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간이란 크게 나누어 대충 두 가지 타입으로 갈라진다. 즉 이사를 좋아하는 타입과 싫어하는 타입이다.
뭐 그렇다고 해서 전자가 행동적이고 진취적인 성품에 좀 덜렁거리는 타입이고, 후자가 그 반대라는 뜻은 아니고, 그저 이사를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 하는 아주 단순한 차원의 얘기다.
얘기가 좀 빗나갔지만, 단순한 차원의 얘기를 새삼스레 심각하게 궁리하는 것은 좋지않다고 생각한다. 가령 장미를 좋아하는 사람은 정열적이라든가, 개를 좋아하는 사람은 성격이 밝다든가, 그런 사고 방식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냥 장미를 좋아하고, 개를 좋아하는 것일 뿐이다. 참 나 그렇잖아요. 히틀러는 개를 좋아했지만, 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두 히틀러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는 할 수 없죠.
나는 이사를 무척 좋아한다. 짐을 꾸려서 이 거리에서 저 거리로,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겨 다니노라면 정말이지 행복한 기분이 든다. 그렇다고 내가 동적인 인간인가 하면 천만의 말씀이다. 오히려 그 반대로, 생활 습관을 바꾸거나 세상 일에 대한 가치판단을 변경하거나 하는 일은 극단적으로 싫어하는 편이다. 마작의 자리 바꿈, 술집 순례, 다 싫어한다. 양복만 해도 십오 년전과 거의 같은 것을 입고 있다. 하지만 이사만큼은 좋아한다.
이사의 미덕은 모든 것을 '제로화'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동네 사람들과의 사귐, 인간 관계, 그 밖의 여러 가지 일상 생활에서의 잡다한 일, 그런 모든 것이 한 순간에 휑하니 소멸해 버린다. 그런 때 맛보는 쾌감은 한번 익히고 나면 평생을 잊어버릴 수 없다. 내 친구 중에 마작을 하다가 자기가 내 준 패 덕분에 상대방이 점수를 올리게 되면 '에이, 전부 때려부셔!'하면서 탁자를 걷어차 버리는 작자가 있는데, 기분학상으로 그 행위와 비슷하다. 야반도주야말로 이사의 기본적 원형이다.
나는 지금껏 꽤 여러 번 이사를 하여, 수많은 동네에 살았고, 다양한 사람들과 사귀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모든 것을 '제로화'해 버리고 지금에 이르렀다.
2.
이 잡지는 관동 지방에서밖에 팔지 않으니까(팔지 않겠지, 잘 모르겠다), 관서 지방에 대한 지리적 설명을 하기가 어렵다. 한가한 사람은 지도를 보세요.
우리 집은 내가 철이 들고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두 번밖에 이사를 하지 않았다. 불만스럽다. 훨씬 더 많이 이사를 하고 싶었다.
게다가 두 번 이사를 했다고는 하지만, 직선 거리로 일 킬로미터정도의 지역을 왔다갔다 했을 뿐이다. 그런 건 이사라고도 할 수 없다. 효고(兵庫)현 니시노미야(西宮)시의 슈쿠가와 서쪽에서 동쪽으로, 그리고 그 다음에는 아시야시 아시야가와의 동쪽으로 옮겼을 따름이다.
동경으로 말하자면 신주쿠(新宿)의 미츠코시(三越)에서 마이씨티로 옮겼다가, 신주쿠 교엔(御苑)으로 옮긴 정도의 거리이다. 그런고로 전학이란 걸 해 본 적이 없다.
나는 옛날부터 전학생을 몹시 동경했다. 국민학교에 다닐 때는 전학을 가게되는 반 친구가 있으면 곧잘 '이별 문집' 같은 것을 만들어서는, '에미코, 멀리 가더라도 꼭 편지해 줘'라든지, '모래밭에서 넘어뜨려서 미안해'라든가 하는 글을 정리하여 전해주곤 했다. 그 아이가 없어지고 나면, 한동안 그 자리만 동그마니 비어 있다. 그런 걸 이상하게도 병적으로 좋아했다.
새로 들어오는 전입생도 무척 좋아했다. 귀여운 여자 아이가 조금은 예민해져 새침을 부리고 있거나, 새 교과서가 없어서 옆에 앉은 아이랑 함께 보는 걸 바라보면서, '이거야, 바로 이거'하는 식으로 흥분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강렬한 희망에도 불구하고, 나는 끝내 한번도 전학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충족되지 않았던 소년 시절의 욕구 불만이 열여덟 살을 지내고 나자 '이사병'이란 숙명적인 형태를 띠고 내게 엄습해 온 것이다. 상세한 것은 다음 회로 계속됨.
3.
