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그르니에 (Jean Grenier)

1898~1971. 프랑스의 사상가, 작가, 철학자. 고대 지중해, 인도사상에 경도되어 방랑의 철학교수 생활을 보내고, 알제리에서 고등학생이던 알베르 카뮈를 가르쳤으며, 그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


 


섬에 부쳐서 - 알베르 카뮈


알제에서 내가 이 책을 처음으로 읽었을 때 나는 스무 살이었다. 내가 이 책에서 받은 충격, 이 책이 내게 그리고 나의 많은 친구들에게 끼친 영향에 대해서 오직 지드의 <지상의 양식>이 한 세대에 끼친 충격 이외에는 비견할 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길거리에서 이 조그만 책을 읽고 그 처음 몇 줄을 읽다 말고는 다시 접어 가슴에 꼭 껴안고 마침내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정신없이 읽기 위하여 나의 방에까지 한걸음에 달려가던 그날 저녁으로 나는 되돌아가고 싶다. 나는 아무런 회한도 없이, 부러워한다. 오늘 처음으로 <섬>을 열어보게 되는 저 낯 모르는 젊은 사람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한다.



글의 침묵 - 김화영

잠 못 이루는 밤이 아니더라도, 목적 없이 읽고 싶은 한 두 페이지를 발견하기 위하여 수맣은 책들을 꺼내서 쌓기만 하는 고독한 밤을 어떤 사람들은 알 것이다. 지식을 넓히거나 지혜를 얻거나 교훈을 찾는 따위의 목적들마저 잠재워지는 고요한 시간, 우리가 막연히 읽고 싶은 글, 천천히 되풀이하여, 그리고 몽상에 잠기기도 하면서, 다시 읽고 싶은 글 몇 페이지란 어떤 것일까?
겨울 숲속의 나무들처럼 적당한 거리에 떨어져 서서 이따금씩만 바람소리를 떠나 보내고 그리고는 다시 고요해지는 단정한 문장들, 그 문장들이 끝나면 문득 어둠이거나 무(無), 그리고 무에서 또 하나의 겨울 나무 같은 문장이 가만히 일어선다. 그런 글 속에 분명하고 단정하게 찍힌 구두점,
그 뒤에 오는 적막함, 혹은 환청, 돌연한 향기, 그리고는 어둠, 혹은 무, 그 속을 천천히 거닐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이 산문집을 번역했다. 그러나 전혀 결이 다른 언어로 씌어진 말만이 아니라 그 말들이 더욱 감동적으로 만드는 침묵을 어떻게 옮기면 좋단 말인가?



공의 매혹

저마다의 일생에는, 특히 그 일생이 동터 오르는 여명기에는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을 다시 찾아내는 것은 어렵다. 그것은 다른 수많은 순간들의 퇴적 속에 깊이 묻혀있다. 다른 순간들은 그 위로 헤아릴 수 없이 지나갔지만 섬뜩할 만큼 자취도 없다. 결정적 순간이 반드시 섬광처럼 지나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유년기나 청년기 전체에 걸쳐 계속되면서 겉보기에는 더할 수 없이 평범할 뿐인 여러 해의 세월을 유별난 광채로 물들이기도 한다.

p25

자신의 내면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이해하고 그것을 외부 세계와 대비시켜보며 자신의 직관을 하나의 체계로- 그 직관을 고갈시켜 버리지 않을 만큼 충분히 유연한 체계로 탈바꿈 시키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보였음직한 그런 반응을 보였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기는커녕, 꽃들이 하나씩 하나씩 시들어 떨어지듯이 그 상태들이 사라져가도록 보고만 있었다. 나는 그냥 하나의 꽃에서 또 다른 꽃으로 달려갔을 것이다 - 여행 그 자체밖에는 아무런 다른 목적이 없는 여행들.
그때 나는 몇 살이었을까? 예닐곱 살쯤이었다고 여겨진다. 어느 한 그루의 보리수 그늘 아래 가만히 누워 구름 한점 없는 하늘에 눈을 던지고 있다가 나는 문득 그 하늘이 기우뚱하더니 허공 속으로 송두리째 삼켜져 버리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내가 처음 느낀 무(無)의 인상이었다. 그 인상은 어떤 풍부하고 충만한 생존의 인상에 바로 잇따라 느끼게 된 것이었기에 더욱 생생했다. 그후, 나는 왜 한 가지는 다른 한 가지에 잇따라 나타나는 것인가를 알려고 애를 써왔다. 몸과 혼으로 알려 하지 않고 지능으로 알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가지는 잘못된 생각으로 인하여 나는 이것이야말로 철학자들이<악의 문제>라고 부르는 바로 그 현상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은 보다 더 깊고 더 심각한 문제였다. 내 앞에 나타난 것은 파멸이 아니라 공백이었다. 입을 딱 벌린 그 구멍 속으로 모든 것이, 송두리째 모든 것이 삼켜져 버릴 판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사물들이 지니고 있는 현실성이란 실로 보잘것없다는 사실에 대하여 생각을 되씹어보기 시작했다. <그날부터>라는 말은 적당하지 않을 것 같다. 우리의 삶 가운데 일어나는 여러 사건들은 -하여간 내면적인 사건들은- 내부의 가장 깊숙한 곳에 감춰져 있던 것이 차례차례 겉으로 드러나는 일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나는 확신하고 있는 터이니까 말이다. 그러고 보면 그것이 어느 날이냐 하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나는 그냥 살아간다기보다는 왜 사는가에 의문을 품도록 마련된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하여간 <덤으로> 살아가도록 마련된 것이다.

