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받고 싶은 본능

사랑만이 우리를 온갖 악에서 해방시켜 주는 유일한 요새다.  


많은 사랑을 적당한 방법으로 받고 자라난 사람만이 정상적인 정서와 남을 사랑하는 마음의 부드러운 풍요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가 다 아는 사실이다.
우리에게는 누구나 생래(生來)의 두 가지 본능이 있다. 하나는 타인 또는 사회로부터 자기(또는 자기의 재능, 기타 어떤 형태의 현존재)를 인정받고 싶다는 충동이고 또 하나는 남의 사랑을 갈망하는 마음이 그것이다. 그 중에서도 사랑받고 싶은 본능은 몹시도 강하게 우리에게 집착하는 내면적 욕구이다.
순탄하게 정상적이고 절도 있는 범위 내에서 풍요하고 만족스럽게 사랑을 받고 자라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는 하늘과 땅 이상의 심연이 놓여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한 인간 속에 내재하는 위대함의 가능성이 컸다 하더라도 이 기본 조건의 상위는 꼭 그들의 생이나 작품이나 사람을 통해서 표현되고야 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똑같은 정도의 천분을 가진 두 작가의 경우, 풍부하고 정상적인 애정을 받고 자라난 사람과 그와 반대되는 사람의 작품을 보면 그들의 작품 속에 그들이 받고 자란(또는 못 받고 자란) 애정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 것을 우리는 볼 수가 있다.
괴테의 모든 작품에 깃든 자족한 고요, 풍요한 조화는 그의 행복했던 어린 시절, 양친의 조화된 생활을 생각함이 없이는 완전히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온갖 정열이나 회오에서도 온건함과 절도 내지 품성을 끝까지 잃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중용'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중용은 어떤 나라의 어떤 사람의 경우에 있어서도 어린 시절 및 양친의 생활과 훈육과 끊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어떤 교육도 암시, 모방 또는 반발에의 이상의 무엇일 수 없다는 이론을 긍정시켜 준다. 다시 말하면 결과로 보아서 부모는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이다.
우리는 부모의 행위를 보고 무의식 중에 모방하고 또는 의식적으로 반발한다. 그들의 명령과는 관계 없이...... 여기에 부모의 역할에 어려움이 놓여 있는 것이고 여기에 괴테적인 조화의 인격을 가진 사람을(그의 재질과 물론 무관하게) 우리 주변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원인이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의 내부에 정리되지 못한 여러 가지 복합현상을 숨기고 있다. 그리고 그 원인은 거의 전부 부모의 부조화된 사랑 또는 일분의 편애 또는 학대, 무관심 등에 그 제일 깊은 원인을 가지고 있다. 부모의 잘못으로 어린 아이의 정서가 정상적인 단계로 발육을 못하고 억압되었을 때 그 억압된 정서는 의식 밑으로 들어가서 병적 증후로 되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발산되는 것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인간의 본능 발달의 단계는 유년기에는 자기애(나르시시즘), 다음에는 자기와 비슷한 모습과 성격을 가진 사람을 사랑의 대상으로 동성애를 거쳐서 이성인 타인을 사랑의 대상으로 하는 이성애의 시기로 옮겨 간다고 한다.
그런데 그때까지의 발달에 여러 가지 장애가 있었을 경우에 본능은 하급의 발달 단계에 고착해서 완전한 이성애로까지 발달하지 못하고 도착 현상을 일으키게 된다고 한다.
새디즘, 매저키즘 또는 이상 성격이 그 결과이며 인간의 정신갈등은 요컨대 전적으로 나와 본능과의 알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프로이트는 보고 있다.
어려울 때 우리가 받은 애정, 다시 말하면 우리의 내년에 있는 애정을 우리가 길러 받은 정도 여하에 우리가 정상적인 인간인가 아닌가의 키 포인트가 있다는 것이다. 맹목적적인 동물적 사랑은 백해 무익이리라. 그러나 우리에게는, 특히 유아기의 우리에게는 햇빛보다도 부모의 애정이 필요하다는 것은 이미 확인된 사실이다. 애정 속에서 어린이가 잔인한 인간, 무궤도한 반사회적 내지는 위법적 인간으로 되는 일은 거의 없다.
그와 반대로 냉혹하고 무관심한 가정에서 소망되지 않은 아이로 탄생해서 온갖 부드러운 정서를 의식 밑에 몰아 넣어야 하는 유년기를 보내지 않으면 안 됐던 사람한테서 우리는 그가 선에 있어서도 악에 있어서도 과장된 과격한 정서와 열정적인 면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 만약 그 외의 어떤 범행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크게 놀라지 않을 것이다.