나는 그곳에 반년 동안 살다가 그 해 가을에 행실 불량으로 내쫓기고 말았다. 경영자가 이름난 우익인데다, 기숙사 사감은 육군 나카노(中野)학교 출신의 으스스한 아저씨이고 보면, 나같은 학생을 내쫓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때는 바야흐로 1968년, 학생 운동의 전성기였고, 내 편은 혈기왕성한 나이었기에 화가 치미는 일이 산더미처럼 많았다. 우익 학생이 점검을 하러 온다기에 베갯밑에 칼을 두고 잔 적도 있다.
하지만 태어나서 여지껏 혼자서 지내기는 처음이라 매일 매일의 생활은 꽤 즐거웠다. 밤이 되면 대개 메지로 언덕길을 내려가 와세다일대에서 마셔댄다. 그리고 마셨다 하면 반드시 곤드레만드레가 된다. 그 무렵에는 곤죽이 되지 않도록 마시는 기발한 재주는 아직 피울 줄을 몰랐다.
술에 취해 나가 떨어지면 누군가가 들 것을 만들어 기숙사까지 운반해 주었다. 들것을 만들기엔 실로 편리한 시대였다. 요컨대 여기저기 아무데고 프래카드가 넘쳐 흘렀기 때문이다. '일제분쇄'라든가 '원잠기항 절대 저지'하는 프래카드를 적당히 골라 짓찢어 와서는, 거기에다 술주정뱅이를 태워 옮기는 것이다. 그것도 상당히 재 밌었다.
헌데 한번은 메지로 언덕길에서 헝겊이 찢어지면서 돌계단에 정신이 바짝 들 정도로 머리를 부딪힌 일이 있다. 덕분에, 이, 삼일 머리가 아팠다.
그리고 한밤중에 일본여자대학의 간판을 훔치러 간 일도 있다. 까짓 거 훔쳐봤댔자 별 신나는 일도 없지만, 웬지 갖고 싶어서 밖으로 나갔는데, 그만 순경 아저씨한테 들켜 줄행랑을 쳤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엔 일주일에 한번은 순경 아저씨한테 검색을 당했다. 시절도 어수선했지만, 내 쪽 인상도 나빴으리라. 최근에는 한번도 검색을 당하지 않았다. 순경아저씨한테 검색 한번 당하지 못하게 되다니 내 인생 이제 끝장이 아닌가, 하고 문득 생각하곤 한다.
4.
메지로의 기숙사에서 쫓겨난 뒤 네리마(練馬)에 있는 하숙집으로 옮겼다. 와세다 대학의 학생과에서 조사한 것 중 가장 싼 방이다. '삼 조에 4,500엔. 보증금·예의금 없음' 이건 그야말로 진짜 싸다. 보증금·예의금 없음이라니 이곳 빼고는 없을 것이다.
하숙집은 세이부(西武) 신주쿠선 '도립가정(都立家政)'역에서 걸으면 한 십오분 정도 걸 리는 거리에 있었다. 주변은 그림에서 보는 듯한 무밭이다. 동경에도 이런 곳이 남아 있구나 싶어 정말 경탄스러웠다. 도대체가 '도립가정'이란 역 이름부터가 한심하다. 일단 이름이라도 붙이고 보자는 속셈이 빤히 들여다 보인다. '도립가정' 이라니 한번 들은 것만으로는 도저히 뜻을 알 수 없다.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는 무우밭에 드문드문 집이 섞여 있다는 정도의 인상밖에 주지 않는 동네였다. 땅은 검고, 질척하게 물기가 차 있어 겨울이 몹시 추웠다. 여자친구와 순조롭지 못했던 점도 있고 해서, 네리마 시절은 내게는 좀 어두운 시절이었다. 학교에도 거의 가지 않고, 신주쿠에서 올 나이트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틈틈이 가부키초(歌舞技町)에 있는 재즈 찻집에 드나들며 음악에 푹 젖어 있었다.
재즈 찻집 중에서는 <빌리지 게이트>라든가 <빌리지 방가드>같은 어두컴컴한 데를 좋아했다. 여자애랑 같이 갈 때는 <다그>라든가 <올드 블라인드 캐츠> 같은 데가 좋 았다. 이런 얘기를 하면 정말이지 궁상맞은 아저씨 같지만, 재즈가 짜릿짜릿하게 몸으로 파고드는 시절이었다.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아마도 '연속 살살마(射殺魔)사건'의 범인 나가야마 노리오도 비슷한 시기에 역시 도립가정에 살면서 <방가드>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럭저럭 벌써 십 년 가까이 세이부 신주쿠선을 타지 않았는데, 저 가부키초→세이부선→도립가정의 생활은 지금도 내 몸 속에 까끌까글한 느낌으로 아주 리얼하게 남아 있다. 그곳에는 1968년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살았다.
⊙ 일본에서는 방이나 집을 빌리는데 전세라는 건 없고 모두 월세이다. 그런데 빌릴 집을 계약하기 위해서는 시키킹(數金)=보증금(집을 나올 때 되돌려 받을 수 있는 돈), 레이킹(禮金)=예의금(집을 빌려 줘서 고맙다는 조로 집주인에게 주는 돈), 거기에다 복덕방비가 월세를 1로 하여 대충 2:2:1의 비율 정도가 필요하다. 더구나 월세가 선불이라 새로이 집을 계약하려면 월세의 6배, 심하면 7배 정도의 몫돈이 든다.
