 속에 띄우면서 내 곁을 지나갔다. 추위 탓으로 나의 피부가 쓰라렸다, 하지만 나는 그 블럭을 시계 바늘 방향으로 계속 걸었고, 계속 생각했다. 아내의 말은 마치 저주와 같이 내 머리에 달라붙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 그대로였다. 그녀의 말 그대로 인 것이다. 이대로라면 나는 나에게 관련되는 누군가를 영원히 상처입게 하고, 계속 손상을 입게 하는 것이다, 아마도.
「달로 돌아가요」하고 말하고 나의 여자 친구는 사라져 갔다, 아니, 사라져간 게 아니다. 돌아간 것이다. 그녀는 현실이라는 저 위대한 세계로 돌아간 것이다.
키키,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녀가 최초의 착수가 되는 셈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메시지는 도중에서 연기처럼 꺼져버렸다.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나는 눈을 감고 회답을 찾았다. 하지만 머리 속에는 아무도 있지 않았다. 양사나이도 있지 않지 않았고, 회색 원숭이마저 있지 않았다. 텅 비어 있었다. 텅 빈 방에 내가 혼자서 앉아 있을 뿐이었다. 아무도 대답해 주지는 않았다. 그 방 안에서 나는 나이를 먹고 늙어서 메말라 지쳐 있었다. 나는 이미 춤을 추고는 있지 않았다, 그것은 서글픈 광경이었다.
역 이름을 아무리 해도 읽어낼 수가 없다.
테이터 부족으로 회답 불가능, 취소 키를 눌러주시오.
하지만 회답은 다음날 오후에 와 닿았다. 여느 때처럼 아무런 예고도 없이, 돌연, 회색 원숭이의 일격처럼.
:::
「잘 기억하고 있네요」하고 유키가 감탄한 듯 말했다.
「그야 그렇지. 나도 예전엔 너만큼 열심히 록을 들었으니까」하고 나는 말했다.「네 나이 때에 말야. 매일 라디오에 매달리고, 용돈을 모아 레코드를 샀지. 로큰롤. 이 세상에 이만큼 멋진 건 없다고 생각했어. 듣고 있기만 해도 행복했었지.」
「지금은 어때요?」
「지금도 듣고 있지. 좋아하는 곡도 있고. 하지만 가사를 암송할 만큼 열심히 듣지는 않아. 예전만큼은 감동하지 않아.」
「왜 그래요?」
「왜 그럴까?」
「가르쳐 줘요」하고 유키는 말했다.
「정말 좋은 건 적다는 걸 알게 되니까 그렇겠지」 하고 나는 말했다.
「정말 좋은 건 아주 적거든 무엇이든 그래. 책이나, 영화나, 콘서트나, 정말로 좋은 건 적거든. 록 뮤직만 해도 그렇지. 좋은 건 한 시간 동안 라디오를 들어도 한 곡 정도밖에 없어. 나머진 대량 생산의 찌꺼기 같은 거야. 하지만 예전엔 그런 거 깊이 생각하지 않았지. 무엇을 듣건 제법 재미 있었어. 젊었고, 시간도 얼마든지 있었고, 게다가 사랑을 하고 있었어. 시시한 것에도, 사소한 일에도 마음의 떨림 같은 걸 느낄 수 있었어. 내가 하는 말 알겠어?"」
「어딘지 모르게」하고 유키는 말했다.
「지금은 사랑을 안 해요?」하고 유키가 물었다.
나는 그 일에 대해 좀 깊이 생각했다.「어려운 질문인데」하고 나는 말했다.「유키는 좋아하는 남자가 있나?」
「없어요」하고 유키는 말했다.「싫은 녀석은 잔뜩 있지만.」
「기분은 알겠어」하고 나는 말했다.
