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가 잔디를 깎던 것은 열여덟 살이나 열아홉 살 때였으니까, 벌써 십사오 년 전의 일이 된다. 꽤 오래 전이다.
가끔, 십사 년이나 십오 년 정도 라면 오래 전이라고 할 만한 세월은 아니지 않는가,고 생각할 때도 있다. 짐 모리슨이 <라이트 마이 파이어>를 노래하거나 폴 매카트니가 <롱 앤드 와이딩 로드>를 노래하거나 하던 시절 ㅡ 조금 앞뒤가 바뀐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런 때다 ㅡ 그것이 그나 자신이 그때에 비해서 그다지 변한 게 없는 게 아닌가 하고도 생각한다.
아냐, 그럴 리는 없겠지. 나는 틀림없이 상당히 변했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잘 설명이 되지 않는 일이 너무 많다. 아, 나는 변했다. 그리고 십사오 년 전이라는 것은 제법 오래 전이다.
우리 집 근처에 ㅡ 나는 얼마 전에 여기로 이사 왔다 ㅡ 공립 중학교가 있고, 나는 물건을 사러 가거나, 산책하러 가거나, 할 때마다 그 앞을 지나간다. 그리고 걸으면서 중학생들이 체조를 하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장난치거나 하고 있는 것을 멍하니 바라본다. 특별히 좋아서 보는 것은 아니고, 그저 달리 볼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오른편에 있는 벚꽃 나무 가로수를 보아도 되지만, 그것보다는 중학생을 바라보는 편이 그런대로 조금은 낫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매일 중학생들을 바라보고 있다가, 어느 날 문득 생각했다.
그˙들˙은˙열˙네˙살˙이˙나˙열˙다˙섯˙살˙이˙다˙고.
이것은 나한테는 그런대로 하나의 발견이었고, 작은 놀라움이었다. 십사 년이나 십오년 전에 그들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고, 태어나 있었다 해도 거의 의식이 없는 핑크빛 고깃덩어리였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벌써 브래지어를 하거나, 마스터 베이션을 하거나, 디스크 자키한테 시시한 엽서를 보내거나, 체육관의 창고 구석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어느 집 담벼락에 빨간 스프레이 페인트로 'X지' 라고 쓰거나, <전쟁과 평화>를 ㅡ아마도ㅡ 읽거나 하고 있는 것이다.
맙소사.
나는 정말로 맙소사라고 생각했다. 십사오 년 전이라면은, 내가 잔디를 깎고 있었던 때가 아닌가. 기억이란 소설과 비슷하다. 혹은 소설이란 기억과 비슷하다. 나는 소설을 쓰기 시작하고 나서 그 사실을 절실하게 실감하게 되었다. 기억이란 소설과 비슷하다, 혹은 운운.
아무리 잘 마무리된 형태로 정리하려고 노력해 보아도, 문맥은 이쪽 저쪽으로 왔다갔다 하고, 마지막에는 문맥도 아니게끔 돼 버린다. 왠지 꼭 축 늘어져 버린 새끼 고양이를 몇 마리 인가 쌓아 올려놓은 것 같다. 따뜻하고, 게다가 불안정하다. 그런 것이 상품이 되다니 ㅡ상품 말이야ㅡ 대단히 부끄러운 일이라고 가끔 느낀다. 정말로 얼굴이 빨개질 때도 있다. 내가 얼굴이 빨개지면, 온 세계가 얼굴을 붉힌다.
그러나 인간의 존재를 비교적 순수한 동기에 기초를 둔 상당히 어리석은 행위로 간주한다면, 무엇이 옳고 무엇이 옳지 않은지 따위는 대수로운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기억이 생겨나고, 소설이 생겨난다. 이것은 이미, 그 누구도 멈추게 할 수 없는 영구 기계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딸가닥 딸가닥 소리를 내면서 온 세계를 돌아다니고, 땅 위에 끝없는 한 줄기 선을 그어 나간다.
잘되면 좋겠습니다,
하고 그는 말한다. 하지만 잘될 리가 없다. 잘돼 본 적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하면 된다는 거냐?
그렇게 해서, 나는 또 새끼 고양이를 모아서 쌓아올려 간다. 새끼 고양이들은 축 늘어져 있고, 아주 부드럽다. 잠이 깨서 자기들이 캠프 파이어의 장˙작˙더미처럼 쌓아 올려진 것을 알아 차렸을때, 새끼 고양이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오라, 뭔가 이상하구나, 라는 정도로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만일 그렇다면 ㅡ그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면은ㅡ 나는 조금은 마음이 놓일 것이다.
그런 것이다.


2

내가 잔디를 깎던 것이 열 여덟 살 아니면 열 아홉 살 때니까, 제법 옛날 얘기다.
그 당시 나에게는 동갑내기 애인이 있었지만, 그녀는 약간 사정이 있어서, 꽤 먼 도시에 떨어져 살고 있었다.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것은 일년에 기껏해야 전부해서 이 주일 정도였다. 우리는 그 이 주일 동안에 섹스를 하거나, 영화를 보거나, 비교적 호사스러운 식사를 하거나, 끝없이 이렇다 할 것도 없는 이야기를 나누거나 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꼭 크게 싸움을 하고, 화해를 하고, 또 섹스를 했다. 요컨대 세상에 있는 일반적인 연인들이 하는 일을 압축한 영화 같이 하고 있었던 셈이다.
내가 정말로 그녀를 좋아했는지 어떤지, 그 점에 대해서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생각은 나지만,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나는 그녀하고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을 좋아했고, 그녀가 한 장씩 옷을 벗는 것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고, 그녀의 부드러운 바기나(질) 안에 들어가는 것도 좋았다. 섹스가 끝난 뒤, 그녀가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이야기하거나 자고 있거나 하는 것을 바라보는 것도 좋아했다. 하지만, 그뿐이다. 장래 일 따위는 무엇 하나 알 수 없다.
그녀와 만나는 이 주일을 빼면, 내 인생은 지독히 단조로웠다. 가끔 대학에 나가서 강의를 받고, 간신히 남만큼의 학점을 땄다. 그리고 혼자 영화를 보거나, 별뜻도 없이 거리를 어슬렁어슬렁 하거나, 사이가 좋은 여자 친구와 섹스가 배제된 데이트를 하거나 했다. 여럿이 모이거나 떠들거나 하는 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위에서는 조용한 사람이라고들 생각하고 있었다. 혼자 있을 때는 로큰롤만 들었다. 행복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불행한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하지만 그 나이에는, 모두 그런 것이다.
어느 여름날 아침, 7월 초에, 애인한테서 긴 편지가 왔고, 거기에는 나하고 헤어지고 싶다고 씌어 있었다.
당신을 쭉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하고, 앞으로도... 운운.