스웨덴의 극작가 스트린드 베리는 몹시 극단적이고 병적인 만큼 애정에도 증오에도 집념이 강한 이기주의적인 인간으로 그의 작품과는 별개로 인간으로서의 그의 생은 실패로 끝난 사람이다. 그런데 그의 일생을 통한 기행과 병적 발작과 고뇌는 그의 유년기에 이미 싹텄었다. 주인과 식모 사이에 생긴 '소망되지 않는 아이'였던 그는 일생 동안 그의 출생의 수치와 아버지의 냉담과 어머니의 경멸을 극복하지 못했었다.
오스트리아의 극작가 그릴파르처도 조화되지 않은 부모의 문제성을 그대로 반영한 억압과 복합에 넘친 폐쇄적인 성품의 인간이었고 작품 속에서의 승화 작용 이외의 그의 생은 역시 하나의 실패작으로서 가정도 아이도 가져 본 일이 없는 사람이다.
릴케도 엄격한 아버지와 경박한 어머니의 무지와 이별로 아버지 혼자의 손으로 키워진 유년 시절의 소유자다. 그 자신의 결혼에 의한 내면적 안정을 획득하려는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으며 일생 동안 어머니로부터 정신적 고통을 느낀 결과 비정상적일 만큼 여성에 정신적 동경과 관심을 갖고 방황했다.
베토벤의 가정적 불행과 그의 생의 어두움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재능의 개화는 왕왕 이러한 모순된 성격의 대립 속에서 끊임 없는 승화에의 의지 속에서만 가능한 것 같기는 하다. 그러나 천재를 안 가진 범인(凡人)은 높고 아름다운 것 속에 자기의 억압을 높여서 표현하는 대신 여러 가지의 이상 현상(남을 해치고 싶은 욕망, 또는 자학 또는 기타의 병적 발작) 속에 배설하려고 하는데 그치는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일반적인 사회적 견지에서 볼 때 애정이 없는, 또는 양친이 화목하지 못하고, 조화되지 않은 가정에서 아이 속에 있는 애정을 눌러 없애는 방식으로 기르는 교육은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요즈음 청소년의 범죄가 많다고 한다. 특히 온 집안을 살해한, 전에 수재였다는 청년의 경우도 최근에 있었다. 그 청년의 과격하고 비정상적인 행위의 원인은 물론 부모에게 있다. 행위를 결과로만 보지 않고 원인에서 본다면 부모 쪽에 몇 배의 책임이 있다. 사랑을 받은 일도 없고 자기 내부에 있는 사랑마저 완전히 눌러 버려진 아이가 자라나서 냉혹하고 과격하고 인간의 존귀성을 무시하는 사람이 되었다면 그 잘못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처음부터 애정의 햇빛을 담뿍 쬐어 주어 잘 자라게 하지는 않고 어린 싹을 짓누르려는 전연 비협조적이고 오히려 파괴적인 태도로 임하고 있다가 그 나무가 자라서 다른 나무와 같이 무성하고 싱싱하지 않다고 우리는 욕할 수가 있는 것일까?
청춘시대는 직관과 감각이 예민하고 순수하며 세계 전체와 자기 자신에 대해 요구가 높고 많은 교만한 시절이다. 따라서 이 시절에 더욱 범죄의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 또는 슈닛츨라의 ≪테레에제≫의 아들, 또 그와 유사한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의 아들 중 젊은 범인들의 무리가 전부 불행한 가정의 소산으로 되어 있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닌 것이다.
사랑만이 우리 인간을 온갖 악에서 해방시켜 주는 유일한 요소라는 것은 몇 번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자기의 내부에 있는 애정을 조금도 구김 없이 발달시켜서 그 애정을 남에게 순수하게 쏟을 수 있게 된 사람만이 정상적이고 성실한 사람일 수가 있는 것이니까 그러한 사람에게만 사회에의 연대감, 타인에의 책임감과 박애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사랑 속에 자라나고 사랑을 지닌 사람은 반사회적이거나 위법적일 수가 없으며, 사랑을 모르고 자라나고 사랑을 모르는 사람은 전부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 가능성에 있어서 반사회적 위법적일 수가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온갖 청년의 범죄를 볼 때 그의 어린 시절이 눈앞에 그려지고 한편 구석에서 손가락을 빨거나 매를 맞고 울고 있거나 하는 아무도 돌보아 주지 않는 어린 아이의 모습이 선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그 오랜 억압의 생활은 지옥보다도 길었으리라고 동정이 가고 결국 그를 도울 수 있었고 앞으로도 도울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사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다.

