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의 뒷면에 수은을 입히면 거울이 된다. 유리는 빛을 투과하고, 거울은 빛을 반사한다. 빛이 지나갈 수 없다는 점 때문에 거울은 피사체를 그대로 볼 수 있게 해준다. 거울을 보는 눈. 빛이 지나다닐 수 있기 때문에 다른 그 무엇도 자유롭게 지나다닐 수 있어서 유리가 경계를 허물 수 있는 물체가 되었다면, 거울은 빛조차 지나다닐 수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을 반사하는 물체가 되었다. 유리는 우리가 무언가를 투시하게 한다면, 거울은 우리가 무언가를 반영하게 한다. 반사하고 반영한다는 점 때문에 거울을 오래 들여다보는 이는 거울의 이면까지 들여다보게 된다. 정확한 풍경을 보여주기 때문에 풍경 안으로 걸어 들어갈 수가 있다. 유리를 통하여 우리는 빛의 길을 따라 ‘갈’ 수 있다면, 거울을 통하여 우리는 빛의 길을 따라 ‘올’수 있게 된다.
p22
거울은 배면이 수은으로 닫혀 있기 때문에 풍경 밖으로 걸어가기보다는 풍경 안에 침잠하게 되며, 유리는 아무것으로도 배면을 닫아놓지 않기 때문에 풍경 밖으로 걸어가게 한다. 마음을 확산하는 것이 유리라면, 마음을 수렴하는 것은 거울인 셈이다.
p23
밥은 사람의 육체에게 주는 음식이라면, 차는 사람의 마음에게 주는 음식이다. 밥보다 차를 더 즐기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마음이 발달한 사람이다. 밥 한 그릇이 육체에게 에너지를 준다면 차 한 잔은 마음에게 에너지를 준다. 일하는 막간에 차 한 잔을 마시는 휴식의 시간은 마음을 쉬게 하고 그럼으로써 육체를 돌보게 해준다.
p24
담배는 건강에 해롭다. 백해무익하다는 담배이지만, 그것은 육체의 관점에서만 보았을 때 가능한 이야기이고, 애연가들에게 담배는 정신 건강에 이롭다. 몸보다 정신의 건강을 우위에 두는 사람이라면 담배가 몸을 해치는 것을 알고도 담배를 계속 손에 들게 될 것이다. 한숨과도 같은 담배 한 모금을 내뿜으며 사람들은 마음을 환기하고 쇄신할 수 있다. 덩 샤오핑에게 사람들이 장수하는 비결을 물었을 때, 그는 ‘끽연’이 그 비결이라고 말했다 한다. 만끽한다는 것만큼 지혜로운 건강법은 없다.
뜨거운 물에 차 알갱이가 풀려나가고, 담배 한 모금의 연기가 허공에 풀려나간다. 그 풀려나가는 실체를 바라보며 사람들은 마음의 매듭을 푼다. 찻물을 끓일 때에도 담배를 피워 물 때에도 불이 필요하다. 차와 담배는 온도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커피를 볶을 때에도 녹차 잎을 말릴 때에도 열기가 필요하고, 담배를 피울 때에도 점화가 필요하듯이, 냉정해지는 것에도 온기 있던 한때가 전제된다. 차 한 잔과 담배 한 모금을 음미할 때처럼.
p25
우리는 이따금 사랑하는 사람에게 차가운 거울이 되어 마주할 때가있다. 차가운 거울과 거울의 마주함은 끝없는 복제와 복제를 낳아 무한대의 영역 속에 서로를 가두게 된다. 그렇게 이따금 사랑하는 사람을 골똘히 마주하다 마침내 감옥에 가두고야 만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사랑하는 사람과 뜨거운 차 한 잔을 원한다. 찻잎이나 차 열매가 물기 하나 없이 건조된 후에야 뜨거운 물과 조우할 수 있듯이, 사람도 그와 같다, 충분히 건조되었을 때에야 온몸으로 응축하고 있던 향기를 더 향기롭게 퍼뜨리는 뜨거운 차 한 잔처럼, 사람의 마음과 마음이 마주한 시간도 그와 같다. 향기롭게 발산하기 위하여 나에겐 언제나 따뜻한 물과 같은 당신이 필요하다.
