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어떤 소설을 읽다가, 돈을 내고 여자와 성교하지 않는 것은 제대로 된 남성의 조건 중 하나라고 하는 문장을 마주한 적이 있다. 나는 그런 문장을 읽으면 과연 그렇겠구나, 하고 생각한다.
과연, 하고 내가 생각하는 게 반드시 내가 그 주장을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러한 사고 방식도 있을 수 있구나, 하고 납득할 뿐이다. 적어도 그러한 신념을 갖고 살아가는 남자가 존재한다는 상황은 납득이 간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한다면, 나도 돈을 내고 여자와 성교하지는 않는다. 한 적도 없으며, 앞으로도 별로 해보고 싶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신념의 문제가 아니고, 이른바 취향의 문제다. 그래서 돈을 내고 여자와 자는 사람을 제대로 된 인간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우연히' 그러한 처지가 되어 버린 것뿐이다.
그리고 이렇게도 말을 할 수가 있다.
우리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들 돈을 내고 여자를 사고 있다고.
예전에 훨씬 젊었을 때에는 물론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었다. 나는 지극히 단순하게 섹스가 공짜라고 생각했었다. 일종의 호의과 호의(좀더 다른 표현도 있겠지만)가 만나게 되면, 거기에 극히 자연스럽게, 자연 발화처럼 섹스가 생기게 된다는 사고 방식이었다.
젊었을 때에는 분명히 그것으로 잘되어 나갔으며, 무엇보다도 지불할 돈 자체가 없었다. 이쪽에도 없었고, 저쪽에도 없었다. 생판 모르는 여자의 아파트에서 자고, 아침이 되어 인스턴트 커피를 홀짝거리면서 차가운 식빵을 나누어 먹는 것과 같은 생활이었지만 그래도 즐겁기만 했다.
그러나 나이를 먹고 나름대로 성숙해지면서 우리는 인생 전반에 대해서 좀더 다른 견해를 갖게 된다. 즉 우리의 존재, 혹은 실재는 다양한 종류의 측면을 긁어 모아서 성립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분리가 불가능한 총체라는 견해다.
우리가 일을 해 돈을 벌거나, 좋아하는 책을 읽거나, 투표를 하거나, 밤에 야구 시합을 구경하러 가거나, 여자와 자거나 하는 모든 행위는 하나하나가 독립적으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하나의 것이 서로 다른 명칭으로 불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충분히 성생활의 경제적 측면이 경제 생활의 성적 측면이 될 수가 있다.
적어도 요즘 나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여간해서는 내가 읽던 그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아주 간단하게, 돈을 내고 여자와 자는 것은 제대로 된 인간이 하는 짓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없을 것 같다.
그것은 하나의 선택으로서만 존재하는 거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우리는 참으로 여러가지 것을 일상적으로 사거나 팔거나 교환하고 있어서 결과적으로 무엇을 팔고 무엇을 사들였는지 전혀 알 수 없게 되어 버리는 일이 종종 있기 때문이다. 잘은 설명할 수 없지만, 결국은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때 함께 술을 마시던 여자는 몇 년인가 전에 돈을 받고 여러명의 모르는 남자와 같이 잔 일이 있다고 나에게 말했다.
내가 술을 마시던 곳은, 오모테산 도로에서 시부야 쪽으로 들어간 곳에 있는 새로운 레스토랑 바와 같은 분위기의 술집이었다. 세 가지 종류의 캐나디안 위스키가 갖춰져 있고, 간단한 프랑스 요리도 나오고, 대리석의 스탠드 위에는 야채가 통째로 쌓여 있고, 스피커에서 도리스 레이의 <잇츠 매직>이 흘러 나오고, 디자이너라든가 일러스트레이터와 같은 종류의 사람들이 모여서 감각 혁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그런 술집이었다.
이런 술집은 어느 시대에나 반드시 있다. 100년 전에도 있었으며, 100년 뒤에도 있을 것이다.