나쁜 것은 언제나 아이가 아니라 부모인 것이다.
마치 나쁘게 자란 나무의 책임이 정원사에게 있듯이.



순간의 지속

모든 순수한 것은 순간 속에 있다. 이것을 지속하고 응결하려는 것이 진실로 산다는 것이다.  
 

무(無)로 가는 우리 생의 과정으로서 생물학적으로 파악한다면 무엇 때문에 '얼마나 많은 땀과 눈물과 피를 흘리는가?' 라고 묻고 싶어진다.
정말로 정신 속에서 우리를 구제하지 않는다면 삶이란 살아질 가치가 없는 무엇인 것이다.
아무리 사고를 되풀이해 보아도 인간의 순수한 상태, 최고도로 승화된 상태로 향한 의식이며, 단순히 인간은 정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따라서 의식을 매순간마다 지키고 깨어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인간에게 적합하고 당연한 과제인 것 같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정신에 의해서 깨끗하게 된 것이 아니라면 무가치한 것일 게다.
우리가 뜨겁게 미칠 듯이 사랑할 수 있는 것은 가장 순수한 의식의 상태에서 뿐이다. 그러나 그런 상태 ― 순수한 사랑이란 이 세계에서는 순간으로써 밖에는 선사되어 있지 않다. 언식을 마비시키는 일반인들이 있는 반면, 죽음을 직시할 용기를 생활 속에서까지 구현해 보인 성실한 예외자들이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도 있었다.
≪번민기(煩悶記)≫의 저자 토무라 조[藤村操]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자기의 생을 하나의 체제로 구성하고, 논리적으로 그것을 살고 죽은 이름 없는 챔피언이 그였다. 그는 그의 존재의 근원과 결과를 탐구했고 그것의 파악이 불가능한 것에 괴로워한 나머지 부정 ― 존재의 부정을 택했다.
죽음은, 누구의 죽음이나 엄숙한 사실이다.
더구나 그것이 의식적으로 선택되고 논리적으로 사유된 결과인 경우 우리는 무엇이 그를 죽음에 던져 넣는가를 알고 싶어 해도 마땅할 것이다.