p26
몸의 귀도 한쪽만 쓰면, 소리의 방향에 둔감해진다고 한다. 마음도 그렇다. 방향을 잃는다. 나를 부르는 소리가 어디서 들려오는지 잘 듣지 못하고 헤맨다. 내 마음은 언제나 귀를 잘 닦고 양쪽을 함께 쓰고 싶다. 나를 부르는 소리를 잘 듣고, 어디서 들려오는지 잘 알고, 헤매지 않고 가 닿고 싶다. 마음이 가는 방향을 두 개의 귀의 균형 속에서 결정할 수만 있다면, 방황하고 소모하는 시간들을 아주 조금은 줄일 수 있으리라.
p30
전등불을 갑자기 끄면 사방은 칠흑이지만, 이내 그곳에도 빛이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사물들의 실루엣이 보이다가 사물들이 온전히 보이기 시작한다. 조금의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마음이 칠흑일 때, 차라리 마음의 눈을 감고, 조금의 시간이 흐르길 차분하게 기다린다면, 그리곤 점자책을 읽듯 손끝으로 따라간다면, 이내 사물을 읽을 수 있고,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밝음 속에서 읽을 때보다 더 선명하게, 온 마음으로 잘 읽힌다.
p31
마음에도 망막이 있다. 망막이 물체를 뒤집어서 받아들이듯, 나도 당신의 표현을 뒤집어보곤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표현 너머를 볼 수 없어서, 빛이 과하면 동공이 작아지고 빛이 모자라면 동공이 커지듯이, 빛을 한 아름 품고 달려오는 당신 앞에서 나는 언제나 마음이 무한대로 부풀고, 그렇지 않을 때는 점처럼 작아지곤 한다.
p32
혓바닥을 이루는 촘촘한 미뢰 들이 맛을 감지해내듯이 나는 당신을 마음의 융단으로써 맛본다. 혀가 앞부분으로는 짠맛을, 뒷부분으로는 쓴맛을, 옆 부분으로는 신맛을 감지하고 전체로는 단맛을 감지하듯이, 당신은 내 혀 위에서 희로애락의 모든 맛을 낸다. 마음의 정면으로는 당신은 항상 짜지만, 마음의 뒤켠으로는 쓰디쓰지만, 당신 때문에 마음의 옆구리는 한없이 시지만, 전체를 부감할 때 당신은 달다.
p36
감정은 세세하시 때문에 명명될 수 있지만, 기분과 느낌은 명명이 불가능하다. 감정이 한 칸의 방이라면, 기분은 한 채의 깁이며, 느낌은 한 도시 전체라 할 수 있다. 감정은 반응하며, 기분은 그 반응들을 결합하며, 느낌은 그 기분들을 부감한다.
감정은 오로지 육체의 하소연만을 듣는다. 그래서 훨씬 변덕이 심할 수밖에 없다. 기분은 감정을 최대한 반영하기 위해 감정의 눈치를 살핀다. 그래서 감정을 반영한 기분은 이내 감정이 다른 지점으로 옮겨갔을 때에는 ‘이상한 기준’에 휩싸인다. 이런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한, 이것과 저것이 섞인 듯한 기분이 든다. 감정은 이미 다른 곳으로 옮겨갔기에, 기분은 잠시 지체된 채로 어리둥절해한다.
느낌은 이러한 기분을 통째로 부감한, 비교적 논리적인 서계다. 감정과 기분만으로 우리는 그 어떤 선택도 할 자신이 없지만, 느낌으로는 선택을 하기도 한다. 모든 감성적인 판단력을 총지휘하는 사령관인 셈이다.
p45
소중한 존재는 그 자체가 궁극이지만, 중요한 존재는 궁극에 도달하기 위한 방편이다. 돈은 전혀 소중하지 않은 채 가장 중요한 자리에 놓여있다. 너무 중요한 나머지 소중하다는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어느샌가 소중했던 당신이 가장 중요한 당신으로 변해가고 있다. 조금씩 덩 소중해지면서 아주 많이 중요해지고 있다.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 소중하기 때문에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은 게 당신과 나의 소망이었다. 이 세상 애인들은 서로에게 소중하지만 아직은 중요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소중함이 사라지고 나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있다. 이 세상 부부들은 서로를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이미 소중하게 여가는 마음은 어디론가 숨어들고 있다. 중요한 사람으로서의 자기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려는 의욕이 있는 한, 버려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각자의 믿음만이 고개를 내민다. 각자의 자기 역할에 대한 믿음을 서로의 존재에 대한 신뢰라고 착각하면서 관계를 유지된다. 우리는 중요한 것들의 하중 때문에 소중한 것들을 잃는 경우가 많다. 중요한 약속과 소중한 약속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며 중요한 약속에 몸을 기울이고 만다.
