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일곱 살이던 그때, 나는 보잉 747기 좌석에 앉아 있었다. 그 거대한 비행기는 두터운 비구름을 뚫고 내려와, 함부르크 공항에 착륙을 시도하고 있었다. 11월의 차가운 비가 대지를 어둡게 물들이고 있었고, 비옷을 걸친 정비공들, 민둥민둥한 공항 빌딩 위에 나부끼는 깃발, BMW의 광고판 등 이런저런 것들이 플랑드르파의 음울한 그림의 배경처럼 보였다. 아, 또 독일인가 하고 나는 생각 했다.
비행기가 착륙하자 금연등이 꺼지고 기내의 스피커에서 조용한 배경음악이 흘 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떤 오케스트라가 감미롭게 연주하는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Norwegian Wood)>이었다. 그리고 그 멜로디는 언제나처럼 나를 어지럽혔다. 아니, 다른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격렬하게 내 머리 속을 어지럽히며 뒤흔들었다.
나는 머리가 터져 버릴 것 같아 몸을 움츠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그 대로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잠시 후 독일인 스튜어디스가 내 앞으로 오더니 어디가 불편하냐고 영어로 물었다. 괜찮다, 좀 현기증이 났을 뿐이라고 나는 대답 했다.
"정말 괜찮으세요?"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스튜어디스는 생긋 웃으며 가버렸고, 음악은 빌리 조엘의 곡으로 바뀌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북해의 상공에 떠 있는 어두운 구름을 바라보면서, 내가 이 제까지 살아오면서 잃어버린 많은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잃어버린 시간, 죽었거 나 또는 사라져 간 사람들, 이젠 돌이킬 수 없는 지난 기억들을. 비행기가 완전히 멈춰, 사람들이 좌석 벨트를 풀고 가방과 옷가지 등을 선반 에서 내리기 시작할 때까지, 나는 줄곧 그 초원 속에 있었다. 나는 풀 냄새를 맡 았고, 살갗에 와 닿는 바람을 느꼈으며, 새소리를 들었다. 그때는 1996년 가을이 었고, 내가 곧 스무 살이 될 무렵이었다.
아까의 스튜어디스가 다시 와서 내 옆에 걸터앉더니 이제 좀 괜찮냐고 물었다.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어쩐지 좀 외로워졌을 뿐이에요(It's all right now, thank you. I only felt lonely, you know)."
나는 미소를 지었다.
"이해해요, 저도 가끔 그러니까요(Well, I feel same way, same thing, once in a while. I know what you mean)."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흔들며 좌석에서 일어나 매우 유쾌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즐거운 여행이 되시기를 빌겠어요. 안녕히(I hope you'll have a nice trip. Auf Wiedersehen)!"
"안녕히(Auf Wiedersehen)!"
하고 나도 말했다. 18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버린 지금에 와서도 나는 그 초원의 풍경을 선명하게 떠올릴 수가 있다. 며칠인가 계속된 부드러운 비로, 여름 동안 쌓였던 먼지가 말 끔히 씻겨 내려진 산은 깊고 선연한 푸르름을 머금고 있었고, 10월의 바람은 억 새 잎을 한들한들 흔들고 있었으며, 기다란 그름이 얼음장처럼 투명한 푸른 창 공에 떠 있었다. 하늘이 너무나 높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으면 눈이 아파 올 지경이었다. 바람은 초원을 건너 그녀의 머리카락을 잔잔히 흔들고는 잡목 숲으로 빠져 나갔다.
나뭇잎들이 사각거리고, 먼 곳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다른 세계의 입구로부터 들려 오는 것만 같은, 희미하고 어렴풋한 울음 소리였다. 그밖에는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어떤 소리도 우리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어느 한 사람과도 마주치질 않았다. 다만 빨간 새 두 마리가 초원 속에서 무 엇인가 겁먹은 듯 날아올라, 잡목 숲으로 날아가는 모습이 눈에 띄었을 뿐이다. 걸어가면서 나오코는 내게 우물 이야기를 해 주었다.