죽음에 관하여

토무라 조[藤村操]의 ≪번민기(煩悶記)≫에 부쳐
집착 ― 어는 사항이나 인간이나 생명에 밀착해 있는 상태는 객관적인 눈으로 볼 때 때로는 취한 느낌, 숨막히는 압박감을 우리에게 준다.
영원히 안 팔릴 열쇠의 꾸러미를 방탄 조끼처럼 걸치고 팔러 다니는 노인, 내일이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을 것이 확실한 회색 생활을 지속하고 잇는 수많은 생활인들. 내일 지구가 파괴된다는 것을 통고 받는다면 그들은 어떤 반응을 할 것인가? 다만 아연히 입을 열고 앙천 탄식(仰天嘆息) 할 뿐일 것이다.
그런 사람들 ― 우리의 대분분이 그 중에 들어가는 ― 에게는 죽음이란 다만 우연한 불상사 이외의 다른 의의를 갖고 있지 않다. 일회적인 생을 사는 우리에게 있어서 신비한 끝인 죽음이 이렇게 등한시되엇 될 일인가는 한번 고려해 볼 문제가 아닐까?
죽음에 무관심하기 위해(내심 우리의 의식은 누구나 그로부터 놓여 있지 않다) 여러가지 방법으로 자기를 기만하고 의제나 거기에 다른 무엇이 섞인 혼합물, 때로는 대체물만이 우리에게 주어진다.
우리의 고독은 그러니까 '영혼의 전달'일 불가능한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의 지속이 불가능한 데 기인하는 불안과 회의에서 싹트는 것이다.
전달(또는 사랑)이 순간에만 가능한 것이고 우리는 '실존'과 만찬가지로 매순간마다 선택되고 의식적으로 받아들여져야먄 한다는 것 그리고 이 받아들임, 선택함에 있어서의 결단성이 우리를 결정하는 전부라는 것을 안다면 사랑이나 기타의 대인관계가 얼마나 투명하고 맑은 관계로 될 것인가?
우정이나 사랑은 그것의 본질에 있어서 파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방향으로 나의 의식을 나날이 선택하는 나의 태도, 즉 나의 의식의 의도에 의해서만 그러한 것들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이란 결정으로 승화된 순간을 말하는 것이며 가득찬 순간, 자기 의식과 타의 의식이 완전히 하나가 된 순간을 말할 것이다.
순간은 포착되어 응결시키지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이 '순간'들이 생의 가치의 전부인 것을 생각할 때, 그리고 그것이 없다면 살 가치가 없다는 것을 생각 할 때 어떤 허망하고도 엄숙한 감동을 갖게 된다.



두개의 세계

데미안은 하나의 이름, 하나의 개념, 하나의 이데아다.  

