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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세상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나무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새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비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일 거예요. 그런데도 나는 겨우 한 가지, 비 오는 일조차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나이를 먹고 죽는 게 아닌가 하고 말이에요. 그런 생각이 들자, 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쓸쓸한 마음이 북받쳐 올라 혼자 울었어요. 울면서 누군가가 꼭 껴안아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안아주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어요. 그래서 나는 외톨이가 되어 침대 위에서 줄곧 울고 있었죠. 그러는 사이에 날은 저물고 사방이 어두워져서, 새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게 되었어요. 그래서 난 비가 오는지 안 오는지 확인할 수가 없게 되었죠. 그 저녁무렵에 우리 가족은 모두 죽어 버렸어요. 내가 그걸 알게 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지만요."
"알게 됐을 때엔 괴로웠겠지."
"잘 기억나지 않아요. 그때는 아무런 느낌도 없었던 것 같아요. 기억하고 있는 건 단지 그 늦가을 비 오는 날 저녁나절에 어느 누구도 나를 꼭 껴안아 주지 않았다는 사실뿐. 그것은 마치ㅡ 내게 있어서 세계의 끝과 같은 것이었어요. 어둡고 힘겹고 쓸쓸해서 견딜 수가 없었기 떄문에 누군가가 꼭 껴안아 주었으면 했는데, 그때 주위에 자신을 안아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당신은 이해하겠어요?"
"이해할 것 같아" 라고 내가 말했다.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적이 있나요?"
"몇 번인가."
"그래서 지금은 외톨이로군요?"
"그런건 아니야" 라고 나는 벨트에 묶인 나일론 로프를 손가락으로 바짝 잡아당기며 말했다.
"이 세상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외톨이가 될 수는 없어. 모두들 어딘가에서 조금씩 연결되어 있지. 비도 내리고, 새도 울고, 배에 상처가 나고, 어둠 속에서 여자 아이와 키스하는 일도 있지."
"그렇지만 사랑이 없으면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어요" 라고 그녀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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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소리에 대해서, 그것이 어떤 소리든지 간에 상대적인 입장을 취할 수가 있다. 그러나 침묵은 제로며 아무것도 없다. 침묵은 분명히 우리들을 감싸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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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자네의 의식의 핵이라고 할 수 있지. 자네의 의식이 그리고 있는 것이 세계의 끝이란 말일세. 어째서 자네가 그런 것을 의식 깊숙이 감추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그러나 이유야 어쨌든 자네의 의식속에서 세계는 이미 끝나 있어. 거꾸로 말하면 자네의 의식은 세계의 끝 안에서 살고 있는 셈이지. 그 세계에는, 지금 이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것의 대부분이 빠져 있다네. 거기엔 시간도 없고, 공간의 확장도 없고, 삶도 없고, 죽음도 없고, 정확한 의미에서의 가치관이나 자아도 없다네. 그 곳에서는 짐승들이 사람들의 자아를 통제하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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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나는 무엇을 잃어버린 것일까? 생각해 보니 나는 정말 여러 가지 것들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아마도 자세히 적는다면 대학 노트 한 권의 분량쯤은 될 것이다. 잃어버렸을 때는 별것 아닌 것으로 여겼었는데 나중에 가서야 몹시 아쉬웠던 것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특히 나는 온갖 사물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감정을 계속 잃어 온 것 같다. 나의 존재를 상징하는 코트 주머니에는 거역할 수 없는 숙명적인 구멍이 뚫여 있어서, 어떠한 바늘과 실로도 그것을 꿰맬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만약 누군가가 내 방의 창문을 열고 고개를 안으로 불쑥 들이밀고는 "너의 인생은 제로야!" 라고 내게 소리쳤다 하더라도, 내게는 그것을 부정할 만한 근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
하지만 만약 내가 다시 한 번 살 수 있다고 해도, 역시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똑같은 인생을 더듬어대며 살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그것이-그 계속 잃어버리는 인생이-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내게는 나 자신이 되는 것말고 또 다른 길이란 없다. 사람들이 아무리 나를 버리고, 내가 아무리 사람들을 버리고, 온갖 아름다운 감정과 뛰어난 자질과 꿈이 소멸되고 제한되어 간다 하더라도, 나는 나 자신 이외의 그 무엇도 될 수는 없다.