요컨대 헤어지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새 보이 프렌드가 생긴 것이다. 나는 고개를 흔들고 담배를 여섯 개비 피우고, 밖에 나가서 깡통 맥주를 마시고, 방에 돌아와서 또 담배를 피웠다. 그리고 책상위에 있는 긴 HB 연필을 세 자루 분질렀다.
특별히 화가 난 것은 아니다. 뭘 해야 할지 잘 몰랐을 뿐이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고 일하러 갔다. 그리고 얼마 동안, 나는 주위의 많은 사람들한테서 많이 밝아졌네. 라는 말을 들었다. 인생이란 정말 알 수가 없다.
나는 그 해, 잔디깎기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잔디깎기 회사는 오다큐선의 교도역 근처에 있었고, 제법 장사가 잘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집을 지으면 마당에 잔디를 심는다.
또는 개를 키운다. 이것은 조건 반사와 같다. 한번에 양쪽을 다하는 사람도 있다. 그것은 그것대로 나쁘지 않다. 잔디의 초록색은 예쁘고, 개는 귀엽다. 그러나 반년쯤 지나면, 모두가 다소 지겨워지기 시작한다. 잔디는 깎지 않으면 안 되고, 개는 산책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좀처럼 잘 되어 가지 않는다.
어쨌든, 우리들은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잔디를 깎아 주었다.
나는 그 전해의 여름, 대학 학생과에서 이 일거리를 찾아냈다. 나 외에도 몇 명인가 같이 들어간 녀석들이 있었지만 모두 금방 그만둬 버리고, 나만이 남았다. 일은 고됐지만, 급료는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남하고 별로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 나한테 알맞았다. 나는 거기에 근무하게 되고 나서, 약간의 목돈을 모았다. 여름에 애인과 어딘가에 여행하기 위한 자금이었다. 그러나 그녀하고 헤어져 버린 지금에 와서는,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헤어지자는 편지를 받고 일주일 정도, 그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 이것저것 생각해 보았다, 라기보다는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일 정도밖에 생각할 것이 없었던 것이다.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는 일주일이었다. 내 페니스는 남의 페니스같이 느껴졌다. 누군가가 ㅡ내가 모르는 누군가가ㅡ 그녀의 작은 젖꼭지를 가만히 씹고 있다. 뭔가 굉장히 이상한 기분이다.
돈의 사용처는 끝끝내 생각해 내지 못했다. 누군가가 중고차 ㅡ스바루 1000CCㅡ 를 사지 않을래,라고 했다. 물건은 나쁘지 않았고 가격도 적당했지만, 왠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스피커를 새로 바꿀까 하고도 생각해 봤지만, 내가 사는 작은 목조 아파트로는 무리한 얘기였다. 아파트를 옮겨도 되었지만, 옮길 이유가 없었다. 아파트를 옮기면, 스피커를 새로 살 만한 돈이 남지 않는 것이었다.
돈을 쓸 데가 없었다.
여름용 폴로 셔츠 한 장과 레코드를 몇 장 샀을 뿐, 나머지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성능이 좋은 소니의 트랜지스터 라디오도 샀다. 커다란 스피커가 붙어 있었고, FM이 아주 깨끗이 들린다.
그 일주일이 지난 뒤,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즉, 돈을 쓸 일이 없다면, 쓸 일 없는 돈을 버는 일도 무의미하다는 사실이다.
나는 어느 날 아침 잔디깎기 회사 사장한테 '일을 그만두고 싶은데요.' 라고 말했다.
"슬슬 시험 준비도 하지 않으면 안 되고요, 그전에 여행도 하고 싶거든요."
설마 이제는 돈이 필요 없어서요,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래, 거 유감인데."
하고 사장(이라고 할까, 정원사라는 느낌의 아저씨다.)은 말했다.
그리고 한숨을 쉬고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뚝뚝. 하는 소리가 나게 목을 이리저리 돌렸다.
"자네는 정말이지 잘해 주었어. 아르바이트생 중에서는 제일 오래 되었고, 단골 손님들 평판도 좋고 말이지. 젊은이답지 않게 정말 잘해 주었어."
"네," 하고 나는 말했다.
사실 나는 대단히 평판이 좋았다. 일을 꼼꼼하게 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아르바이트생들은 대형 전기 잔디깎기 기계로 대충 잔디를 깎아 내고 나면은, 나머지는 적당히 해치운다. 그렇게 하면 시간도 많이 걸리지 않고, 몸도 고되지 않다. 내가 하는 방법은 완전히 거꾸로 였다.
기계로는 적당히 하고, 손으로 하는 일에 시간을 들였다. 당연히 일은 깨끗이 완성된다. 단, 벌이는 적다. 한 건에 얼마라는 급료 계산법이었기 때문이다. 정원의 대체적인 면적으로 가격이 정해진다.
그리고 쭈그리고 일을 하기 때문에, 허리가 지독히 아파진다. 이것은 실제로 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일이다. 익숙해지기 전에는 계단의 오르내리기에도 부자유스러울 지경이다.
나는 특별히 좋은 평판을 듣자고 일을 꼼꼼히 한 것이 아니었다. 믿어줄지 모르겠지만, 단순히 잔디를 깎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잔디깎기 가위를 갈고, 잔디깎기 기계를 실은 라이트 밴(뒤쪽 좌석을 앞으로 젖혀 짐 싣는 공간을 넓게 할 수 있는 자동차 형식의 하나=역주)으로 단골집에 가고, 잔디를 깎는다.
여러 유형의 정원이 있고, 여러 유형의 잔디가 있고, 여러 타입의 부인들이 있다. 얌전하고 친절한 부인이 있는가 하면은, 무뚝뚝한 부인도 있다. 노브라에다 넉넉한 T셔츠를 입고 잔디를 깎고 있는 내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젖꼭지까지 보여 주는 부인도 있다.
어쨌든 나는 잔디를 계속 깎았다. 대부분의 경우 잔디는 충분히 웃자라고 있었다. 마치 풀밭 같았다. 잔디가 웃자라 있으면 있을수록, 일은 할 만했다. 일이 끝난 뒤에는, 정원의 인상이 완전히 변해 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아주 멋진 느낌이다. 마치 두꺼운 구름이 한순간 걷히고, 태양 광선이 주위에 꽉 찬 것 같은 느낌이다.
꼭 한 번 ㅡ일이 끝난 뒤에ㅡ 부인들 중 하나하고 잔 적이 있다. 서른 하나나 둘, 그 정도 나이의 부인이었다. 그녀는 자그마했고, 작고 탄탄한 유방을 갖고 있었다. 덧문을 전부 닫고, 불을 끈 컴컴한 방안에서 우리는 관계를 맺었다. 그녀는 원피스를 입은 채 속옷을 벗고, 내 위에 올라탔다. 가슴보다 아래쪽은 나한테 만지지 못하게 했다. 그녀의 몸은 이상할 정도로 차가웠고, 바기나만이 따뜻했다. 그녀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나도 잠자코 있었다. 원피스 옷자락이 사각사각 소리를 냈고 그것이 늦어지거나 빨라지거나 했다. 도중에 한 번 전화벨이 울렸다. 벨은 한참 울리고 나서 그쳤다.