≪데미안≫의 경우


고등학생 때와 대학교 1, 2학년 때 누구나 한 번씩 사로잡히는 책이 헤세의 ≪데미안≫이다. 나도 더 클 수 없는 감동을 가지고 읽었던 것을 기억한다. 개인적인 이유에서도 ≪데미안≫은 나에게 잊을 수 없는 책이 되어 버렸다.
≪데미안≫을 몹시 사랑하던 내 친구가 대학교 2학년 때 어느 날 나에게 와서 ≪데미안≫을 빌려 달라고 부탁한 일이 있다. 다음주 월요일 꼭 갖다 주겠다고 약속하면서 그 친구는 빨간 줄 투성이인 내 ≪데미안≫을 빌려갔다. 여학교 동창이고 기계처럼 매사에 정확한 모범생인 그 친구는 월요일에 나에게 오지 않았다. 나는 무심코 별일 없이 그냥 못오게 되었는 줄만 알고 있었다. 그후 약 반달이 넘어서야 나는 그 아이가 그때 이미 죽어 있었기 때문에 못 온 것을 알았다. 죽는 순간까지 ≪데미안≫을 읽고 있었다 한다. 그래서 그 책도 같이 무덤 속에 들어가고 말았다. 왜 죽었을까? 그 아이는? 나는 한 반년간은 그 의문에서 헤어나지를 못했었다. 지금도 그날(책을 빌리러 나에게 왔던 날)이 생각나고 그후 길가에서 무심코 제삼자의 입에서 그 아이의 죽음을 들었을 때의 경악이 안 잊혀진다. 겨울이었다. 아마 나는 일생 그 일을 내 뇌리에 어느 구석에 간직하고 있을 것만 같다.
데미안, 데미안은 누구인가? 독일의 전몰 학도들의 배낭에서 꼭 발견되었다는 책, 누구나 한번은 미치게 만드는 책, 도대체 그 마력의 근원은 어디에 있고 왜 우리는 ≪데미안≫을 읽고 또 읽고, 때로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읽어야만 했는가? 데미안, 유년기의 향수같은 맛, 서럽고 감미로운 이름이다. 도대체 헤세는 ≪데미안≫을 통해 어떤 인간을 부각하려고 한 것일까?
새는 알을 까고 나온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의사대로가 아닌 어두운 계절이 있다. 마치 악마와도 같은 외계의 힘이 우리를 무겁게 누르고 자유를 빼앗고 만다. 소리를 질러도 공허한 메아리만 울려 돌아오고 마의 힘은 더욱더 중압을 가해온다. 그럴때 우리는 악! 소리를 지르면서 동시에 악몽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꿈이었다는 것을 의식할 때의 우리의 고마움은 크다.
에밀 싱클레어는 그리고 무의식의 세계에서 여러가지 악령들에게 눌려서 분열하면서 살아왔다. 맑고 분명하고 아름다운 대낮과 어둡고 무섭고 몽롱하고도 마력을 지닌 밤의 두 세계가 그의 내부와 외부에 존재한다. 그는 뚜렷한 의식없이 때로는 낮의 세계에 때로는 밤의 세계에 속하면서 살고 있다. 낮과 밤, 의식과 무의식, 아폴로와 디오니소스, 각성과 도취, 존재와 당위, 지성과 관능, 계산과 몽상, 일상적인 것과 엄청난 일, 이러한 두가지로 나눌 수 있는 세계의 대립 속에서 그것을 어렴풋하게 느끼면서도 적극적으로 그것에 참가할 용기도 없고, 물리칠 만한 강한 자아도 없이 막연히 두 세계의 각각 발을 들여 놓고 있는 것이 에밀 싱클레어의 유년기다.
그는 양친의 아늑한 방, 찬송가와 질서와 깨끗한 내의가 지배하는 좀 권태로운 세계를 전자로, 또 하녀, 머슴, 육고간 등의 난잡하고 재미나고 가슴 설레이는 전율이 있고 무서운 세계를 후자로 보고있다. 전자는 내재이며, 후자는 초월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싱클레어는 언제나 전자에 속해 있으면서도 후자로 뛰어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악의 세계, 혼돈의 세계에 대한 동경을 유년기에 안 가져 본 사람이 있을까? 그때 악의 세계의 챔피언으로서 카인(Kain)이 등장한다. 싱클레어의 의사 자유를 완전히 뺏고 자기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으려는 카인 싱클레어는 마치 꿈 속에서 우리가 도망치려 해도 몸이 안 움직이듯이 아무리 헤어나려 해도 못 헤어나고 괴로워한다. 카인에의 순종과 봉사는 동시에 밝은 세계(양친의 세계)에 대한 배신인 까닭이다.
그때 그에게는 숙명적인 '만남'이 일어난다. 데미안을 알게 되는 것이다. 두 세계의 어느 편에도 안 속해 있고 다만 자기 자신에만 속해 있는 데미안에게서 그는 인간이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의 암시를 막연하게나마 받고 그에게 미칠 듯이 열중한다. 스승이면서도 벗, 모든 것을 읽었고 알고 있는 선구자, 그는 한동안 데미안을 위해서만 산다.
그러나 그 관계는 데미안의 출발로 일시 끊긴다. 싱클레어는 '다른 세계'에 대한 누를 수 없는 동경을 길에서 우연히 한 번 본 잊을 수 없는 맑음을 지닌 소녀 베아트리체에게서 채우려고 한다. 인간의 온갖 고귀와 순결을 구상한 듯한 소녀 ― 영혼뿐이고 관능이 없는 그리움이다. 영혼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 향수를 갖고 싱클레어는 베아트리체를 바라본다. 한동안 이렇게 그가 전자의 세계에 파묻혀 있는 동안 그의 정신은 안온하고 선량하고 규칙적인 것으로 길들어져 시민적으로 되어진다. 그때 그에게 돌연 어느 그림이 한장 날아온다. 알을 까고 날으려는 새의 그림, 그리고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붙어있다.