내가 이 술집에 들어간 것은 그 근처를 걷고 있을 때, 갑자기 비가 내려서였다. 나는 시부야에서 업무에 관한 협의를 끝내고, 천천히 거닐면서 '파이드파이퍼'로 음반을 구경하러 가는 도중에 비를 만났던 것이다.
아직 이른 저녁때라서 술집 안에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고, 거리에 접한 벽에는 유리가 끼워져 있었기 때문에, 비가 내리는 상태를 보면서 맥주라도 마시면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리고 가방 속에는 방금 산 책이 몇 권 들어 있었기 때문에 시간을 때우는 데 애를 먹을 염려가 없었다.
메뉴를 보니까, 수입 맥주만도 그 가짓수가 스무 개 정도는 되어 보였다. 나는 그중 적당한 맥주를 고르고, 안주는 잠시 망설이다가 피스타치오를 주문했다.
여름의 막바지라서 거리에는 여름의 끝에 걸맞는 공기가 떠돌고 있었다. 햇볕에 살을 태운 여자들은 '그런 것쯤은 알고 있다구요' 하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굵은 빗방울이 아스팔트를 눈 깜짝할 사이에 검게 물들이고, 거리의 열을 식혔다.
그 시끌시끌한 무리가 우산을 탁탁 접으면서 술집으로 뛰어들어온 것은, 내가 소울 벨로우의 새로운 소설을 읽고 있을 때였다. 그 소설은 소울 벨로우의 대부분의 소설이 그렇듯이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며 시간이나 때우기 위해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책을 덮고 피스타치오의 껍질을 벗기면서 그들을 관찰했다.
그들은 전부 일곱 명으로, 남자 네 명에 여자가 세 명이었다. 나이는 얼핏 보기에 스물한 살에서 스물아홉 살로 유행의 최첨단을 걷는다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모두 정확히 시류에 맞춘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머리칼을 꺼벙하게 세우거나, 헐렁한 누더기 알로하 셔츠를 걸치거나, 통 넓은 바지를 입거나, 검은 테의 둥근 안경을 쓰거나, 한 옷차림이었다.
그들은 술집 안으로 들어오더니, 중앙에 있는 계란 모양의 커다란 테이블 주위에 앉았다. 자주 이 집에 드나드는 것처럼 보였는데, 아니나다를까 아무도 주문을 하지 않았는데도 위스키와 얼음 통이 나왔다.
웨이터가 모두에게 메뉴를 돌렸다. 그들이 도대체 어떠한 부류의 사람들인지는 알 수가 없었으나, 지금부터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에 대해서는 대충 상상을 할 수 있었다. 아마도 업무의 기획을 위한 모임이든가, 업무의 반성회든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어느쪽이든 간에, 술에 취해서 같은 말을 계속 되풀이한 뒤 약속을 하고 헤어질 것이다.
여자 한 명이 곤드레만드레 취해서 남자가 택시로 아파트까지 데려다 주고, 재수가 좋으면 내친 김에 침대에 같이 들어가게 된다. 백년 전부터 계속되고 있는 고전적인 모임이다.
나는 그 그룹을 관찰하는 것에도 싫증이 나자, 창 밖의 경치를 바라보았다. 비는 아직도 내리고 있었다. 하늘은 변함없이 뚜껑이라도 뒤집어쓴 듯이 새까맸다. 예상보다는 비가 오랫동안 계속 내릴 것 같았다.
도로 양 옆에서는 빗물이 모여서 빠른 시냇물을 이루고 있었다. 술집 건너쪽에는 오래된 반찬 가게가 있었는데, 콩자반이라든가 무말랭이 같은 것이 유리 상자 안에 진열되어 있었다. 소형트럭 밑에서는 커다란 흰 고양이가 비를 피하고 있다.
한참 동안 멍하니 그런 풍경을 바라보고 나서, 술집 안으로 눈을 돌렸다. 피스타치오를 몇 개 까 먹으면서 책을 계속 읽을까말까 생각하고 있으려니까, 여자 한 명이 내 테이블로 다가와서 내 이름을 불렀다. 아까 들어 온 일곱 명 중 한 명이었다.