나중에, 내가 애인하고 헤어지게 된 것은 그 일 때문이 아닐까 문득 생각하기도 했다. 특별히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왠지 그렇게 느껴졌을 뿐이다. 받지 않았던 전화벨 때문이다. 하지만, 됐다. 어차피 끝난 일이다.
"하지만 난처한데." 하고 사장이 말했다.
"자네가 지금 빠져 버리면, 예약을 처리할 수가 없어. 지금이 한창 시즌이고 말이지."
장마 탓에 잔디가 아주 길게 자란 것이다.
"어때, 일주일만 더 일해 주지 않으려나? 일주일 정도면 사람도 어떻게 구할 수 있을 거고, 그럭저럭 해 나갈 수 있겠는데 말이지. 만일 해 준다면 특별 보너스를 주지."
"괜찮아요." 하고 나는 말했다.
당장 이렇다 할 예정도 없었고, 무엇보다도 일 자체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긴 하지만 이상하군, 하고 나는 생각한다. 돈 따윈 필요 없다고 생각하자마자 돈이 들어온다.
삼 일 개고 나서, 하루 비가 오고, 또 삼 일 개었다. 그런식으로 마지막 일주일이 지나갔다.
여름이었다. 그것도 반해 버릴 만큼 멋진 여름이었다. 하늘에는 옛 추억 같은 하얀 구름이 떠있었다. 태양은 따갑게 살갗을 태웠다. 내 등 껍질은 깨끗이 세 번 벗겨지고, 새까매졌다.
귀 뒤켠까지도 새까맸다.
마지막 일하는 날 아침, 나는 T셔츠와 쇼트 팬츠, 테니스 슈즈에다가 선글라스의 차림으로 라이트 밴에 올라탔고, 내게는 마지막이 될 정원으로 향했다. 자동차 라디오는 망가져 있었기 때문에, 집에서 들고 온 트랜지스터 라디오로 로큰롤을 들으면서 차를 몰았다. 클리댄스나 그랜드 펑크 같은 그런 느낌이다. 모든 것이 여름의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었다.
나는 토막토막 휘파람을 불고, 휘파람을 불지 않을 때는 담배를 피웠다. FEN의 뉴스 아나운서는 이상한 인토네이션으로 베트남의 지명을 연발하고 있었다.
나의 마지막 일터는 요미우리 랜드 근처에 있었다.
맙소사, 왜 가나가와에 사는 사람이 세타가야에서 잔디깎기 서비스를 불러야 했을까?
하지만 나에게는 그런 일에 대해서 불평할 권리가 없다. 왜냐하면 내가 스스로 그 일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아침에 회사에 나가면 칠판에 그날의 일터가 전부 씌어 있고, 각자가 마음에 드는 장소를 고른다. 많은 사람들이 가까운 장소를 택한다. 왕복 시간이 걸리지 않고, 그만큼 일을 많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반대로 될 수 있는 대로 먼 곳의 일터를 고른다.
언제나 그랬다. 그에 대해서는 모두가 의아해 했다. 전에도 말했듯이, 나는 아르바이트생 중에서는 제일 고참이고, 마음에 드는 일을 남보다 먼저 고를 권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특별히 대단한 이유는 아니다. 멀리 가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먼 정원에서 먼 잔디를 깎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먼 곳의 먼 광경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설명해 봤자, 아마 아무도 이해해 주지 않을 것이다.
나는 차의 유리창을 전부 열어 놓고 운전했다. 도시가 멀어짐에 따라 바람이 시원해지고, 녹색이 선명해져 갔다. 풀 내음과 마른 흙 냄새가 강해지고, 하늘과 구름의 경계가 분명한 획을 긋기 시작하였다. 멋진 날씨였다. 여자아이하고 둘이서 간단한 여름 여행을 나서기에는 최고의 날씨다. 나는 시원한 바다와 뜨거운 모래 사장을 떠올렸다. 그리고 에어 컨디셔너가 잘된 작은 방과 풀이 잘 먹여진 블루 시트를 생각했다. 그뿐이었다. 그밖에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모래밭과 블루 시트가 교대로 머리에 떠올랐다.
가솔린 스탠드(주유소)에서 기름 탱크를 가득 채우고 있는 동안에도 같은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스탠드 옆의 풀밭에 드러누워, 서비스 요원이 오일을 체크하거나 유리창을 닦거나 하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땅에 귀를 대면 여러가지 소리가 들린다. 먼 파도와 같은 소리도 들린다. 하지만 물론 그것은 파도 소리는 아니었다. 땅이 흡수한 여러 가지 소리가 섞였을 뿐이다. 눈앞의 풀 잎사귀 위를 작은 벌레가 기어가고 있었다. 날개가 있는 작은 초록색 벌레다. 벌레는 풀잎 끝까지 가자, 한참 주저하고 나서 같은 길을 되돌아갔다.
그다지 낙심한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벌레도 역시 더위를 느낄까? 모르겠는데.
십 분쯤 지나 급유가 끝났다. 서비스 계원이 차 클랙슨을 울려서 나에게 끝났다고 알렸다.


3

목적의 집은 언덕 중턱에 있었다. 평온하고 고상한 언덕이다. 꼬불꼬불한 길 양편에는 느티나무가 늘어서 있었다. 어느 집 정원에서는 작은 사내아이가 둘, 벌거벗고 호스의 물을 서로 끼얹고 있었다. 하늘로 향한 물보라가 오십 센티미터 정도 되는 작은 무지개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누군가가 유리창을 열어 놓은 채 피아노 연습을 하고 있다. 아주 잘 치는 피아노 였다. 레코드 연주가 아닌가 착각할 정도였다.
나는 집 앞에 라이트 밴을 세우고, 벨을 눌렀다. 대답이 없었다. 주위는 지독히 고요했다.
사람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스페인계 나라에서 흔히 있는 낮잠 자는 시간같이 느껴졌다.
나는 다시 한 번 벨을 눌렀다. 그리고 가만히 응답을 기다렸다.
아담하고 인상이 좋은 집이었다. 크림색 모르타르로 되어 있었고, 지붕 한가운데는 같은 색 네모난 굴뚝이 나와 있었다. 창틀은 회색이고, 하얀 커튼이 걸려 있었다. 양쪽 다 지독하게 햇볕에 그을어 있었다. 오래 된 집이지만, 그 낡음이 썩 어울렸다. 피서지에 가면, 흔히 이런 느낌의 집이 있다. 반년은 사람이 살고, 반년은 빈집이다. 그런 분위기다. 건물의 존재감이 일상적 삶의 냄새를 엷게 해 버린 것이다.