「음악을 듣고 있는 편이 즐거워요.」
「그 기분도 알겠어」
「정말 알아요?」하고 말하고, 유키는 의아한 듯 눈을 가늘게 하고 나를 보았다.「정말 알아」하고 나는 말했다. 「모두들 그것을 도피라고 불러. 하지만 뭐 그건 그걸로 좋아. 내 인생은 내것이고 네 인생은 네 것이야. 무엇을 구하느냐만 명백하다면, 너는 너 좋을 대로 살면 좋은거야. 남이 뭐라고 하건 알 게 뭐야. 그런 녀석들은 왕악어에게 먹혀 죽으면 되는 거야. 나는 예전에, 너만한 나이에 그렇게 생각했었어. 지금도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그건 어쩌면 내가 인간적으로 성장해 있지 않기 때문인지도 몰라. 아니 어쩌면 내가 영원히 옳은 것인지도 몰라. 아직은 잘 모르겠어. 쉽게 해답이 나오지 않거든.」
「잘 모르지만, 타고 있으면 어쩐지 친밀한 느낌이 들어요.」
「아마도 그건 이 차가 내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일 거야.」
「그렇게 하면 친밀한 느낌이 들게 돼요?」
「조화성」하고 나는 말했다.
「잘 모르겠는데」하고 유키는 말했다.
「나와 차가 서로 도와주고 있는 거야. 간단하게 말해 내가 이 공간에 들어가지. 나는 이 차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해. 그러면 여기에 그런 공기가 생겨. 그리고 차도 그런 공기를 느끼게 돼. 나도 기분이 좋게되고 차도 기분이 좋게 돼.」
「기계도 기분이 좋게 돼요?」
「물론, 되지」하고 나는 말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지, 하지만 기계도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고, 약이 오르기도 해. 이론적으로는 해명되지 않지만, 경험적으로 말해서 그래. 틀림없어.」
「인간이 서로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인간과는 달라. 이런 건 말이지, 그자리에 머물고 있는 감정이거든 인간에 대한 감정이란 건 그것과는 달라. 상대에게 맞춰서 늘 미세하게 변화하고 있어. 흔들리거나 망설이거나, 부풀거나, 꺼지거나, 부정되거나, 상처를 입기도 해. 대개의 경우 의식적으로 통할 수는 없어. 스바루를 대하는 것과는 달라.」
유키는 그에 관해 한동안 생각하고 있었다. 「부인과는 서로 통하지 못했었나요?」하고 유키가 물었다. 「통해 있다고 난 줄곧 생각하고 있었어」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내 아내는 그렇게 생각지 않았어. 견해의 차이. 그래서 어디론가 가버리는 편이 차라리 빨랐던가 봐.」
「스바루처럼은 잘 되지 못했던가 보죠?」
「말하자면 그렇지」하고 나는 말했다. 맙소사, 도대체 열세 살짜리 여자아이를 상대로 하는 이야기란 말인가, 이것이. 「저, 나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죠?」하고 유키가 물었다.
「나는 아직 너에 대해선 거의 아무것도 몰라」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또 내 왼쪽 뺨을 물끄러미 바라 보았다. 그러다가 왼쪽 뺨에 구멍이 뻥 뚫리지나 않을까 싶었다. 그토록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알겠어, 하고 나는 생각했다.
「넌 내가 여태껏 테이트한 여자아이 중에선 아마 제일 예쁜 여자아이일 거야」하고 나는 내 시선 정면의 길을 내다보면서 말했다. 「아니지. 아마가 아냐. 틀림없이 제일 예뻐. 내가 열다섯이라면, 확실히 너와 사랑을 했을 거야. 하지만 난 이제 서른넷이니, 그렇게 간단하게 사랑은 하지 않아. 이 이상 더 불행해지고 싶지 않아. 스바루 편이 더 쉬워. 그런 정도로 말하면 될까?」
유키는 이번에는 평온한 시선으로 나를 잠시 동안 보고 있었다. 그리곤 「이상한 사람」하고 말했다. 유키에게 그런 소리를 듣자 나는 내가 정말로 인생의 패배자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마 악의는 없을 게다. 하지만 유키의 그런 소리를 들으니 꽤 사무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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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그녀가 부러워졌다. 그녀가 지금 열세 살이라는 게 말이다. 그녀의 눈에는 갖가지 일들 모두가 신선하게 비치리라. 음악이며 풍경이며 사람들이. 나 역시 옛날에는 그랬다. 내가 열세 살 때, 세계는 휠씬 단순했다. 노력은 당연히 보답을 받아야 하는 것이었고, 말은 보증되어야 하는 것이었고. 아름다움은 그곳에 머물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나는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으며, 혼자 있을 때의 자신을 믿을 수 있었지만, 당연한 일이지만 대개의 경우 혼자 있지는 못했었다.