p57-58
행복은 스며들지만, 기쁨은 달려든다. 행복은 자잘한 알갱이들로 차곡차곡 채워진 상태이지만, 기쁨은 커다란 알갱이들로 후두둑 채워진 상태다. 기쁨은 전염성이 강하지만, 행복은 전염되기 힘들다. 남의 기쁨에는 쉽게 동조되지만, 남의 행복에는 그렇지가 않다. 약간의 질투와 약간의 모호성, 그것이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남에게서 전염된 기쁨은 그러나 오래가지도 않고 자기 것이 되지도 않는다. 금세 잊는다. 그렇지만, 남에게서 전염된 행복은 오래가기도 하거니와 자기 것이 된다. 그만큼 느리고 꼼꼼하게 진행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스스로 얻은 기쁨과 행복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그렇지만, 빠르고 간단한 것들은 느리고 꼼꼼한 것만 못하다.
p59
소망은 지니고 태어나고, 희망은 살면서 지니게 된다. 소망도 희망도 우리의 힘만으론 이루기 어렵다. 희망은 행운이 필요하고 소망은 신의 가호가 필요하다. 때로 소망은 조금씩 옷을 젖게 하는 가랑비처럼 소리 없이 우리 곁에 와 있곤 한다. 그렇기 때문에 소망은 이루어냈다는 자각이 크지 못하다. 다만, 다른 소망을 품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했을 때 예전의 소망이 벌써 이루어져 있음을 알아챈다. 그에 비하면, 희망은 이루어졌을 때의 자각이 분명할뿐더러 희열을 가져오기도 한다. 희열이 가라앉은 후, 내내 품어왔던 희망을 이루고 난 후, 이제는 어떤 희망으로 살아가야 할지를 모른다. 희망은 그래서 독한 허무를 자식처럼 품고 우리에게 오는 것이다.
p60
처참함은 너덜너덜해진 남루함이며, 처절함은 더 이상 갈 데가 없는 괴로움이며, 처연함은 그 두 가지를 받아들이고 승인했을 때의 상태다. 처참함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정황이라면, 처절함은 차마 손 댈 수 없는 정황이며, 처연함은 눈뜨고 볼 수도 있고, 손을 댈 수도 있지만, 눈길도 손길도 효력이 없으리란 걸 알고 있는 상태다. 처참함은 입맛을 잃어 물조차 삼킬 수 없는 지경이라면, 처절함은 밥솥을 옆구리에 끼고 전투적으로 숟가락질을 하게 만드는 지경이며, 처연함은 한 그릇 밥 앞에서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경지이다. 누군가가 우리를 처참하게 했을 때, 우리는 행동할 게 없어지고 말이 쌓인다. 하지만, 누군가 우리를 처절하게 했을 때, 우리는 말이 없어지고 대신 처신할 것만 오롯이 남는다. 그 누구 때문에 우리가 처연해진다면, 그때는 말도 필요 없고 행동도 필요치 않은 상황이다. 처참함 때문에 우리는 죽고 싶지만, 처절함 때문에 우리는 이 악물고 살고 싶어진다. 처연함은 삶과 죽음이 오버랩 되어서 죽음처럼 살고, 삶처럼 죽게 한다.
p63-64
동정은 이질감을 은연중에 과시한다면 연민은 동질감을 사무치게 형상화한다. 물에 빠진 사람을 동정한다면 우리는 119구조대를 부를 테지만, 물에 빠진 사람을 연민한다면 우리는 팔을 뻗어 손을 내밀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지독한 동정은 오직 사랑 때문에, 사랑의 내용을 망치는 쪽으로 나아간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지독한 연민은 사랑의 형식을 망가뜨릴지라도 내용은 채우려는 쪽으로 나아간다.
p66
우리가 흘리는 눈물에는 세균을 죽이는 라이소자임이라는 성분과 함께, 인간의 감정 농도에 따라 분비량이 달라지는 나트륨도 들어 있다. 하품을 하거나 양파를 썰 때 나오는 눈물에는 없고, 슬프거나 기쁠 때 흘리는 눈물에는 있는, 더구나 분노 때문에 흘리는 경우에는 가장 많은 성분이 나트륨이다.