기억이란 건 아무래도 이상한 것이다. 거기에 실제로 내가 있었을 때 나는 그 런 풍경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특별히 인상적인 풍경이라는 느낌도 없었고, 더구나 18년 후에 그 풍경을 선명하게 기억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솔직하게 말해서 그때 나에겐 그런 풍경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던 것이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생각했으며, 그때 내 곁에서 나란히 걷고 있건 아름다운 한 여인에 대해 생각했고, 나와 그녀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나 자신에 대해 생각했다. 그때는 무엇을 보든, 무엇을 느끼든, 무엇을 생각하든, 결국 모든 것은 부메랑(역주:갈고리 모양의 장난감으로, 던지면 되돌아온다)처럼 자기 자신 에게로 되돌아오는 그런 나이였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사랑을 하고 있었다. 그 사랑은 몹시 복잡한 곳으로 나를 끌어들 이고 있었다. 주위의 풍경에 마음을 쓸 여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나의 뇌리에 맨 먼저 떠오르는 건 그 초원의 풍경이 아닌 가. 풀 냄새, 차가움을 머금은 부드러운 바람, 산 능선, 개 짖는 소리, 그런 것들 이 우선 먼저 떠오른다. 너무도 선명하게. 그것들은 너무나도 선명해서 손을 뻗 으면 그 하나 하나가 손가락으로 만져질 것만 같다. 그러나 그 풍경 속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아무도 없다. 그녀도 나도 없다. 우리들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토록 소중해 보이던 그때의 그녀와 나, 그리고 나의 세계는 모두 어디로 가 버린 것일까.
그래, 지금의 나로선 그녀의 얼굴을 바로 떠올릴 수조차 없는 것이다. 내 기억 에 남아 있는 것 사람 그림자 하나 없는 배경뿐이다. 물론 시간만 들이면 그녀의 얼굴을 떠올릴 수는 있다. 조그맣고 차가운 손, 산 뜻하고 곧은 머리결, 부드럽고 동그란 귓불, 그 바로 밑에 있는 조그마한 검은 점, 겨울이면 자주 걸치고 다니던 우아한 카멜 코트, 언제나 상대의 눈을 물끄러 미 들여다보면서 질문하는 버릇, 이따금 무슨 영문인지 떨리는 듯하던 목소리(마 치 강풍이 부는 언덕 위에서 재잘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 이미지를 하나하 나 쌓아 가면 문득 자연스레 그녀의 얼굴이 떠오른다.
먼저 옆얼굴이 떠오른다. 그건 아마도 나와 그녀가 언제나 나란히 걸어다녔던 탓일 것이다. 그래서 내가 제일 먼저 떠올리는 건 언제나 그녀의 옆얼굴이다. 그 다음에 그녀는 나를 보며 생긋 웃고, 갸웃이 고개를 기울여 말을 걸고, 내 눈을 들여다본다. 마치 맑은 샘물을 번뜩 헤치며 가는 작은 물고기의 그림자라 도 찾아내려 하는 것처럼.
하지만 그런 식으로 내 머리 속에 그녀의 얼굴이 떠오르기까지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세월이 흐를수록 거기에 필요한 시간은 점점 길어지게 된다. 슬픈 일이긴 하지만 그건 사실이다.
처음엔 한 5초면 떠올랐는데, 그것이 10초가 되고 30초가 되고 1분이 된다. 마 치 저녁 무렵의 그림자처럼 그것은 자꾸만 길어진다. 그리고 마침내는 땅거미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렇다. 나의 기억은 확실히 그녀가 서 있던 곳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마치 내가 그 옛날 나 자신이 서 있던 곳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풍 경만이, 그 10월의 초원 풍경만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되풀이 되풀이되어 내 머리 속에 떠오른다. 그리고 그 풍경은 나의 머리 어느 한 부분을 집요하게 걷어차고 있다.
이봐, 일어나지 못해? 난 아직도 여기 있어. 일어나! 일어나서 생각해 봐! 왜 내가 아직도 여기 있는가 하는 그 이유를. 아픔은 없다. 아픔은 전혀 없다. 걷어 찰 때마다 공허한 소리만 날 뿐이다. 그리고 그 소리마저도 언젠가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다른 모든 것이 결국은 사라져 버렸던 것처럼. 그러나 함부르크 공항의 루프트한자 비행기 안에서 그것은 여느때 보다도 오 래, 여느 때보다도 세차게 내 머리를 걷어차고 있었다. 일어나라, 생각해 보라, 하고. 그래서 나는 바로 이 글을 쓰고 있다. 나는 무슨 일이든 글로 써 보지 않고선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때 그녀는 무슨 이야길 했던가? 그렇다. 그녀는 내게 들판에 있는 우물 이야길 했다. 그런 우물이 정말 있었는 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그것은 그녀 안에밖엔 존재하지 않는 하나의 이미지나 상징이었는지도 모른다-그 어두운 나날에 그녀가 자신의 머리 속에서 실을 뽑듯 자아낸 다른 수많은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하지만 그녀가 그 우물 이야기를 해준 다음부터, 나는 그 우물 모습 없이는 초원의 풍경을 떠올릴 수가 없게 되었다. 실제로 내 눈으로 본 것도 아닌 우물 의 모습이, 내 머리 속에선 분리할 수 없는 일부로 그 풍경 속에 뚜렷하게 붙박혀 있다.