      새는 알을 까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싸스다.

싱클레어는 마치 꿈에서 경악 때문에 쇠를 지르고 깨어난 사람같은 각성을 느낀다. 자기의 내부에 잠자고 있었던 초월에의 욕망을 이 한 장의 종이로 완전히 뚜렷하게 의식한다. 그는 다시 의식하고 산다. 베아트리체도 양친의 만족(그의 평온화에 대한)도 이미 그에게는 관계 없는 무엇이 되고 만다. 결국 그 속에서 안주할 수 없는 자기를 느낀다.
그리고 그에게는 다시 괴로운 시절이 온다. 어디로 갈 것인가? 아니 우선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 것인가? 자기에 도달하는 길은 멀다. 거의 불가능하게 멀다. 결국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것은 욕망뿐인 것일까? 싱클레어의 전 흥미의 대상은 그때부터 아프락싸스가 된다.아프락싸스, 어느 세계로 인도하는 문을 열어 주는 주문인 것일까?
그는 어느 날 수업 시간에 헤로도토스 강의에 만연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그 신임 교사의 음성은 그의 의식에 와 부딪쳤다.
"...... 내가 아까 예를 든 아프락싸스 같은 것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사람들은 그 이름을 희랍의 미술 양식과 결부시키고 그것을 오늘날 야만 민족간에 더러 남아 있는 일종의 마귀의 이름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아프락싸스는 보다 의미 있는 무엇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 이름을 예를 들면,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을 결합시키는 상징적인 관계를 가진 어떤 신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물쇠는 열어진 셈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를 채울 수 없었다. 그는 더욱 더 모색했다. 그러나 손에 잡히는 개념이나 실체가 없었다. 그러나 또 한번 '우연'이 그와 부딪친다.
어느 황혼의 교회에서 들려 나온 바하의 음악에 이끌린 그는 기어코 그 바하 연주자인 괴상한 사나이 피스토리우스와 알게 된다. 피스토리우스는 싱클레어를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방에는 책과 벽난로뿐이었다. 벽난로 앞에 엎드려서 그들은 불을 응시했다. 피스토리우스는 싱클레어에게 가르친다.
"배화(拜火)는 인간이 발명한 것 중에서 가장 어리석은 것은 아닙니다."
배화하면서 그는 독백을 계속했다. 우리는 우리 인격의 한계를 너무 좁히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세계의 총체로 만들어져 있으며 우리 각자는 우리 육체가 물고기에 이르기까지의, 아니 더 먼 곳까지의 발달의 족보를 간직하고 있듯이 우리의 영혼 속에는 인간의 영혼이 한번이라도 살았었던 모든 것을 간직하고 있다.
여태까지 존재한 모든 신과 악마는 모두 우리 속에 함께 있고 가능성으로서, 소망으로서, 출구로서 존재 할 것이다.
싱클레어는 피스토리우스에 의해서 아프락싸스가 무엇인가를 점점 알게 된다. 그러나 싱클레어가 그에게서 배운 가장 큰 것은 그가 자신에의 길로 한 걸음 더 나아가도록 계기가 되어준 데 있었다.
싱클레어는 결국 피스토리우스가 바라는 '새로운 종교'에 완전히 귀의하고 '예배와 도취와 신비한 의식'을 그와 함께 나누는 것에 회의를 품게 된다.
그는 피스토리우스도 다만 인간이고 자기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으나 자기보다 더 약함을 지닌 인간이 아닐까 의심하게 된다. 그 의심을 말한 날이 또한 그들의 우정의 마지막 날이 되고 만다. 싱클레어는 다시 고독 속에 혼자 남는다. 정신의 방황이 계속된다. 그는 스승을 잃은 것이다.