프랑스 식으로 쌓아올린 벽돌담은 허리 높이밖에 없었고, 그 위는 장미 울타리였다. 장미꽃은 다 지고, 초록색 잎사귀가 눈부신 여름 햇빛을 담뿍 받고 있었다. 잔디는 보이지 않았지만, 정원은 제법 넓고, 커다란 녹나무가 크림색 벽에 시원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세번째 벨을 눌렀을 때 현관문이 천천히 열리고, 중년의 부인이 나타났다. 아주 큰 여자였다. 나도 결코 작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나보다 삼 센티미터는 컸다. 어깨 폭도 넓었고 꼭 뭔가에 화를 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이는 아마 쉰 살 전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미인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단정한 얼굴이었다. 하긴 단정하기는 하지만 사람들이 호감을 가질 만한 그런 타입의 얼굴은 아니다. 짙은 눈썹과 네모난 턱은 한번 말을 꺼내면 뒤로 물러 서지 않는 완고함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녀는 졸린 듯한 멍한 눈으로 귀찮은 듯이 나를 보았다. 백발이 약간 섞인 뻣뻣한 머리카락이 머리 위에서 물결치고 있었고, 갈색 면 원피스 어깨로부터는 튼튼한 두 개의 팔이 맥없이 늘어져 있었다. 팔은 새하얗다.
"뭐야?" 라고 그녀가 말했다.
"잔디를 깎으러 왔는데요."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나서 선글라스를 벗었다.
"잔디?" 하며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잔디를 깎는단 말이지?"
"네, 전화를 주셨는데."
"아. 그렇지, 잔디야. 오늘이 며칠이지?"
"십 사 일입니다."
그녀는 하품을 했다.
"그래. 십 사 일인가?"
그리고 나서 다시 한 번 하품을 했다.
"그런데 담배 있어?"
"나는 주머니에서 쇼트 호프(담배의 이름)를 꺼내서 그녀에게 주고, 성냥으로 불을 붙여 주었다. 그녀는 기분 좋은 듯이 하늘을 향해서 훅 하고 연기를 뿜어 냈다.
"해." 하고 그녀가 말했다.
"얼마나 걸리는데?"
"시간 말입니까?"
그녀는 턱을 앞으로 쭉 내밀면서 고개를 끄덕했다.
"넓이와 정도에 따라 다릅니다. 보아도 될까요?"
"물론 되지. 도대체 보지 않으면 할 수 없을 것 아냐."
나는 그녀 뒤를 따라서 정원을 돌아보았다. 정원은 평평한 장방형이었고, 육십 평 정도의 자양나무 숲이 있었고, 느티나무가 하나 있었다. 나머지는 잔디밭이었다. 유리창 아래 빈 새장이 두 개 내던져져 있었다.
정원은 잘 손질되어 있었고, 별로 깎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잔디는 짧았다. 나는 조금 낙심했다.
"이런 정도라면 아직 이 주일은 괜찮겠는데요. 지금 깎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것은 내가 결정할 일이야. 그렇지?"
나는 잠깐 그녀를 보았다. 그건 분명 그렇다.
"좀 더 짧게 해 주었으면 해. 그 때문에 돈을 지불하는 거야. 됐잖아."
나는 끄덕했다.
"네 시간이면 끝나겠습니다."
"상당히 시간이 걸리잖아."
"천천히 일하고 싶어서요." 라고 나는 말했다.
"좋을 대로 하지." 라고 그녀가 말했다.
나는 라이트 밴에서 전동 잔디 기계와 잔디 가위와 갈퀴와 쓰레기 주머니와 아이스 커피를 담은 보온병과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꺼내서 정원으로 날랐다. 태양은 빠른 걸음으로 하늘 한가운데로 다가가, 기온은 자꾸만 올라가고 있었다.
내가 도구를 운반하는 동안, 그녀는 현관에 구두를 열 켤레 정도 늘어놓고 헝겊으로 먼지를 털고 있었다. 구두는 전부 여자 것이고, 작은 사이즈와 특대 사이즈의 두 가지 종류였다.
"일을 하는 동안에 음악을 틀어도 괜찮을까요." 하고 나는 물어 보았다.
그녀는 몸을 굽힌 채 나를 올려다보았다.
"물론이지. 나도 음악을 좋아해."
나는 먼저 정원에 흩어져 있는 잔돌을 치우고, 그리고 기계를 돌렸다. 돌이 들어가면 기계날이 상해 버린다. 잔디 깎는 기계 앞면에는 플라스틱 바구니가 붙어 있어서, 깎은 잔디는 전부 거기에 담겨지게 되어 있다. 바구니가 가득 차면 그것을 빼서 쓰레기통에 버린다. 정원이 육십 평이나 되면, 짧은 잔디라 해도 제법 양이 많다.
태양은 따갑게 내리쬐었다. 나는 땀에 젖은 T셔츠를 벗고, 쇼트 팬츠 하나만의 모습으로 일했다. 마치 꼴 좋은 바베큐가 된 것 같은 느낌이다. 이렇게 일하고 있으면 아무리 물을 마셔도 소변 따윈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다. 전부 땀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한 시간 정도 잔디깎기 기계를 쓰고 나서 한숨 돌리고, 느티나무 그늘에 앉아 아이스 커피를 마셨다. 당분이 몸의 구석구석에 스며 들어갔다.
머리 위에서는 매미가 계속 울어대고 있었다. 라디오 스위치를 켜고, 다이얼을 돌려 적당한 디스크 자키를 찾았다. 스리 덕 나이트의 <마마 톨드 미>가 나오는 곳에다 다이얼을 맞추고, 똑바로 드러누워서 선글라스를 통해서 나뭇가지와 그 가지 사이에서 새어 나오는 태양 빛을 바라 보았다.
그녀가 와서 내 곁에 섰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니까, 그녀는 느티나무처럼 보였다. 그녀는 오른손에 글라스를 들고 있었다. 잔 안에는 얼음과 위스키가 들어 있었고, 그것이 여름 태양 광선에 반짝반짝 흔들리고 있었다.
"덥지?" 하고 그녀가 말했다.
"네." 라고 나는 말했다.
"점심은 어떻게 할거야?" 하고 그녀가 말했다.
나는 손목 시계를 보았다. 열한 시 이십분이었다.
"열 두 시가 되면 어딘가에 먹으러 가겠습니다. 가까이에 햄버거 스탠드라도 있으면."
"일부러 갈거야 없지. 내가 샌드위치라도 만들어 줄게."
"괜찮습니다. 항상 밖에 나가서 먹으니까요."
그녀는 위스키 글라스를 들고, 한 입으로 반을 마셨다. 그리고 입을 오므리고 휴 하고 한숨을 쉬었다.
