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세상에는 여러 가지 불쾌한 일들, 마음에 들지 않는 갖가지 일들이 있겠지만, 내 경우에는 도대체 얼굴 사진 찍는 일만큼 싫은 것이 없다. 옛날부터 사진에 찍힌 내 얼굴은 이상하게 좋아지지가 않았다(사진에 찍히지 않은 실물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특별히 더 그렇다는 뜻이다). 그래서 얼굴 사진 촬영을 요구하는 일은 가능한 한 거절하는데, 그래도 폴 매카트니도 노래하듯이 인생은 길고 구불구불한 길, 거절할 수 없는 경우도 생기기 마련이다.
어째서 사진에 찍힌 자신의 얼굴을 좋아하지 않는가 하면, 나는 카메라를 향하는 순간 거의 반사적으로 얼굴이 굳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카메라 맨이 '예, 힘을 빼고 웃어 주세요.'라고 해도, 나는 긴장해서 더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웃는다는 것이 사후 경직 예행 연습 같은 것이 되어 버린다.
트루먼 카포티가 작가로서 데뷔했을 때, 책 뒤표지에 썼던 얼굴 사진은 굉장히 (병적일 만큼) 아름다워서 그것이 세상의 ㅡ특히 일부의ㅡ 평판을 불러일으켰다.
누군가가 '카포티 씨, 얼굴 사진을 아름답게 찍는 요령이 뭔가요?'라고 질문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간단해요. 당신의 머릿속을 아름다운 것으로 가득 채우면 되는 거예요. 아름다운 것만을 생각하는 거죠. 그러면 누구라도 아름다운 얼굴이 찍힐 겁니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닌 것 같다. 실제로 시도해 보았지만, 전혀 잘 되지 않았다. 아마도 카포티 씨 쪽이 특수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건 나도 동물과 함께 사진을 찍으면 이상하리만치 편안한 얼굴 표정이 된다. 고양이든 개든 토끼든 뭐든 좋은데, 손이 닿는 거리에 동물이 있으면 나는 비교적 자연스럽게 웃는다. 그러나 그것을 요전에야 겨우 깨달았던 것이다. 한 인간이 동물이 있고 없는 데에 따라서 그렇게 얼굴 표정이 달라지다니.
이제 와서 새삼스레 핸섬해지고 싶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라고 할까, 생각한다고 어떻게 될 것도 아니지만), 항상 옆에 작은 동물이 있는 듯한 온화한 얼굴 표정으로 즐거운 날들을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기시다 교코 씨가 노래한 동요에 "강아지는 어째서 따뜻할까"라는 것이 있었다. 나는 이 노래를 좋아한다.
강아지는 어째서 강아지는 어째서 부드럽지?
강아지를 코트 속에 넣고 걸을까.
강아지 꼬마 강아지 어째서 강아지는 부드럽지?
그러게, 언제나 코트 속에 강아지를 넣고 있는 듯한 따뜻한 기분으로 나날을 보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실제로 코트 속에 강아지를 넣고 생활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울 것 같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