그는 데미안을 생각했다. 딴 도시로 가 버리고 시야 밖에 사라졌으나 언제나 그의 심층 의식을 지배했던 데미안이었다. 어렸을 때의 구제자 ― 둘이 다 이마에 흔적을 갖고 있던 별종들 그리고 그보다 그렇게 많이 모든 것을 알고 있던 어린 스승, 그는 데미안의 그리움을 참을 길 없어서 찾아 헤맨다. 우연히 길에서 만난 그는 다시 그와 함께 모든 문제를 의논하고 토론하기 위해 매일 그의 집을 찾게 된다.
그 집에는 에바 부인이 있다. 데미안의 어머니였다. 남성과 여성, 신적인 숭고와 악마적인 유혹을 함께 지닌 수수께끼의 여인, 모성이고 애인인 에바 부인을 첫 대면했을 때 그는 오래된 그의 꿈이 이루어졌음을 안다. 전에 베아트리체 숭배에서 피스토리우스의 감화로 옮겨가던 시대에 그는 종종 꿈을 꾼 일이 있었다. 자꾸 반복되어서 똑같은 꿈이 나왔는데 그 꿈은 이러하였다.
집안에서 어머니가 나를 향해 걸어왔다. 그러나 내가 집에 들어가서 어머니를 안으려고 하니까 그것은 어머니가 아니었고 한번도 보지 못한 다른 모습이었다. 그 모습은 키가 크고 힘있게 생겼으며 막스 데미안과 비슷했고, 내가 그린 그림과 비슷하면서도 아주 달랐고 힘있게 생겼는데도 매우 여성적인 모습이었다. 그 모습은 나를 끌어 당기고 깊고 소름 끼치는 애무 속에 나를 받아들였다. 쾌락과 공포가 섞여 있었고 그 포옹은 동시에 예배이며 범죄였다. 나를 껴안은 이 모습 속에는 어머니에 대한 추억과 내 친구 데미안에 대한 추억이 너무 많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 여자의 포옹은 온갖 외경심에 저촉되는 불순한 것이면서도 동시에 그 이상 없는 행복을 뜻했다.
종종 나는 이 꿈속에 깊은 행복감을 안고 깨어나고 때로는 끔찍한 죄를 저지른 것 같은 양심의 가책과 죽음의 공포를 가지고 깨어났다. 나는 내가 바로 이 예감의 꿈속에서 아프락싸스를 부르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쾌락과 공포, 남자와 여자가 뒤섞이고 성스러운 것과 추악한 것이 서로 얽힌, 그리고 가장 섬세한 순진함에 의해서 흠칫 놀라는 죄악 ― 이러한 것이 내 사랑의 꿈의 모습이었고 또한 아프락싸스의 모습이었다.
꿈의 모습을 그대로 구현시킨 여인이 바로 데미안의 어머니 에바 부인이었던 것이다. 싱클레어는 이제야 고향에 돌아온 것 같다고 그 여자에게 말한다. 깊은 안도와 행복을 느낀다. 그는 '내가 어떻게 되든간에 상관없었다. 나는 이 여자가 이 세상에 있는 것을 아는 것이 행복했다. 그 여자의 목소리를 마시고 그 여자의 가까이에서 숨쉬는 것이 행복했다. 그 여자가 나에게 어머니가 되든, 애인이 되든, 하여간 그 여자가 있기만 한다면!' 이라고 느낀다. 전한 행복한 시절,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날 그는 전쟁이 일어났음을 알려 받는다. 그도 데미안도 출전한다.
그리고 점령 지구의 농가 앞에서 보초를 서다가 싱클레어는 총탄에 맞아 쓰러진다. 총탄에 맞는 순간 그가 본 것은 신비한 여신 ― 에바 부인, 아프락싸스 등의 이름을 통해 그가 추구하던 목표였다. 그것이 하늘에 가득 덮였음을 보는 찰나에 그는 총탄에 맞은 것이다. 후방으로 이송되면서 그는 데미안을 만난다. 최후의 순간에 싱클레어는 자기가 바로 데미안과 같아진 것을 느낀다. 데미안은 말하자면 그의 분신이었던 것이다.
발전 단계에서의 우리들의 일곱개의 시절
소설 '데미안'이 표현하고 있는 인간상은 한 청춘의 고뇌의 상이다. 고독하게 모색하고 지치도록 갈망하고는 죽음에 의해서 자기의 운명을 성취하는 모습이다.
이 인간상이 우리에게 와 부딪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우리들이 어느 시기에 반드시 겪어야 하는 정신적 발전 단계를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는 점일 것이다. 그러면 그 발전 단계를 헤세는 어떻게 구분한 것인가?

