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에선 구조 작업이
계속되고 있는지도 몰라.
아니면 모두들 단념하고
이젠 물러났을지도 몰라.
ㅡ<뉴욕 탄광의 비극>ㅡ

(작사.노래 : 비지스)


태풍이나 집중 호우가 들이닥칠 때마다 동물원으로 발걸음을 옮기곤 하는 다소 기묘한 습관을, 10년 이래 꾸준히 지켜 온 사내가 있다. 그는 나의 친구다. 그는 동물원에서 걸어서 15분 정도 걸리는 곳에 살고 있다.
태풍이 거리에 접근해서,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들이 덜컹거리는 덧문을 닫거나, 생수를 사러 내달리거나, 트랜지스터 라디오와 회중 전등의 상태를 확인할 무렵이 되면, 그는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었던 시절에 입수한 미군용 판초로 몸을 감싸고, 양쪽 주머니에 캔맥주를 쑤셔 넣은채 동물원으로 향했다. 그는 이를 위해, 태풍이 불면 늘 회사를 쉬곤 했다.
운이 나쁘면, 동물원의 문은 닫혀져 있었다.
금일은 악천후로 휴원 합니다.
그것은 글쎄, 그럴 만도 한 일이었다. 도대체 누가 일부러 태풍이 오는 오후에 '기린'이랑 '얼룩말'을 구경하러 동물원을 찾아온단 말인가?
그는 선뜻 단념하고 정문앞에 줄지어 선 다람쥐 석상에 걸터 앉아, 약간 미지근해진 캔맥주를 마시고 나서 집으로 돌아온다.
운이 좋은 날은 동물원 문이 열려 있었다.
그는 요금을 내고 안으로 들어가, 이내 질척질척하게 젖어 버린 담배를 애써 피우면서, 동물들을 한마리 한마리 꼼꼼히 구경하고 다녔다. 손님은 거의 없었다. 동물들은 모두 우리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들은 얼빠진 듯한 멍청한 눈으로 창을 통해 빗줄기를 바라보거나, 강풍속을 흥분해서 뛰어다니거나, 급격한 기압의 변화에 겁을 먹거나, 화를 내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벵갈 호랑이 우리 앞에 앉아서 캔맥주 하나를 마시고(태풍이 불면 언제나 벵갈 호랑이가 가장 화를 내곤 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고릴라 우리 앞에서 두번째 맥주를 마셨다.
고릴라는 태풍보다도 사람의 모양새쪽에 맣은 흥미를 가지는 것 같았다. 반은 물고기 같은 모습으로 콘크리트 마룻바닥에 앉아서 캔맥주를 마시고 있는 그를, 고릴라가 언제나 가엾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곤 했다.
"마치 고장 난 엘리베이터에 공교롭게도 단둘이 타게 된 것 같은 느낌이야." 하고 그는 말했다.
하긴 태풍이 부는 날 오후의 그런 행동을 제외하면, 그는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었다. 별로 유명하지는 않지만, 아담하고 인상이 좋은 외국인 무역 회사에 근무했고, 산뜻한 아파트에서 혼자 살았다.
그는 반년마다 여자친구를 바꿨는데,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토록 부지런히 여자친구를 갈아대는지, 나로선 아무래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녀들은 모두 세포 분열이라도 한 것처럼 꼭 닮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로선 분별할 수가 없었다.
많이 사람들은 웬일인지 그를 평범하며 둔중하다고 필요 이상으로 믿어 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로서는 사람들의 그런 테도가 전혀 신경쓰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상태가 나쁘지 않은 중고차와 발자크 전집을 가지고 있었으며, 장례식에 입고 가기에 안성맞춤인 검정 양복과 검정 넥타이와 검정 가죽 구두를 가지고 있었다.
누군가 죽어서 장례식에 참석하게 되면, 나는 으레 그에게 전화를 걸곤 했다. 양복과 넥타이와 가죽 구두를 빌리기 위해서다. 양복과 가죽 구두는 나에겐 한 치수씩 더 컸지만, 물론 그 이상의 사치를 말할 처지는 못 되었다.
"미안해. 또 장례식이야" 하고 내가 말하면, 그는 늘 "어서, 어서, 급할텐데. 앞으로 또 가지러 와도 괜찮아" 라고 했다.