나는 그 우물의 모습을 아주 정밀하게 묘사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물은 초원 이 끝나고 잡목 숲이 시작되는 바로 그 경계선에 있다. 땅및으로 빠끔히 열린, 지름 1미터 가량의 어두운 구멍을 풀들이 교묘하게 감추고 있다. 둘레에는 목책 도, 높다란 돌담도 없다. 다만 그 구멍만이 입을 벌이고 있을 뿐이다. 가장자리의 돌들은 비바람을 맞아 희끄무레하게 변색됐고, 여기저기 틈이 벌 어지고 무너져 내려 있다. 작은 녹색 도마뱀이 그런 돌 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는 것이 보인다. 몸을 기울여 그 구멍 속을 들여다보아도 그밖엔 아무것도 안 보인다.
나로서 유일하게 알 수 있는 건, 그 우물이 아무튼 지독하게 깊다는 사실뿐이 다. 어림할 수조차 없을 만큼 깊다. 그리고 그 구멍 속에는 암흑이-이 세상 온갖 종류의 암흑을 응축해 놓은 것 같은 암흑이-가득 차 있다.
"그건 정말-정말 깊단 말예요" 하고 그녀는 신중하게 어휘를 골라 가면서 말 했다. 그녀는 가끔씩 그런 식으로 이야기 했다. 정확한 어휘를 골라 찾으면서 아주 천천히 이야기하는 것이다.
"정말 깊어요. 하지만 그것이 어디에 있는진 아무도 알지 못해요. 이 들판 어 딘가에 있다는 건 확실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말하곤 외투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채, 내 얼굴을 보면 서 정말예요, 하듯 생긋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정말 위험하기 짝이 없잖아. 어딘가에 깊은 우물이 있다, 그런데 그 게 어디에 있는진 아무도 모른다......그럼 거기에 빠지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지?"
"어쩔 수 없겠죠. 쉬익-풍덩. 그걸로 끝장이죠, 뭐."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까?"
"가끔 일어나요. 2년 또는 3년에 한 번쯤......어떤 사람이 갑자기 없어져서 아무 리 찾아도 없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이 근처 사람들은 말하죠. 들판의 우물에 빠진 거라구요."
"별로 좋은 죽음은 못되는 것 같군."
"끔찍한 죽음이죠"라고 말하고, 그녀는 외투에 붙은 풀잎들을 털었다.
"그냥 목뼈라도 부러져 깨끗이 죽어 버리면 좋겠지만, 어쩌다가 발을 삔 정도로 끝난 다면 정말 난처하거든요. 소리 소리 질러 보아도 누구 하나 듣는 사람도 없고, 누군가 발견해 줄 가망도 없구요. 사방엔 지네나 거미가 우글우글하고, 거기서 죽어 간 사람들의 해골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고, 어둡고 침침하고......그리고 저 높이 머리 위엔 빛의 동그라미가 마치 겨울 달처럼 조그맣게 떠 있겠죠. 그 런 곳에서 혼자서 서서히 죽어 가는 거예요."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군. 누군가가 찾아내어 울타리를 만들어야겠어."
"하지만 누구에게도 그 우물은 발견되지 않아요. 그러니 제대로 난 길에서 벗 어나면 안 돼요."
"그래야겠지" 그녀는 주머니에서 왼손을 꺼내더니 내 손을 쥐었다.
"하지만 걱정 없어요. 당신은 아무 염려 말아요. 당신은 어두운 밤에 이 주변 을 무작정 걸어다닌다 해도, 절대로 그 우물에 빠지진 않을 테니까요. 그리고 당 신과 이렇게 꼭 붙어 있는 한 나도 절대로 빠지지 않을 거예요.
"절대로?"
"절대로."
"어떻게 그걸 알지?"
"난 알 수 있어요. 그냥 알아요."
그녀는 내 손을 꼭 쥔 채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잠시 동안 말없이 걷기만 했 다.
"난 잘 알아요. 이유라든가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느끼는 거예요. 말하자면 지금 이렇게 당신과 꼭 붙어 있으면 말예요, 난 전혀 무섭지 않아요. 어떤 나쁜 일이든 어두운 일이든, 나를 유혹하려 하질 않는 거예요."
"그럼 문제는 간단하군. 줄곧 이렇게 하고만 있으면 그만일 테니까."
"그거-진심이에요?"
