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겨울이 왔을까? 계절은 사람이 늙는 것처럼 서서히 쇠퇴해갔다. 하루하루의 변화는 눈에 띄지 않았지만, 어느새 겨울은 가혹한 현실로 자리를 잡았다. 처음에는 저녁에 기온이 좀 내려가는가 싶더니, 며칠 계속 비가 오고, 대서양에서 온 바람이 제멋대로 불고, 습도가 높아지고, 나뭇잎이 떨어지고, 결국 서머타임으로 당겼던 시간을 늦추게 되었다. 그래도 이따금씩 유예의 시간들이 있었다. 외투 없이 집을 나서다 구름 한 점 없이 밝게 빛나는 하늘을 볼 수 있는 아침이 그런 때였다. 그러나 이런 아침은 이미 죽음을 선고 받은 환자가 보여주는 거짓 회복 징후와 같았다. 12월이 되자 새로운 계절은 확고하게 뿌리를 내렸다. 거의 매일 불길한 느낌을 주는 강철 빛 회색 하늘이 도시를 덮었다.

p13

 

 

행복을 찾는 일이 우리 삶을 지배한다면, 여행의 그 일의 역동성을 그 열의에서부터 역설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활동보다 풍부하게 드러내준다. 여행은 비록 모호한 방식이기는 하지만, 일과 생존 투쟁의 제약을 받지 않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다.

여행할 장소에 대한 조언은 어디에나 널려 있지만, 우리가 가야 하는 이유와 가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는 듣기 힘들다. 하지만 실제로 여행의 기술은 그렇게 간단하지도 않고 또 그렇게 사소하지도 않은 수많은 문제들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p18

 

 

귀중한 요소들은 현실보다는 예술과 기대 속에서 더 쉽게 경험하게 된다. 기대감에 찬 상상력과 예술의 상상력은 생략과 압축을 감행한다. 이런 상상력은 따분한 시간들을 잘라내고, 우리 관심을 곧바로 핵심적인 순간으로 이끌고 간다. 이렇게 해서 굳이 거짓말을 하거나 꾸미지 않고도 삶에 생동감과 일관성을 부여하는데, 이것은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보푸라기로 가득한 현재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기억은 단순화와 선택을 능란하게 구사한다는 점에서 기대와 흡사하기 때문이다.

p27

 

 

미래에 대한 근심은 우리의 마음을 떠나지 않는 듯하지만, 정작 그것을 돌이켜보는 것은 안타깝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어떤 장소로부터 돌아오자마자 기억에서 제일 먼저 사라지는 것이 바로 앞으로 다가올 시간을 생각하며 보낸 과거의 많은 시간, 즉 우리가 있던 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보낸 과거의 많은 시간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자면 어떤 곳에 대한 기억과 그곳에 대한 기대에는 모든 순수함이 있다. 각각의 경우에 도드라져 나오는 것은 장소 자체이기 때문이다.

p37

 

 

우리가 어떤 장소에 가장 온전하게 있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반드시 그곳에 있어야 한다는 부수적인 도전에 직면하지 않을 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p38

 

 

아름다운 대상이나 물질적 효용으로부터 행복을 끌어내려면, 그 전에 우선 좀 더 중요한 감정적 또는 심리적 요구들을 충족시키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런 요구들 가운데는 이해에 대한 요구, 사랑, 표현, 존경에 대한 요구가 있다. 따라서 중요한 인간관계 속에 흥건하게 고여 있는 몰이해와 원한이 갑자기 드러나면, 우리의 마음은 화려한 열대의 정원과 해변의 매혹적인 나무 오두막을 즐기려 하지 않는다. 아니, 즐길 수가 없다.

p41

 

 

인간은 호텔을 건축하고, 만을 준설하는 등 엄청난 프로젝트들을 이루어내면서도, 기본적인 심리적 매듭 몇 개로 그 성과를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다. 울화가 치밀 때면 문명의 이점들이란 것이 얼마나 하찮게 여겨지는지! 이런 정신적 매듭들이 얼마나 처치 곤란인지 생각하다 보면, 고대 철학자들의 준엄하면서도 비꼬는 식의 지혜가 떠오른다. 그들은 번영과 세련으로부터 물러나 통이나 진흙 오두막 속에 살면서, 행복의 핵심적 요소는 물질적인 것이나 미학적인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심리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p42

 

 

위스망스의 말에 따르면 데제생트는 "상상력은 실제 경험이라는 천박한 현실보다 훨씬 나은 대체물을 제공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실제 경험에서는 우리가 보러간 것이 우리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것 때문에 희석되어 버린다. 우리는 근심스러운 미래에 의해 현재로부터 끌려나온다. 당혹스러운 신체적, 심리적 요구들 때문에 미학적 요소들의 감상은 방해를 받는다.

p43

 

 

늘 여기가 아닌 곳에서는 잘 살 것 같은 느낌이다. 어딘가로 옮겨가는 것을 내 영혼은 언제나 환영해 마지않는다.

p52

 

 

꼼꼼하게 살펴보면 창밖의 공중에 떠 있는 우리의 동반자들은 우리가 예상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림에서 볼 때나 땅에서 볼 때 구름은 수평으로 놓인 알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보면 불안정한 면도용 거품을 쌓아 만든 거대한 오벨리스크 같다. 이들이 증기와 친족 간이라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진다. 오히려 증기보다 더 변화무쌍해 보인다. 어쩌면 막 폭발한 어떤 것, 여전히 변하고 있는 것의 산물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위에 앉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깨달음은 여전히 당혹스럽다.

보들레르는 구름을 사랑할 줄 알았다.