그곳에 가면, 테이블 위에는 말쑥히 다림질한 양복과 넥타이가 이미 갖춰져 있었고, 구두는 광이 나 있었으며, 냉장고에는 외국산산 맥주가 알맞게 차가워져 있었다.
무엇이든 언제라도 곧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었다. 그런 타입의 남자였다. 분명 그러한 인간이 아니고선, 반년마다 여자친구를 바꾸는 귀찮은 짓은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 동물원에서 고양이를 봤어." 하고 그는 맥주마개를 따면서 나에게 말했다.
"고양이?"
"응, 한 2주일 전에 출장으로 훗카이도에 갔었는데, 그때 근처 동물원에 들어가 봤지. 그곳에 '고양이' 라는 팻말이 걸린 조그만 우리가 있었는데 말이지, 그 안에 고양이가 자고 있지 뭐야."
"어떤 고양이?"
"보통 고양이야. 어디에나 있는 그런 것. 갈색 줄무늬에 꼬리가 짧고, 지독히 살찐 놈이었어. 그것이 그저, '벌렁' 드러누워서 뒹굴고 있더란 말일세."
"훗카이도에선 고양이가 진기한가 보지?"
"농담 마, 훗카이도에도 고양이쯤은 있어. 그런 게 진귀할 리가 없다구."
그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거꾸로 말하자면, 어째서 고양이가 동물원에 들어가 있으면 안된다는 거지? 고양이 역시 동물이잖아."
"그건 습관이야. 고양이나 개는 '흔해빠진' 동물이거든. 일부러 동물원까지 가서 구경할 만한 것은 못 된다는 거지. 주위만 둘러봐도 얼마든지 있어" 하고서 그는 덧붙였다. "인간과 마찬가지지."
둘이서 반 상자 가량의  맥주를 마시고 나자, 그는 커다란 백화점 봉투에다 넥타이와 비닐 커버를 씌운 양복과 구두 상자를 꼼꼼하게 챙겨 주었다.
"늘 미안해. 내 돈 내고 사야 된다고 생각은 하는데 어째 사게 되지를 않아. 상복을 사면, 어째 누가 죽는 걸 인정해 버리는 것 같아서 말이야."
"신경 쓸 것 없어. 어차피 나는 사용하지도 않는걸. 양복 입장에서 보더라도 무의미하게 걸려 있기보다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편이 기분 좋겠지."
그 자신은 삼 년 전에 그  장례식용 양복을 맞추고 나서 한 번도 그걸 사용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이 양복을 맞춘 이래로 누구 한 사람 죽지 않는단 말야" 하고 그가 말했다.
"모두 그런 식이야. 전부 그러게 마련이야." 하고 나는 말했다.
" 정말그래. "
정말이지, 그해에는 장례식이 굉장히 많았다. 내 주위에서는, 친구와 예전의 친구들이 차례차례 죽어 갔다. 마치 가문 여름날의 옥수수밭 같은 광경이었다.
내가 스물여덟 살 되던 해의 일이다.
주위의 친구들도 대강 비슷한 나이였다. 스물 일곱, 스물 여덟, 스물 아홉,... 그건 죽음과는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나이다. 시인은 스물하나에 죽고, 혁명가와 로큰롤 가수는 스물넷에 죽는다.
그것만 지나고 나면, 당분간은 어떻게든 잘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게 우리들 대부분의 예측이었다.
전설의 '불길한 커브'도 지나갔으며, 조명이 어두운 습기 찬 터널도 뚫고 나왔다. 이제는 곧게 뻗은 6차선 도로를 (별로 내키지는 않지만) 목적지를 향해 내달리기만 하면 되는 셈이다.
우리들은 머리를 깎고, 매일 아침 수염을 밀었다. 우리들은 이제 시인도, 혁명가도, 로큰롤 가수도 아니란 말이다. 술에 취해 전화 부스 안에서 자거나, 얼이 빠지도록 술을 마시거나, 새벽 4시에 도어즈의 레코드 볼륨을 높여 듣거나 하는 일도 그만두었다.
교제 관계로 생명 보험에도 들었고, 호텔의 바에서 술을 마시게도 되었고, 치과 의사의 영수증도 받아두어 의료비 공제를 받게도 되었다. 아무튼, 이젠 스물여덟이니까····.
예기치 못한 살육이 시작된 것은 그 직후였다. 그것은 참으로 '기습' 이라고 할 만했다.