"괜찮아. 어차피 하는 김이니까 말야. 내 것도 만든단 말야. 먹으려무나."
"그럼 먹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괜찮아." 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천천히 어깨를 흔들면서 집안으로 돌아갔다.
열 두 시까지는 가위로 잔디를 깎았다. 우선 기계로 깎은 부분 가운데 고르지 않은 부분을 다시 고르고, 그 잔디를 갈퀴로 쓸어 모으고, 다음에는 기계로는 깎이지 않는 부분을 깎는다. 느긋하게 해야 하는 일이다.
적당히 하려고 하면 적당히 할 수 있고, 꼼꼼하게 하려고 하면 얼마든지 꼼꼼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꼼꼼하게 했다고 해서 그만큼 평가 받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느릿느릿 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도 전에도 말했듯이, 비교적 나는 꼼꼼하게 일한다. 이것은 성격상의 문제다. 그리고 아마도 프라이드 문제다.
정오의 사이렌이 어딘가에서 울리자, 그녀는 나를 부엌으로 들어오게 해서 샌드위치를 내 주었다. 넓지는 않았지만 깨끗하고 청결한 부엌이었다. 커다란 냉장고가 내는 소리 외에는 아주 조용했다. 식기도 스푼도 옛날 것이었다. 그녀는 맥주를 권했지만, 나는 '일하는 도중이니까요.' 하고 사절했다. 그녀는 대신 오렌지 주스를 내주었다. 맥주는 그녀가 마셨다. 테이블 위에는 반쯤 남은 화이트 호스(스카치 위스키의 하나=역주)병도 있었다. 개수대 아래에는 여러 종류의 빈병이 구르고 있었다.
샌드위치는 맛있었다. 햄과 래터스(양상치)와 오이 샌드위치로, 겨자가 잘 배합되어 있었다.
정말 맛있어요, 하고 나는 말했다. '샌드위치 하나는 잘 만들거든.' 라고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한 조각도 먹지 않았다. 피클을 두 조각 먹었을 뿐, 맥주만을 마시고 있었다. 그녀는 별로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나도 할 얘기가 없었다.
열 두 시 반에 나는 잔디로 돌아갔다.
마지막 오후의 잔디밭이다.
나는 FEN의 로큰롤을 들으면서 잔디를 꼼꼼하게 깎았다. 몇 번이고 갈퀴로 깎은 잔디를 치우고, 이발사가 하듯이 여러 각도에서 깎다 만 부분이 없는지 점검을 했다. 한 시 반이 됐을 때는 삼분의 이가 끝났다. 여러 번 땀이 눈으로 들어갔고 그때 마다 정원의 수도에서 얼굴을 씻었다. 몇 번이고 페니스가 발기했고, 그리고 가라앉았다. 잔디를 깎으면서 발기하다니 왠지 우스꽝스러웠다.
두 시 이십 분에 일이 끝났다. 나는 라디오를 끄고, 맨발로 잔디 위를 빙 둘러 보았다. 만족할 만한 작품이었다. 깎다 남은 부분도 없었고, 얼룩도 없었다. 카펫처럼 매끄러웠다.
'당신을 아직도 매우 좋아합니다.' 라고 그녀는 마지막 편지에 썼다. '따뜻하고 아주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던 것입니다. 왜 그렇게 느껴졌는지 나 자신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게 너무 심한 줄 압니다. 아마 무엇 하나 설명된 것이 아니겠지요. 열 아홉이라는 것은, 정말이지 기분 나쁜 나이입니다. 몇 년 지나면 좀더 설명을 잘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몇 년인가 지난 후에는, 아마 설명할 필요도 없어져 버리겠지요.'
나는 수돗물로 얼굴을 씻고, 도구를 라이트 밴으로 나르고, 새 T셔츠를 입었다. 그리고 현관문을 열고 일이 끝났음을 알렸다.
"맥주라도 마시렴." 하고 그녀가 말했다.
"고맙습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맥주 정도는 마셔도 되겠지.
우리는 정원 끝에 나란히 서서 잔디를 바라보았다. 나는 맥주를 마시고, 그녀는 길쭉한 글라스에다 레몬을 뺀 보드카 토닉을 마시고 있었다. 술집에서 자주 덤으로 주는 그런 글라스 였다. 매미는 아직도 울고 있었다.
그녀는 전혀 취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숨소리만이 조금 부자연스러웠다. 휴~ 하고 이 사이에서 새는 것 같은 숨소리다.
"자네는 일을 잘하네." 하고 그녀가 말했다.
"지금까지 잔디 깎는 사람을 여럿 불러 보았지만, 이렇게 꼼꼼하게 해 준 것은 자네가 처음이야."
"네." 하고 나는 말했다.
"죽은 남편이 잔디에 대해서는 까다로워서 말야. 언제나 자기가 꼼꼼하게 깎았지. 자네가 깎는 방법하고 아주 비슷해."
나는 담배를 꺼내서 그녀에게 권하고, 둘이서 담배를 폈다. 그녀의 손은 내 손보다도 컸다. 오른손의 글라스도 왼손의 쇼트 호프도 아주 작게 보였다. 손가락은 굵고, 반지도 없었다. 손톱에는 선명하게 세로로 선이 몇 개 인가가 있었다.
"남편은 노는 날에는 잔디만 깎았지. 그렇게 이상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말이야."
나는 이 여자의 남편에 대해 잠시 상상해 보았다. 잘 되지 않았다. 느티나무 부부를 상상할 수 없는 것하고 같다. 그녀는 또 휴~ 하고 숨을 쉬었다.
"남편이 죽고 나서는..." 하고 그녀가 말했다.
"쭉 업자가 와 주었지. 나는 태양에 약하고, 딸도 태양에 그을리는 것을 싫어하고 말이야. 어쨌든, 햇볕에 타는 것은 치지 않더라도 젊은 여자아이가 잔디깎기 따위를 할 수는 없는 것이고 말이지."
나는 끄덕였다.
"하지만 자네 일은 마음에 들었어. 잔디라는 것은 이렇게 깎아야 하는 거야."
나는 다시 한 번 잔디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트림을 했다.
"내달에도 또 오려무나."
"내달에는 안 됩니다." 라고 내가 말했다.
"왜?" 하고 그녀가 말했다.
"오늘이 마지막이거든요." 라고 내가 말했다.
"슬슬 학생으로 돌아가서 공부하지 않으면 학점을 못 따게 될지 모르니까요."
그녀는 잠시 내 얼굴을 바라보고, 발 밑을 바라보고, 그리고 또 내 얼굴을 보았다.
"학생이야?"
"네." 라고 내가 말했다.
"어느 학교?"