"맞죠?"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렇습니다" 하고 나는 깜짝 놀라서 대답했다.
"저 기억하세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는 기억은 있으나, 누군지는 잘 모르겠다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여자는 나의 맞은편에 놓여 있는 의자를 끌어당겨 거기에 걸터앉았다.
"언젠가 무라카미 씨와 인터뷰를 했잖아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러고 보니까 분명히 그랬었다. 내가 첫 소설을 출판했을 무렵이니까, 지금으로부터 5년쯤 전에 그녀는 어떤 일류 출판사가 내고 있는 여성 대상의 월간 잡지의 편집자로서 신간 소개를 맡고 있었는데, 거기에 나의 인터뷰 기사를 실어 주었다.
그것은 내가 작가가 되고 나서 한 최초의 인터뷰였다. 그녀는 그때 긴 머리에 우아한 원피스를 단정하게 입고 있었다. 아마 나보다 네 살이나 다섯 살 연하였던 것 같다.
"너무 느낌이 달라져서 몰라 봤어요" 하고 나는 말했다.
"그래요?" 하고 그녀는 말하고 웃었다.
그녀는 머리를 요즘에 유행하는 모양으로 깎았고, 자전거의 방수포로 만든 것 같은 헐렁한 카키색 셔츠를 입고, 귀에다가는 모빌 같은 금속 조각을 두 개 달고 있었다. 미인이라고 해도 될 만한 부류였고, 이목구비가 뚜렷해 그러한 차림이 그런대로 잘 어울렸다.
나는 웨이터를 불러서 위스키의 온더록을 더블로 주문했다. 웨이터가 위스키는 무엇이 좋겠느냐고 물었다. 시험삼아 시바스리갈 있느냐고 물으니까, 있다고 했다. 그러고는 그녀에게 무엇을 마시겠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같은 것으로 하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시바스 리갈의 온더록을 더블로 두 잔 주문했다.
"저쪽에는 가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하고 나는 중앙의 테이블을 흘끗 쳐다보면서 물었다.
"괜찮아요. 일 때문에 만나서 마시고 있는 것뿐이고, 게다가 일은 벌써 끝난 거나 다름없으니까요."
위스키가 도착하자 우리는 잔에 입을 갖다 댔다. 언제나와 다름없는 시바스 리갈의 냄새가 났다.
"무라카미 씨, 그 잡지 망한 거 아시죠?" 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까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잡지로서의 평판을 그리 나쁘지 않았지만, 팔리는 게 시원치 않아서 2년쯤 전에 회사를 정리했는 얘길 말이다.
"그래서 그때 저도 총무과로 옮기게 됐어요.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꽤나 끈질기게 항의를 했지만, 결국은 회사 뜻대로 되고, 그런 저런 일로 인해서 저는 회사를 그만둬 버렸어요."
"꽤 괜찮은 잡지였는데" 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가 회사를 그만 둔 것은 2년 전의 봄으로, 그 일을 전후로 해서 그녀는 3년 동안 사귀어 온 연인과도 헤어지게 되었다. 이유를 말하자면 이야기가 길어지지만, 이 두 가지 사건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간단하게 말하면, 그와 그녀는 같은 출판사의 편집자였던 것이다. 남자 쪽은 그녀보다 열 살이 위고, 아이도 두 명이나 있는 유부남이었다. 남자는 처음부터, 아내와 이혼하고서 그녀와 결혼할 생각이 없었고, 그녀에게도 그런 사정을 분명히 설명해 주었다. 그녀 또한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자택이 다나시에 있어서, 센다가야 근처에 회원제 호텔방을 빌려 가지고, 일이 바빠지면 1주일에 2∼3일은 그 곳에서 잤다. 그녀도 1주일에 하루는 그 곳에서 잤다. 결코 무리해서 데이트는 하지 않았다. 그와 같은 세밀한 부분에 대해서는 남자 쪽이 신중해서 그녀도 마음은 편했다.