우리들은 온화한 봄날 햇살 아래에서 한창 양복을 갈아입는 중이었다. 좀처럼 사이즈가 맞지 않거나, 셔츠 소매가 뒤집혀 있거나, 오른쪽 다리는 현실적인 바지에 밀어넣으면서 왼쪽 다리는 비현실적인 바지에 밀어넣어 보거나 하는, 그런 작은 소란을 피웠다.
살육은 기묘한 총성과 함께 찾아왔다.
누군가가 형이상학적인 언덕 위에 형이상학적인 기관총을 대놓고, 우리들을 향해 형이상학적인 탄환을 퍼부어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결국, 죽음은 죽음일 뿐이다. 다시 말해, 모자에서 튀어나오건 보리밭에서 튀어나오건, 토끼는 토끼일 뿐이다.
고열의 '화덕'은 고열의 화덕일 뿐이고,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일 뿐이다.
현실과 비현실(혹은 비현실과 현실) 사이에 가로 놓인 그 어두운 연못을 처음으로 건너뛴 이는, 중학교의 영어 교사로 있던 대학 시절 친구였다. 결혼한 지 삼 년 되었고, 아내는 출산 때문에 연말부터 시코쿠에 있는 친정에 가 있었다.
1월치고는 무척 따뜻한 일요일 오후, 그는 백화점 철물 매장에서 코끼리 귀라도 베어낼 수 있을 것 같은 서독제 면도칼과 면도용 크림 두 통을 사가지고, 집에 돌아와 목욕물을 끓였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얼음을 꺼내, 스카치 위스키 한 병을 비운 뒤, 욕조 속에서 간단히 손목을 자르고 죽었다.
이틀 후에 그의 어머니가 시체를 발견했다. 그리고 경찰이 몰려와 몇 장이나 현장 사진을 찍었다. 욕조는 피로 인해 토마토 주스 같은 색깔을 띠었다.
'자살' 이라는 것이 경찰의 공식 발표였다. 온 집안의 문은 잠겨 있었으며, 그날 면도칼을 산 것은 죽은 본인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가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사용할 가망도 없는 면도용 크림을(그것도 두통씩이나) 샀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이제 몇 시간이 지난 뒤에는 죽어 있을 거라는 생각에 뜻대로 익숙해질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자신이 자살하려고 하는 것을 백화점 점원에게 간파당할 것을 두려워했는지도 모르겠다.
유서도 메모도, 아무것도 없었다. 부엌의 식탁 위에는 글라스와 빈 위스키 병과 얼음을 넣는 그릇, 그리고 두 통의 면도용 크림만이 남아 있었다.
분명히 그는 목욕물이 끓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 헤이그의 온 더 록을 몇 잔이나 목구멍 속으로 흘려 넣으면서, 테이블 위의 면도용 크림통을 줄곧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이런 식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두 번 다시 수염을 깎지 않아도 된다.
스물여덟 살 청년의 죽음은 겨울 비처럼 어쩐지 서글프다.
그것에 이어진 12개월 동안, 네 명의 인간이 죽었다.
3월에는 사우디아라비아인지 쿠웨이트인지의 유전 사고로 한 명이 죽었고, 6월에는 두 명이 죽었다. 심부전증과 교통 사고다. 7월에서 11월까지, 평화로운 계절이 이어진 다음, 12월 중순에 마지막 한 명이 역시 교통 사고로 죽었다.
맨 처음 자살한 친구를 제외하면, 모두가 죽음을 의식할 겨를도 없이 눈 깜짝 할 사이에 죽어 갔다. 늘 오르내리던 계단을 아무 생각없이 걷다가 발로 디딜 판자 한 장이 뻥 뚫려 있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이부자리를 좀 깔아 주지 않을래?" 하고 한 사내가 아내에게 말했다.
6월에 심부전증으로 죽은 친구다. 그것은 오전 11시의 일이었다. 그는 가구 디자이너였다
아침 9시에 일어나 잠시 동안 자기 방에서 일을 하고는, "어째 졸리는걸" 하며 부엌에 와서 커피를 마셨다. 하지만 졸음은 가시지 않았다.
"좀 자야겠어. 왠지 머리 뒤쪽에서 달그락달그락 소리가 나는걸."
그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왠지 머리 뒤쪽에서 달그락달그락 소리가 나는걸.
그는 이불 속에 들어가 잠든 후, 두 번 다시 깨어나지 않았다.