p27-28

나는 자신이 밤의 어둠속에서 어떤 나룻배를 타고 있다는 상상을 해보곤 하는 것이었다. 방향을 가늠할 표적 하나 없었다. 길을 잃은 채, 어쩔 도리도 없이 길을 잃은 채, 눈에 보이는 별 하나 없었다.

이런 몽상이 그렇다고 씁쓸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나는 그 몽상을 마음 편하게 펼쳐가고 있었다. 그런 이야기를 쓴 글을 읽은 적이라곤 한 번도 없었으니 무슨 <문학적인 병> 이라고 할 성질의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타고난 병이었고 나는 달콤한 기분으로 그 병을 즐겼다. 무한의 감정은 내게는 무라는 것이 그러했듯 아직 이름이 없는 감정이었다. 그 결과 내가 느낀 것은 거의 완전한 무심, 일종의 고요한 무감각-눈을 뜬 채 잠자는 사람과 같은 그런 상태였다. 날이면 날마다 나는 그 음울한 벌판으로, 씨앗 하나 싹트는 일 없는 그 황량한 모래톱으로 쏘다녔다. 나는 물결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았지만 물결은 뒤로 물러났다 앞으로 나아갔다 하면서, 마치 든든한 밧줄로 바다 깊숙이 비끄러매놓은 부표처럼 끝내는 나를 제자리에 그대로 남겨놓은 것이었다. 그 같은 무감각 상태에서 헤어나기란 좀처럼 쉽지 않았다. 내가 그것을 좋아하고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나는 쾌감이 전혀 없지도 않은 채 그냥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로 인하여 결국 어떤 결과에 이르게 되는 것일까? 무엇이나 다 어디 엔가로 인도하게 마련이다. 오직 그것에만 아무런 출구가 없었다. 설사 그 상태의 끝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더라도 나의 삶 자체가 어찌나 죽음과 흡사한 것이었는지 그 차이를 분간하지 못했을 것이다. 심지어 동물도 죽을 때는 본능적으로 경련하는 법이라지만.
이런 체질을 가진 내가 만사에 무심하지는 않았다니 어인일일까? 사실은 조그만 일로도 나는 쉽사리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왜냐하면 나의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면 무엇이나 나의 가장 큰 관심사인 단 한 가지에 비하면 그래도 얼마 되지 않으나마 어떤 가치를 지닌 것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앞에서 내가 분석한 내용은 불완전한 것이다. 내게도 어떤 이상이라는 것이 있었던 모양이다. 사람이 자기의 주위에 있는 것들을 무시해 버리고 어떤 중립적인 영역 속에 담을 쌓고 들어앉아서 고립되거나 보호받을 수는 있다. 그것은 즉 자신을 몹시 사랑한다는 뜻이며 이기주의를 통해서 행복해질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자신을 세상만사 어느 것과도 다를 바 없는 높이에 두고 생각하며 세상의 텅 비어 있음을 느끼는 경우라면 삶을 거쳐 가는 갖가지 자질구레한 일들에 혐오를 느낄 소지를 충분히 갖추는 셈이다. 한 번의 상처쯤이야 그래도 견딜 수 있고 운명이라 여기고 체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날이면 날마다 바늘로 콕콕 찔리는 것 같은 상태야 참을 길이 없다. 대국적인 견지에서 보면 삶은 비극적인 것이다. 바싹 가까이에서 보면 삶은 터무니없을 만큼 사치스럽다. 삶을 살아가노라면 자연히 바로 그 삶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절대로 그런 것 따위는 느끼지 않고 지냈으면 싶었던 감정들 속으로 빠져들게 마련이다. 이것이 저것보다 더 낫다고 여겨지는 때도 있다. <이것>과 <저것> 둘 중에서 선택을 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다. 아니라고 말해 보아야 소용이 없다. 그렇다라고 나는 말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이야말로 고문이 아니고 무엇인가?
나는 자신도 모르게 <무심>의 순간에서 <선택>의 순간으로 옮겨가게 된다. 나는 유희에 말려들고 덧없는 것 속에서 거기엔 있지도 않은 절대를 찾는다. 입을 다물고 무시해 버리지는 않고 나는 마음속에 소용돌이를 계속 불러일으키고 있다. 상표가 서로 다른 두 자루의 펜을 놓고 선택을 해야만 한다는 것은 실로 참혹하다. 가장 좋은 것이 반드시 가장 비싼 것은 아닐 터이니 말이다.
가장 못한 것이 오직 다르다는 이유로 널리 쓰일 수도 있다. 가장 좋은 것도 없고 가장 못한 것도 없다. 이때에 좋은 것이 있고 저때에 좋은 것이 있다. 이 세상에는 완전한 것이란 없음을 나도 잘 알지만 이 세상에 일단 발을 들여 놓기만 하면, 이 세상 속에 일단 얼굴을 내밀기로 작정만 하면, 우리는 더할 수 없을 만큼 기묘한 악마의 유혹을 받게 된다. 목숨이 붙어 있는데 왜 안 살아? 왜 제일 좋은 걸 안 골라? 하고 귀에다 속살거리는 그 악마 말이다. 이렇게 되면 곧 뜀박질을 하고 여행을 떠나고..... 그러나 <이제 막> 욕망이 만족되려고 하는 순간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순간인가.
공(空)의 매혹이 뜀박질로 인도하게 되고, 우리가 한 발을 딛고 뛰듯 껑충껑충 이것저것에로 뛰어가게 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공포심과 매혹이 란데 섞인다-다가서면서도(동시에 도망쳐) 뒤로 물러나는 것이다. 제자리에 가만히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그칠 사이 없는 움직임의 대가를 받는 날이 찾아오는 것이니, 말없이 어떤 풍경을 고즈넉이 바라보고만 있어도 욕망을 입을 다물어버리게 된다.
문득 공(空)의 자리에 충만이 들어앉는다. 내가 지나온 삶을 돌이켜보면 그것은 다만 저 절묘한 순간들에 이르기 위한 노력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그렇게 하기로 굳게 마음 먹은 것은 저 투명한 하늘의 기억 때문이었을까?
내 어린 시절, 반드시 누워서 그리도 오래도록 나뭇가지 사이로 물끄러미 바라보았던 하늘, 그리고 어느 날 싹 지워져 버리던 그 하늘의 기억 때문이었을까?

