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하고 이 년째쯤 되던 해의 일인데, 나는 한 반 년 정도 '주부(主夫)' 역할을 했더랬다. 그때는 이렇다 할 느낌도 없이 평범하게 하루하루를 보냈는데,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니 그 반 년이 내 인생에서 가장 멋진 시절이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하긴 그 당시엔 딱히 '주부(主夫)'가 되고자 소망한 것도 아니고, 우연찮은 사소한 인연으로 마누라는 일을 하러 밖으러 나가고, 내가 집에 남아 있게 되었을 뿐이다. 이럭저럭 벌써 십이삼 년전, 존레논이 '주부(主夫)'가 된 일로 화제를 불러일으키기 전의 일이다. '주부(主夫)'의 일상은 '주부(主婦)'의 일상과 다를 바 없이 평온하다.
우선 아침 일곱시에 일어나 아침 식사 준비를 하고, 마누라를 일터로 보내고 뒷정리를 한다. 싱크대 속에 있는 그릇들을 재빨리 씻어 놓는 것은 물론 가사의 철칙 중 하나이다. 그러고 나서 다른 이들 같으면 신문을 읽든가 텔레비전을 보든가 라디오를 듣든가 할테지만, 나는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당시 우리는 무형 문화재처럼 궁핍해서, 라디오도 못 사고, 텔레비젼도 못 사고, 신문을 구독할 돈마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집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돈이 없으면 생활이란 놀랄 만큼 심플해 진다. 세상에는 '심플 라이프'란 브랜드가 있는데, '심플 라이프'에 관해서라면 내 편이 훨씬 더 경험이 풍부할 것이다.
아침 설거지가 끝나면 빨래를 한다. 새삼 밝힐 것도 없지만 세탁기도 없으니까 목욕탕에서 발로 꾹꾹 밟아 빠는 것이다. 이 작업은 시간은 꽤 걸리지만, 제법 상당한 운동이 된다. 그리고 넌다.
빨래가 끝나면 시장을 보러 간다. 시장을 본다고는 하지만 냉장고가 없으니까 (참 너무 가난하다) 필요 이상은 살 수 없다. 그날 꼭 쓸 것만을 여분이 생기지 않도록 사는 것이다. 그런 형편이니 저녁 반찬이 무우 된장국에 무우 조림, 무우즙에 섞은 잔멸치란 상황도 심심치 않은 빈도로 발생하는 게 당연하다. 이런 생활을 '심플 라이프'라 부르지 않는다면 달리 어떤 표현이 가능하랴?
시장을 보는 길에 '고쿠 분지 서점'에 들러 새 책을 사기도, 싸구려 헌 책을 사기도 한다. 그러고는 집으로 돌아와 점심을 간단히 먹고, 다림질을 하고, 대충 청소를 하고(나는 청소에는 서툰 터라 그다지 꼼꼼하게 하지 않는다), 저녁 때까지 지낸다. 무엇보다 한가하니까, 나는 이 시기에 <강담사, 소년 소녀 세계 명작 전집>을 독파했고, <싸락눔>같은 소설을 세번이나 읽었다.
사방이 어둑어둑해지면 슬슬 저녁 준비를 한다. 쌀을 씻어 밥을 짓고, 된장국을 끓이고, 조림을 만들고, 생선을 구울 준비까지 해 놓고서는 마누라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마누라가 돌아오는 것은 대개 일곱 시가 안되어서인데, 이따금 야근을 하느라 늦어지는 날도 있다. 그러나 -지금 또다시 말할 것도 없지만- 우리 집에는 전화가 없으므로, 연락을 취할 길이 없다. 그런고로 나는 생선을 석쇠 위에다 올려 놓은 채, 마누라가 돌아오기를,
"..."
하는 식으로 지긋이 기다리는 것이다.
이,
"..."
은, 일상 속에서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아마 이해하기 힘드리라 여겨지는데, 매우 미묘한 감흥이다.
'오늘은 좀 늦어질 모양인데, 먼저 먹어 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다가. '그래도 지금까지 애써 기다렸으니까 조금 더 기다려 보지' 하고도 생각하고, '그건 그렇고 배가 고픈 걸' 하고 주억거리기도 한다. 이런 여러 가지 생각의 집약이.
"..."
하는 침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아, 미안해요. 저녁 먹고 왔어요' 란 소리를 들으면 역시 화가 난다.
그리고 이건 기묘하다고 하면 기묘하고, 그렇지 않다고 하면 그렇게 기묘하지 않은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자기가 만든 음식을 식탁에 늘어놓는 순서가 되면 으레껏, 뜻대로 안되었거나 모양이 일그러진 부분을 내 접시에 얹어 놓고 만다. 생선 같으면 몸통을 반으로 나누어, 머리 쪽은 마누라에게 주고, 나는 꼬리 쪽을 먹는다. 이것은 딱히 내가 주부가 된 자신을 비하시켜서가 아니라, 그냥 단순하게 상대방을 조금이라도 기쁘게 하고 싶은 요리사의 습성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고 보면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주부적'이라고 여겨지고 있는 속성 중 많은 것이 반드시 '여성적' 이란 것과 동의어는 아닌듯이 생각된다. 즉 여자가 나이를 먹는 과정에서 아주 자연스레 주부적인 속성을 체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단순히 '주부'라고 하는 역할에서 빚어지는 경향 내지는 성향에 불과하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남자가 주부의 역할을 맡으면 당연히 많든 적든간에 어느 정도는 '주부적'으로 되어 갈 것이다.
나의 개인적 경험으로 말하자면, 세상의 모든 남자들이 일생동안 최소한 반년이나 일 년쯤 '주부' 구실을 해 봐야 마땅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하여 단 기간 이나마 주부적인 경향을 습득하여, 주부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현 세계에서 통용되고 있는 통념의 대부분이 얼마나 불확실한 기반위에 성립되어 있는가를 잘 인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나도 그럴 수만 있다면 다시 한번 유유자적하게 주부생활을 마음껏 누려 보고 싶은데, 아내가 도무지 일을 하러 나가주지 않으니, 그러지도 못하고 곤경에 처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