"물론 진심이지" 그녀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두 손을 내 어깨 위에 얹은 채, 내 눈을 물끄 러미 들여다 보았다. 그녀의 깊은 눈동자 속에서는 묵직한 액체가 이상한 모양 의 소용돌이를 그려내고 있었다. 갑자기 그녀가 발돋움 하더니 내 볼에다 살며 시 볼을 대었다. 그것은 한순간 가슴이 막혀 버릴 만큼 뜨겁고 멋진 동작이었다.
"고마워요."
"천만에."
"그렇게 말해 줘서 정말 기쁘지 뭐예요, 정말" 하고 그녀는 슬픈 미소를 지으 며 말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어요."
"어째서?"
"그건 안 될 일이니까요. 잔혹한 일이니까요. 그리고 그것은......."
말을 하다가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물고 그대로 걷기만 했다. 갖가지 생각들이 그녀의 머리 속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다는 사실을 안 나는, 역시 말없이 그녀의 곁에서 묵묵히 걷기만 했다. 한참 뒤에야 그녀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
"그건......올바른 일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당신에게도, 또 내게도."
"왜 올바르지 못한 일이지?"
하고 나는 조용히 물었다.
"글쎄요...... 누가 누군가를 영원히 지킨다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이에요. 안 그래요? 가령 내가 당신과 결혼을 했다고 쳐요. 그럼 당신은 회사에 다니겠지요. 그럼 당신이 회사에 있는 동안엔 도대체 누가 나를 보호하고 지켜 줄까요? 당신 이 출장을 가 있는 동안엔 또 누가 나를 지켜 주지요? 그러니 나는 죽을 때까지 당신과 붙어 다녀야 하잖아요. 안 그래요? 그런 것은 좋지 못해요. 그런 것은 인 간관계라고 할 수도 없겠지요. 그리고 언젠가 당신은 내게 싫증을 느끼고 말 할 거예요. '내 인생이란 게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 여자를 돌보는 일뿐이란 말인가' 하고. 난 그런 건 싫어요. 그래서는 내가 안고 있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 으니까."
"그런 일이 일생 동안 계속되는 건 아냐. 언젠가는 끝나. 그것이 끝나는 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거야. 이제부터 어떻게 할 것인가 하고. 그때는 어쩌면 나오코가 나를 도와주게 될지도 모르지. 우리는 손익 계산표에 맞추어 살고 있는 건 아냐. 만약 나오코가 지금 당장 나를 필요로 하면 나를 쓰면 되는 거야. 안 그래? 어째서 그런 식으로 모든 일을 어렵게 생각하지? 어깨의 힘을 좀 빼라구.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으니까 그런 눈으로 사물을 보게 되는 거야. 어깨에서 힘을 좀 빼면 몸이 가볍게 돼."
"어째서 그런 식으로 말하죠?"
하고 그녀는 몹시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 나는 뭔가 아주 잘못된 말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죠?"
하고 그녀는 꼼짝도 않고 발 밑의 땅을 보면서 말했다.
"어깨 힘 을 빼면 몸이 가벼워진다는 것 쯤은 나도 알아요. 그건 말을 해봤자 아무런 소 용이 없다구요. 알겠어요? 내가 지금 어깨 힘을 뺀다면 산산 조각이 난단 말이 에요. 나는 처음부터 그런 식으로만 살아왔고, 지금도 그런 식으로 살아갈 수 밖 에 없어요. 한 번 힘을 빼면 다시는 제자리로 돌아올 수 없다구요. 난 산산조각 이 나서 어딘가로 날려가 버릴 거예요. 어째서 그걸 모르는 거죠? 그걸 모르면 서 어떻게 나를 돌봐 준다는 말을 할 수가 있죠?"
나는 잠자코 있었다.
"난 지금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더 깊은 혼란에 빠져 있어요. 어둡고 차갑고 혼란스럽고......어째서 그때 나와 잠자리를 함께 한 거죠? 왜 나를 내버려 두지 못했지요?"
우리는 너무나도 조용한 소나무 숲속을 걷고 있었다. 길에는 늦여름에 죽은 매미가 바삭바삭하게 말라 흩어져 있어서, 그것이 구두밑에서 사각사각 소리를 내었다. 우리는 마치 잃어버린 물건이라도 찾듯이 땅을 보면서 천천히 소나무 숲 속을 걸었다.
"미안해요" 그녀가 내 팔을 살며시 잡았다. 그리고 몇 번인가 고개를 저었다.
"상처를 줄 생각은 없었어요. 내가 한 말에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정말 미안 해요. 난 다만 내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을 뿐이니까요."