12월에 죽은 여자아이가 그해에 있어서 최연소 사망자며, 동시에 유일한 여성 사망자기도 했다. 그녀는 스물네 살이었다, 스물네 살, 혁명가와 로큰롤 가수가 죽은 나이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차가운 비가 내리는 저녁, 맥주 회사의 운반 트럭과 콘크리트 전신주 사이에 만들어진 비극적인(그리고 지극히 일상적인) 공간 속에서, 그녀는 압사당하듯 죽어 갔다.  
마지막 장례식의 며칠 뒤엔가, 나는 세탁소에서 갓 돌아온 양복과 답례용 위스키를 안고 양복 주인의 아파트로 찾아갔다.
"참으로 고마워. 번번이 도움을 받는군." 하고 나는 말했다.
냉장고에는 역시 차가운 맥주가 채워져 있었고, 푹신한 소파에서는 희미하게 태양의 냄새가 났다. 탁자 위에는 갓 닦아 놓은 재떨이와 크리스마스용 포인세티아 화분이 있었다.
그는 비닐로 포장된 양복을 받아 들고 막 동면에 들어간 새끼곰을 굴속으로 되돌려주는 듯한 손놀림으로 살며시 옷장 속에 집어 넣었다.
"양복에 장례식 냄새가 배어들지 않았으면 좋을텐데." 하고 나는 말했다.
"양복은 괜찮아. 그야 그걸 위한 양복인걸. 하지만 걱정은 알맹이 쪽이야."
"응. 그래" 하고 나는 말했다.
"여하튼 한 해가 자네에겐 장례식 투성이였지 뭔가."
그는 맞은편 소파에 다리를 내던지고, 맥주를 글라스에 따르면서 그렇게 말했다.
"전부 해서 몇 명이었지?"
"5명." 하고 나는 왼쪽 손가락을 전부 펼쳐 보인 후 "하지만 이제는 끝났겠지" 하고 말했다.
"그렇게 생각해?"
"이젠 충분한 수의 인간들이 죽었잖아."
"어쩐지 피라미드의 저주 비슷한데. 그런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어. 충분한 수의 인간들이 죽을 때까지, 그 저주가 계속 된다는 거지. 붉은 별이 하늘을 맴돌고, 달 그림자가 태양을 덮어 버릴 때까지."
맥주 반 상자를 마셔 버리고, 우리는 위스키를 마시기 시작했다. 겨울의 석양이 완만한 고갯길처럼 방안으로 비쳐 들고 있었다.
"요즘 어째 얼굴 표정이 어둡구나." 하라고 그가 말했다.
"그런가." 하고 내가 말했다.
"틀림없이 밤중에 무언가를 너무 깊이 생각하기 때문일 거야. 난 말이지, 밤중에 깊이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어."
"어떻게?"
"어두운 기분이 들 것 같으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청소를 해. 2시건 3시건, 닥치는 대로 접시도 닦고, 가스레인지도 닦고, 마룻바닥도 걸레질하고, 행주 표백도 하고, 책상 정리도 하고, 양복장 속에 있는 셔츠를 전부 다림질하기도 한단 말이지."
그는 그렇게 말하고서 손가락 끝으로 글라스의 얼음을 빙빙 돌렸다.
"파김치가 될 때까지 그러고 나서는, 술을 한잔만 꿀꺽 마시고 잠들어 버리는 거야. 그것뿐이야. 아침에 일어나 양말을 신을 때쯤해선 대개의 일을 잊어버리지. 무엇을 생각했었는지조차 말이야. 기억이 안 나."
나는 새삼스레 그의 방안을 휘 둘러보았다. 여느 때나 다름없이 지나치리만큼 잘 정돈된 청결한 방이었다.
"한밤중 3시에 사람들은 별별 일을 다 생각하게 마련이거든. 이것저것 말야. 누구나 다 그래. 그러니까 한 사람 한 사람이 거기에 대항할 방법을 생각해 내지 않으면 안돼"
"그럴지도 몰라."
"한밤중 3시에 동물원에 가본 적 있어?"
"아니, 없어"하고 나는 멍하게 대답했다.
"나는 꼭 한 번 있어. 동물원에서 일하고 있던 아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그가 야근할 때 들어갔었지. 사실은 안되는 일이지만 말야."
