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어를 일본어로 번역하면서 가장 골치 아픈 것은 역시 경어와 인칭 문제가 아닌가 생각한다. 특히 1인칭 소설의 경우, 주인공의 호칭을 나 1(약간은 비어에 가까운)로 하느냐, 나 2(공식적이고 정중한)로 하느냐, 나 3(부드럽고 귀여운)으로 하느냐에 따라 작품의 인상이 꽤 달라진다.
물론 그런 것을 일일이 생각할 필요 없는 텍스트도 얼마든지 있다. 예를 들면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 홀던 콜필드는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를 나 1로 표현하지 않을 것이고, 또 나 2로도 지칭하지 않을 것이다. 처음부터 나 3으로 정해져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거의 예외적이다.
하드보일드 탐정물 중에는 같은 주인공의 시리즈이면서도 번역자에 따라 나 2로 되어 있기도 하고 나 3으로 되어 있기도 하며, 나 1로 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때로는 이미지의 혼란이 초래된다. 가능하면 통일해 주었으면 싶은데, 하기야 출판사에도 여러 가지 사정이 있을 것이다. 아무튼 호칭이 자신의 감각과 다르면 사이즈가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껴입은 것처럼, 읽다 보면 피곤하기도 하고 신경이 쓰여 마지막까지 제대로 읽지 못하는 일도 있다.
나는 레이먼드 카바의 작품을 오래도록 번역하고 있는데, 한 작품 한 작품마다 1인칭을 나 2로 해야할지, 나 3으로 해야 할지 꽤나 망설였다. 나 1은 대화 부분을 제외하면 좀 부적절했기 때문에 제외할 수 있었지만, 나 2와 나 3은 마지막 순간까지 구분하기에 애를 먹었다. 결국은 작품의 톤을 가늠하여 이 작품은 나 2, 이 작품은 나 3 하는 식으로 거의 감각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구별의 정확한 근거를 제시하라고 하면 좀 난감하다.
카바 씨의 생전에, 워싱턴 주의 올림픽 반도에 있는 그의 집을 방문하여 제법 긴 시간 둘이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때의 일은 지금도 신기할 정도로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의 인품이나 얘기 속에 나의 마음을 매혹케 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작품과 인간성의, 말하자면 일체감 같은 것이 일종의 강력한 자석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무릎을 맞대고 얘기를 나누면서 ‘아하, 내가 지금까지 읽은 이 사람의 작품이란 이런 것이었단 말이지’ 하고 아주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그 이후 나는 그의 작품의 주인공을, 그의 분신이라 여기고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버릇이 생기고 말았다. 그리하여 내 머릿속에서 그 가상적 주인공을 이리저리로 움직여 보고, ‘이 사람이 만약 일본어로 말을 한다면 과연 나 2를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나 3을 사용할 것인가’ 하고 궁리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나 3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 점에 관해 몇몇 분들이 이의를 제기하였다.
‘그거 좀 다르지 않을까. 카버의 작품은 미국의 지방 소도시에 사는 블루 칼라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 대부분이니, 그런 사람이 인칭 대명사로 나 3을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은데’ 라고 지적하였다. 그 의견은 나 역시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실제로 만나 대화를 나눈 카버는, 절대로 일면적인 ‘이쪽이냐 저쪽이냐’ 로 설명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미국 블루 칼라의 등신대 생활을 그려 미국 문학에 커다란 쐐기를 박았다’ 고 평가되는 일이 많은 그이지만, 카버 자신은 결코 그런 단순한 블루 칼라의 대변자는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노동자 계급 집안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여러 가지 가혹한 육체노동을 경험하였지만, 그후 인생의 대부분을 그는 대학 도시에서 문학을 하는 사람들과 함께 지냈다. 또한 그는 그의 거의 모든 정열을 창작과 사색에 쏟아부었다. 그는 천연덕스러운 ‘문단’ 에는 친숙해질 수 없는 무엇을 느꼈고 주변 노동자들의 생활에서는 공감과 동정을 품었지만, 그와 동시에 자기는 두 번 다시 거리로 돌아갈 수 없다는 냉철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나날의 육체노동이 얼마나 인간을 피폐하게 만드는지, 그는 자신의 체험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인품이나 작품에는 그렇듯 앤비 밸런트하고(어느쪽에도 속할 수 없는) 떨쳐 버릴 수 없는 초라한 젊음 같은 것이 녹아 있다.
나도 대단치는 않지만 육체노동을 매일매일 7년간 계속한 인간이니, 그 기분은 충분히 이해한다. 몸이 저미도록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또 내가 만난 카버는 지적이고 수줍음이 많고 덩치가 큰 남자였다.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하고, 호기심에 찬 눈을 반짝거리는 소년 같은 인물이었다. 나는 그 사람이 한눈에 좋아졌다.
그런 추억과 상념이 한데 어우러져, 나로 하여금 카버의 주인공들을 나 3으로 번역케 하는 일이 많은 모양이다.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편이 작중인물이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 있을 듯하다. 그건 또 어쩌면 어느 정도는 내 마음의 투영인지도 모른다. 만약 그것이 ‘오역’ 이라면, 나는 자진하여 그 ‘오역’ 을 짊어지고 그에 목숨을 바쳐도 좋다는 생각까지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