그래서 두 사람의 관계는 3년 간이나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지속되었다. 편집부 사람들은 두 사람의 사이가 나쁘다고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대단하죠?" 하고 그녀는 나에게 말했다.
"그렇군요"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러나 흔히 있는 이야기였다.
잡지의 폐간이 결정되고, 인사 이동이 발표되어 남자는 여성 주간지의 부편집장으로 발령이 났고, 여자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총무과로 발령이 났다.
여자는 편집자로서 입사했으니까, 편집 일 자리로 이동시켜 달라고 회사에 항의했으나, 회사측은 잡지 전체의 정원이 현실적으로 부족해 편집자만 늘릴 수는 없다며 거절했다. 그 대신에 1년이나 2년쯤 후에 다시 편집 일로 돌려주겠다고 약속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이 그렇게 운 좋게 풀릴 것이라고는 그녀는 생각하지 않았다.
한번 편집 분야에서 탈락된 사원이 두 번 다시 이전의 부서로 돌아가지 못하고, 판매과나 총무과에서 서류에 둘러싸인 채 시들어 가는 예를 그녀는 여러 번 보았기 때문이다.
공백 기간이 1년이 2년 되고, 2년이 3년 되고, 3년이 4년 되고, 그리고 자꾸만 나이를 먹어 가면서 편집자로서의 감각을 상실하고 마는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는 되고 싶지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을 같은 부서로 데려가 달라고 연인에게 부탁해 보았다. 물론 그렇게 되도록 노력은 해보겠지만, 아마 무리일 거라고 남자는 말했다. 지금 현재 자기의 발언력은 너무나 한정된 것이고, 게다가 너무 시끄럽게 떠들어대서 우리의 관계가 탄로나는 것도 곤란하다는 이유에서다. 그보다는 1∼2년 간 총무과에서 참고 있으면, 그 동안에 자기가 힘을 써서 어떻게 해보겠다고, 그게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남자는 말했다.
거짓말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남자는 사실은 겁을 집어먹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높은 그네에 뛰어올라 탈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머리 속이 복잡해, 그녀를 위해서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할 생각이 없었다.
남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녀는 테이블 밑에서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 사람도 저 사람도 모두가 그녀를 짓밟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남자에게 커피를 끼얹어 버릴까 생각했지만, 결국 바보스럽다고 느껴져 그만두었다.
그녀는 "그렇군요.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하고 남자에게 말하고 생긋이 웃었다. 그리고 그 이튿날 사표를 냈다.
"이런 이야기 듣고 있으면 지루하지 않으세요?" 하고 묻고는 그녀는 위스키를 한 모금 핥듯이 마시고, 매니큐어를 칠한 예쁜 엄지손가락의 손톱으로 피스타치오 껍집을 벗겼다.
그녀가 나보다 더 경쾌한 소리를 내면서 피스타치오 껍질을 벗기는 것 같았다.
별루 지루하지 않다고, 나는 그녀의 엄지손가락의 손톱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녀는 두 개로 쪼개진 껍질은 재떨이에 넣고 알맹이는 입으로 가져 갔다.
"어째서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죠? 하지만 아까 무라카미 씨를 발견했을 때 왠지 반가웠거든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반가웠다고요?"
나는 약간 놀라서 반문했다. 나는 그때까지 그녀와는 두 번밖에 만난 적이 없었고, 그때는 특별히 친근하게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었다.
"그러니까 뭐라고 할까요, 옛날 친구를 만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지금은 이미 다른 세계에 있지만 한때는 매우 소중한 관계를 맺었던 상대라고 할까……, 사실은 그 정도로 구체적으로 관계를 맺은 것도 아니지만요. 하지만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실 수 있겠지요?"
