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터

하루키의우물 2008. 3. 28. 12:16



스웨터를 입은 무리들을 좀처럼 볼 수 없었다. 나는 어느 겨울밤에 우연히 그들을 관찰했던 일이 있었다. 그것은 아름답고 따스한 풍경이었다.
나와 애인은 동쪽 코엔지에 있는 조그만 아파트에서 살면서 섹스를 한다거나 포테이토 칩을 먹거나 하고 있었다.
당시 나는 열 아홉살이었다. 열 아홉 살 나이의 남자로서 처음 그 날, 여자를 만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밤 늦게까지 있어주면, 정말로 진짜 애인처럼 생각되었다.
나와 애인은 정말로 애인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두 사람이 함께 지하철을 탔다. 그 날 확실히 아홉 시쯤이었다.
갈색 종이봉지에서 라임쥬스, 얼음, 진 토닉을 꺼냈다. 그리고 유리잔을 두 개 준비했다.
수도꼭지를 틀었다. 찌이익-. 날카로운 소리가 조용한 아파트에 울렸다. 우리들은 마치 의식을 치루는 것처럼 진 라임을 마셨다.
브라운관을 빼고 전체를 빨갛게 칠한 텔레비젼에 스위치를 넣었다. 텔레비젼 화면빛을 조명 대신으로 우리들은 창가로 다가갔다.
옆집 아파트 학생이 수도꼭지를 틀었다. 우리들 방까지 찌이익- 하고 울렸다.
우리들은 '애인이 되려는 시간'을 일단 연장했다. 그리고 잠시 친구처럼 지내기로 했다.
텔레비젼 화면은 칙칙- 거리는 소리만 났다. 아무 프로도 나오지 않았다.
우린 서로의 말들을 브라운관에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 풍경을 반사시키고 있었던 나와 애인은 직접 마주보면서 얘기했다. 나는 텔레비젼 볼륨마저 낮추었다. 아무 소리도 안났다. 스위치만 켜져 있는 화면을 그대로 놔뒀다. 조작은 발로 했다.
그리고 나와 애인은 섹스를 했다.
아침이 다가왔다. 우리는 겨울 바람을 쐬기 위해 창문을 열어놨다. 그때, 신주쿠쪽에서 형형색색의 스웨터 무리들이 마치 춤이라도 추듯 다가왔다. 이것은 내가 먼저 발견했다. 스웨터 무리들은 겨울에, 바람을 타고 한밤중에 우리 앞에 나타났다.
"멋있어요. 우리들은 운이 좋아요."
약 삼십분 후 스웨터 무리들은 오기쿠보 방향으로 사라졌다.
우리들은 가까운 곳에 있는 친구들에게 이 이야기를 전하려고 했다. 그러나 전화부스가 너무 멀어 우리들만 즐기기로 했다.
그때의 무수한 스웨터 무리들이 마치 밤하늘을 날아오르는 듯한 풍경은 지금도 확실히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애인 얼굴은 이제 완전히 잊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