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시간 전만 해도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클로이가 이미 나의 갈망의 대상이라는 지위에 올랐다는 의미였다. 이 갈망은 끼니때가 되면 주기적으로 다가오는 배고픔이 아니었다. 배고픔의 경우에는 요구의 표시가 점진적으로 나타나며, 시간의 경우에 따라서 그 요구의 흐름을 인식할 수 있다.
p24


전화는 전화를 하지 않는 연인의 악마 같은 손에 들어가면 고물 도구가 된다. 이야기는 전화를 거는 사람의 손에 놓여있다. 전화를 받아야 하는 사람은 그 이야기의 전개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다. 따라가기만 할 뿐이다. 전화가 걸려왔을 때 대답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전화는 나를 수동적인 역할로 묶어놓았다.
p30


지하철에서 어떤 여자의 다리가 지금처럼 내 다리를 스쳤다면 나는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그러나 클로이의 경우 나는 의미가 자체 내에 담겨 있지 않고, 문맥에 의해서, 독자에 의해서 부여될 수 밖에 없는 행동을 이해하려고 했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p35


구애하는 위치 때문에 나는 내 마음에 드는 것은 무엇일까? 하고 묻지 않고 그녀 마음에 드는 것은 무엇일까? 하고 묻게 되었다. 내가 보기에 내 타이가 어떤가? 하고 묻지 않고 그녀가 내 타이를 어떻게 볼까? 하고 묻게 되었다. 나는 사랑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의 눈을 상상하고 그 눈을 통하여 나 자신을 보게 되었다. 나는 누구인가? 가 아니라 나는 그녀에게 누구인가? 였다.
p44


당신이 지금 나를 사랑한다면, 그것은 당신이 내 전체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내 전체를 보지 못하고 있다면, 언제 당신이 내 전체를 보게 될까 초조해하며 당신의 사랑에 익숙해져가는 것은 바보짓이다
. 이것이 마르크스주의자의 생각이다.
p76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본질적인 평범함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그 광기를 드러낸다. 그래서 방관자 자리에 선 사람들에게는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따분해 보인다. 방관자들은 묻는다. 저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한 인간 외에 무엇을 보는 걸까? 나는 클로이에 대한 내 뜨거움을 친구들과 공유해보려고 했다. 영화, 책, 정치와 관련하여 많은 공통점을 발견한 친구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마치 메시아적 열정에 사로잡힌 사람을 마주한 무신론자들처럼 세속적이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친구들한테 세탁기 옆의 클로이, 영화관에서의 클로이와 나, 주문을 하려고 기다리는 클로이와 나에 대해서 열 번쯤은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플롯은 없고 액션조차도 거의 없는 이야기, 동작이 거의 없는 이야기의 중심에 서있는 중심인물에 대한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러고 나서야 나는 사랑이 외로운 일이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기껏해야 다른 한 사람, 사랑하는 사람만이 이해해줄 수 있는 일이었다.
p137


"마흔이 되면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어울리는 얼굴을 가지게 된다.“
조지 오웰은 이렇게 썼다.
p141


인간은 ‘사회적 동물’ 이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오직 인간만이 연체동물이나 지렁이와는 달리 자신을 규정하고 자의식을 얻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뜻이다.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어디에서 끝나고 다른 사람들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지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제대로 된 느낌에 이를 수 없다. “혼자서는 절대로 성격이 형성되지 않는다.” 스탕달의 말이다. 성격의 기원은 자신에 대한 다fms 사람들의 반응에 있다는 의미이다. “나”라는 것은 완전한 구조가 아니기 때문에, 그 유동성에 남들이 윤곽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나에게는 내 역사를 짊어지고 나가는 것을 도와줄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 나 자신만큼 나를 잘 아는 사람, 때로는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
p161


의미론적으로 볼 때 사랑과 관심이 거의 맞바꾸어 쓸 수 있는 말이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나는 나비를 사랑한다”는 말의 의미는 “나는 나비에 관심이 많다”는 말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깊은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며, 그 관심에 의해서 그들이 무엇을 하고 무슨 말을 하는지 일깨워준다는 것이다.
p162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안다고 할 때 우리는 부분을 통해서 전체를 해석할 수밖에 없다. 누군가를 완전히 알려면, 이론적으로는 그 사람과 함께, 그 사람 안에서 평생의 모든 시간을 보내야 한다. 이렇게 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실마리를 가지고 전체를 엮어내는 탐정일 수밖에 없고 분석가[심리탐정]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늘 너무 늦게, 이미 범죄나 주요한 행동이 저질러진 뒤에 현장에 도착한다. 따라서 침전물로부터 과거를 천천히 재구성할 수밖에 없다. 마치 깨어난 뒤에 꿈을 분석하듯이.
p166