p29-33


고양이 물루

나는 그를 사랑한다. 물루는, 내가 잠을 깰 때마다 세셰와 나 사이에 다시 살아나는 저 거리감을 없애준다.

황혼녘, 대낮의 그 마지막 힘이 다해 가는 저 고통의 시각이면 나는 내 불안감을 진정시키기 위하여 고양이를 내 곁으로 부르곤 했다. 그 불안감을 뉘에게 털어놓을 수 있으랴? 「나를 진정시켜 다오」하고 나는 그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밤이 다가온다. 밤과 더불어 내게 낯익은 유령들이 깨어 일어난다. 그래서 나는 하루에 세 번 무섭다. 해가 저물 때, 내가 잠들려 할 때, 그리고 잠에서 깰 때. 확실하다고 굳게 믿었던 것이 나를 저버리는 세 번..... 허공을 향하여 문이 열리는 저 순간들이 나는 무섭다 - 짙어가는 어둠이 그대의 목을 조이려 할 때, 한밤중에 잠깨어 나는 과연 무슨 가치가 있는 존재일까를 가늠해 볼 때,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생각이 미칠 때, 잠이 그대를 돌처럼 굳어지게 할 때, 대낮에 그대를 속여 위로한다. 그러난 밤은 무대 장치조차 없다 」
물루는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나는 그의 몸 위에 내 시선을 가만히 기대어 본다. 그러면 그가 거기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시금 믿음직스러워졌다. (모든 것을 다 담고 있는 그의 현전(現前). )
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나는 네 말을 다 듣는다.
<나는 저 꽃이에요. 저 하늘이에요. 또 저 의자예요. 나는 그 폐허였고 그 바람, 그 열기였어요. 가장한 모습의 나를 찾아보지 못하시나요? 당신은 자신이 인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를 고양이라고 여기는 거예요.
대양 속의 소금같이, 허공 속의 외침같이, 사랑 속의 통일 같이, 나는 내 모든 겉모습들은 저녁의 지친 새들이 둥지에 들듯 제 속으로 돌아올 거예요. 고개를 돌리고 순간을 지워버리세요. 생각의 대상을 갖지 말고 생각해 보세요. 제 어미가 입으로 물어다가 아무도 찾아낼 수없는 곳으로 데려가도록 어린 고양이가 제 몸을 맡기듯 당신을 가만히 맡겨보세요.>

p41-43

나 스스로를 돌이켜보노라면 이런 가득함은 나를 슬프게 한다. 나는 내가 인간이구나 하는 느낌을 갖게 된다. 즉 그냥 온전치 못한 존재라는 느낌이 든다는 말이다. 연극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비틀거릴 것이고 내 상대역이 묻는 질문에 해야 할 대답을 잊어버린 채 아무 말도 못하고 멍청하게 서 있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있어도 있지 않은 부재(不在).

