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식에 대하여 1


나는 꽤 편식을 하는 인간이다. 생선과 채소와 술에 관한 한은 거의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싫고 좋은 게 없는데, 고기는 쇠고기밖에 못 먹고, 조개류는 굴 이외에는 입에도 대지 못한다. 그리고 중화 요리도 일체 못 먹는다. 그래서 대개는 생선과 야채를 중심으로, 담백한 음식을 찔끔찔끔 먹으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곤약이 라든가 녹미채, 두부 같은 이른바 노인식이다, 이건 순전히.
이따금 스스로도 신기하게 생각할 때가 있는데,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한다는 판단 기준은 도대체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일까? 어째서 굴은 먹을 수 있는데 대합은 못먹는 걸까? 대체 굴과 대합이 본질적으로 어떻게 다르다는 말인가? 이런 것들은 암만 생각해도 적절한 대답이 안나와, 결국 '운명'이란 한마디로 처리하는 수 밖에 도리가 없다. 나는 어느 날, 바람 부는 언덕 위에서 이유도 없이 굴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하는 식으로. 결과가 전부이다.
어떤 이유로 중화 요리를 먹을 수 없게 되었는지 하는 것도 내게는 커다란 수수께끼 중 하나다. 중국이나 중국인에게 나쁜 감정을 품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고, 오히려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는 편이다. 친구 중에도 몇 사람인가 중국인이 있고, 내 소설 중에도 중국인이 제법 등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위는 중화 요리란 음식을 완고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어째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유아 체험이라든가 그런게 있는지도 모르겠다.
센다가야에 살던 시절, 집 근처의 키라 거리에 맛있기로 평판이 난 라면집이 두 집 나란히 있었는데, 그 앞을 지나가면 싫어하는 라면 냄새가 풍풍 풍기는 터라,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늘 고생스러웠다. 어느 친구는 그 앞을 지날 때마다 라면을 먹고 싶은 격렬한 욕망을 억누르느라 굉장히 고생을 한다고 한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라면을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 하는 차이만으로도 인생살이의 양상이 꽤 달라지겠구나 싶은 기분이 든다..



편식에 대하여 2


며칠 전 영국 신문을 읽고 있는데, 광고란에 개가 목을 매달고 있는 사진이 실려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읽어 보았더니, 그게 애견가 협회에서 보내는 메세지로 '한국에서는 개를 죽여서 먹는 습관이 있는데, 이건 야만적 행위니까 저지합시다'란 내용이었다.
그 후 한달쯤 지나 호놀룰루에서 신문을 읽고 있으려니, '중국인은 들개 사냥을 하는데다 그 일부는 먹는다고 하는데, 그건 지나친 야만 행위니 우리는 중국 제품을 보이코트 하자'는 투고가 게재돼 있었다. 투고는 북경에서 행해진 대규모 들개 사냥 으로, 6주 동안에 처분된 개의 숫자가 약 이십만 마리라는 사건(끔찍하다!)에 대한 한 호놀룰루 시민의 반응이었다.
내 기억에 의하면 조선과 영국 사이에는 개소동이 백년쯤 전에도 한번 있었다. 그 때는 빅토리아 여왕(이었다고 생각한다)이 우호를 위해 조선 황제에게 선물로 보낸 개를 조선 조정 쪽에서 완전히 잘못 받아들여, 고맙게 요리를 하여 먹어 버린 터라, 당시에는 상당한 정치적 문제가 되었다. 재밌다고 말하면 안되겠지만 재밌다.
이렇게 개를 먹느냐 안 먹느냐 하는 습관의 문제를 편식과 동일하게 논하는 것은 좀 무리겠지만, 그래도 무엇은 먹고 무엇은 안 먹는다는 선택이 기본적으로 불합리 하다는 점에 있어서는 비슷한 차원의 것이다. 야만이라는 것은 인간이 지닌 성향의 문제가 아니고, 개념의 문제이다. 내가 굴은 먹을 수 있지만 대합은 못 먹는다는 점에 대해 누가 '왜 그런가?'하고 집요하게 묻는다면, 나로서는 설명하기가 무척 곤란 하다. 성향을 설명하는 일은 가능하지만, 개념을 설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얘기가 한참 비약되는데, '왜 그런 마누라랑 함께 살 게 되었나?'하는 질문도 같은 선상에 있는 어려운 문제이다. 나는 이런 종류의 현실을 잠정적으로 '동시 존재적 정당성'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어째 이번은 얘기가 좀 골치 아파졌다. 그럼.



편식에 대하여 3


딱히 생리적으로 못 받아들이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별로 먹고 싶지 않은 종류의 음식이 있다. 카레 우동이라는 것도 그 중 하나이다.
나는 카레도 우동도 좋아하는데, 그게 '카레 우동'이 되면 도무지 손을 댈 엄두가 안 난다. 정말 속수무책이다. 고로케 우동이라는 것을 며칠 전 신주쿠에서 우연히 봤는데, 그것도 역시 먹을 수 없을 것 같다.
도대체 왜 우동 속에다 구태여 카레니 고로케니 하는 분명하게 다른 부류의 이물질을 집어 넣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가 안된다. 그런 일들을 일일일 다 허용하다 보면 언젠가 '미트 소스 차즈께' 같은 음식이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요 얼마 전에 모 카이세키 요리집에서 아보카도와 리큐 무침이라는 요리를 먹었는데, 이것도 좀 먹기 곤란한 음식이었다. 보수적이라고 비난을 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요컨대 평화스럽고 느긋하게 정상적인 음식을 먹고 싶다고, 내 희망은 그것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나도 그 옛날, 혼자서 생활하던 학생시절에는 정말 엉망진창으로 음식을 만들어서는 적당히 주린 배를 채웠다. 그러니까 별 대단한 소리는 할 수 없다.
당시 가장 빈번하게 만들던 요리는, 당장 집에 있는 걸로 만든 스파게티 한 가지밖에 없다. 스파게티라고 해서 무슨 명확한 맛의 기준 같은 것이 있는게 아니고, 아무튼 스파게티를 잔뜩 삶아 놓고, 거기에다 냉장고에 남아 있는 것을 고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전부 쓸어 넣고 흐물흐물하게 휘저을 뿐인, 그런 요리이다. 요리로서의 통일성 같은 것은 손톱만큼도 없다.
스파게티 속에 찹쌀떡과 토마토와 샐러미햄과 계란과 조미료와 무청이 함께 들어 있는 적도 있어, 지금 생각하면 구역질이 날 정도지만, 당시에는 '아, 맛있어 맛있어'하고 꿀꺽꿀꺽 먹었다.
호기심이 발동하는 분은 한번 시험해 보세요. 상당한 스테미너식이니까. 후후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