가정과 학교라는 완강한 테두리 속에 갇혀서 나는 초조해하고 있었다. 초조한 나이였다. 나는 여자아이를 사랑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물론 순조롭지가 않았다. 왜냐하면 사랑이 어떤 것이라는 것조차도 알지 못했으니 말이다. 나는 그녀하고 거의 제대로 이야기도 하지 못했다. 나는 내성적이고 재치가 없는 소년이었다. 선생이나 부모가 강압으로 밀어붙이는 가치관에 이의를 말하고 반항하려 했지만, 이의를 제기할 말이 제대로 잘 나오지 않았다. 무슨 일을 하거나 솜씨있게 되지 않았다. 무슨 일을 하거나 척척 되어가는 고혼다 군과는 전혀 반대 입장에 놓였다. 하지만, 나는 사물의 신선한 모습을 볼 줄은 알았다. 그것은 정말 멋진 일이었다. 냄새가 제대로 풍겼고, 눈물은 진실로 훈훈했으며, 여자아이는 꿈처럼 아름다웠으며, 로큰롤은 영원히 로큰롤이었다. 영화관의 어둠은 우아하고 친밀했으며, 여름밤은 끝없이 그윽하고 관능적이었다. 그러한 초조한 나날을 나는 음악과 영화와 책과 더불어 지냈다. 샘 쿡이랑 리키 넬슨의 유행가 가사를 암송하면서 지냈다. 나는 나 혼자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그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것이 나의 열세 살 때였다. 그리고 고혼다 군과는 같은 과학 실험반에 있었다. 그는 여자아이들의 뜨거운 시선을 받으며 성냥을 그어 가스 버너에다 우아하게 쏘옥 불을 당기곤 했다.
어째서 그가 나를 부러워하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인가?
알 수 없는 일이다.
「가끔씩. 가끔씩 밖엔 안 느끼죠. 그런 걸 느끼는 상대란 그렇게 많진 않거든요. 아주 조금뿐. 하지만 되도록 그 일은 생각지 않으려고 하거든요. 무엇을 느낄 것만 같아지면 이내 닫아 버리도록 하거든여. 대개 그런 경우란 느낌으로 알게 되니깐요, 닫아버리면, 깊게는 느끼지 않아도 되거든요. 눈을 감는 것과 마찬가지로. 감각을 닫아버리는 거죠. 그렇게 하면 아무것도 안 보이죠. 무엇이 있다는 건 알아. 하지만 보이진 않아. 그냥 그대로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보지 않아도 돼. 그래, 영화 같은 데서 무서운 게 나올 것만 같으면 눈을 감아버리죠, 그것과 마찬가지죠. 그것이 지나가버릴 때까지 감고 있지요. 가만히 말이죠.」
「그런 건 누군가 딴 사람이 생각할 일이지, 유키가 생각할 일이 아니야. 모두가 유키를 구박하는 그런 장소에 가야 할 의무란 아무것도 없어. 전혀 없어. 그런 걸 싫다고 할 권리는 유키에게 있는 거야. 큰소리로 '싫다' 하고 말하면 그만이야.」
「하지만 그러고 나서 그 앞은 어떻게 되죠? 줄곧 이런 일의 되풀이에요?」
「나도 열세 살 때엔 그런식으로 생각한 적도 있었지」하고 나는 말했다. 「이런 식 그대로의 인생이 계속되는 게 아닌가 하고 말야. 하지만 그렇진 않지. 어떻게든 되지. 어떻게든 되지 않는다면, 또 그때 가서 생각하면 돼. 좀더 크게 되면 사랑도 하게 돼. 브래지어도 선물받게 되고, 세계를 보는 눈도 달라지게 되고.」
「아저씨란 사람, 바보 같군」하고 그녀는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보세요. 요즘의 열세 살짜리 여자아이들은 다들 '브래지어' 쯤은 갖고 있어요. 아저씬 반세기쯤 늦었쟎아요?」
「에게게」하고 나는 말했다.