그리고는 글라스를 흔들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건 실로 기묘한 체험이었지. 말로는 잘 표현할 수 없지만 말이야, 마치 땅바닥 이곳저곳이 소리도 없이 갈라지고, 거기에서부터 무엇인가 기어올라 오는 듯한 그런 느낌이 들었지. 그리고 밤의 어둠 속에서, 글쎄, 땅속에서 기어올라 온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날뛰고 있는 거야. 차가운 공기 덩어리 같은 거라고나 할까. 눈에는 안보여. 하지만 동물들은 '그것'을 느끼지. 그리고 나는 동물들이 느끼는 '그것'을 느꼈어. 결국, 우리들이 딛고 있는 대지는 지구 중심까지 통해 있으며, 그 지구의 중심엔 엄청난 양의 시간이 흡수되어 있다는 거지."
나는 잠자코 있었다.
"두 번 다시는 가고 싶지 않아. 한밤중의 동물원 같은 데는."
"태풍 쪽이 더 좋아?"
"응, 태풍 쪽이 훨씬 나아."
전화 벨이 울렸다. 그는 침실로 가서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느 때처럼 세포 분열적인 그의 여자 친구에게서 온, 세포 분열적으로 끝없이 긴 전화인 것 같았다. 이제 돌아가겠다고 말하려 했지만, 그는 아무리 기다려도 되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단념하고 텔레비전을 켰다. 27인치 컬러 텔레비전으로, 곁에 있는 리모트 컨트롤 스위치에 살짝 손만 대도 소리 없이 채널이 바뀌었다. 스피커가 여섯 개나 달려 있는 덕분에 상당히 좋은 소리가 났다.
나는 그렇게 훌륭한 텔레비전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채널을 위에서 아래까지 되풀이해서 눌러 본 다음 뉴스 쇼를 보기로 결정했다. 국경 분쟁이 있었고, 빌딩 화재가 있었으며, 통화가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자동차의 수입 제한이 있었는가 하면, 동계 수영 대회가 있었고, 일가족 동반 자살이 있었다.
각각의 사건들이 중학교 졸업 사진처럼, 어딘가 조금씩 관련되어 있는 것같이 느껴졌다.
"재미난 뉴스 있었어?"
그가 되돌아와서 그렇게 물었다.
"그저 그래"
"텔레비전은 자주 봐?."
나는 고개를 저었다.
"텔레비전이 없어."
"텔레비전엔 적어도 한 가지 좋은 점은 있지. 그것은 원할 때 끌 수 있다는 거야."
그는 한참 생각하고 나서 말했다
"아무도 뭐라고 안하거든."
그는 리모콘은 손에 들고, 스위치를 '오프(OFF)'로 했다. 그 순간 화면이 꺼졌다. 방안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창 밖은 빌딩 불빛으로 환해지기 시작했다.
한 5분쯤, 우리는 이렇다 할 화재도 없이 위스키를 계속 마셔댔다. 다시 한 번 전화벨이 울렸지만 , 그는 이번에는 못 들은 척했다. 전화벨이 울리기를 멈출 때쯤 해서, 그는 생각난 듯이 텔레비전의 스위치를 다시 '온(ON)'으로 했다.
순식간에 화면이 돌아오고, 뉴스 해설자는 등뒤의 꺾은선 그래프를 막대기로 가리키면서 최근의 석유의 가격 변동에 대해 계속 떠들고 있었다.
"봐, 저 친구는 우리가 5분 동안이나 스위치를 끄고 있었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어."
"그야 그렇지."
"어째서? "
생각하는 것이 귀찮아서, 나는 고개를 저었다.
"스위치를 끄는 순간, 어느 쪽인가 존재가 제로가 된 거야. 우리든. 아니면 저 친구든, 어느 쪽이든지 말야. 아무튼 스위치를 살짝 누르기만 해도 관계가 끝나는 거지, 그런 게 편리해."
"글쎄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겠지." 
"생각하는 방식에는 백만 가지도 더 있어. 인도에는 야자나무가 자라고 있고 , 베네수엘라에선 정치범을 헬리콥터로 뿌리고 있고."
그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텔레비전을 껐다.
"남의 일에 대해선 이러쿵저러쿵 말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세상엔 장례식을 치르지 않는 죽음도 있어. 냄새가 안 나는 죽음도 있고." 하고 그는 말했다.