나는 마침내 나 스스로 사랑한다고 자처했던 이 존재들, 그리고 나 자신과 따로 떼어놓을 길 없었던 나를 보고 넋을 잃고 있다. 당혹스러운 어떤 필연성이 나의 조건으로부터 멀리멀리 나를 데려간다. 인간들은 남이 자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가 자기 자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루가 자신이 고양이인 것에 만족해하듯이 인간들은 자신이 인간인 것에 만족해한다. 그러나 물루의 생각은 옳지만 그들의 생각은 틀렸다. 왜냐하면 물루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지만 인간들의 입장은 성립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인간들에게 그 점을 설득시켰으면 싶다. 우리들에게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이란 없으며 우리들의 입장이란 성립될 수 없는 입장이라는 것을. 그러니 도망치는 도리밖에 없다. 그런데 발 딛고 도망칠 단 한 치의 단단한 땅도 없다. 물루와........사이에는.

p44-45

내 주위를 에워싼 침묵들은 하나씩 하나씩 더해져 갔다. 집의 침묵, 들의 침묵, 작은 도시의 침묵, 나는 여러 겹으로 싸인 솜 덩어리 속에서 숨이 막혔다. 그것을 걷어내고 싶었다.
도대체 내게 시간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에 있었던 시간 못지않게 내가 죽은 이후에도 있을 그 막대한 시간 말이다. 햇빛이 잘 쪼여주는 이 가득한 시간들이 내게 기대할 것도 잃어버릴 것도 없음을 가르쳐주는 것이었다.

p52-54

우리가 어떤 존재들을 사랑하게 될 때면 그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지게 마련이어서, 그런 것은 사실 우리들 자신에게 밖에는 별 흥밋거리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적절한 순간에 늘 상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직 보편적인 생각들만이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가진다. 왜냐하면 그런 생각들이라야 이른바 그들의 <지성>에 호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사람들이 <깊이 생각하게> 하는 것이나 슬프게 하는 것 쪽을 더 중시하는 까닭도 따지고 보면 마찬가지 이유이다.

p57

하루하루를 잊지 않고 찾아오는 날들을 견디어내려면 무엇이라도 좋으니 단 한가지의 대상을 정하여 그것에 여러 시간씩 골똘하게 매달리는 것보다 더 나은 일은 없다. 르낭은 아침마다 히브리어 사전을 열심히 읽곤 함으로써 삶의 위안을 얻었다. 나는 <연구> 라는 것에 그 이외의 다른 흥미가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우리가 배우게 되는 것은 무엇이나 다 보잘것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들로 하여금 최후를 기다리는 동안 인내하는 놀이를 배운다는 것은 타기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사실, 어떤 절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그리고 일체의 인간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할 때, 그러기 위한 모범으로써 한 마리의 동물보다 더 나은 것이 어디 또 있겠는가. 흔히 감정이란 <인간적인 것>일 뿐 동물에는 그런 것이 없다고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비인간적인 나라인 그리스에서나 마찬가지로 인간의 척도를 헤아려볼 수 있는 것이란 전혀 없는 나라인 인도에 대하여 흥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이 바로 내가 받은 계시요. 나의 열쇠요. 나의 깨달음이었다. 그러나 물루의 죽음은 내가 나의 힘을 과신하고 있었음을 가르쳐 주었다.