5.
도립가정의 어두운 삼조 방에서 반년을 생활하다, 살아 있다는 게 못 견디게 싫어져서 또 이사를 하기로 했다. 1969년 봄의 일이다. 가구와 짐이라고는 거의 없으니까 이사하기는 실로 간단하다. 이불과 옷가지와 그릇 나부랭이를 자동차 트렁크에 던져 넣고나면, 그것으로 준비 완료다. 인생이란 모름지기 이랬으면 좋겠다.
이번 터전은 미타카에 있는 다세대 주책이다. 닥지닥지 복잡한 곳은 이제 진절머리가 나서, 교외로 옮기기로 한 것이다.
육조 방 한 칸에 부엌이 딸려서 7,500엔(와 싸다), 2층 모퉁이에 있는 방으로 사방이 전부 빈 들판이어서 참으로 햇빛이 잘 들었다. 역까지 먼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지만, 무엇보다도 공기가 깨끗하고, 좀 걸으면 아직도 자연 그대로 남아 있는 무사시노(武藏野)의 잡목림이 있어, 굉장히 행복했다.
날아갈 듯 기분이 산뜻하여 전당포에서 중고 플롯을 사가지고와 연습을 하고 있었더니, 옆 방에 카마야츠 히로시와 비슷하게 생긴 기타보이가 '해피맨 같이 해요'라 기에, 매일 <멤피스 언더 그라운드>만 열심히 불었다. 그래서 내 기억 속에는 미타카=<멤피스 언더 그라운드>가 되어 버렸다.
그 무렵에 관한 나머지 기억이라고 하면, 브래지어가 하늘을 날았다는 정도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브래지어가 정말 하늘을 날았단 말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바람에 날려 공중을 떠다녔을 뿐이다. 아주 바람이 강한 밤이었는데, 내가 집 근처 길을 터벅터벅 걷고 있자니, 무슨 하얀 물체가 하늘 높이 둥실둥실 날고 있어, '아니, 백로인가'하고 곰곰 올려다 보니, 그게 브래지어였단 말씀에요.
브래지어가 밤하늘을 날고 있는 광경을 목격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잘 아실 테지만, 그게 또 몹시도 희안한 광경입니다. '설마 그런 게 어떻게'하는 의아스러움, 공기역학적인 움직임의 재미가 일체화되어 그 장면 정말 멋있었다.
6.
나는 절대로 일기를 쓰지 않는 인간인데, 미타카 시절에 한해서는 무슨 이유에선가 짧은 일기를 썼다. 뭐 대단한 일기는 아니고, 뭘 먹었다든지, 무슨 영화를 봤다든지, 누구를 만났다든지, 몇 번 했다든지, 그 정도의 일밖에 씌어 있지 않지만, 그래도 뒷날 읽어 보니 제법 재밌다.
1971년 당시를 보니, 석간이 15엔이다. 헤이본(平凡) 펀치는 80엔, 쇠고기 200그램 180엔, 하이라이트 80엔, 콜라 40엔, 대충 지금 물가의 반 정도다.
그 해 1월 3일과 5일에는 눈이 내렸다. 1월 3일에는 10센티미터나 쌓였다. 이 날은 미타카 다이에(大英) 극장에서 야마시타 코사쿠(山下耕作)의 <승천하는 용>(좋은 영화다)과 아츠미 마리의 <좋은 거 드리죠>(좋은 제목이다)를 동시 상영으로 보았다. 5일에는 신주쿠의 게이오(京王) 명화관에서 <석양을 향해 달려라>와 <이지라이더>를 보았다. <이지 라이더>는 그것으로 세 번째 관람이다. 1971년이란 해는 대학의 학생 운동이 일단 전성기를 넘어서고, 투쟁이 음습화되어 폭력적인 내 부 투쟁으로 치닫기 시작한 아주 복잡하고 암울한 시기였지만, 이렇게 돌이켜보니 실제로는 매일 여자 친구랑 데이트를 하거나 영화를 보면서 제법 뻔뻔스럽게 살았던 모양이다. 그러니 '요즘 젊은 남자들이 이러니 저러니'하고 잘난 척 얘기할 수는 도 저히 없을 것 같다. 인간이란 특별히 대의명분이나 불변의 진리나 정신적 향상을 위 해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니고, 이를테면 깜찍한 여자애랑 데이트나 하면서 맛있는 것 먹고 즐겁게 살고 싶다고 생각할 뿐이다.
나이를 먹어서 되새겨 보면 자신이 몹시도 긴장된 청춘 시절을 보낸 듯한 기분이 드는 법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고, 모두들 바보 같은 생각만 하면서 구질구질 살아온 것이다.
오래된 옛 일기를 읽고 있으려니, 그런 분위기가 삼삼하게 전해져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