나는 대학 이름을 댔다. 대학의 이름은 그녀에게 대단한 감명을 주지 않았다. 감명을 줄 만한 대학이 아닌 것이다. 그녀는 둘째 손가락으로 귀 뒤를 긁었다.
"이젠 이 일을 안한다고?"
"네. 올 여름은." 하고 나는 말했다.
올 여름은 이제 잔디깎기를 하지 않는다. 내년 여름에도, 그리고 내 후년 여름에도.
그녀는 양치질이라도 하듯이 보드카 토닉을 입에 담고, 그리고 아끼듯이 반씩 마셨다. 땀이 이마 가득히 맺혀 있었다. 작은 벌레가 달라붙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안에 들어오렴." 하고 여자가 말했다.
"밖은 너무 더워."
나는 손목 시계를 보았다. 두 시 삼십 오 분. 이른 것인지 늦은 것인지 잘 모르겠다. 일은 다 끝났다. 내일부터는 이제 일 센티미터도 잔디를 깎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아주 이상한 기분이다.
"바쁜가?" 라고 그녀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면 집에 들어와서 차가운 거라도 마시렴.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을거야. 그리고 자네가 좀 봐 주었으면 하는 것도 있거든."
봐 주었으면 하는 것?
하지만 나에게는 주저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그녀는 앞장 서서 쑥쑥 걷기 시작했다. 나를 뒤돌아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나는 할 수 없이 그녀 뒤를 쫓아갔다. 더위 때문에 머리가 멍하다.
집안은 여전히 고요했다. 여름 오후 태양 광선의 홍수 안에서 갑자기 실내로 들어가자, 눈꺼풀 속이 쑤시듯이 아파 왔다.
집안에는 물에 탄 것 같은 옅은 어둠이 떠돌고 있었다. 몇 십년 전부터 거기에 늘어붙어 버린 것 같은 그런 어둠이다. 특히 어둡다 할 만하지도 않은, 옅은 어둠이었다. 공기는 시원했다. 에어 컨디셔너의 시원함이 아니고, 공기가 움직이고 있는 시원함이었다. 어딘가에서 바람이 들어와, 어딘가로 빠져 간다.
"이쪽이야." 라고 그녀는 말하고, 똑바로 뻗은 복도를 퉁퉁 소리를 내면서 걸어갔다. 복도에는 몇 개인가 유리창이 붙어 있었지만, 이웃집 담과 너무 자란 느티나무 가지가 광선을 차단하고 있었다. 복도에서는 여러 가지 냄새가 났다. 어느 냄새도 기억에 있는 냄새였다. 시간이 만들어 내는 냄새다. 시간이 만들어 내고, 그리고 언젠가 또 시간이 지워 버리는 냄새다. 낡은 양복이나 낡은 가구, 낡은 책이라든가, 낡은 생활의 냄새다. 복도 막다른 곳에 계단이 있었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고 내가 쫓아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계단을 올라갔다. 그녀가 한 계단 올라갈 때마다 오래 된 나무 판자가 끽끽 소리를 냈다.
계단에 올라서자 겨우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층계참에 달려 있는 유리창에는 커튼도 없었고, 여름 태양이 마루 위에 빛의 풀(pool)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이층에는 방이 두 개밖에 없었다. 하나는 창고이며, 또 하나가 제대로 된 방이었다. 가라 앉은 옅은 그린 도어에, 작은 불투명한 유리창이 붙어 있었다. 그린 색 페인트는 조금 터져 있었고, 노브(문의 둥근 손잡이=역주)는 손잡이 부분만이 하얗게 변색되어 있었다.
그녀는 입을 오므리고 휴, 하고 숨을 토해 내고는 거의 빈 보드카 토닉 글라스를 창틀에 놓고, 원피스 주머니에서 열쇠다발을 꺼내, 큰 소리를 내고 문을 열었다.
"들어와." 하고 그녀가 말했다.
우리는 방에 들어갔다. 안은 캄캄했고 찌는 듯했다. 더운 공기가 들어 차 있었다. 꼭 닫은 덧문 틈에서 은박지같이 납작한 광선이 몇 줄기인가 방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희끄무레하게 먼지가 떠있는 것이 보일 뿐이었다. 그녀는 커튼을 젖히고 유리창을 열고, 덧문을 잡아당겼다. 눈부신 빛과 시원한 남녘바람이 금방 방 안에 찼다.
방은 전형적인 틴에이지 여자아이의 방이었다. 창가에 책상이 있었고, 그 반대 편에 작은 나무 침대가 있다. 침대에는 주름살 하나 없는 코럴 블루의 시트가 덮여 있었고, 같은 색 베개가 놓여 있었다. 발 쪽에는 담요가 한 장 개켜져 있었다. 침대 옆에는 양복장과 드레서(화장대)가 있었다. 드레서 앞에는 화장품이 몇 개인가 놓여 있었다. 헤어 브러시라든가 작은 가위라든가 립스틱이라든가 콤팩트 따위, 그런 것이다. 특히 열심히 화장을 하는 그런 타입은 아닌 것 같았다.
책상 위에는 노트라든가 사전이 있었다. 불어 사전과 영어 사전이었다.. 꽤 많이 사용한 것 같이 보였다. 그것도 함부로 사용한 것이 아니고, 꼼꼼하게 사용한 그런 느낌이었다. 펜꽂이 에는 필기 도구가 대충 늘어 놓여 있었다. 지우개만은 한쪽이 동그랗게 닳아 있었다. 그리고 자명종 시계와 전기 스탠드와 유리 문진. 그 어느 것이나 간소했다. 나무 벽에는 새의 원색화가 다섯 장 그리고 숫자만 있는 캘린더가 걸려 있었다. 책상 위를 손가락으로 훑어보니, 손가락이 먼지로 하얘졌다. 한 달 정도 분량의 먼지였다. 캘린더도 6월의 것이었다.
전체적으로 방은 그 또래 여자아이 것 치고는 간소한 것이었다. 인형도 없고 록 싱어 사진도 없다. 화려한 장식도 없고, 꽃 무늬 쓰레기통도 없다. 벽에 달아맨 책장에는 여러 가지 책이 꽂혀져 있었다. 문학 전집이 있기도 하고, 시집이 있기도 하고, 영화 잡지가 있고, 회화전의 팜플렛이 있었다. 영어 페이퍼 북도 몇 권인가 놓여 있었다. 나는 이 방 주인의 모습을 상상해 보려고 했지만, 잘 안 됐다. 헤어진 애인 얼굴밖에 떠 오르지 않았다.
덩치가 큰 중년 여인은 침대에 걸터앉은 채 가만히 나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내 시선을 쭉 쫓고 있었지만, 전혀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눈이 나를 향하고 있을 뿐이지, 사실은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나는 책상 의자에 앉아서 그녀 뒤의 석회 벽을 바라보았다. 벽엔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았다. 단지 하얀 벽이다. 가만히 벽을 바라보고 있자, 위쪽이 앞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금방이라도 그녀의 머리 위로 무너져 내려 올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광선 때문에 그렇게 보일 뿐이다.