알 것 같다고 나는 말했다. 즉 그녀에게 있어서 나라고 하는 인간은 기호적인 ㅡ좀더 호의적으로 말하면, 축제적이고 의식적인ㅡ 존재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나라고 하는 존재는 그녀가 일상적 평면으로 파악하는 세계에서는 참다운 의미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왠지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렇다면 나라고 하는 인간은 도대체 어떤 종류의 일상적 평면에 속해 있는 것일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것은 어려운 문제였다. 게다가 그녀하고는 상관없는 문제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 일에 대해서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하고 말했을 뿐이다.
그녀는 피스타치오를 다시 한 개 집어 들고, 아까처럼 엄지손가락의 손톱을 사용해서 껍질을 벗겼다.
"한 가지 알아줬으면 하는 것은요, 누구에게나 나에 관한 얘기를 늘어놓지는 않는다는 거예요. 솔직히 이런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하는 건 당신이 처음이에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창 밖에서는 아직도 여름 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손안에서 주물럭거리던 피스타치오 껍질을 재떨이에 버리고 나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녀는 회사를 그만두자마자 일 관계로 알게 된 편집자 동료나 카매라맨, 자유 기고가들에게 닥치는 대로 전화를 걸어서, 회사를 그만두었다는 얘기와 새로운 일자리를 찾고 있다는 얘길 했다. 그 가운데 몇 사람은 일자리를 알아봐 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그 자리에서 내일부터 출근하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대개는 홍보지나 지방 소식지, 패션 메이커의 팸플릿과 같은 걸 만드는 작은 일이었으나, 그래도 대기업에서 전표 정리를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일단 두 곳이 내정되고, 그 두 곳에서 받는 수입을 합쳐 보니, 지금보다는 못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한 달 후에 나가기로 해놓고, 그 동안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짧은 여행을 다녀오거나 하면서 보내기로 결심했다.
많은 액수는 아니었지만, 일단 퇴직금이 있었기 때문에 생활비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잡지 시절에 알게 된 헤어 디자이너를 찾아가서,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이 머리로 짧게 잘라 달라고 부탁하고, 그 디자이너가 단골로 다니는 양장점을 돌아 다니면서 새로운 헤어스타일에 걸맞는 옷과 구두와 핸드백과 액세서리를 사들였다.
회사를 그만둔 지 이틀째 되는 날 저녁때에, 옛 동료며 애인이었던 남자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상대가 이름을 말하자,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15초 뒤에 다시 전화 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다시 들어보니 그 남자였다. 그녀는 이번에는 전화를 끊지 않고, 수화기를 숄더 백 속에 쑤셔 넣고 지퍼를 잠갔다. 그 이후 두 번 다시 전화는 걸려 오지 않았다.
그 한 달 간의 휴식 시간은 느긋하게 흘러갔다. 여행은 가지 않았다. 잘 생각해 보니까, 본래 여행을 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으며, 게다가 남자와 헤어진 스물여덟 살 난 여자가 혼자 여행을 떠나는 것도 너무나 통속적이어서 김이 새버렸다.
그녀는 사흘 동안 다섯 편의 영화를 보고, 음악회에 가고, 롯폰기의 라이브 하우스에 가서 재즈를 들었다. 그리고 시간이 있을 때 읽을 요량으로 사두었던 책을 모조리 읽었다. 음반도 들었다. 스포츠 용품점에서 조깅 운동화와 러닝 팬티도 사서 근처를 매일 15분 가량 달려 보았다.
처음 1주일 동안은 잘해 나갔다. 번잡하고 신경을 마모시키는 일에서 해방되어 마음껏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멋진 일이었다. 마음이 내키면 음식을 만들고, 해가 저물면 혼자 맥주를 마시거나 포도주를 마셨다.
그러나 열흘이 지나고 나서부터는 무엇인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더 이상 보러 가고 싶은 영화도 없었고, 음악 소리가 시끄럽기만 해서 LP 한 장을 끝까지 들을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책을 읽으면 머리가 아팠다. 음식을 만들면 어느 것이나 다 김빠진 맛이 낫다.
