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부에 관하여 1


이 컬럼에는 죽 안자이 미즈마루 씨가 삽화를 그려 주고 있는데, 나로서는 한번만 이라도 좋으니까 안자이 씨에게 아주 그리기 어려운 테마를 주어 고생스럽게 그림을 그리게 해 보려고 꽤나 시도를 했다. 그러나 완성된 그림을 보면, 고심한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아무리 고심한 흔적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프로라지만 약간은 '잘 안된다, 어렵다'는 곤경에 처하게 해 놓고 즐겨 보자는 게 인심이다. 그래서 요 전번에는 '식당차에서 비프 커틀릿을 먹는 롬멜 장군'이란 테마로 글을 써 보았는데, 어김없이 비프 커틀릿을 먹고 있는 롬멜 장군이 담긴 삽화가 그려져 있었다.
그래서 결국은 어려운 테마를 제시하려고 하기 때문에, 나는 영원히 안자이 미즈마루 씨를 쩔쩔매게 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가령 '문어와 커다란 지네의 씨름'이라든가 '수염을 깎고 있는 칼 마르크스를 따스한 눈길로 지켜보고 있는 엥겔스' 같은 테마를 내준다 해도, 안자이 화백은 틀림없이 가볍게 정복해 버릴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떻게 하면 안자이 미즈마루를 당황하게 할 수 있을까? 대답은 한 가지밖에 없다. 단순성이다. 예를 들면 두부처럼 말이다.
신주쿠에 있는 술집 중에 아주 맛있는 두부를 먹을 수 있는 곳이 있는데, 누군가 나를 그곳에 데려갔을 때, 나는 너무 너무 맛있는 나머지 네 모를 연달아 먹어 치웠다. 간장이나 양념, 그런 것을 전혀 뿌리지 않고, 그냥 새하얗고 매끌한 것을 날름 먹어치우는 것이다. 정말 맛있는 두부라면 불필요한 양념을 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영어로 하면 simple as it must be가 될까. 그 두부는 나카노에 있는 손두부집에서 요리집용으로 만드는 두부라고 하는데, 요즘에는 맛있는 두부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자동차 수출도 좋지만, 맛있는 두부의 생산을 격감시키는 국가 구조는 본질적으로 왜곡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두부에 관하여 2


안자이 미즈마루 씨로 하여금 그림의 단순함 때문에 골탕을 먹도록 두부 얘기를 계속한다.
나는 솔직히 말하면 열광적인 두부팬이다. 맥주와 두부와 토마토와 풋콩과 가다랭이 다짐(관서 지방은 갯장어 같은 것도 좋다)만 있으면, 여름 날의 저녁나절은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천국이다. 겨울에는 살짝 데친 두부, 두부 튀김, 구운 두부 오뎅 국, 좌우지간 춘하추동을 불문하고 하루 두 모는 먹는다. 우리 집은 현재 쌀밥을 먹지 않으니까, 실질적으로는 두부가 주식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친구들이 행여 우리 집에 와 저녁 식사라고 내놓으면, 모두 '이게 밥이야!'하고 경악을 금치 못한다. 맥주와 샐러드와 두부와 흰 살 생선과 된장국으로 그만이니까요. 그러나 식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습관이니까 이런 걸 계속 먹고 있노라면, 그게 당연한 것처럼 되어 버려, 남들이 하는 보통 식사를 하면 위에 부담이 간다.
우리 집 근처에 제법 맛있는 손두부를 만드는 두부 가게가 있어, 아주 귀하게 여기고 있었다. 점심 시간 전에 집에서 나와 책방이나 레코드 대여점이나 오락 센터에 갔다가, 메밀국수집이나 스파게티집에서 적당히 점심을 먹고, 저녁 반찬거리를 산 후, 마지막으로 두부를 사 가지고 돌아오는게 나의 일과였다.
두부를 맛있게 먹기 위한 비결이 세 가지 있다. 제일 처음 한 가지는 제대로 된 두부 가게에서 두부를 살 것(슈퍼마켓은 안된다), 그 다음 한 가지는 집으로 돌아오면 곧바로 물을 담은 그릇에 옮겨 냉장고에 보관할 것, 마지막 한 가지는 산 그 날 중으로 다 먹어 치우는 것이다. 그런 고로 두부 가게는 반드시 집 근처에 있어야만 한다. 먼데 있으면 일일이 부지런을 떨어가며 사러 다닐 수가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산책을 다녀오는 길에 두부 가게에 들리니 셔터가 내려져 있고, '가게 세줌'이란 종이가 나붙어 있었다. 언제나 웃는 얼굴로 사람좋게 대해 주던 두부 가게집 일가가 돌연 가게를 그만두고, 어딘가로 사라지고 만 것이다. 이제부터 나의 식생활은 대체 어떡하란 말인가?