p61
 

어떤 도시를, 어떤 짐승을 사랑하는 것과 어떤 여자를, 어떤 친구를 사랑하는 것-우리는 머릿속으로는 이런 것을 서로 구별하려고 애쓰고, 마음속으로는 이런 것이 다 같은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한다.-이런 모든 애정을 표시하는 데는 오직 한 가지 말 밖에는 없다. 사람들이 묵주신공을 우습게 아는 것을 보고 그것을 옹호하려고 어떤 설교사가 이렇게 말했다.
「사실 언제나 똑같은 내용이긴 하지요. 그렇지만 사랑하는 마음을 나타내려고 할 때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는 말 이외에 다른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은 마음속에서 모든 순간들과 모든 존재들을 하나로 합쳐주는 것입니다」

p64
 

나는 시체를 꺼냈다. 두 눈은 흐릿하고 털은 몸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두 다리는 축 늘어져 있었다. 물루가 놀라울 정도로 고분고분 내게 몸을 맡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우리들에게 지극히 드물게 작용되는 범우주적인 사랑의 법칙에 복종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의 존재를 사로잡아 그의 겉모습을 다듬고 형상을 굳혀놓았던 그 법칙 말이다. 전에 그는 태양이 뜨겁고 밤이 싸늘하다고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는 이 세상 어디에서나 화해한다. 모든 곳에서 그는 영접 받고 축복받을 것이다. 저를 맞아들이는 장소의 형태와 결합하여 차츰차츰 그 형태와 분간할 수 없도록 하나가 되어 버릴 것이다.  완강한 저항이 철저한 복종으로 변했다가 어떤 새로운 생존 속에서 다시 반항으로 소생할 것이니 이 소용돌이와 평화의 교차가 우주적인 삶을 구성한다.
이제 그를 묻어주어야 할 차례였다. 아마도 수의사가 <뒤처리를 해주겠다>고 한 것은 오로지 그 가죽을 팔기 위해서였겠지만 최근의 시가로 집고양이의 가죽은 불과 3프랑밖에 되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를 나무 상자 속에 담아 묻을 생각인 듯 했다. 그러나 내가 이미 물루를 갈레리 라파예트 백화점의 종이 상자 속에 담아 눕혀놓은 뒤였다. 「이렇게 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아요. 더 빨리 썩을 테니까요」하고 아주머니가 말했다. 나는 정원 한 구석 커다란 월계수 아래에다가 구덩이를 팠다. 아무도 거기 까지 가볼 생각은 하지 안을 테니 물루에게 방해되지 않아 좋을 것 같았던 것이다.
이제 마침내 물루는 제가 좋아했던 정원에, 제 집으로 여기며 지냈던 정원에 묻혔으니, 쉬렌 근처의 섬에 매장되는 파리의 고양이들보다 더 행복하고, 무엇보다도 가슴이 조여들도록 답답한 공원묘지에 묻히는 사람들보다 더 행복하며, 아피에나 대로를 따라 자기네 시골 영지에 묻히는 부유한 로마 사람들 만큼이나 행복하다.
그는 이제 땅 속에 누워 있었다. 바로 그날 저녁부터 떨어진 낙엽이 그 위를 덮었다. 나는 발길을 재촉하여 허둥지둥 내 방으로 올라갔다.

p72-74


케르겔렌 군도

나는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것을 수없이 꿈꾸어 보았다. 그러면 나는 겸허하게, 아니 남루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되면 <비밀>을 간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 자신에 대하여 말을 한다거나 내가 이러이러한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 보인다거나, 나의 이름으로 행도한다는 것은 바로 내가 지닌 것 중에서 그 무엇인가 가장 귀중한 것이 있기에? 아마 이런 생각은 다만 마음이 약하다는 증거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즉 단순히 살아가는 일뿐만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확립하기> 위하여 누구에게나 반드시 필요하게 마련인 힘이 결여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환상에 속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이 같은 타고난 부족함을 무슨 드높은 영혼의 발로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에게는 여전히 그런 비밀에 대한 취향이 남아 있다. 나는 오로지 나만의 삶을 갖는다는 즐거움을 위하여 별것 아닌 행동들을 숨기기도 한다.
비밀스러운 삶, 고독한 삶이 아니라 비밀스러운 삶 말이다. 나는 오랫동안 그 꿈이 실현 가능한 것이라고 믿어왔다.
비밀스러운 생활이라면 예를 들어 데카르트가 암스테르담에서 영위했던 생활이 바로 그런 것이다. 도무지 변화라곤 없는데다가 계속적이며 공개적인, 그리고 극단적으로 단순한 생활을 영위함으로써 데카르트는 그 비밀을 충실하게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후세 사람들은 암스테르담에서 그가 살았던 집에다가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이 기념판을 붙여놓았지만 사실 그 집은 시내의 한가운데 있는 평범한 건물에 지나지 않는다. <억세고 활동적인 데다가 남의 사정에 궁금해 하기보다는 자기 일에 더 골몰하는 그 대단한 백성들의 무리에 섞인 채, 사람의 왕래가 가장 잦은 대도시가 갖추고 있는 편리함을 골고루 다 누려가면서 나는 가장 한갓진 사막 한가운데서 사는 것 못지않게 고독하고 호젓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데카르트의 선택은 적절한 것이었다. 그는 생활을 완전히 개방해 놓음으로써 정신은 자기만의 것으로 간직할 수 있었다.

