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별로 책을 읽지 않게 되었다는 글을 쓴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무래도 좀 쑥스럽지만, 요 한 달 동안 꽤 많은 책을 읽었다. 일상적인 얘기를 글로 쓰면 이런 식의 일이 종종 일어난다. "담배를 끊은 지 2년, 몸 상태가 무척 좋다"고 쓰자마자 담배를 다시 피우기 시작하거나, "넥타이를 매는 건 1년에 두세 번밖에 되지 않는다"고 쓴 직후에 연달아 세 번이나 넥타이를 맬 처지에 놓이거나 하는 식이다. 무책임하다고 하면 무책임한 일이겠지만, 뭐 세상이란 원래 다 그런 거다.
어째서 갑자기 책을 읽기 시작했는가 하면, 요 한 달 동안 전철이나 비행기를 탈 기회가 꽤 많았기 때문이다. 요컨대 나는 이동이 많으면 책을 많이 읽게 되는 것이다.
우선 남반구 항로의 비행기로 도쿄-아테네 사이를 왕복했으므로(편도 약 스무 시간) 그 동안 책을 세 권 읽었다. 존 어빙의 <워터메서드 맨(Water-method Man)>과 닥터로의 <다니엘 서>와 존 고어즈의 <해미트>다. 남반구 항로의 유럽행 비행기는 몸도 마음도 위장도 죄다 기진맥진하게 되지만, 적어도 책만큼은 잘 읽힌다.
<워터메서드 맨>은 3년인가 4년 전에 읽었을 때는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는데, 이번에 다시 읽어 보니 맨 처음 읽었을 때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가프의 세계>만큼 완성도가 높지는 않지만 풍속 소설을 토막낸 듯한, 독특하고 와일드한 재미가 있어서 푹 빠져 들게 되었다. 나의 개인적인 기준으로 따지자면 첫 번째보다 두 번째 읽었을 때 더 재미있는 책이 좋은 소설이다. 하기야 두 번이나 읽고 싶어지는 소설은 그리 많지 않으니까 다시 한 번 읽어 보고 싶어지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지도 모르겠다.
닥터로의 <다이엘 서>도 <워터메서드 맨>처럼 시간이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하는 소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익숙해지기 전에는 포인트를 잡기가 어렵지만, 한번 포인트를 포착하면 내 몸이 소설의 시간에 자연스레 감응하여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읽을 만한 소설이다.
고어즈의 <해미트>는 그런 풍의 분위기가 잘 나타나 있어 재미는 있었지만, 실재 인물을 주인공으로 설정해 놓은 만큼 다소 짜임새가 빤히 들여다 보이는 경향이 있는 듯했다.
비행기 안에서 독서벽이 붙어 버렸는지 귀국한 뒤에도 일하는 짬짬이 시간만 나면 핀천의 <경매 넘버 49의 외침>을 읽었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영어로 읽어 보려고 시도하다 좌절했던 소설인 만큼, 번역본이 나온 것은 나에게는 커다란 기쁨이었다. 물론 핀천의 소설이니까, 술술 읽힐 뿐더러 재미도 있다고 할 수 없지만, 이만큼 우스꽝스러운 소설도 흔치 않을 테니 흥미가 있는 분은 꼭 읽어 보길 바란다.
그 다음에는 존 어빙의 신작(여전히 무턱대고 긴 소설) <더 사이더하우스 룰스(THE CIDERHOUSE RULES)>의 후반부를 다 읽었는데, 이 소설에 대한 감상은 도저히 한마디로 말할 수 없으므로 통과해야겠다.
그러고 나서 스파게티 소설을 세 권, 크럼리의 <댄싱 베어>와 리처드 콘든의 <여자와 남자의 명예>(제목의 뜻은 불명)와 마이클 Z.류인의 <침묵의 세일즈맨>이다. 스파게티 소설이란 것은 내가 만들어 낸 말로, 스파게티를 삶으면서 읽기에 적당한 소설이라는 의미다. 물론 이들 작품을 깔보는 게 아니다. 스파게티를 삶으면서도 자꾸만 손에 들게 되는 소설이라고 해석해 주기 바란다. 세 권 중에서는 <여자와 남자의 명예>가 제일 재미있었던 것 같다.
다음으로는 누가 읽어 보라고 권하길래 류탄지 유 전집을 세 권쯤 읽었다. 나는 일본 소설을 그다지 읽지 않으므로 류탄지 유라는 사람이 문학사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전체적으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고, 몇몇 마음에 드는 작품도 있었다. 그러나 모리타 요시미쓰의 <그로부터>를 본 뒤로는 전전 일본 소설의 주인공은 모두 마쓰다 유사쿠처럼 느껴지고 만다. 책을 읽고 있으면 거의 자동적으로 마쓰다 유사쿠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이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영화는 무척 재미있었지만.
또 한 권, 저자인 스즈무라 가즈나리 씨가 보내 주신 <아직/이미, 무라카미 하루키와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라는 책도 읽었지만 이것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에 대한 평론서이므로 감상은 쓰지 않겠다. 그러나 자신에 대해 씌어진 글을 읽는다는 건 어쩐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듯한 기분이 드는 일이다. 아마도 나와 무라카미 하루키 씨는 거울을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세계에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나는 가끔 독자들과 만나 얘기를 할 때마다 항상 누군가를 대신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고 마는 것이다.
한편 아내는 그 동안 세 권의 책을 읽었다. 앨리스 워커의 <컬러 퍼플>과 헨리에트 폰 쉴러흐슈미트(이름 한번 길다)의 <히틀러를 둘러싼 여인들>과 키티 하트의 <아우슈비츠의 소녀>다. 그녀가 도대체 어떤 취미와 목적으로 책을 선택하는지 지금까지도 나는 잘 모르겠다. 한마디로 부부라 해도 그 사이에 가로놓은 골짜기는 어둡고 깊은 모양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내가 읽는 책의 영역과 집사람이 읽는 책의 영역은 거의 겹치는 일이 없으므로(고작해야 랩 크래프트 정도가 두 영역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 서로가 제멋대로 좋아하는 책을 사 모아 우리 집의 책은 늘어 가기만 한다. 어떻게 좀 했으면 좋겠지만, 아마 어떻게도 안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