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나는 오랜 동안 그녀에게 내 마음속의 특별한 부분을 열어두었던 것 같다. 마치 레스토랑의 구석진 조용한 자리에 예약석이라는 팻말을 살며시 세워놓듯이 나는 그녀를 위하여 그 부분만은 남겨두었다
p30


그것은 나라는 인간이 궁극적으로 악을 행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악을 행하고자 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동기나 생각이 어떻든, 나는 필요에 따라 제멋대로일 수 있었고, 잔혹해질 수 있었다. 나는 정말로 소중히 해야 할 상대에게조차 그럴듯한 이유를 대며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결정적인 상처를 줄 수 있는 인간이었다.
p76


모두 점점 사라져간다고 나는 생각했다. 어떤 것은 끊어져 버린 듯 순식간에 사라지고, 어떤 것은 시간을 두고 희미하게 사라져간다. 그리고 남는 것은 사막뿐이다.
p128


"넌 누구에게나 이렇게 친절하니?"
"누구에게나가 아니야. 너니까 그런 거지. 누구에게나 친절한게 아냐. 누구에게나 친절하기에는 내 인생은 너무나도 한정되어있어. 너 한 사람한테 친절하기에도 내 인생은 벅차다고. 만약 한정되어 있지 않다면 너에게 더 많은 것을 해줄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그렇지 않아."
p191


울 수 있다면 편안해질 텐데 하는 생각을 할 때도 가끔 있었다. 하지만 무엇을 위해서 울어야 좋을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누구를 위해서 울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타인을 위해서 울기에는 나는 너무나도 나 자신밖에 모르는 인간이었고, 나 자신을 위해 울기에는 너무 나이 들어 있었다.
p243


"그렇지만 한동안 오지 못할 거라는 메모를 남겨두었잖아."
" 한동안이라는 건 말이지, 시마모토. 기다리는 입장에 있는 사람에겐 길이를 헤아릴 수 없는 말이야" 라고 나는 말했다.
p259


"저기, 하지메. 잘 들어줘" 라고 한참 있다가 시마모토는 말했다. "이건 아주 중요한 얘기니까 잘 들어줘. 아까도 말했듯이 내게는 중간이란게 존재하지 않아. 내 안에는 중간적인 것은 존재 하지 않고, 중간적인 것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는 중간도 존재하지 않는 거야. 그러니깐 네가 나를 모조리 갖든지, 아니면 갖지 않든지. 그 어느 쪽밖에 없어. 그게 기본적인 원칙이야. 만약 네가 지금 같은 상황을 이어나가도 상관없다면 우린 이어질 수 있을거야. 언제까지 계속될지 나도 알 수 없지만 난 그걸 이어나가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건 다 할 거야. 내가 널 만나러 올 수 있는 때는 널 만나러 오는거야. 그러기 위해서 나도 내 나름대로 노력할꺼야. 하지만 올 수 없을 때는 올 수 없는거야. 언제든지 내가 오고 싶을 때마다 항상 널 만나러 올 수는 없어. 그건 명백해. 하지만 만약 네가 그런게 싫다고, 두 번 다시 내가 어디에도 가는 걸 원치 않는다고 한다면, 넌 나를 모조리 가져야해. 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내가 끌고 가는 것이나. 내가 안고 있는 것 전부. 그리고 나도 분명 네 모든걸 갖게 돼야겠지. 모든 걸 말이야. 넌 그걸 알고 있어? 그게 뭘 의미하는지도 알고 있는 거야?"
"잘 알고 있어"라고 나는 말했다.
p2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