p77-79

꿈을 사라져버리게 하는 것은 꿈의 헛됨에 대한 깨달음이 아니다. 이상하게도 그 같은 비밀의 감정은 마치 끈질기고 숨 막히는 어떤 냄새, 심지어 창문을 활짝 열어젖혀 두어도 가시지 않는 냄새와 같은 것이다. 방탕한 생활에 빠져버린 어떤 친구가 전에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의 관심이 끌리는 쪽은 댄스홀이나 쾌락의 거리가 아니라 어둠이 내릴 무렵 여인들이 옷깃을 스치고 지나가며 나직한 목소리로 유혹의 말을 건네 오는 한녘진 골목길들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극단적인 예를 들지 않더라도, 강렬한 감정치고 깊이 감추어진 감정이 아닌 것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

내가 그 골목의 직각으로 꺾이는 지점에 이를 때면 강렬한 재스민과 리라꽃 냄새가 내 머리 위로 밀어닥치곤 했다. 꽃들은 담장 너머에 가려져 있어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꽃 내음을 맡기 위하여 오랫동안 발걸음을 멈춘 채 서 있었고 나의 밤은 향기로 물들었다. 자기가 사랑하는 그 꽃들은 아깝다는 듯 담장 속에 숨겨두는 그 사람들의 심정을 나는 너무나도 잘 이해할 수가 있었다. 하나의 정열은 그 주위에 굳건한 요새의 성벽들을 쌓아 두고자 한다. 그때 나는 하나하나의 사물을 아름답게 만드는 비밀을 예찬했다. 비밀이 없이는 행복도 없다는 것을.

p81-84

달은 우리에게 늘 똑같은 한 쪽만 보여준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삶 또한 그러하다. 그들의 삶의 가려진 쪽에 대해서 우리는 짐작으로밖에 알지 못하는데 정작 단 하나 중요한 것은 그쪽이다.

p90


행운의 섬들

사람들은 여행이란 왜 하는 것이냐고 묻는다.

언제나 충만한 힘을 갖고 싶으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여행이란 아마도 일상적 생활 속에서 졸고 있는 감정을 일깨우는 데 필요한 활력소일 것이다. 이런 경우, 사람들은 한 달 동안에, 일 년 동안에 몇 가지의 희귀한 감각들을 체험해 보기 위하여 여행을 한다. 우리들 마음속의 저 내면적인 노래를 충동질하는 그런 감각들 말이다. 그 감각이 없이는 우리가 느끼는 그 어느 것도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p95

찬미의 눈물이 아니라 <무력함>의 눈물이었다. 그는 깨달았다(왜냐하면 그것은 마음의 동요라기보다는 정신의 동요였음이 분명하니까). 그는 자기가 절대로 이룰 수 없는 모든 것을, 하는 수 없이 감당하게 마련인 미천한 삶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는 일순간에 그의 염원들의, 그의 사상의, 그의 마음의 무(無)를 깨달은 것이다. 모든 것이 거기에 주어져 있었지만 그는 어느 것 하나 가질 수 없었다. 그 한계점에서 그는 지금까지는 그저 잠정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겼던 이별, 그러면서도 오직 그만이 원했던 그 이별이 결정적인 것임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의식했다고 말했다.

p98-99

가장 달콤한 쾌락과 가장 생생한 기쁨을 맛보았던 시기라고 해서 가장 추억에 남거나 가장 감동적인 것은 아니다. 그 짧은 황홀과 정열의 순간들은 그것이 아무리 강렬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 아니 바로 그 강렬함 때문에- 인생 행로의 여기저기에 드문드문 찍힌 점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순간들은 너무나 드물고 너무나 빨리 지나가는 것이어서 어떤 상태를 이루지 못한다. 내 마음속에 그리움을 자아내는 행복은 덧없는 순간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단순하고 항구적인 어떤 상태이다. 그 상태는 그 자체로서는 강렬한 것이 전혀 없지만 시간이 갈수록 매력이 점점 더 커져서 마침내는 그 속에서 극도의 희열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그런 상태인 것이다.