나는 잠자코 수긍했다. 그가 말하려는 뜻을 알 것도 같고 전혀 모를 것도 같았다. 나는 지치고 혼란스러워졌다. 나는 포인세티아의  초록색 잎사귀를 손으로 만지작 거렸다.
"실은 말야, 샴페인이 있어. 지난번 출장 때 프랑스에서 가지고 온 거야. 샴페인의 효능에 대해선 아는 것이 없지만, 확실히 상등품이야. 함께 마시지 않을래? 피로 회복에 도움이 될거야, 틀림없이" 하고 그는 생생한 얼굴로 말했다.
"크리스마스 밤에 어떤 여자와 마시려고 따로 두었던 거 아냐?" 하고 나는 물었다.
그는 냉장한 샴페인 병과 유리잔 두 개를 가지고 와서, 탁자 위에 조용히 놓았다. 그는 시원스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샴페인에는 용도 같은 건 없어. 마개를 따야 할 때가 있을 뿐이야."
"과연." 하고 나는 감탄했다.
우리는 샴페인 마개를 땄다. 그리고 파리의 동물원과 그곳의 동물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확실히 상등품 샴페인이기는 했다.
그해 연말에 조그마한 파티가 있었다.
롯폰기 부근의 가게를 빌려 매년 그믐날 밤에 여는 파티였다. 피아노 삼중주가 있고, 제법 맛있는 요리와 술이 나온다, 아는 사람이 있으면 가볍게 잡담을 한다.
늘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일에 관계된 것이다.), 나는 해마다 그곳에 얼굴을 내민다. 파티라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 모임은 비교적 마음이 편했다. 그믐날 밤에 특별히 하고 싶은 일도 없었고, 적당히 구석 쪽에 앉아 한가롭게 술이나 마시면서 음악을 듣고 있으면 되었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강요하는 사람도 없었고, 무리한 소개를 받아, 채식으로 암을 고치는 따위의 지루한 설교를 들어야 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그날, 누군가 나에게 한 여성을 소개했다. 나는 적당히 잡담을 하고 나서, 여느 때처럼 구석 자리로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물을 탄 글라스를 들고 내 자리까지 따라왔다.
"당신한테 소개해 달라고 제가 부탁했어요" 하고 그녀는 애교 있게 말했다.
그녀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 만큼의 미인은 아니었지만, 괭장히 인상이 좋은 여성이었다. 그리고 적당히 돈을 들여 장만한 파란 실크 원피스가 제법 잘 어울렸다.
나이는 서른 두살 정도였고. 좀더 젊게 보이려고 하면 간단히 해결될 것처럼 보였지만, 그녀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두손에 전부해서 세 개의 반지를 끼었고, 입가에는 안개 낀 저녁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말이 잘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녀와 똑같이 미소지었다.
"당신은 제가 알고 있는 분하고 꼭 닮았어요. 얼굴 생김새부터 키, 분위기, 말투까지 깜짝 놀랄 만큼 똑같네요. 당신이 여기에 오시면서 부터 계속 관찰하고 있었어요"
"그렇게 닮은 사람이 있다니. 한번 만나 보고 싶군요."하고 나는 말했다. 달리 무슨 말이 좋을지 몰랐기 때문이다.
"정말이요?"
"예, 그래요. 자기와 똑같은 사람을 만나면, 도대체 어떤 기분이 들지......"
그녀의 미소가 잠시 깊어지는 듯싶더니 다시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젠 무리예요. 그는 5년 전에 죽고 말았으니까. 바로 지금의 당신과 비슷한 나이였지요."
"그렇습니까."
"제가 죽였어요."
피아노 삼중주가 두 번째 무대를 마친 듯, "짝짝짝짝" 주위에는 내키지 않는 듯한 박수 소리가 일어났다.
"음악을 좋아하세요?" 하고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좋은 세계에서 듣는 좋은 음악이라면 그렇죠." 
"좋은 세계엔 좋은 음악이라는 건 없어요. 좋은 세계의 공기는 진동하지 않는데요." 하고 그녀는 소중한 비밀을 털어놓듯 나에게 말했다.
"과연 그렇군요." 하고 나는 대답했다. 다르게 대답할 도리가 없었다.
"워렌 비티가 나이트 클럽의 피아노 연주자로 나온 영화는 봤어요?"
"아뇨, 보지 못했어요."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클럽의 손님이었죠. 아주 가난하고 비참한 역이었어요."
"흐응."