두부에 관하여 3


파리에 사는 주부들은 빵을 사다 묵히지 않는다. 식사를 할 때마다 그녀들은 빵집에 가서 빵을 사오고, 남으면 버린다. 식사란 모름지기 그래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두부만 해도 그렇다. 막 사온 것을 먹어야지, 밤을 넘긴 두부 따위 먹을 수 없잖은가, 하고 생각하는 게 정상적인 인간의 사고다. 귀찮으니까 그냥 날 지난 것이라도 먹자는 주의가 방부제나 응고제 같은 것들의 주입을 초래하는 것이다.
두부 가게집 일손들도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아침 된장국 끓이기에 지장이 없도록 그야말로 새벽 네 시부터 일어나 열심히 맛있는 두부를 만드는 것인데, 모두들 아침에는 빵을 먹든지(우리 집도 그렇다) 슈퍼마켓에서 사 온 방부제가 들어 있어 며칠씩 묵어도 상관없는 두부를 사용하기가 일쑤니까, 두부 가게집도 일할 맛이 없어져 버리는 것일 게다. 그래서 결국은 본격적인 두부를 만드는 제대로 된 두부집이 동네에서 하나 둘 모습을 감추어 간다.
요즘 세상에 새벽 네 시부터 일어나 일하겠다고 하는 유별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유감이다.
두부하면 어렸을 적 쿄토 난젠지 부근에서 먹었던 살짝 데친 두부가 뭐라 형용할 수 없이 맛있었다. 지금은 난젠지의 두부도 '안농'풍으로 완전히 관광화되고 말았지만, 옛날에는 전체적으로 훨씬 더 소박하고 꾸밈없는 맛이 났다.
아버지의 고향집이 난젠지 근처에 있어서 물길을 따라 곧잘 긴카쿠지 주변을 산책하고, 그리고 그 근처에 있는 두부집의 뜰에 앉아 후후 불어가며 뜨거운 두부를 먹었다. 이건 뭐랄까, 파리의 길모퉁이에 있는 크레페 판매대와도 비슷한 서민을 위한 소박한 건강 식품이다. 그러므로 최근 정식 코스로 하여 오천엔 운운하는 것은, 어딘가 좀 이상하지 않나 생각된다.
기껏해야 두부, 그 정도 선에서 두부는 굳건하게 홀로 남아 버티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런 두부의 존재 방식을 좋아한다.



두부에 관하여 4


'두부를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은 무얼까?' 하고 한가한 때에 생각해 본 일이 있다. 대답은 한 가지밖에 없다. 정사를 나눈 후에 먹는 것이다.
음, 이 점은 애당초 분명하게 말해 두지만, 모두 상상이다. 정말 당해 본 일이 아니다. 경험담이라고 오해를 하면 몹시 난처하다. 가상의 얘기다.
우선 오후 해가 짱짱할 무렵 동네를 거닐고 있자니, 삼십대 중반쯤 돼 보이는 요염한 부인이 '앗'하고 숨을 삼키며 내 얼굴을 본다. '왜 그럴까'하고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그녀가 데리고 온 다섯 살 정도의 여자 아이가 내게로 달려와 '아빠' 하고 부른다. 사정 얘기를 듣고 보니, 작년에 죽은 그녀의 남편이 나랑 똑 닮았던 것이다.
그녀는 '얘, 그 아저씨는 아빠가 아니야'하고 여자 애한테 설득을 하는데, 여자 아이 쪽은 '아빠야-아'하면서 내 손을 놓지 않는다.
하나 나도 이런 걸 싫어하지 않는 터라 '그러면 잠시 동안 아빠가 되어 주지'하고, 함께 공원에서 놀고 있는 사이에 여자애가 지쳐서 그만 잠들고 만다. 이렇게 되면 그 다음은 이미 코스나 다름없는 것으로, 나는 둘을 집을 데려다 주고는 당연스레 그 미망인과 정사를 갖는 것이다. 그래서 일을 끝내고 나니 저녁나절, 집 밖으로 딸랑딸랑 종소리를 울리며 두부 아줌마가 지나간다. 여자는 흐트러진 머리칼을 가다듬으며 '두부 아줌마-'하고 소리를 질러 연두부를 두 모 사들여, 한모에다 잘게 썬 파와 간 생강을 곁들여 맥주와 함께 내 앞에 갖다준다. 그러고는 '우선 두부랑 마시세요. 지금 바로 저녁 준비를 할테니까'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우선 두부의 섹시함이란 뭐라 형용할 수 없이 감미롭다. 그러나 나랑 꼭 닮은 남자랑 결혼을 했던 요염한 미망인을 찾는 데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얘기가 안 되는데, 하고 골치 아픈 일을 생각하고 있는 동안은 바람 같은 건 도저히 못 피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