「응?」하고 유키는 말했다. 그리곤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아저씬 바보야.」
「그럴지도 몰라」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그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앞에 서서 차 있는 데까지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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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고 싶어지면 네가 전화를 걸어주면 돼. 사람과 사람이 의무적으로 만날 필요는 없어. 만나고 싶어지면 만나면 되는 거야. 우리는 서로가 누구에게도 말하고 있지 않은 것을 숨김없이 털어놓으면서 비밀을 공유하고 있어. 그렇지? 틀리나?" 」
그녀는 약간 망설이다가 「응」하고 말했다.
「그런 것은 내버려 두면 몸 안에서 자꾸 부풀어 오르는 수가 있어. 억제할 수 없게 되는 때가 있는 거야. 이따금 공기를 뽑아주지 않으면, 펑하고 폭발해 버려. 알겠어? 그렇게 되면 살아가기가 어려워져. 무엇인가를 혼자서 떠맡는다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야. 너도 고통스럽고 나 역시 고통스럽다고 느끼는 수가 있어.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고, 아무도 이해해 주지 않아. 하지만 우리는 서로 이야기할 수 있어.」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너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아. 네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으면, 내게 전화를 걸어주면 돼. 이것은 너의 아버지의 이야기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어. 혹은 내가 너에 대해 세상 물정에 밝은 오빠나 아저씨 역할을 하려 하는 것도 아냐.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는 대등해. 우리는 서로 도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 그러기 위해서도 우리는 이따금 만나는 게 좋아.」
기묘하게도 인간에게는 각기 절정이라는 게 있다. 거기에 올라가 버리면, 다음에는 내려가는 수밖에 없다. 이는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절정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직 괜챦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갑자기 그 분수령이 다가온다. 아무도 알 수 없다. 어떤 자는 열두 살 때 절정에 도달하기도 한다. 그리고 다음에는 별로 시원치 않은 인생을 보내게 된다. 어떤 자는 죽을 때까지 계속 올라간다. 어떤 자는 절정에서 죽는다. 많은 시인이나 작곡가들은 질풍처럼 살면서 너무 급격히 꼭대기까지 올라갔기 때문에, 서른 살도 되기 전에 죽었다. 파블로 피카소는 여든 살이 넘어서도 힘찬 그림을 계속 그리다가 그대로 편안히 죽었다. 이 점만은 끝나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어떤가ㅡ 하고 나는 생각해 보았다.
절정ㅡ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한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되돌아보면, 이는 인생이라고는 할 수 없을 듯한 느낌이 든다. 약간의 기복은 있었다. 꾸역꾸역 올라가거나 내려오기는 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거의 아무것도 한 게 없다. 아무것도 만들어낸 게 없다. 누군가를 사랑한 적도 있고, 누군가로부터 사랑받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 기묘하게 평탄하며, 풍경이 단조롭다. 마치 비디오 게임 속에 걸어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팩맨 같다. 잇따라 미로 속의 점선을 먹어 간다. 목적도 없이. 그리고 언젠가는 확실하게 죽는다.
