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특별히 물건에 집착이 많은 편도 아니고, 수집벽 같은 것도 그다지 없는 편인데, 그런데도 그냥 놔두면 사방에 여러 가지 물건들이 점점 쌓인다. 레코드니 책이니 테이프니 팜플렛이니, 그 밖에 서류, 사진, 시계, 우산, 볼펜 등등 하는 류의 것들이다. 어떤 것들은 그 나름의 필연성에 의하여 늘어나고, 어떤 것들은 아무런 필연서도 없이 늘어난다. 그러나 필연성이 있고 없음에 관계없이 그 물건들은 자동적으로 증가해 가는 것이고, 우리의 한정된 힘으로 그 흐름을 저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까지 한 것처럼 생각된다.
이러한 무용지물의 자연적 증가 경향은 젊은 시절에는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지만, 인생의 한 포인트를 지나고 나면 돌연 명확한 형태를 띠고 그 모습을 우리 앞에 나타내는 듯하다. 여하튼 싫건 좋건간에 정신없이 사방에 물건이 늘어나기만 한다. 누군가로부터 받은 물건이 있는가 하면, 스스로 돈을 주고 산 것도 있다. 어느 쪽인지 기억이 안 나는 것도 있다. 약간은 쓸모가 있는 게 있는가 하면, 거의 아무런 쓸모도 없는 것도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어떤 하나의 공통된 특질을 지니고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그것은 바로 '간단히 버릴 수 없다'는 특질이다.
예를 들면 우리 집에는 볼펜이 전부해서 오십 자루 정도나 있다. 그러나 '왜 볼펜이 오십 자루나 있는가?'하고 물어도, 신속하게 대답하기 힘들다. 나는 볼펜이라고 하는 필기구를 일에는 전혀 사용하지 않으니까, 일 이외의 일상 생활에서 쓴다고 해 봤자, 수첩에 메모를 하거나, 크레디트 카드에 사인을 하는 경우 정도로 한정돼 있다. 그러므로 문방구에서 볼펜을 산 기억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펜은 끊일 새 없이 늘어나기만 한다. 그리고 어느 볼펜이고 잉크가 1센티미터나 2센티미터 정도밖에 줄어들지 않았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면 내 쪽도 '볼펜이란 제멋대로 증식하여 늘어나는 것이다'라는 인식 하에 포기하는 수밖에 없을상 싶다.
물론 그렇다고 볼펜이 제멋대로 증식을 하는 것은 아니고(만약 그렇다면 멘델의 법칙에 따라 빨강 파랑 혼합이라든가 파랑 검정 혼합이라는 색깔이 존재했을 것이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볼펜이 늘어나는 데는 그 나름대로 반드시 몇 가지 이유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념품으로 받았거나, 누군가가 잊어 먹고 두고 갔거나, 여행지의 호텔에서 기념으로 들고 왔거나, 외출한 곳에서 문득 필기구를 갖고 나오지 않았음을 깨닫고 임시 변통으로 역내 매점에서 샀거나(무엇보다 싸니까)하는 이유이다. 그러한 경로를 거쳐 볼펜 오십 자루는 밤 새 소리도 없이 내린 눈처럼 우리 집에 쌓여 있는 것이다. 이사를 할 때마다 나는 그 볼펜 꾸러미를 바라보며 마음 속으로 진저리를 친다. 볼펜 오십 자루라니 필시 나는 평생을 써도 다 못 쓸 것이다.
그러나 그 불필요한 볼펜이 성가시다고 싹 버릴 수 있는가 하면, 그런 일은 할 수 없다. 아직 잉크가 남아 있고 사용 가능한 상태에 있는 볼펜을 쓰레기통에다 내던지는 것은 미네랄 워터로 이를 닦는 것과 비슷한 정도의 용기를 필요로 하는 행위이다. 그러니까 결국은 아무리 이사를 거듭해도, 볼펜수는 절대로 줄지 않는다. 가끔 '이제 잉크가 굳어 버려 쓸 수 없게 된 것이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갖고 한 자루 한 자루 실험을 해 보곤 하는데, 최근의 볼펜은 품질이 향상된건지, 그런 경우는 한 자루도 없어 퍽 실망하고 만다.
볼펜 정도라면 아무리 쌓여 있어도 그렇게 무겁지도 않고 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아니니까, 눈에 보일 만큼의 실질적인 해는 없다. 문제는 책과 레코드이다. 직업상 책의 숫자는 점점 늘기만하고, 레코드도 올바로 세어 본 적이 없으니 잘 모르겠지만(세어 볼 마음도 없다) 전부 삼천 장 정도는 족히 되지 않을까 싶다. 레코드 삼천 장하고 한마디로 말하기는 쉽지만, 한 장에 앞뒤 45분으로 치면 통털어 듣는데 2200시간 이상 걸린다. 요컨대 그렇게 많은 양의 레코드는 아무리 생각해도 불필요하다. 이사를 할 때마다 죽을 지경이다. 정말 무슨 수를 써야지 하고 뼈저리게 생각한다.
마누라는 '새 레코드를 열 장 사면, 헌 걸 열 장 팔아 버리면 되잖아요. 어차피 그렇게 많이 듣는 것도 아니니까'하고 투덜거리지, 나 역기 그게 옳은 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그렇게 생각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는다. '이건 좀 희귀한 레코드고'라든지, '이건 고등 학교 때 산 추억이 담신 레코드니까'라든지, '별로 듣지는 않지만, 이 한 곡만큼은 마음에 드니까'하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결국 재고가 한 장도 줄어들지 않는다. 속수무책이다.
실은 지금도 몇 달 후로 다가와 있는 이사를 빙자하여 레코드 500장, 책 500권 삭감에 애쓰고 있지만, 늘 그런 것처럼 간단히 처리될 것 같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