내가 좀더 젊었을 때는, 마치 내가 나 아닌 다른 존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다시 말해 나는 카사블랑카에 바를 열고 잉그리드 버그만과 지인이 되는 일도 가능할지 모른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좀더 현실적으로-그것이 실제로 현실적인지 아닌지는 접어 두고-나의 자아에 어울리는 더 유익한 삶을 손에 넣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나를 변혁하기 위한 훈련까지도 했다. <녹색혁명>도 읽었고, 심지어 <이지 라이더> 같은 것은 세 번씩이나 보았다. 그러나 나는 매번 마치 키가 구부러진 보트처럼 똑같은 자리로 되돌아왔다. 그것은 또다시 나였다. 나는 아무데로도 가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거기에 머물면서, 내가 되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절망이라 불러야 하는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래, 절망인지도 몰라. 투르게네프라면 환멸이라 부를지도 모르고, 도스토예프스키라면 지옥이라 부를지도 모른다. 서머셋 몸이라면 현실이라 부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가 그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그것은 결국 나 자신인 것이다.
나는 불사의 세계를 상상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거기서 나는, 내가 잃어버렸던 모든 것을 되찾아 새로운 나 자신을 확립할지도 모른다.
또한 그러한 나의 모습을 향해 누군가가 손뼉을 치고, 축복해 줄지도 모른다. 나는 행복해지고, 내 자아에 어울리는 아주 유익한 인생을 손에 넣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지금의 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또 다른 나 자신이며, 지금의 나는 오직 지금의 나만을 안고 있다. 그것은 그 누구도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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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도시의 어딘가에 반드시 출구가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은 처음에는 직감이었어. 그렇지만 오래지 않아 확신을 하게 되었지. 그 까닭은 이 도시가 완벽한 시가지기 때문이지. 완벽하다는건 필연적으로 모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거지. 그렇기 때문에 이곳은 도시라고 얘기할 수조차 없어. 좀더 유동적이고 총체적인 그 무엇이야. 모든 가능성을 제시하면서 끊임없이 그 형태를 바꾸어 가고, 그리고 완전성을 유지하고 있다구. 즉 이곳은 결코 고정적으로 완벽한 세계는 아니란 거야. 다시 말해 움직이면서 완벽해지는 세계란 말이지. 그렇기 때문에 내가 탈출구를 원한다면, 탈출구는 있게 마련인 거야. 내 말뜻을 알겠어?"
"잘 알아"라고 나는 말했다.
"나도 그 점을 바로 어제 깨달았어. 이곳은 가능성의 세계라는 걸 말이야. 여기엔 무엇이든지 있으면서 또 아무것도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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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네가 하는 말을 믿을 수 있어. 강은 아마도 그 곳과 통해 있을거야. 우리가 뒤에 두고 온 세계와 말이야. 지금은 나도 그 세계의 일을 조금씩 기억해 낼 수 있어. 공기랑, 소리랑, 빛이랑, 그런 것들 말이야. 노래가 내게 그런 것들을 다시 기억하게 해주었어."
"그게 정말 멋진 세계인지는 나도 알 수는 없어"라고 그림자는 말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마땅히 살아가야만 하는 세계지.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어. 또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일도 있지. 난 그 곳에서 죽어야 돼. 네가 죽으면 나도 사라지게 되는데, 가장 자연스런 일이야."
"아마도 네 말이 맞겠지"라고 나는 말했다.
그러고서 우리는 다시 도시를 내려다 보았다. 시계탑도, 강도, 다리도, 벽도, 그리고 연기도, 거센 눈보라에 푹 덮여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마치 폭포처럼 공중에서 대지 위로 떨어져 내리는 거대한 눈 기둥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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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를 잃어버리고 나자, 이 황량한 우주의 변방에 홀로 남겨진 것만 같았다. 난 이제 어디로도 갈 수 없고, 그 어디로도 되돌아갈 수 없다. 여기는 세계의 끝이고, 세계의 끝은 그 어떤 곳과도 통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세계는 끝이 나고, 고요하게 멈춰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