"뭐 마실래?" 하고 그녀가 말했다. 나는 거절했다.
"사양하지 않아도 돼. 뭐 잡아먹지는 않을테니깐."
"그럼 같은 걸로 엷게 해 주세요." 라고 말하고 나는 그녀의 보드카 토닉을 가리켰다.
그녀는 오 분 뒤에 보드카 토닉 두 잔과 재떨이를 갖고 돌아왔다. 나는 내 보드카 토닉을 한 입 마셨다. 전혀 엷지 않았다. 나는 얼음이 녹는 것을 기다리면서 담배를 피웠다. 그녀는 침대에 앉아서, 아마도 내 것보다는 훨씬 짙은 보드카 토닉을 조금씩 마시고 있었다. 가끔 아삭아삭하는 소리를 내면서 얼음을 씹었다.
"몸이 튼튼해." 라고 그녀가 말했다.
"그러니까 취하지를 않지."
나는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아버지도 그랬다. 하지만 알코올과 경쟁해서 이긴 사람은 없다. 자기 코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버릴 때까지 여러가지 일을 깨닫지 못한다는 얘기일 뿐이다. 아버지는 내가 열 여섯 살 나 해에 죽었다. 아주 간단한 죽음이었다. 그 전에 살아 있었는지조차 잘 기억 나지 않을 만큼 간단한 죽음이었다.
그녀는 쭉 잠자코 있었다. 글라스를 흔들 때마다 얼음 소리가 났다. 열어 놓은 창에서 가끔 시원한 바람이 들어온다. 바람은 남쪽에서 언덕을 건너서 왔다. 이대로 잠들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조용한 여름의 오후다. 어딘가 먼 곳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양복장을 열어 봐. 하고 그녀가 말했다.
나는 양복장 앞에 가서, 시킨 대로 양쪽으로 열게 되어 있는 장문을 열었다. 장 안에는 옷이 가득 걸려 있었다. 반은 원피스고, 나머지 반은 스커트나 블라우스나 재킷이었다. 전부 여름 것이다. 낡은 것도 있고 거의 입지 않은 것 같은 새것도 있었다. 스커트 길이는 대부분이 미니였다. 취미도 물건도 나쁘지 않았다. 특별히 남의 눈을 끄는 것은 아니었지만, 매우 인상이 좋다. 이만큼 옷을 갖추고 있으면 한 여름 내, 데이트할 때마다 다른 복장을 할 수가 있다. 한참 양복들을 보고 나서 문을 닫았다.
"멋있는데요." 라고 내가 말했다.
"서랍도 열어 보렴." 하고 그녀가 말했다.
나는 잠시 주저 하고 나서 단념하고 양복장에 붙어 있는 서랍을 하나씩 열어 보았다. 여자아이가 방을 비운 사이에 방안을 뒤진다는 것은ㅡ 비록 모친의 허가가 떨어졌다 하더라도ㅡ 정당한 행위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지만, 거역하는 것 또한 귀찮았다. 아침 열 한 시 부터 술을 마시는 인간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제일 위 커다란 서랍에는 진 바지라든가 폴로 셔츠, T셔츠가 들어 있었다. 세탁되고, 잘 개켜져, 주름 하나 없었다. 두번 째 서랍에는 핸드백이라든가 벨트라든가 손수건, 블레 이슬렛(팔찌)이 들어 있었다. 나는 뚜렷한 까닭도 없이 서글픈 기분이 들었다. 왠지 조금 마음이 무거워지는 그러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나서 서랍을 닫았다.
여자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 창밖의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른손에 들고 있는 보드카 토닉 글라스는 거의 비어 있었다.
나의 의자에 돌아와서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유리창 밖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었고, 그 경사가 끝난 지점에서, 또 새로운 다른 언덕이 시작되고 있었다. 초록색 기복이 어디까지고 계속되었고, 거기에 달라붙듯이 주택가가 늘어서 있었다. 어느 집에도 정원이 있고, 어느 정원에도 잔디가 빛나고 있었다.
"어떻게 생각해?" 하고 그녀는 창에 눈길을 둔 채 말했다.
"그녀를 말이야."
"만난 적도 없는데 어떻게 알겠어요." 라고 내가 말했다.
"옷을 보면 여자 일은 대충 알 수가 있지." 하고 여자가 말했다.
나는 애인을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어떤 옷을 입고 있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내가 그녀에 관해서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은 전부가 막연한 이미지였다. 내가 그녀의 스커트를 생각해 내려고 하면은 블라우스가 사라져 없어지고, 모자를 생각해 내려고 하면, 그녀의 얼굴은 누군지 다른 여자아이의 얼굴이 되었다. 겨우 반년 전의 일인데 무엇 하나 생각나지 않았다. 결국, 내가 그녀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모르겠습니다." 라고 나는 되풀이했다.
"느낌만으로도 괜찮다니깐. 어떤 것이라도 좋아. 아주 조금이라도 들려주면 된다고."
나는 시간을 벌기 위해서 보드카 토닉을 한 입 마셨다. 얼음은 거의 녹았고, 토닉 워터는 달콤한 물같이 변해 있었다. 보드카의 독한 냄새가 목을 지나, 위에 들어가 희미한 따뜻함으로 화했다. 유리창에서 들어오는 바람이 책상 위의 하얀 담뱃재를 흩날렸다.
"대단히 인상이 좋은 단정한 사람 같아요." 고 내가 말했다.
"별로 남한테 부담을 주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성격이 약한 것도 아닙니다. 성적은 중이나 상 클래스, 학교는 여자 대학이나 전문대. 친구는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사이는 좋다. ……맞습니까?"
"계속해 보렴."
나는 손 안에서 글라스를 몇 번인가 돌리고 나서 다시 책상에 올려 놓았다.
"그 이상은 모르겠어요. 게다가 도대체 지금 말한 것도 맞았는지 어떤지 전혀 자신이 없는걸요."
"대체로 맞았어." 라고 그녀는 표정없이 말했다.
그녀의 존재가 조금씩 방안으로 스며 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희미한 하얀 그림자 같았다. 얼굴도 손도 발도, 아무 것도 없다. 빛의 바다가 만들어 낸 아주 작은 굴절 가운데 그녀는 존재하였다. 나는 보드카 토닉을 또 한 모금 마셨다.
"보이 프렌드는 있습니다." 하고 나는 말을 계속했다.
"하나나 둘. 모르겠는데요. 어느 정도의 사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아무래도 좋습니다. 문제는……그녀가 여러 가지 일에 쉽게 익숙해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몸이라든가,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일이라든가, 자기가 구하고 있는 것이라든가, 남이 요구하고 있는 것이라든가…… 뭐 그런 것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렇지." 하고 조금 있다가 여자가 말했다.