p75
슬픔은 모든 눈물의 속옷과도 같다. 무슨 연유로 울든 간에, 그 가장 안쪽에는 속옷과도 같은 슬픔이 배어 있다.
p78
‘외롭다‘라는 말에 비하면, ’쓸쓸함‘은 마음의 안쪽보다는 마음 밖의 정경에 더 치우쳐 있다. 정확하게는, 마음과 마음 밖 정경의 관계에 대한 반응이다. 외로움은 주변을 응시한다면, 쓸쓸함은 주변을 둘러본다. 마음을 둘러싼 정경을 둘러보고는, 그 낮은 온도에 영향을 받아서 마음의 온도가 내려가는 게 바로 ’쓸쓸함’이다
p92
외로움은 약 없이도 회복되지만(정확히 말하자면, 회복되지 않더라도 약 없이 살아지지만), 권태로울 때는 최소한, 외로움이란 외투로 갈아입어야 마음을 회복할 기미를 찾을 수 있게 된다.
p93
심심하다.. 이것은 가장 천진한 상태의 외로움이다. 어린아이들은 외롭고 쓸쓸하고 권태롭고 허전하고 공허한 상태를 ‘심심하다’라고 받아들인다.
p95
상실감 같은 것, 무엇인가 있다가 없어진 상태, 혹은 있기를 바라는 그것이 부재하는 것. 그래서 허전함에는 무언가를 놓아버려 축 처진 팔이, 팔 끝엔 잡았던 느낌을 오롯이 기억하고 있는 손이 달려 있다.
p97
공허는 의미 있게 생각한 것들이 움킨 손 사이로 자꾸만 빠져 나가는 모래와 같은 상태라면, 결핍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 의미를 자꾸 흘리곤 하는 철 지난 외투의 구멍 난 주머니와 같다.
p102
관계에 대해 눈을 뜨기 이전, 아주아주 어렸을 적에는, 주저 없이 누군가에게 다가갔던 기억이 있다. 좋으면 그냥 다가갔다. 아주 어린 날의 일이다. 산책길에 만난 반가운 강아지라든가, 만져보고 싶은 물건을 향해서 주저 없었다. 손을 미리 쭈욱 뻗고 입을 벌려 웃으며 다가갔다.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럴 때, 어떤 거부를 당했더라도 그 상처가 깊지 않았는지, 상처에 관해선 기억조차 없다. 기대하고 설레고 그래서 마음먹고 다가간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실망도 없었을 테고, 실망이 있었을지라도 짧았을 것이다. 다가갈 또 다른 것들이 세상에는 봄날이 꽃들처럼 만발했을 시절이었으므로.
언젠가부턴 다가가지 않고 기다리게 됐다. 내가 실망을 하게 될까봐 다가가지 못했던 건 아니다. 다가가기엔 수줍음이 너무 컸다. 다만 수줍기 때문에 어찌할 줄을 몰랐다. 마냥 기다리면서, 하염없이 해가 뜨고 별이 지는 풍경들 아래에서 그 풍경을 고스란히 앓았다. 기다리고 있어서 초라하거나 힘이 들거나 하진 않았다. 기다린다는 그 자체에 대해서 그냥 그대로 실컷 앓았다. 이렇게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누군가가 눈치 챌까 봐 오히려 걱정했다. 들키는 게 두려워서가 아니라, 들킨다는 게 더 쑥스러웠기에 그랬다. 소녀 시절은 그렇게 보냈다.
열정이 무엇인지, 정념이 무엇인지를 처음 알게 된 때에, 그러니까 관계에 대해 눈을 처음 뜨게 된 그때에는, 언제나 ‘다가갈까, 기다릴까’를 고민하게 됐다. 고민에 빠져서 내가 무엇을 향해 다가가려고 하는지 마저 잠깐씩 잊을 정도였다. 그때는 고민이라는 말보다는 어쩌면 계산이라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관계에 대해, 꼭 원하던 것을 얻고 싶기에, 조심스러워서 하던 갈등이었기 때문이다. 기다리기만 하다가는 꼭 잃을 것만 같아서 다가갔고, 다갔다가는 꼭 상처를 입을 것만 같아서 기다렸다. 서성이느라 모든 날들이 피곤했다. 그 와중에서 행복에 빠지기도 했고 불행에 빠지기도 했다. 행복이거나 불행이거나 간에, 그 어디든 빠져서 허우적대던 시절이었다.