어느 날 괴상하게 생긴 학생 같은 남자가 뒤를 쫓아와서 조깅은 아예 그만두어 버렸다. 이상하게 신경이 곤두서서 한밤중에 깨기도 하고, 어둠 속에서 계속 누군가가 자기를 응시하고 있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그녀는 그럴 때마다 하늘이 희뿌옇게 밝아 올 때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떨었다. 식욕이 떨어지고 하루 종일 짜증만 났다. 더 이상 무엇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그녀는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닥치는 대로 전화를 걸어 보았다. 그 가운데 몇 사람인가는 얘기를 들어주거나 의논 상대가 되어 주었지만, 그들도 일이 바빠서 한없이 그녀를 상대해 줄 수는 없었다. 그들은 앞으로 2∼3일 후면 지금의 일이 일단락 지어지니까, 그때 천천히 한잔하러 가자고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2∼3일이 지나도 술을 마시자는 전화는 걸려 오지 않았다. 하던 일이 일단 끝나기는 했지만, 갑자기 또 다른 일이 생긴 것이다. 그녀 자신도 지난 6년 간 줄곧 그러한 생활을 되풀이해 왔기 때문에,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기 쪽에서 전화를 걸어서 상대를 귀찮게 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해가 저물고 난 뒤에 집에 있는 것이 따분해 밤이 되면, 새로 구입한 옷을 입고 롯폰기나 아오야마 부근의 아담한 바에서 지하철이 끊어질 때까지, 혼자서 칵테일을 홀짝홀짝 마시곤 했다.
운이 좋으면 그 곳에서 옛날 동료를 만나서 잡담을 하며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다. 운이 나쁘면 (그러한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아무도 만나지를 못했다. 더욱 운이 나쁘면, 돌아오는 마지막 지하철 안에서 모르는 남자의 정액이 스커트에 묻기도 하고, 택시 운전사에게 유혹을 당하기도 했다.
수많은 인간이 북적거리는 대도시 속에서, 그녀는 견딜 수 없이 고독하다고 느꼈다.
처음으로 그녀가 함께 잔 상대는 중년의 의사였다. 그는 핸섬하고, 값비싼 양복을 입었고 ㅡ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ㅡ 쉰 한 살이었다. 그녀가 롯폰기의 재즈 클럽에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으려니까, 그 남자가 옆으로 다가와서, "아무래도 당신이 기다리는 분은 오지 않는 것 같군요. 저도 사실은 그렇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어느 한 쪽의 상대가 올 때까지만이라도" 하는 식으로 틀에 박힌 말을 했다. 낡아 빠진 수법이었으나, 그의 목소리가 상당히 좋아서 그녀는 잠시 망설인 뒤에 "괜찮아요. 앉으세요" 하고 말했다.
그 뒤에 한동안 둘이서 재즈를 듣고(밍밍한 설탕물 같은 피아노 트리오), 술을 마시면서 (그가 맡겨 놓은 잭 다니엘스) 잡담을 나눴다 (롯폰기의 옛날이야기).
물론 그의 상대는 나타나지 않았다. 열한 시가 지나자, 그는 어딘가 조용한 곳으로 식사를 하러 가자고 했다. 그녀는 지금부터 고엔지까지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럼, 자동차로 태워다 드리지요, 하고 그는 말했다. 태워다 주지 않아도 돌아갈 수 있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저는 이 근처에 방을 가지고 있는데, 아예 그 곳에서 자고 가면. 물론 당신이 싫다면 이상한 짓은 하지 않을 테니까요, 하고 그는 말했다.
그녀는 잠자코 있었다.
그도 잠자코 있었다.
나는 비싸다구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어째서 그런 말을 하게 되었는지, 그녀 자신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말이 극히 자연스럽게 입에서 나와 버린 것이다. 일단 나온 말을 다시 집어 넣을 수는 없어서 그녀는 입술을 꽉 물고 상대방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상대방은 싱긋이 웃고, 잔에 새로 위스키를 따랐다.
"좋아요. 그러면 금액을 말해 보세요" 하고 상대는 말했다.
"7만 엔" 하고 그녀는 즉각 대답했다.