p101

이제 내가 말한 그런 순간들을 경험하고 나서도 또 살 수 있을까? 사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새로운 예기치 않은 순간을 기다리면서 그저 살아남아 있는 것뿐이다. 그러나 아무러면 어떠랴? 내게는 이미 <획득하는> 일이 일어났으니 말이다. 그 말의 힘을 당신은 제대로 느낄 수 있겠는가? 제로에서 무한으로 옮겨간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 무엇을 말하겠는가? 그렇지만 그 다음에는 무(無)로 다시 떨어진다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주 가느다란 실 같은 빛이 남아서 잠 속에까지 따라오고 이렇게 귀에 대고 속삭인다. 옛날에 어느날⋅⋅⋅⋅⋅⋅, 그럴진대 나 자신보다도 더 내면적인 그 존재의 깊숙한 곳으로 천분의 일 초 동안에 내가 또다시 달려 들어가지 말라는 법이야 있겠는가?
바다위에 떠가는 꽃들아, 가장 예기치 않은 순간에 보이는 꽃들아, 해초들아, 시체들아, 잠든 갈매기들아, 배의 이물에 갈라지는 그대들아, 아, 내 행운의 섬들아! 아침의 예기치 않은 놀라움들아, 저녁의 희망들아 - 나는 그대들을 이따금씩 다시 보게 되려는가? 오직 그대들만이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해방시켜 준다. 그대들 속에서만 나는 나 자신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다. 티 없는 거울아, 빛 없는 하늘아, 대상 없는 사랑아.....

p106-107


부활의 섬

「건강에 해로웠던 것은 또 더 있어요. 아마 그것이 다른 것 보다 더 나빴을 거예요. 갑자기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신경이 예민해진 것이 바로 그거예요」
「그래요, 젊을 때는 제삼자가 하는 말 따위에는 코방귀도 안 뀌던 내가 소심해진 거지요. 여전히 내 고집대로 하기는 했지만 누가 나를 나무라는 듯한 표정만 지어도 속으로는 겁이 났어요. 누가 내게 대놓고 덤빈다면야 오히려 신이 났을테지요. 나는 모조리 다 깨부술 수 있었을 테니 기분이 풀렸을 거예요. 그러나 사람들은 말로는 나하고 같은 생각인 척해 놓고는 뒤에 가서 ⋅⋅⋅⋅ 내가 왜 변했느냐구요. 나도 모르겠어요. 아마 나는 본래부터 그랬는지도 모르지요. 기분대로 살고 무정부주의자라고 자처하시는 분이니 당신은 나를 비웃겠지요. 혼자서 사는 것을 좋아하신다는 분이니까요. 그렇지만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바로 당신도 자신의 약점을 느끼기 때문이란 걸 모르시나요.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나한테 서투른 얘긴 하지 마시라구요. 당신도 식민지에 가서 십 년씩 살 수 는 없을 거예요, 단 석 달 동안도 혼자서는 못 살 겁니다. 당신도 사람들하고 어울리는 걸 좋아하고 남들과 교제하고 싶어하고 재미있게 놀고 싶어해요. 다만 당신은 신경이 예민한 분이라 다른 사람들 때문에 기분을 상하고 싶지 않아서 속으로 웅크리기만 하는 거예요. 나도 당신 같았어요. 그 때문에 나는 죽게 된 거예요, 나는 나만을 위해서 사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남들을 위해서 살고 있었던 거예요」

p114-115


상상의 인도

플로티누스는 두 가지의 죽음을 구분한다. 그 하나는 자연적인 죽음이요. 다른 하나는 자연적인 죽음에 앞서 올 수 있는 철학적 죽음이다. 철학적 죽음은 힌두교도의 목표다. 그러므로 작품을 이룩한다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오직 자신의 방향만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현실과의 관계는 끊어졌고 또 다른 세계와의 사이에 새로운 다리가 놓인 것이 다. 소위 세계라고 이름 하는 것에 대한 점진적인 혐오를 상상해 보라. 그리고 삶과 죽음이라는 저 영원한 쌍(雙)의 소멸을, 그리하여 마침내 얻게 되는 계시를 상상해 보라.
갑작스럽게 정신이 휘청거리면서 그가 <그것 Cela>을 보게 될 때의 감동이란 얼마나 대단할까? 이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저 다른 것도 아닌 그것. 그 자신도 아니요, 그렇다고 다른 누구도 아닌 그것. 서로 구별할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닌 그것. 그가 부러워하는 대상도 아니요, 혐오하는 대상도 아니다. 욕망의 대상도 증오의 대상도 아니지만 감지할 수 있는 대상. 마음에서 가까운 그 무엇도 아니고 수를 셀 수 있는 그 무엇도 아니다. <그것.> 그는 뒤로 돌아서도 동시에<그것을> 본다. 그는 돌연히 그리고 마치 의기 투합하듯이 밤낮으로 <그것>과 함께 있다는 것을 느낀다. 태어나고 사멸하는 모든 것의 곁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도대체 그것은 어떤 모습을 가진 것일까? 그는 나에게 무어라고 말하는 것일까? 사물도 사람도 아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아무것도 그 누구도 아니다. 아니다. 그대는 <그것>이다. 항구적이지 않은 것을 통해서 항구적이며 부재 속에 존재하며 공(空) 속에 산재한다. 이해할 필요도 없이 나는 그것을 만져보기만 하면 된다. 비록 내가 그것에서 헤어난다. 한들 그것을 잊어버릴 수 있겠는가? 아니 과연 이제 내가 그것에서 헤어날 수 있기나 한가? 내게는 그것이 아쉽지만 그것은 나를 아쉬워하지 않는다. 세계는 저절로 주어지는 구경거리이며 나는 그 구경거리의 장면들이 현실이며 그 배우들이 현실임을 믿는다. 세계는 오직 내가 깨어 있는 순간에만 제가 부재함을 알린다. 어깨에 기대어오는 머리처럼 존재의 가벼운 움직임. 그러면 어느새 세계는 홀연히 사라지고 그는 세계의 버팀대처럼 나타난다. 그러나 나는 보다 직접적으로 그것과 하나가 될 수는 없을까? 내가 나의 가장 깊숙한 것 위로 기울어지면 나는 존재하기를 그치며 나는 이제 내가 아닌 것이 된다- 그리고 남도 아니다. 나는 <그것>이다. 나의 사고와 나의 욕망들은 그것들을 불러일으키는 그이에 비한다면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잠들면 나는 <그것>에 가까워지고 내가 죽으면 나는 그것과 하나가 되려한다. 나는 돌이 우물 속 깊이 떨어지듯 그의 속으로 떨어진다.
어느 힌두교도의 말: 중요한 것은 우주를 한 바퀴 도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중심을 한 바퀴 도는 것이다- 꿈 이야기를 쓸 수는 없다. 그저 꿈에서 깨어날 뿐이다.