나에게는 이름이 있다. 그 이름은 평생 나에게 머문다. 여섯 살 때 내 사진에서 보게 되는 “나”와 앞으로 예순 살이 되었을 때 내사진에서 보게 될 “나”는 똑같은 문자들의 틀 안에 들어가지만, 시간은 나를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바꾸어놓을 것이다. 나는 나무를 나무라고 부르지만, 1년 내내 나무는 변하고 있다. 그렇다고 철이 바뀔 때마다 나무를 달리 부르는 것은 너무 혼란스러울 것이다. 그래서 언어는 계속성에 안주하며, 어느 철에는 잎이 무성하지만 어느 철에는 잎이 없다는 사실은 잊어버린다.
p178


그러나 절대로 오지 않는 미래를 갈망하는 것은 지나가버린 시간을 갈망하는 것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과거는 단지 그것이 과거이기 때문에 더 나아 보이는 경우가 많지 않을까?
p199


헌신을 한 판의 달걀이라고 본다면, 현재에 헌신하는 것은 달걀을 과거와 미래의 바구니에 나누어 담지 않고 모두 현재의 바구니에 담는 위험이다. 이 비유를 사랑으로 옮긴다면, 내가 클로이와 행복하다는 사실을 마침내 인정하는 것은 위험에도 불구하고 내 모든 달걀이 그녀의 바구니 안에 확실하게 들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p201


“인간의 모든 불행은 자기 방에 혼자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생긴다.” 파스칼의 말이다.
p203


상대방에게 무엇 때문에 나를 사랑하게 되었느냐고 묻지 않는 것은 예의에 속한다. 개인적인 바람을 이야기하자면, 어떤 면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사실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다. 속성이나 특질을 넘어선 존재론적 지위 때문에 사랑을 받는 것이다. 사랑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은 부유함 속에서 사는 사람들처럼 애정/소유를 얻고 유지하는 수단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는 금기를 지켜야 한다. 사랑에서건 돈에서건 오직 빈곤만이 체제에 의문을 품게 한다. 그래서 아마 연인들은 위대한 혁명가가 되지 못하는 것 같다.
p209


내가 너한테 약해 보여도 될 만큼 나를 사랑하니?
모두가 힘을 사랑한다. 하지만 너는 내 약한 것 때문에 나를 사랑하니? 이것이 진짜 시험이다. 너는 내가 잃어버릴 수도 있는 모든 것을 벗어버린 나를 사랑하는가? 내가 영원히 가지고 있을 것들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가?
p211


한편에는 여자를 천사와 동일시하는 남자가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사랑을 병과 동일시하는 천사가 있었다.
p218


일단 한쪽이 관심을 일기 시작하면, 다른 한쪽에서 그 과정을 막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는 것 같다. 구애와 마찬가지로 떠나는 일도 과묵이라는 담요 밑에서 고통을 겪는다. 관계의 중심에는 말로 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나는 너를 원한다 / 나는 너를 원하지 않는다 - 양쪽 메시지 모두 그것이 언어로 분명하게 표현되려면 오랜 세월이 걸린다. 의사소통 체계 자체가 붕괴되었다는 사실은 논의하기조차 힘들다. 그것은 양쪽 모두 그것을 복원하고 싶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연인은 정망적인 상황에 빠진다. 적법절차에 따라서 가동되던 대화의 매력과 유혹은 사라져버리고 이제 대화는 짜증만 일으킬 뿐이다. 연인이 적법하게[다정하게] 행동해도 아이러니가 담긴 행동이 되어버린다. 사랑을 소생시키려다가 오히려 질식시키고 마는 행동이다. 그래서 이 시점에서 연인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짝에게 다시 구애를 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게 되고, 그 결과 낭만적 테러리즘에 의존하게 된다. 이것은 대책 없는 상황의 산물이다.
테러리스트가 된 연인은 현실적으로 자신의 사랑이 보답 받을 길이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연애에서나 정치에서나] 어떤 일이 쓸모없다고 해서 반드시 그 일을 안 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꼭 누가 들어주지 않는다고 해도 말하는 것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에 하는 말도 있는 법이다.
p221-222


낙타는 시간을 따라 걸어가면서 짐이 점점 더 가벼워졌다. 계속 등에 실린 기억과 사진들을 흔들어 사막에 떨어뜨렸고, 바람이 그것들을 모래 속에 묻어버렸다. 낙타는 점점 더 가벼워져서 나중에는 그 독특한 모습으로 뛰어가기까지 했다. 그러다 어느 날 마침내 현재라고 부르는 조그만 오아시스에서 이 지친 짐승은 나의 나머지를 따라잡게 되었다.
p2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