1. 영과 육의 대립시대 : 아직도 완전한 의식이 아니다. 무의식, 즉 자의 세계의 문턱은 이미 넘었다.(두개의 세계)
2. 외계와의 대결(Kromer 크로마라는 이름으로) : 외계는 언제나 우리에게도 대항적인 무엇이고 자기 이외의 모든 사람은 이방인(헤세는 도마뱀, 물고기 등의 어휘를 쓰고 있다)이다. 아테네인이 스파르타인에게서 느꼈던 것 같은 이질감에서 나오는 본능적 혐오.
3. 데미안의 등장 : 우리는 우리 자신에 도달하기 위해서 타자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결코 혼자서는 우리 자신일 수가 없다. 타자와의 교통 속에서만 우리는 실존이다
4. 베아트리체 시대 : 사춘기의 욕정에 대한 자기 반발에서 흰구름을 바라보고 숭배하고 싶은 시대. 맑은 것, 고귀한 것만을 원한다. 관념 그 자체이고 싶다.
5. 아프락싸스 : 배화교 시대. 피스토리우스라는 스승을 통해 신비한 새 종교 의식에 골몰한다. 그러나 제자는 스승과 갈라져야 하는 것이 운명이다.
6. 다시 찾은 데미안 : 사랑의 감미와 고뇌를 그의 모친 에바에게서 안다. 관념적이나 4의 경우보다는 본질적으로 다른 참된 사랑의 체험이다. 모성, 여신, 동물, 악마, 여인, 모든 것의 집대성 같고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예지의 여인이 에바 부인이다.
7. 새로운 창조를 위한 파괴 : 새는 알을 까고 나온다. 시작과 종말은 같다. 전쟁이 다가왔다. 그리고 불가피한 것(죽음)이.

데미안도 싱클레어도 죽는다. 그리고 죽는 순간에 둘이 다 서로를 안다. 파악한다. 구별 못할 만큼 같아진다. 그리고 돌아간다. 땅으로 모든 것의 원천이고 모성인 땅에게로 죽음에게로.
데미안은 하나의 이름, 하나의 개념, 하나의 이데아이다. 그러나 어떤 현실의 인간보다도 더 살아 있고 더 생생하고 가깝게 느껴지는 무엇이다. 우리 속에 있는 모든 요소를 남김 없이 그리고 완전한 방법으로 구현하고 있는 까닭에 우리는 때로 관념속에서 보다 진실하다. 데미안이 우리보다 진실한 것은 그 때문일것이다. 젊음과 인식욕, 지식학의 심볼, 어린 시절의 성에의 기피에 대한 섬세한 대변자, 관념 속에의 도피, 자아 예찬, 그리고 죽음에 의한 승리, 데미안은 확실히 우리 자신의 분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