"난 아직은 정말로 나오코에 대해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진 않아. 나는 머리가 좋은 편이 아니어서 무엇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리는 편이지. 하지만 만일 시간만 있다면 나는 나오코를 잘 이해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되면 나는 이 세 상의 누구보다도 나오코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해."
우리는 거기에 멈춰 서서 정적 속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구두 끝으로 죽은 매미나 솔방울을 굴리기도 했고, 소나무 가지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우러럽기도 했다. 그녀는 외투 주머니에다 두 손을 집어 넣은채, 무엇을 눈여겨보는 것도 아 니면서 무슨 생각엔가 골몰해 있었다.
"이봐요, 와타나베. 날 좋아해요?"
"물론이지."
"그럼 내 부탁을 두 가지만 들어줄래요?"
"세가지라도 들어주지" 그녀는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두 가지면 그만이에요. 두 가지면 충분해요. 하나는 당신이 잃게 날 만나러 와준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가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해요. 정말 기쁘 고, 정말 구제받은 거 같아요. 혹시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해도 말이에요."
"또 만나러 올 거야. 다른 하나는 뭐지?"
"나를 꼭 기억해 주었으면 해요. 내가 존재해서 이렇게 당신 곁에 있었다는 사 실을 언제까지라도 기억해 줄래요?
"물론 언제까지라도 기억하지."
하고 나는 대답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앞 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나뭇가지 사이로 새어 드는 가을 햇살이 그녀의 어깨 위 에서 하늘하늘 춤추고 있었다. 또다시 개 짖는 소리가 들려 왔는데, 그것은 조금 전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서 들려 오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작은 언덕 같은 곳으로 오르더니 소나무 숲에서 나와, 비스듬한 비탈길을 빠른 걸음으로 내려갔다. 나는 그녀의 두세 걸음 뒤에 서 걸어갔다.
"이쪽으로 와, 주위에 우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나는 그녀의 등 뒤에서 대고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방긋이 웃 으며 내 팔을 살며시 잡았다. 그리하여 우리는 남은 길을 둘이서 나란히 걸어갔 다.
"정말 언제까지라도 잊지 않을 거죠?"
그녀는 작은 소리로 속삭이듯 물었다.
"언제까지라도 기억하고 말고. 내가 나오코를 잊을 까닭이 없지."
그러나 기억은 확실히 멀어져 가는 것이어서, 나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이미 잊어버렸다. 이렇게 기억을 더듬으면서 글을 쓰고 있으면, 나는 가끔 몹시 불안 한 기분에 휩싸이고 만다. 어쩌면 내가 가장 중요한 부분의 기억을 상실해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아 문득 들기 때문이다. 내 몸 속에 기억의 변두리라고나 부를 만한 어두운 부분이 있어서, 소중한 기억들이 모두 거기에 싸여 부드러운 먼지로 변해 버린 것은 아닌가 하고.
그러나 어쨌든 지금으로선 그것이 내 손에 넣을 수 있는 전부인 것이다. 이미 엷어져 버렸고, 지금도 시시각각 엷어져 가는 그 불완전한 기억을 가슴에 꼭 끌 어안고, 뼈라도 핥는 심정으로 나는 이 글을 써 나가고 있다. 그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선 이러는 수밖에는 아무런 방법이 없는 것이다.
오래 전, 내가 아직 젊고 그 기억이 훨씬 선명했던 무렵, 나는 그녀에 관해서 글을 써보려고 시도한 적이 몇번인가 있었다. 하지만 그때엔 단 한 줄도 쓸 수 가 없었다. 첫 한 줄만 나와 준다면 그 다음은 무엇이든 술술 써질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그 한 줄이 아무리 애써도 나와 주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것 이 너무나 선명해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너무나 선명한 지도가, 선명함이 지나쳐 때로는 도움이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젠 안다. 결국에는 -하고 나는 생각한다.-글이라는 불완전한 그릇에 담을 수 있는 것은, 불완전한 기억이나 불완전한 상념밖엔 없다는 것을. 그리고 나오코에 관한 기억이 내 안에서 희미해져 가면 갈수록, 나는 보다 더 깊이 그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왜 그녀가 나를 향해 '나를 잊 지 말아요' 하고 당부했는지 그 이유도 나는 지금 알 것 같다.
물론 그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 안에서 그녀에 관한 기억이 언젠가는 희미해져 가리라는 것을. 바로 그렇게 때문에 그녀는 나를 향해 호소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를 언제까지라도 잊지 말아 줘요. 내가 존재했다는 걸 기억해 줘요."
하고. 그렇게 생각하면 나는 견딜 수 없이 서글프다. 왜냐하면 그녀는 나를 사랑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실의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