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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끝까지 해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게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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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누군가에게 친절하게 대해주고 싶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상대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냥 됐다싶어 이쪽에서도 단념한다. 생각해 보면 늘 이런식으로 지금까지 자신의 생각을 어느 시점에선가 단념해온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절따윈됐다고 우기는 사람이, 실은 얼마나 그 친절을 필요로하고 있는가. 지금까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상대를 위해서 그랬다고 하면서도 결국 자신을 위해 중간에 포기해 왔다는 것을 짧은 순간에 깨달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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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러니까 말야. 너처럼 살아도 한평생, 나처럼 살아도 한평생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태양은 말이지, 계속해서 보고 있으면 , 더 이상 눈이 부시지도 않고, 뭐 아무렇지도 않게 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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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초반에 비하면, 하는 일 없이 그냥저냥 흘려보내는 하루가 무료함이 아닌, 불안함으로 느껴지기는 했지만 아직 '찾아보면 할 일은 얼마든지 있다'는 낙관적인 생각이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 밑바닥에 남은 희망을 손가락으로 끄집어내 깨작깨작 핥다보면 날이 저물고, 야구중계에서 코미디 프로그램으로 이어지는 TV앞에 늘어져 있다 보면, 아침에 눈을 떴을 때는 아주 멀게만 느껴졌던 내일로 간단히 넘어간다. 백수의 나날이 길어지면 요일 감각은 말할 것도 없고 어제, 오늘, 내일의 경계조차 흐지부지해진다. 다시 말해서, 오늘의 해가 지면 내일이 오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한 번 어제가 반복 되는 듯한, 그런 아무 의욕없는 시간의 흐름을 느낄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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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타나베는 워낙 다른 사람과 식사하는게 비위에 안 맞았다. 자기가 먹고 있는 모습을 누군가에게 보이는 것도 싫었고, 다른 사람이 뭔가 먹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무방비 상태가 되는것 같다고나 할까. 다시 말해서, 자기가 뭔가 먹고 있는데 그 모습을 누가 빤히 보고 있으면 마치 그 사람 앞에 발가벗고 앉아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거꾸로 누군가가 먹고 있는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 사람의 벗은 몸뚱이를 보고 있는것 같은, 그 사람의 별 가치도 없는 흐느낌을 듣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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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더 간단히 말하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점점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게 아니라 점점 더 누군가를 싫어할 수 없게 되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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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내일부터는 다시 다람쥐 쳇바퀴처럼 돌아갈 일주일을 앞둔 일요일 밤에 듣기에, 치카게의 목소리가 너무나 칙칙해서 마치 '이번주는 운세가 아주 저조하니 얌전히 몸 조심하는게 좋겠다' 고 써 있는 운세 란을 읽은 것처럼 지레 김이 빠지고 피로감이 몰려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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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자기가 무엇으로부터 이렇게 경황없이 멀어지려 하는지, 도망치려 하고 있는지 자기도 알 수 없었다. 물론 치카게한테 들은 이야기 때문에 겁을 먹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렇게 허둥지둥 방을 뛰쳐나온 것은 그것만이 원인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방안에 혼자 있으면, 자기까지 무언가에 붙잡힐 것 같아 그것이 너무나 무서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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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카츠는 만원 버스나 전철을 타고 있으면 꼭 싸움에 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했다. 도대체 어떤 싸움이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상대를 앞에 두고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꾹 참고 있는, 그런 기분이 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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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타워의 밑둥치를 불고 지나가는 바람은 차가웠지만 새파랗게 펼쳐진 하늘로 우뚝 솟은 붉은 색과 흰색이 어우러진 철탑은 아름다웠다.
"굉장하구나."
하늘을 올려다보는 마사카츠의 목젖이 꼴깍 움직인다. 아버지를 따라서 게이고도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동안 쳐다보니 원근감이 흐트러져 푸른 바탕에 우뚝 서 있는 철탑 꼭대기를 손가락 끝으로 콕 집어낼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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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무사 사무소의 일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목수일처럼, 그날의 일을 끝냈다고 해서 속이 후련해지는 그런 업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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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엾다는 감정은 그냥 그렇게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가여웠다는 과거형이 되고, 어느새 자기가 그런 생각을 했었다는 것조차 까맣게 잊고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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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러니까, 잊으려고 하면 할수록 잊혀지지가 않아. 인간이란 건 말이다, 잊으면 안 되는 걸, 이런식으로 맘에 담아두고 있는 건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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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문을 닫자마자 게이고는 문득 책꽂이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보통 누군가 이 방에 올 때는 꼭 엎어져 있는 마키사진이, 똑바로 이쪽을 향해 있었다. 분명히 마사카츠가 뭔가 싶어 들춰보고는 그대로 세워든 것일 거다. 누가 본다 해서 문제가 될 건 없지만, 이미 몇 년 전에 죽은 여자친구의 사진을 여태 가지고 있는 걸 들키는 건 어찌 생각해도 역시나 껄끄럽다. 다만, 한 번 세워 놓은 걸 걷어치우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게이고는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마키를 잠시 바라본 다음, 다시 엎어놓을까 하다가 그냥 세워두기로 했다.
마키를 사고로 잃은 뒤 물론 다른 여자와 만난 적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 집안에 들어올 때면 단순히 마키의 사진이 아니라 게이고의 마음 속에 감추게 되는 무언가가 있다. 사진을 보여 달라고 하는 여자들도 있었다. 말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보고 몰래 다시 엎어놓은 다음,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뗀 여자도 있었다. 그 어느쪽이든 게이고로서는 특별히 감출 의도도 없던 것을 마치 비밀처럼 들키고 나면, 아니 일방적으로 까발려지고 나면, 위로를 받기도 하고, 새 출발하라고 격려받기도 하고, 때론 질투를 당하기도 했다. 그러면 눈 앞에서 마치 살아있는 몸으로 환생한 것 같은 그 여자가 너무 값싼 인간으로 보였다. 이렇게 아직도 사진을 올려두고 있는 것도 죽은 애인을 향한 마음이 한결 같아서가 아니라, 분명 언젠가는 잊어버릴 거라는 것을 알기에, 끝까지 치우지 않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게이고는 무언가를 잊지 않고 그대로 간직하고 싶었다. 무언가를 잊지 않고 산다는 것이 절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니까, 그러면 그럴수록 점점 더 그 무엇을 절대 잊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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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리코는 가방을 안고 돌아 나왔다. 이 년이나 함께 살았다면서 김빠지는 소리가 새어나올 정도로 가벼운 가방이었다. 아파트 계단을 내려서던 찰나, 교이치한테서 건네받은 열쇠를 그 여자에게 돌려준다는 걸 잊었다는 생각이 났다. 곧장 문 앞으로 돌아와 초인종을 누르려던 찰나, 그리 두껍지 않은 문 너머에서, 안으로 꾸역꾸역 삼키려 애쓰는 여자의 오열하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문 바로 뒤에서 났다. 가방을 건네고 노리코가 문을 닫은 직후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린 것이었다. 마치 자기 몸이 떨어져나가는 듯한, 애끓는 울음소리였다. 도대체 무엇을 잃으면, 이런 소리로 울 수 있을 까, 그 소리는 문 앞에 멈춰선 노리코를 무척이나 두렵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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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괴로움의 끝에 도대체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바로 그 차이였다. 부조리한 괴로움은 내일을 기다려도 해결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