이제는 다가갈까 기다릴까를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그냥 지켜보게 됐다. 이것은 살아온 날들이 만든 현명한 태도이지만은 않다. 정념의 불꽃을 다스렸다는 절제 또한 아니다. 소중한 것들이 내 품에 들어왔던 기억, 그 기억에 대해 좋은 추억만을 갖고 있진 않기에, 거리를 두고 지켜볼 수밖에는, 일종의 비애인 셈이다. 나를 충족시키는 경우보다 결핍 그대로가 더 나은 경우를 경험해보았다. 그것은 나만을 생각했던 시절들을 지나와서 관계 자체를 배려하게 됐다는 뜻도 있지만, 그 배려에는 쓰디쓴 상처의 흔적들이 배어 있다. 지켜보고 있음이 꽤 오랫동안 변치 않는 은은한 기쁨을 선사해줄 거라는 패배 비슷한 믿음도 또한 있다. 그러므로 바라던 것이 나에게 도래하지 않아도 잘 살 수 있게 되었다. 바라던 것들이 줄 허망함을 더 이상 겪고 싶지 않은 ‘외면‘이란 감정의 부축을 받으며
p109-111
착하고 순하고 정직한 사람에게 우리는 결코 ‘매력 있다’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그럴 경우 ‘미덥다’는 표현을 더 쓰게 된다. 한 존재가 가진 결핍과 과잉, 모자라거나 지나친 성향들, 그것에 대하여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환호할 때, 이 낱말은 제법 용이하게 쓰이곤 한다. 누군가의 모자란 점가 지나친 점을 곱게 보아줄 때, 매력은 날개를 펼친다. 매력 있는 존재만을 쫒는 사람은 자신이 매력 있어 하는 대상과의 관계에 대해 늘 불만족스럽다. 게을러서 아름다운 사람은 관계도 게으르며, 섬세해서 아름다운 사람은 상대방의 섬세하지 못함을 이따금 책망한다. 그렇기 때문에 매력 덩어리들은 언제나 상대방을 허하게 하거나 피곤하게 한다. 그렇지 않을 때도 있긴 있다. 결핍을 결핍으로 똑바로 인식하고, 과잉을 과잉으로 똑바로 인지하는 때, 그때란 대개 관계의 내리막길을 걸어내려 갈 때다. 간혹, 매력 때문에 생겨난 호감의 양 날개를 뚝뚝 분지르며 걸어내려 가기도 한다.
p126
마음에서 무언가 사라지길 원해서 우리는 말을 하는 걸까, 아니면, 무언가 정말 잘 기억하기 위해서 말을 해두는 걸까, 아니면, 누군가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말을 건네는 걸까. 무언가 사라지길 원해서 하는 말은 ‘발산’이고, 잘 기억하기 위해서 하는 말은 ‘언약’이며, 마음을 얻기 위해서 하는 말은 ‘애걸’이다.
p141
실망과 공포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을 고안해냈다. 불행에 빠지지 않을 수위로 자신의 기억들을 재편집한다거나, 적절한 때에 다가와주는 망각에 의존한다거나, 미리 의심하고 미리 이별하고 미리 포기하기도 한다. 혹은 상상함으로써 현실 너머로 건너가기조차 한다. 이 모든 행위들은 사실과는 도무지 거리가 먼 거짓말의 일부인 셈이다.
p143
비밀은, 사실은 부담스럽다. 비밀을 들어주려면 감정이입보다는 감정투입을 해야 할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비밀을 들어주는 사람으로 간택되었다고 우리는 기뻐할 수 있겠지만, 인간의 가치를 추구하던 길목에서 그가 나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가치를 출현시키기 위해 애쓰던 길목에서 내가 우연히 발견된 것이다. 비밀은 우리를 따뜻하게 결속시켜주지만, 우리를 불안에 빠뜨리기도 한다. 비밀은 단열은 잘되고 방음은 잘 되지 않는 여관방 같기 때문이다.