어째서 7만 엔 인가? 전혀 근거가 없다. 그래도 그녀는 7만 엔이 아니면 안 될 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7만 엔이라고 말하면, 남자가 거절할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7만 엔에 풀 코스 프랑스 요리를 덧붙이겠소" 라고 남자는 말하고는 위스키 잔을 단숨에 비우고 일어섰다.
"자아, 가실까요?" 하고 남자는 말했다.
"의사라고 했나요? 하고 나는 그녀에게 물어 보았다.
"네, 그래요"
"무슨 의사였지요? 그러니까 전문이 뭐냐는 말인데."
"세타가야에서 수의사 일을 한다고 하더군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수의사……."
나로서는 수의사가 여자를 산다는 것을 한 순간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물론 수의사도 여자를 산다.수의사는 그녀에게 프랑스 요리를 사주고는 가미야의 교차로 부근에 있는 그의 원 룸 맨션으로 데리고 갔다. 그는 그녀를 부드럽게 다루었다. 난폭하게 행동하지도 않았고, 변태적인 구석도 없었다. 두 사람은 천천히 성교를 하고, 한 시간만에 다시 한 번 성교를 했다.
그녀는 이런 상황에 빠져 든 것에 대해서 무척 당황해 했는데, 그가 차분히 애무를 해주는 사이에, 쓸데없는 생각을 안 하게 되고 섹스에 점점 몰입해 들어갔다.
남자가 페니스를 빼내고 샤워를 하러 간 뒤에, 그녀는 한동안 침대 위에 누워서 꼼짝 않고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는 지난 며칠 동안 줄곧 내부에 맺혀 있던 형용할 수 없는 짜증스러움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을 깨달았다. 제기랄,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어떻게 하다가 이렇게 되어 버린 거지?
아침 열 시에 그녀가 잠에서 깨어 보니까, 남자는 벌써 일을 나가고 없었다. 책상 위에 1만엔짜리 지폐가 일곱 장 든 봉투가 놓여 있고, 그 옆에는 방 열쇠가 있었다.
편지도 있었는데, 열쇠는 우편함에 넣어 두라고 씌어 있었다. 냉장고에 애플파이와 우유와 과일이 들어 있다고도 씌어 있었다.
"만일 괜찮다면 가까운 시일 내에 다시 만나고 싶으니까, 그럴 마음이 생기거든 이곳으로 전화해 주기 바라오. 한 시부터 다섯시까지는 반드시 있으니까" 라는 글귀도 눈에 띄었다.
그리고 병원의 명함이 끼어 있었다. 명함에는 전화 번호가 있었다. 그녀는 그 편지와 명함을 갈기갈기 찢은 후에 싱크대에서 태웠다. 돈은 핸드백에 쑤셔 넣었다. 냉장고 안의 음식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택시를 타고 자기 아파트로 돌아왔다.
"그 뒤에도 몇 차례인가 돈을 받고 다른 사람과 잤어요" 하고 그녀는 나에게 말했다. 그러고는 입을 다물었다.
나는 테이블에 양쪽 팔꿈치를 괴고 입술 앞에서 깍지를 꼈다. 그러고는 웨이터를 불러서 위스키를 두 잔 더 부탁했다.
잠시 위에 위스키가 나왔다.
"뭐 좀 먹겠어요?" 하고 나는 물어 보았다.
"아뇨, 괜찮아요. 정말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하고 그녀는 말했다.
우리는 다시 홀짝홀짝 위스키를 마셨다.
"질문을 해도 괜찮겠어요? 사생활에 관한 질문인데요"
"물론 괜찮아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조금 눈을 크게 뜨고 내 얼굴을 바라보면서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싶으니까, 지금 이렇게 무라카미 씨에게 털어놓고 있는 거 아니겠어요" 하고 덧붙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얼마 남지 않은 피스타치오의 껍질을 벗겼다.
"수의사와 잘 때말고도 금액은 언제나 7만 엔이었나요?"