당신은 행복해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고 양사나이가 말했다. 그러니까 춤을 계속 추는 수밖에 없어, 사람들이 모두 감탄할 만큼 능숙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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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분, 내게 돈을 건네주면 다 된 걸로 생각하고 있어요」하고 그녀는 말했다.「엉터리야. 그래서 오늘은 내가 대접해 드리는 거예요. 우리는 대등하잖아요, '어떤 의미에선' 언제나 대접만 받아왔으니까, 때로는 괜챦지 않았어요.」
「잘 먹었어」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후배를 위해 한 마디 한다면, 그러한 짓은 클래식한 데이트의 매너에는 벗어나는 거야.」
「그럴까요?」
「데이트를 하면서 식사를 한 후에, 아가씨가 스스로 계산서를 갖고 카운터로 가서 돈을 치르면 안 돼. 남자에게 먼저 치르게 하고, 나중에 돌려주는 거야. 그게 세상살이의 매너야. 남자로서의 자존심을 상하게 해요. 나는 물론 손상되지 않았지만, 나는 어떠한 관점에서 보든간에 인색한 인간이 아니니까. 어쨌든 나는 괜챦지만, 그런 것에 산경을 쓰는 남자도 세상에는 꽤 많이 있어, 세계는 아직도 인색하거든.」
「바보같아」하고 그녀는 말했다.「난 그런 남자와는 데이트 따윌 하지 않아요.」
「그건 말하자면 하나의 식견이지」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주차장에서 스바루를 몰고 나왔다.「하지만 사람은 불합리하게 사랑에 빠지는 수가 있어. 좋아하는 상대방만을 고를 수 없는 수도 있어. 그게 사랑이라는 거야. 너도 브래지어가 필요해질 나이가 되면, 아마 그걸 알수 있을 거야.」
「갖고 있다고 말했잖아요.」하고 그녀는 주먹으로 내 어깨를 마음껏 쳤다. 그래서 나는 하마터면 붉게 칠해진 커다란 쓰레기통에 자동차를 부딪칠 뻔했다.
「농담이야」하고 나는 차를 멈추고 말했다.「어른의 세계에서는 모두들 농담을 하고 서로 웃거든. 혹은 그게 시시한 농담일지도 몰라. 하지만 너도 그러한 일에 익숙해져야 해.」
「흠」하고 그녀는 말했다.
「흠」하고 나도 말했다.
「바보처럼」하고 그녀는 말했다.
「흉내내지 말아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흉내내기를 중지하였다. 그리고 자동차를 주차장에서 몰고 나왔다.
「하지만 지금처럼 운전하고 있는 사람을 치면 안 돼, 농담이 아냐」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런 짓을 하면 어디에고 부딪쳐 둘 다 죽어 버리게 돼. 이게 제2의 데이트 매너야. '죽지 않고 살아 남을 것'.」
「흠」하고 유키는 말했다.
조정을 하기 위한 하루였다.
하지 않으면 안 될 일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한 하루가 있다. 현실적이 되어, 현실적인 현실과 맞붙어 씨름을 해야 하는 하루.
우선 나는 몇 개의 셔츠는 세탁소에 갖다 주고, 몇 개의 셔츠를 찾아 돌아왔다. 그리고 은행에 들러 현금을 찾고, 전화요금과 가스 요금을 지불했다. 집세도 불입해 두었다. 구둣방에 들러 뒤축을 새 것으로 갈아 끼웠다. 자명종의 전지와 카세트 테이프도 여섯 개나 샀다. 그리고 방으로 돌아와 음악을 들으면서 방안을 정리하였다. 욕조를 깨끗이 씻었다. 냉장고 속의 물건들을 모두 꺼내어 내부를 깨끗이 닦고, 식품을 점검하고 정리하였다. 가스레인지를 닦고, 더러워진 환풍기를 손질하고, 바닥을 닦고, 창문을 닦고, 쓰레기를 한데 모아 두었다. 침대 시트와 베갯잇을 갈아 끼웠다. 청소기로 청소를 하였다. 이만큼의 일을 하는데 두 시까지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