p156
자신의 욕망을 정신적으로 전환시키려는 노력, 즉 숭고한 어떤 논리에 아전인수하려는 노력 같은 것이, 때로 종교에 귀의하는 수도사처럼 정갈한 사랑의 행로를 가게 하기도 하지만, 그 행로도 무상한 시간 앞에서는, 책갈피 속 네잎클로버거나 포르말린에 담가둔 심장에 지나지 않는다. 언제나 사랑은 찰나 속에서만 존재하며, 그 찰나의 짜릿한 합일 이후는 길고 긴 이별을 변주하는 몸짓에 불과하다. 너무도 길고 긴 이별이지만, 그 과정이 인내할 만한 것은(어쩌면 달콤하기까지 한 것은), 정든 사람의 ‘익숙한 손’과 ‘익숙한 채취’라는 향정신성 감각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죽음처럼 밀려드는 피곤을 감내하지 않으면, 사랑의 묘약은 사랑의 독이 되며, 독이 번지는 영혼은 지옥을 온몸으로 형상화하기 시작한다.
p169
이기심이 원하는 것이 많아 관계에서 불만을 축적해가는 동안에, 자기애는 주고 싶은 것이 많아 관계에서 미안함을 축적해간다. 사랑에 빠졌을 때에, 이기심은 비로소 자기를 사랑해줄 사람을 얻은 것이지만, 자기애는 자기가 사랑할 사람을 한 사람 더 얻은 것이 된다. 이기심은 스스로가 언제나 약자처럼 느껴져서 자신이 받은 상처만을 되뇌며 억울해하고 있다면, 자기애는 스스로가 언제나 강자처럼 착각돼서 자신이 줬을지도 모를 상처만을 상상하며 자책하고 있다.
p190
자존심은 차곡차곡 받은 상처들을, 자존감은 차곡차곡 받은 애정들을 밑천으로 한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를 지켜내는 것이 자존심이 되고 누군가가 불어넣어주는 것이 자존감이 된다. 자존심은 누군가 할퀴려 들며 발톱을 드러낼 때에 가장 맹렬히 맞서고, 자존감은 사나운 발톱을 뒤로 두고 집으로 돌아와서 길고 긴 일기를 쓰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나쁜 결과 앞에서, 자존심은 어차피 모든 걸 예감했던 듯 독해지며, 자존감은 모두들 어디로 갔을까 하며 세상이 독하다는 사실을 난생처음 깨닫고 만다.
자존심이 강한 자는 이기심이라는 커다란 호주머니를 달게 되고, 자존감이 강한 자는 자기애라는 목도리를 목에 감게 된다. 호주머니는 무엇을 채워 넣으려는 속성을, 목도리는 온기를 주고자 하는 속성을 예비한다. 자존심의 결말은 신문지라도 덮고 추운 겨울밤을 견뎌야 하는 노숙의 운명이라면, 자존감의 결말은 행복한 왕자의 동상과도 같이 어깨에 시린 눈발이 쌓여가도 허리를 펴고 서 있느라 다리에 쥐가 날 운명이다.
그러나 이 진짜와 가짜는 서로의 내왕을 허가한다. 난관을 이겨내기 위하여 자가발전 플래시를 손에 들어, 탐정이 되거나 탐사단이 되는 일에 협력하기도 한다. 게다가 그렇고 그런, 거기서 거기인 것으로 만들기 위한 위장술을 쓰기도 하지만, 같은 먹빛임에도 사약과 보약이 재료부터 다르고 용도 또한 다른 것과 비슷한 이치로, 코를 킁킁거려 지나치게 보약만을 감별하려 해봤자 구별되지 않을뿐더러, 큰일이 벌어지지 않는 한 이 둘은 모두 무고하다.
p193-194
순진한 사람은 속기 쉽지만 순수한 사람은 속지 않는다. 순진한 사람은 조종하기 쉽지만 순수한 사람은 조종할 수 없다.