"아니에요. 그렇지는 않았죠. 그때그때에 따라서 입에서 튀어 나오는 금액이 달라요. 제일 비쌀 때가 8만 엔, 제일 쌀 때가 4만 엔이었을 거예요. 상대방의 얼굴을 보고 직감적으로 숫자가 나오는 거예요. 금액을 말해서 거절당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대단하군요" 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웃었다.
그녀는 그 휴식 기간 동안에 전부 다섯 명의 남자와 잤다. 상대는 모두 40대나 50대의 세련된, 바람을 피우는 데 익숙한 남자들이었다. 그녀는 아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을 것 같은 술집에서 남자를 헌팅하고, 한 번 남자를 낚았던 술집에는 두 번 다시 가지 않았다. 대개는 남자가 호텔 방을 잡고 그 곳에서 잤다.
딱 한 번 이상한 일이 있었지만, 그 밖의 상대는 모두 정상적이었다. 돈도 약속대로 받았다.
그리고 그녀의 '휴가'는 끝났다. 다시 일에 쫓기는 나날로 돌아온 것이다. 홍보지나 지방 소식지, 팸플릿은 큰 잡지가 갖는 특권이나 사회적 영향력은 없지만, 또 그만큼 모든 걸 재량껏 할 수가 있었다.
옛날과 현재를 비교해 보면 지금이 더 행복했다. 그녀에게는 두 살 위인 카메라맨 남자 친구가 있어서, 더 이상 돈을 받고 다른 남자와 자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지금 현재는 일이 재미있어서 빨리 결혼할 생각은 없지만, 앞으로 2∼3년 후에는 그런 마음이 들지도 모르겠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렇게 되면, 무라카미 씨에게도 연락할게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수첩의 메모란에 주소를 적고, 그것을 찢어서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고맙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여러 남자들과 자고서 받은 돈은 결국 어떻게 했나요?" 하고 나는 질문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위스키를 마시더니 낄낄거리며 웃었다.
"어떻게 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모르겠는데요" 하고 나는 대답했다.
"전부 3년짜리 정기 적금에 넣었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웃었고, 그녀도 따라 웃었다.
"그때쯤에는 결혼이니 뭐니 해서, 아무리 돈이 많아도 모자랄 것 같으니까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글쎄, 그럴지도 모르죠" 하고 나는 말했다.
중앙 테이블의 그룹이 커다란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이제 그만 가봐야겠어요. 지루한 이야기를 들려 드려서 죄송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이런 식으로 말해도 좋을지는 모르지만, 재미있는 이야기였어요" 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나 생긋이 웃었다. 웃는 얼굴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만일, 내가 돈을 내고 당신과 자고 싶다고 한다면 말이예요. 만일" 하고 나는 말했다.
"그래서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당신은 얼마를 부르겠어요?"
그녀는 입술을 조금 벌려 숨을 들이쉬고 3초 가량 생각했다. 그러고는 다시 한 번 생긋이 웃더니 "2만 엔이요" 라고 대답했다.
나는 바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가지고, 안에 얼마나 들어 있는지 봤다. 전부 3만 8,000엔이었다.
"2만 엔에다 호텔비, 그리고 여기서 마신 술값과 돌아가는 지하철비, 그 정도 아닐까요?"
정말이지 그녀의 말 그대로였다.
"잘 가요" 하고 나는 말했다.
"안녕히 가세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밖으로 나오자, 비는 이미 그쳐 있었다. 여름 비라서 그다지 오래 내리지 않는 모양이다. 하늘을 올려다보니까 신기하게도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반찬 가게는 벌써 오래 전에 문을 닫았고, 고양이가 비를 피하던 소형 트럭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오모테산 도로까지 걸어갔는데, 배가 고파 가게에 들어가 장어를 먹었다.
나는 장어를 먹으면서, 2만 엔을 지불하고 그녀와 자는 것을 상상해 보았다. 그녀와 자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을 것 같았으나, 돈을 지불하는 것은 좀 이상할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그 옛날 섹스가 산불처럼 공짜였던 시절을 떠올렸다. 정말로 산불처럼 공짜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