"자네가 말하는 뜻을 알겠어."
나는 알 수가 없었다. 내 말이 뜻하고 있는 것은 알았다. 그러나 그것이 누구한테서 누구에게로 향해진 것인지는 알 수 가 없었다. 나는 아주 피곤했고, 자고 싶었다. 자버리면, 여러 가지 일이 확실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일이 확실해진다고 해서 무엇인가가 편해지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뿐 그녀는 쭉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나도 잠자코 있었다. 십 분이나 십오 분, 그렇게 하고 있었다. 심심했기 때문에, 결국 보드카 토닉을 반정도 마셔 버렸다. 바람이 조금 강해지고, 느티나무의 둥그런 잎사귀가 흔들렸다.
"붙잡아 두어서 미안해." 고 한참 뒤에 여자가 말했다.
"잔디가 굉장히 깨끗이 깎여서 말이지, 기뻤거든."
"천만에요." 라고 내가 말했다.
"돈을 치르지." 하고 여자는 말하면서 원피스 주머니에 커다란 하얀 손을 집어넣었다.
"얼마지?"
"나중에 제대로 정리된 청구서를 보내드립니다. 은행으로 넣어 주세요." 라고 나는 말했다.
"흠." 하고 여자가 말했다.
우리는 또 똑같은 계단을 내려와서 똑같은 복도를 되돌아와, 현관으로 나왔다. 복도와 현관은 갈 때하고 똑같이 냉냉하고, 어둠에 싸여 있었다. 어렸을 때의 여름, 얕은 강을 맨발로 거슬러 올라가다가, 커다란 철교 아래를 지나갈 때 꼭 이런 느낌이 들었다. 캄캄하고, 갑자기 물의 온도가 내려간다. 그리고 모래밭이 이상하게 미끌미끌한 느낌이 난다. 현관에서 테니스 슈즈를 신고 문을 열었을 때는 정말이지 마음이 놓였다. 햇빛이 내 주위에 넘치고 있었고, 바람에서는 초록색 냄새가 났다. 벌이 몇 마리인지 졸린 듯한 날개 소리를 내면서 울타리 위로 날아가고 있었다.
"굉장히 잘 깎여졌어." 라고 그녀는 정원의 잔디를 보면서 다시 한 번 그렇게 말했다.
나는 잔디를 바라보았다. 정말 굉장히 깨끗이 깎여져 있었다.
여자는 주머니에서 여러 가지ㅡ정말이지 여러 가지ㅡ를 끄집어 내고서, 그 가운데서 구겨진 일만 엔짜리를 골라 냈다. 그렇게 낡은 지폐는 아니였지만, 어쨌든 구겨져 있었다. 십사 오 년 전에 일만 엔이라면 대단한 액수다. 조금 주저했지만, 거절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받기로 했다.
"고맙습니다." 라고 내가 말했다.
여자는 아직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잘 알 수 없는 것 같았다. 잘 알 수 없는 채 오른손에 든 글라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글라스는 비워져 있었다. 그래서 또 나를 보았다.
"또 잔디깎기 일을 시작하면 우리 집에 전화하렴. 언제라도 좋으니까 말야."
"네." 하고 나는 말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샌드위치와 술 감사했습니다."
그녀는 목 속에서 응, 인지 흥, 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고, 그리고 나서 빙글 등을 돌리고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차 시동을 걸고, 라디오 스위치를 켰다. 벌써 훨씬 전에 세 시가 지나 있었다.
도중에 졸음을 쫓기 위해 드라이브인(차를 탄 채로 들어가게 된 식당, 휴게소, 극장, 은행, 상점 등=역주)에 들어가 코카롤라와 스파게티를 주문했다. 스파게티는 지독히 맛이 없어서, 반밖에 먹지 못했다. 그러나 어쨌든, 배는 별로 고프지 않았던 것이다. 안색이 나쁜 웨이트리스가 그릇을 갖고 가 버리자, 나는 비닐 의자에 앉은 채 잠깐 졸았다. 가게는 텅 비어 있었고, 적당하게 쿨러가 돌고 있었다. 아주 짧은 잠이었기 때문에 꿈 같은 것은 꾸지 않았다. 잠 자체가 꿈 같은 것이었다. 그래도 눈을 떴을 때는 태양 광선이 얼만가 약해져 있었다. 나는 다시 한 잔 콜라를 마시고, 아까 받은 일만 엔짜리로 셈을 치렀다.
주차장에서 차를 타고, 열쇠를 대시보드(운전석 앞의 계기판=역주)에 올려놓은 채 담배를 한 대 피웠다. 여러 가지 자질 구레한 피곤이 한꺼번에 밀려 왔다. 결국, 나는 아주 피곤한 것이었다. 나는 운전하는 것을 단념하고 시트에 깊이 앉아, 다시 한 대 담배를 피웠다. 모든 것이 먼 세계에서 일어난 일처럼 느껴졌다. 쌍안경을 반대로 들여다 볼 때처럼, 모든 것이 이상하게 선명하고 부자연스러웠다.
'당신은 나한테 여러 가지를 요구하고 있었겠지만,' 하고 연인은 썼다.
'나는 아무래도 나 자신이 무엇인가를 요구받고 있다고 생각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내가 추구하는 것은 제대로 잔디를 깎는 일 뿐이야, 하고 생각했다. 처음에 기계로 잔디를 깎고, 갈퀴로 훑어 모으고, 그리고 잔디깎기 가위로 제대로 정리한다. 그뿐이라고. 나는 그걸 할 수 있어. 그렇게 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이야.
그˙렇˙지˙않˙아˙, 하고 나는 소리 내어 말해 보았다.
답이 없었다.
십 분 뒤에 드라이브인의 매니저가 차 옆에 와서 허리를 굽히고,
"괜찮아?" 하고 물어 왔다.
"조금 어질어질했어요." 라고 내가 말했다.
"더우니까 말이야. 물이라도 갖다 줄까?"
"고맙습니다. 하지만 이젠 괜찮아요."
나는 주차장에서 차를 빼내, 동쪽을 향해 달렸다. 길 양 편에는 여러 가지 집이 있었고, 여러 가지 정원이 있었고, 여러 사람들의 여러 생활이 있었다. 나는 핸들을 잡으면서 그런 풍경을 쭉 바라보고 있었다. 등 뒤에서 잔디 깎는 기계가 달그락 달그락 소리를 내면서 흔들리고 있었다.


4

그 이후, 나는 한 번도 잔디를 깎지 않았다. 언젠가 잔디가 있는 집에 살게 되면, 나는 또 잔디를 깎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훨씬 더 먼 나중의 일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때가 되어도, 나는 굉장히 꼼꼼하게 그리고 가지런히 잔디를 깎을 것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