p199
솔직한 사람은 사랑한다는 말과 미워 한다는 말을 번복과 반복으로 발설한다. 반면, 정직한 사람은 사랑하는 마음과 미워하는 마음을 정리하여, 사랑하지만 미워한다거나, 밉기도 하지만 사랑하고 있다고 말할 줄 안다. 자기감정에만 충실할 때에는, 좋을 때에 사랑한다고 말했다가 싫을 때에 미워한다고 말해버리지만, 누군가를 배려하고 싶을 때에는, 사랑하되 미워한다거나 밉지만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즉, 솔직함은 자기감정에 충실한 것이고, 정직함은 남을 배려하려는 것이다. 솔직함은 전부를 다 풀어 헤친다. 이율배반적인 것들과 대책 없는 것들과 막무가내인 것들까지 그냥 다 뱉어낸다. 솔직함은 가리지 않는다. 그리고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의도하지 않는다, 반면, 정직함은 전부를 다 풀어 헤치지 않는다.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율배반적인 것들 중에서 일관성을 찾아 정리하고, 대책 없는 것들의 대책을 궁리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직함은 한층 더 정리되어 있으나 고집스럽고 편집적이다. 정직함은 가리는 것이 있다. 의도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믿음을 주겠다는 신념 아래에서 의도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정직함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 더 믿게 되는 것은 정직함이지만, 진실로 더 믿게 되는 것은 솔직함이다. 또한 솔직한 행동은, 하는 사람은 편하고 대하는 사람은 불편할 때가 많다. 정직한 행동은, 하는 사람은 조금 불편해도 대하는 사람은 편하다. 나를 편하게 하려는 것이냐 남을 편하게 하려는 것이냐에 따라 솔직함과 정직함은 쓰임새를 달리 한다. 그래서 솔직함은 탈제도적이지만, 정직함은 제도 안에 들어와 있게 된다. 그래서 ‘솔직한 공무원’ 이라는 것은 별 의미가 없지만, ‘정직한 공무원’이라는 것은 의미 있게 쓰인다.
p200-201
그것이 가짜임이 밝혀져 본질이 드러날 때 오히려 정갈해진다. 위선은 또 다른 위선만으로도 살아낼 수 있지만, 위악은 본질이 알려지면 멈출 수밖에 없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의 위선은 나의 식은 사랑과 당신의 식지 않은 사랑의 간격을 메우기 위하여 필요하고,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의 위악은 나의 식지 않은 사랑과 당신의 식은 사랑을 견뎌내기 위하여 필요하다.
p206
너와 내가 함께 좋아할 수 있는 유일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이어폰을 내 귀에 꽂아줘.
p215
‘정든다’는 말처럼 단단한 지옥은 없다. 난공불락의 요새와 같다. 정들이기 좋아하는 우리는 날마다 감옥을 짓고, 무덤을 만든다. 감옥과도 같은 파리한 인생이 싫어서, 우리들은 무언가에 정을 주고 물을 주고 싹을 기다리고 꽃이 피기를, 열매가 맺기를 기다리곤 한다. 기다리는 것이 오기는 한다. 하지만, 왔는가 싶으면 이내 스쳐 지나가 사라져버린다. 기다리던 것들이란, 언제나. 그 반복 속에서 우리가 갇혀 있는 정든 지옥을 바라보며 우리는 안정감을 느끼곤 한다. 어쩌면 안정감을 느끼기 위해서 애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것이 불안하기 짝이 없는 상태임을 안다. 불안의 얼굴을 힘껏 외면하면서, 안정감이라는 가면을 씌워 놓으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이내 본색을 드러내고야 마는 솔직하디 솔직한 불안이란 맨 얼굴.
p233
이별이 더러울 수 있는 것은 청산되지 않은 찌꺼기 때문이다. 합의하지 않고 행하는 일방적인 행동과 보폭을 맞추지 않은 눈치 없는 걸음은, 이별을 행하려고 할 때, 언제나 더러운 미련을 남긴다. 사랑의 시작에만 합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끝에도 합의가 있다. 서로의 마음속에 계약서를 작성해 넣어두고, 그리고 각자 도장을 찍고 밀봉하는 것이 시작은 물론 끝에도 있다. 그 절차가 없을 때에 미련이 남고, 미련이 남은 자는 미련을 남긴 자가 계약서를 쓰레기통에 버릴 때, 함께 버려진다.
p235
사랑의 순간에는 생의 하중을 가볍게 하며 생을 상쾌하게 지나갈 수 있게 했다면, 이별 이후, 생의 하중을 있는 그대로 다 견뎌내야 한다. 이별한 후, 존재는 어디든 있으나, 아무 대도 없게 된다.
p242
모두가 잠들어 있음을 알기에, 깨어 있는 나와 너는 가느다란 전화선을 타고 유일하게 닿아 있다. 기억할 수도 없고 기억하기에는 맥락조차 없는 희미한 대화들을 오래도록 나눈 후에 전화를 끊으면, 나는 비로소 혼자가 된다.
