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는 윤회 같은 걸 믿어?”
마리는 고개를 가로 젓는다. “아마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그런 내세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해?”
“그런 일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하지만 내세가 있다고 생각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 같아요.”
“죽어버리면 그 다음은 무無밖에 없다, 이 말이지?”
“기본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해요”라고 마리는 말한다.
“나는 말이야, 윤회 같은 게 틀림없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뭐라고 할까, 그런 게 없다면, 너무 두려워. 그 무라는 걸 나는 이해할 수 없거든. 이해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어.”
“무라는 건 절대적으로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니까, 특별히 이해하거나 상상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닐까요?”
“그렇지만, 만에 하나, 그 무라는 것이 이해나 상상 같은 걸 확고하게 요구하는 종류의 무라면 어떡해? 마리 짱도 죽어본 적은 없잖아. 그렇다면 실제로 죽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지.”
“그건 확실히 그렇지만......”
“그런 걸 생각하기 시작하면, 말도 할 수 없는 두려움이 서서히 어김없이 엄습해 오는 거야”라고 고오로기가 말한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차고, 몸이 움츠러드는 것 같아. 그럴 바엔 윤회를 믿는 게 차라리 마음 편해. 다음 세상에 아무리 모진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 모습을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는 있으니까. 예를 들면 말로 태어난 내 모습이라든가, 달팽이로 태어난 내 모습 같은 것 말이지. 혹시 바로 다음에는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 해도, 다시 그 다음 윤회의 기회에 또 희망을 걸어볼 수 있잖아.”
“그래도 나에겐 역시, 죽음 이후엔 아무것도 없다는 게 자연스럽게 느껴져요”라고 마리가 말한다.
“그건 말이야, 아마도 마리 짱이 정신적으로 강하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요?“
고오로기는 고개를 끄덕인다. “마리 짱은 단단하게 자기의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처럼 보여.”
마리는 고개를 가로 젓는다. “그런 것 없어요. 난 단단하지 못한 걸요. 어렸을 때,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가질 수 없어서, 늘 겁먹은 태도로 안절부절못했죠. 그래서 학교에서도 자주 왕따를 당했어요. 왕따의 표적이 되기 쉬웠던 거죠. 그때의 무서운 느낌이, 아직도 내 안에 남아 있어요. 종종 그런 꿈을 꾸기도 하고요.”
“그렇다면 오랜 시간 노력해서 조금씩 극복해 왔겠지. 그때의 언짢은 기억을 떨쳐버리려고.”
“네, 조금씩이요”라고 마리가 말한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인다. “조금씩, 그런 타입이에요. 노력하는 성격.”
“혼자서 열심히 노력하는 숲 속의 대장장이 같은?”
“그래요.”
“맞아, 나는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훌륭한 거리고 생각해.”
“단지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그렇다는 거예요?”
“맞아, 노력할 수 있다는 것이.”
“달리 아무 장점이 없어도요?”
고오로기는 아무 말 없이 미소 짓고 있다.
마리는 고오로기의 말에 대해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잇는다.
“시간을 가지고, 자기의 세계 같은 것을 조금씩 만들어왔다는 생각은 들어요. 그런 세계에 혼자 있으면, 어느 정도 안도감이 생기거든요. 하지만 그런 세계를 일부러 만들 수밖에 없다는 것 자체가, 나 자신이 상처받기 쉬운 약한 인간이라는 뜻 아닐까요? 그리고 그 세계란 것도 세상의 눈으로 보면, 아주작고 보잘것없는 세계에 불과하잖아요. 골판지 상자로 만든 집처럼,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어딘가로 날아가 버릴 듯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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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내 성격이 어둡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어”라고 마리는 솔직하게 말한다.
다카하시는 악기 케이스를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 어깨로 옮겨 멘다. 그리고 말한다.
“우리들의 인생은 단순히 밝은가, 어두운가 하는 것으로 쉽게 구분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지. 어둠과 밝음 사이에는 그늘이라는 중간지대가 있잖아. 그 그늘의 단계를 인식하고, 이해하는 것이 건전한 지성이야. 그리고 건전한 지성을 획득하려면, 그 나름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 않겠어? 나는 마리가 성격적으로 별로 어둡지는 않다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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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은 급속하게 밝아온다. 창문에 내려진 블라인드 커튼 사이로, 선명한 빛줄기가 방 안으로 스며들어 온다. 묵은 시간성이 효력을 잃고, 등 뒤로 지나가려 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아직 묵은 말을 계속 중얼거리고 있다. 그러나 이제 막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새로운 태양빛 속에서, 말의 의미는 빠르게 옮겨가고, 새롭게 바뀌려 하고 있다. 설령 그 새로운 의미의 대부분이, 그날 저녁 무렵까지밖에는 계속되지 않는 잠시 동안의 것이라고 해도, 우리는 그것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걸음을 앞으로 옮겨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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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전혀 새로운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되려 하고 있다. 그것은 특별하거나 별 보람도 없는 매일 똑같은 하루가 될지도 모르고, 여러 가지 의미에서 기억에 남을 만한 눈부신 하루가 될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 되든, 지금 이 시간대는 누구에게나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은 한 장의 백지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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