"그래서 워렌 비티가 엘리자베스한테 묻는 거예요, '무슨 신청곡은 없습니까' 라고요."
"그래서,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무엇을 신청했습니까?"
"잊었어요. 옛날 영화니까요."
그녀는 반지를 반짝거리면서, 물 탄 술을 마셨다.
"하지만 전 신청이라는 걸 싫어해요. 어쩐지 비참한 느낌이 들거든요. 도서관에서 빌려 온 책 같아서 말이죠, 시작되는 순간에 벌써 끝날 때를 생각하게 되는걸요."
그녀가 담배를 물고, 내가 성냥으로 불을 붙여 주었다.
"그건 그렇고, 당신과 꼭 닮은 사람 이야기였죠."
"어떻게 해서 죽였습니까?"
"꿀벌통 속에 던져 넣었어요."
"거짓말이죠?"
"거짓말이에요."
나는 한숨을 쉬는 대신 물 탄 술을 한모금 마셨다. 얼음이 아주 녹아 버려 위스키 맛은 거의 없었다.
"물론 법률상의 살인 같은 건 아니죠. 게다가 도의상의 살인도 아니고요."
"법률상의 살인도 도의상의 살인도 아니라......"
내키지는 않았지만, 나는 거기까지의 요점을 정리해 보았다.
"하지만, 당신은 사람을 죽였잖아요."
"그래요, 당신과 꼭 닮은 사람을요." 하고 그녀는 유쾌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 저쪽에서 누군가 큰소리로 웃었다. 그 소리에 끌려서 주위의 몇 사람이 따라 웃었다.
글라스가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굉장히 먼 곳에서 났지만, 하지만 무서우리만큼 선명하게 들려 왔다.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심장이 커다랗게 부풀어올라, 그것이 위아래로 흔들리는 듯했다.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땅바닥을 걸어 다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5초도 걸리지 않았죠. 죽이는 데 말예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잠깐 동안 침묵이 계속되었다. 그녀는 그 침묵을 곰곰이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자유에 관해 생각해 본 적 있어요?" 하고 그녀가 물었다.
"가끔씩, 그런데 왜 그런 것을 묻죠?"
"데이지 꽃을 그릴 줄 아세요?"
"아마도요 …‥어째 이거 성격 테스트 같군."
"비슷해요." 하고 그녀는 웃었다.
"그래, 저는 통과 했습니까?"
"예, 문제없어요. 걱정할 것 없어요. 당신은 반드시 장수할 테니까. 제 육감이지만."
"대단히 고맙습니다." 
밴드가 <올드 랭 사인>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11시 55분."
그녀는 목걸이 끝에 달린 금시계를 흘깃 바라보고 그렇게 말했다.
"저는 <올드 랭 사인>을 무척 좋아해요. 당신은요?" 하고 그녀가 물었다.
"저는 <언덕 위의 집>쪽이 더 좋은데요, 사슴이랑 들소가 나오니까요."
그녀는 다시 한 번 생긋 웃었다.
"동물을 좋아하시나 봐요?"
"예, 동물을 좋아합니다" 라고 말하며 문득 동물원을 좋아하는 친구와 그의 상복을 떠올렸다.
"당신과 얘기해서 즐거웠어요. 안녕."
"안녕." 하고 나도 말했다.
공기를 절약하기 위해 칸델라(휴대용 석유등)를 끄자, 주위는 칠흑 같은 어둠에 묻혔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5초마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만이 어둠 속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다들, 되도록 숨을 쉬지 말라구. 남은 공기가 적으니까 말이야"
나이 많은 광부가 그렇게 말했다. 나직한 소리였지만, 그래도 천장의 암반이 약간 삐꺽대는 소리를 냈다. 광부들은 어둠 속에서 몸을 서로 기대고, 귀를 기울여, 단 하나의 소리가 들려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곡괭이 소리, 생명의 소리 말이다.
그들은 이미 몇 시간이고 그처럼 기다리고 있었다. 어둠이 조금씩 현실을 용해시켜 갔다. 모든 것이 훨씬 옛날에, 어딘가 먼 세계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여겨졌다. 혹은 모든 것이 먼 앞날에, 어딘가 먼 세계에서 일어날 것 같은 일처럼 여겨졌다.
다들, 되도록 숨을 쉬지 말라구. 남은 공기가 적으니까 말야.
바깥에서는 물론 사람들이 굴을 계속 파고 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