p247
이 짙은 친숙함은 처음에는 정체 모를 비참함으로 와 닿다가, 곧이어 정체가 분명한 자책으로 현현된다. 이 자책은 너무나 자주 만나왔기 때문에 친숙하기 짝이 없다. 하여, 자책의 서론이 시작된다. 어젯밤의 모든 행위들은 실수로 여겨지고, 어젯밤의 모든 가학적인 말들은 자학이 되고, 어젯밤 오갔던 모든 진실들은 위선이 되며, 어젯밤의 모든 진리들은 죄책감으로 둔갑하며, 어젯밤 일기장에 적어둔 도든 문장들은 일곱 살짜리의 유치한 엄살이 된다. 그 모든 것들은 최상의 위악으로 둔갑하여 여행 가방처럼 단단하게 완성되고, 드디어 자책의 대장정은 시작되는 것이다.
p255-256
“술 한 잔 할래?” 하는 친구의 전화가 없었을지라도, 쓸쓸히 집에 들어가고 나면, 저도 모르게 달각대며 라면을 끓여 냄비째 모시고 앉아, 냉장고에서 꺼내온 소주병의 뚜껑을 딴다. 나 아니면 누가 나를 달래랴 싶은 마음으로 시작된 혼자 술 마시기는, 우울을 끝까지 확장시킨 다음에, 우울이라는 손님을 받아들이고 함께 살자며 방을 하나 내어줄 때까지 계속된다. 그러나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는 않아서, 헛일 했다는 공허함으로 뱃속이 허하게 채워진다. 고통으로부터 도망치는 지름길을 알려주면 “술, 너마저…….” 하는 배신감. 이 기분은 최후까지 믿었던 자에게 당하는 배신과도 같이 내 자신을 오롯하게 만든다.
다음날 아침, 세상은 마치 출감한 자 앞에 누군가가 내민 두부 한 모처럼 반듯하고 깨끗하다. 따끈따끈한 김이 올라오는 듯도 하다. 그리고 나는 그 두부 속으로 걸어 들어가며 갱생의 아침을 맞는다.
p259-260
그는 열 번 중에 딱 한 번의 기회를 아주 잘 포착하는 귀신이다. 아홉 번은 무심하다가 정말 필요한 순간에 다가와 위로 한마디를 툭 던진다. 대개 '거봐'라고 시작되는 걱정 한마디다. '거봐'라는 한마디 때문에, 무심한 줄 알았던 그가 꽤 오랫동안 내 문제를 속으로 걱정해왔겠구나 감동하게 한다. 그는 그 어떤 말들도 효력이 없다고 믿는 편이어서, 말을 아껴왔다가 슈퍼맨처럼 가장 중요한 순간에 나타나준다.
p263
남들이 오늘은 무슨 옷을 입을지, 오늘은 어떤 음악을 들을지, 어느 식당이 음식을 맛있게 하는지를 생각해두는 순간에 그는, 우주는 어떤 방식으로 팽창하는지, 지구의 종말은 어떤 형태로 닥칠지, 세계 인류의 언어는 몇 종이나 되는지, 다음 차례의 빙하기는 몇 년도에 시작될지를 생각해두느라 바쁘다. 호방함은 간혹 도를 넘어서, 당구를 칠 때에도 옆 당구대로 공을 훌쩍 넘겨버리고는 공이 사라지는 묘기가 가능해졌다고 기뻐한다. 그에겐 당구대는 물론이고 이 우주가 너무 좁다.
p264
그는 오직 자신의 일에만 열중한다. 지구상에 희망을 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 돌아가는 것을 통 알지 못해서, 지구가 멸망할 때도 하던 대로 사과나무를 심을 것이다.
p265
그러나 우리는, 열정은 식게 마련이고 탕자는 돌아오기 마련이며, 쾌락은 싫증나기 마련이고 정조는 유리잔처럼 깨어지기 직전가지만 쓸모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동질감의 다음 정류장은 이질감이며, 공생의 다음 정차 역은 기생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아무리 지워도 밀물처럼 밀려오는 자기애가 규범을 이탈하려는 유혹을 끝끝내 이기지 못한다는 것도 알게 됐다.
봄날의 경이에 예민해지는 자, ‘그는 사랑을 아는 자다’라고 조심스레 적어본다. … 우리는 저마다 꽃을 갖고 있다. 꽃은 부드럽게 떨리며 하루하루 꽃잎을 여닫는다. 단조로우면서도 환희에 찬 하루를 산다. 그 꽃은 한꺼번에 피어서 온 세상을 화사하게 뒤바꾸기도 하며 때로는 홀로 수줍게 피어 어느 한 산책자의 발길을 묶기도 한다.
p2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