p147-149


사라져버린 날들

2월 9일은 모든 사람들이 기억 속에 1934년의 어떤 정치적 일화를 상기시킨다. 그런데 나는 그해 2월 6일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가? 그저 오늘이 내 생일이구나 하고, 그리고 오늘로 나는 한 살 더 먹었구나 하고.

한 살 더, 그러니까 살 날이 한 해 덜. 그리하여 그 생일날 나는 바캉스를 가졌다. 바캉스란 일체의 행동이나 사고나 의사 교환이나 오락을 하지 않는 것을 뜻했다(그러니까 그것은 휴가가 아니었다). 나는 진공을 만들려고 했고 시간을 중단시키고자 했다. 무슨 반성을 하자는 목적에서도 아니었고 무슨 준비를 하자는 목적에서도 아니었다. 과거는 분명 죽었고 미래는 형태가 없는 상태였다. 언제나 손에 잡으려면 벗어나는 것이 그 본질인 현재가 아주 예외적으로 마치 기름에 의해서 잔물결로 변하는 파도처럼 질펀해져 버릴 수는 없을 것인가? 나는 <묵상>을 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묵상이란 이 세계의 바탕과는 다른 바탕에서 여전히 계속되는 어떤 삶을 전제로 한다. 전진과 추락이 있고 또 무슨 방향
이 있는 그것은 여전히 어떤 삶인 것이다. 나는 오히려 무(無)가 되고 싶었다. 말을 거창하게 했지만 그저 나 자신을 잊어버리고 싶었다는 뜻으로 이해하라.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하자면 그저 잠이라고 말했어야 옳았을 것이다. 그런데 몽상 쪽이 보다 큰 매력이 있었다. 잠과 깨어 있음 사이의 그 몽롱한 상태는 불가항력인 연속성에서 벗어나면서도 그것에서 벗어나 있다는 행복한 의식을 잃지 않고 지니게 해준다.

p165-166


보로메의 섬들

여행을 해서 무엇 하겠는가? 산을 넘으면 또 산이요 들을 지나면 또 들이요 사막을 건너면 또 사막이다. 결국 절대로 끝이 없을 터이고 나는 끝내 나의 둘시네를 찾지 못하고 말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 말했듯이 이 짤막한 공간 속에 긴 희망을 가두어주자. 마죄르 호반의 자갈밭과 난간을 따라가며 사는 것은 불가능하니 그저 그것의 영광스러운 대용품이나 찾을밖에!

그럼 무엇을? 에 - 또, 태양과 바다와 꽃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나 나에게는 보로메 섬들이 될 것 같다. 그리도 가냘프게 그리고 인간적으로 보호해주는 마른 돌담 하나만으로도 나를 격리시켜 주기에 족할 것이고 어느 농가의 문턱에 선 두 그루의 시프레 나무만으로도 나를 반겨 맞아주기에 족할 것이니..... 한 번의 악수, 어떤 총명의 표시, 어떤 눈길..... 이런 것들이 바로 - 이토록 가까운, 이토록 잔혹하게 가까운 - 나의 보로메 섬들일 터이다.

p175-1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