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면 존 업다이크를 떠올린다. 존 업다이크를 읽으면 1968년의 봄이 떠오른다. 우리 머리 속에는 그런 연쇄 고리가 몇몇 존재한다. 아주 사소한 것이지만, 우리의 인생과 세계관은 그렇게 ‘아주 사소한 것’ 들로 유지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대학으로 진학하기 위해서 동경으로 올라온 것은 1968년 봄이었다. 커다란 짐보따리를 들고 다니는 게 싫어서 필요한 것들을 먼저 부쳐 버리고, 코트 주머니에 담배와 라이터와 존 업다이크의 <음악 학교>만을 쑤셔 넣고 집을 나섰다. 밴덤 출판사인지 델 출판사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보급판인데도 고풍스럽고 상큼한 멋진 표지였다. 여자 친구와 식사를 나누고, 안녕을 고하고서는 신칸선을 탔다.
겨우 업다이크 한 권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동경으로 올라오다니, 지금 생각해 보면 좀 같잖은 이야기지만, 그것은 뭐 아무래도 좋다. 오후 늦게 동경에 도착하여 메지로에 있는 새 방으로 가보니 어떻게 된 일인지 이미 도착해 있어야 할 짐이 아직도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갈아입을 옷도 없거니와, 세면 도구도 재떨이도 이부자리도 커피 잔도 주전자도 없다. 비참한 일이다.
방은 휑뎅그레했다. 서랍이 하나밖에 없는 기가 찰 정도로 심플한 책상과 형편없이 단순한 철제 침대가 있을 뿐이다. 침대 위에는 정신이 아득해질 것만 같은 매트리스가 얹혀 있었다. 앉아 보니 일주일 전에 산 불란서 빵처럼 딱딱했다.
구름 껴 희뿌연 봄날의 조용한 저녁 나절이었다. 창문을 열자, 멀리에서 라디오 소리가 들려 왔다. 14년전이나 지난 옛날 일인데도, 자질구레한 일만 선명하게 기억하고있다.
당장 해야 할 아무런 일도 없고, 무슨 일을 할 기분도 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근처에 있는 구멍 가게에 가서 코카콜라(물론 병이죠. 병을 상상해 주세요)와 비스켓을 사다 놓고, 딱딱한 매트리스 위에 벌렁 누워, 읽다만 업다이크를 읽었다. 조금씩 해가 저물어 방은 어두워지고, 나는 천정에 있는 형광등을 켰다. 한쪽 형광등에서 치지직치지직하는 소리가 났다.
업다이크를 다 읽은 8시 반쯤, 코카콜라 병바닥에는 담배꽁초가 5센티미터 정도 쌓여 있었다. 나는 책을 머리맡에 두고 한 시간이나 천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 거대한 도시에 이불도 없이, 면도기도 없이, 전화를 걸 만한 상대도 없이, 외출을 할 만한 장소도 없이, 홀로 외로이 방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리 우울한 기분은 아니었다.
만약 누군가가 책을 읽는데 가장 적합한 장소는 어디냐고 묻는다면, 나는 '1968년 4월 저 휑한 방에 있던 딱딱한 매트리스 위'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작품의 한 줄 한 줄이 마음에 잔잔하게 스며드는 장소 -그런 장소가 즉 내게는 ‘서재’ 이다. 임즈의 라운지 체어와, 모빌리아의 스탠드와 AR 스피커에서 조용하게 흘러 나오는 텔레만(독일의 작곡가)도 나쁘지는 않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이다. 존 업다이크를 읽기 위해서는 존 업다이크를 읽기 위한, 치버를 읽기 위해서는 치버를 읽기 위한 가장 좋은 장소가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란,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