 

이방인

 

말해다오, 그대는 누구를 가장 사랑하는가, 그대 수수께끼 같은 사람이여,

그대의 아버지인가, 어머니인가, 누이인가, 형제인가?

나에게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누이도, 형제도 없다네.

그대의 친구들인가?

내가 이해하지도 못하는 말을 사용하는구나.

그대의 조국인가?

나는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네.

아름다움인가?

그녀가 여신이고 불멸이라면 내 온 마음으로 사랑하겠네.

돈인가?

나는 그대가 신을 싫어하듯이 돈을 싫어한다네.

그러면 그대는 무엇을 사랑하는가, 그대 낯선 이방인이여?

나는 구름을 사랑한다네…… 지나가는 구름…… 저 위에…… 저

위에…… 저 예쁜 구름들!

 

비행기에서 구름을 보면 고요가 찾아든다. 저 밑에는 적과 동료가 있고, 우리의 공포나 비애가 얽힌 곳들이 있다. 그러나 그 모두가 지금은 아주 작다. 땅 위의 긁힌 자국들에 불과하다. 물론 이 오래된 원근법의 교훈은 전부터 잘 알던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차가운 비행기 창에 얼굴을 갖다 대고 있을 때만큼 이것이 절실하게 느껴지는 경우는 드물다. 우리가 타고 있는 것은 심오한 철학의 스승이며, 보들레르의 명령을 충실하게 따르는 제자이다.

p65-70

 

 

나는 한쪽 구석에 앉아 손가락처럼 생긴 초콜릿을 먹으며, 이따금씩 오렌지 주스를 홀짝거렸다. 외로웠다. 그러나 부드러운, 심지어 유쾌하다고 할 만한 외로움이었다. 웃음소리와 동료애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외로움이 아니었다. 만일 그랬다면 내 기분과 주위 환경 사이의 대조로 인해 괴로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외로움은 모두가 나그네인 곳, 의사소통의 어려움과 사랑을 향한 좌절된 갈망이 건축과 조명에 의해 인정을 받고 또 잔인하게 기념되는 곳에서 피어올랐다.

집단적 외로움과 마주치자 에드워드 호퍼(1882-1967, 미국작가)가 그린 유화 몇 점이 떠올랐다. 그의 그림들은 황량함을 묘사하고 있지만 그 자체가 황량해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보는 사람이 자신의 슬픔의 메아리를 목격하게 함으로써 그 슬픔으로 인한 괴로움과 중압감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게 해준다. 어쩌면 우리가 슬플 때 우리를 가장 잘 위로해주는 것은 슬픈 책이고, 우리가 끌어안거나 사랑할 사람이 없을 때 차를 몰고 가야할 곳은 외로운 휴게소인지도 모른다.

p71

   

 

여행은 생각의 산파다. 움직이는 비행기나 배나 기차보다 내적인 대화를 쉽게 이끌어내는 장소는 찾기 힘들다.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과 우리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생각 사이에는 기묘하다고 말할 수 있는 상관관계가 있다. 때때로 큰 생각은 큰 광경을 요구하고, 새로운 생각은 새로운 장소를 요구한다. 다른 경우라면 멈칫거리기 일쑤인 내적인 사유도 흘러가는 풍경의 도움을 얻으면 술술 진행되어나간다.

p83

   

 

모든 운송 수단 가운데 생각에 가장 큰 도움을 주는 것은 아마 기차일 것이다. 배나 비행기에서 보는 풍경은 단조로워질 가능성이 충분히 있지만, 열차에서 보는 풍경은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다. 열차 밖의 풍경은 안달이 나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그러면서도 사물을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 느리게 움직인다. 이 풍경을 통해 우리는 잠깐 사적인 영역들을 보고 영감을 얻기도 한다.

p84

 

 

18세기 말부터는 공동체의 관행이 아니라 방랑자가 되는 것에서 동료의식이 생겨난다. 따라서 자연과 공동체의 매개는 일반적인 사회의 엄격함, 냉혹한 금욕, 이기적인 편안함이 아니라 본질적인 고립과 침묵과 외로움에 맡겨지게 된다.

레이먼드 월리엄스, <시골과 도시>

p86

   

 

왜 다른 나라에서 현관문 같은 사소한 것에 유혹을 느낄까? 왜 전차가 있고 사람들이 집에 커튼을 달지 않는다는 이유로 어떤 장소에 사랑을 느낄까? 그런 사소한[또 말 없는] 외국적 요소들이 강렬한 반응을 일으킨다는 것이 터무니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다른 삶에서도 비슷한 반응 양식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우리는 사랑의 감정이 상대가 빵에 버터를 바르는 방식에 닻을 내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도 하고, 또 상대가 구두를 고르는 취향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기도 한다. 이런 자잘한 일에 영향을 받는다고 우리 자신을 비난하는 것은 세밀한 것들도 그 속에 풍부한 의미를 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다.    

내가 그 아파트 건물을 사랑하게 된 것은 그 건물이 수수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건물은 편안하기는 했지만 웅장하지는 않았다. 그 건물은 이곳이 경제적 중용에 매력을 느끼는 사회임을 암시했다. 그리고 그 설계에는 솔직함이 있었다. 런던의 현관은 고대 신전의 모습을 흉내 내는 경향이 있는 반면, 암스테르담의 현관은 자신의 지위를 인정하고, 기둥과 석고를 피하여 단정하고 장식 없는 벽돌을 택했다. 건물은 가장 좋은 의미에서 현대적이었으며, 질서와 청결과 빛을 옹호했다.

이국적이라는 말을 좀 더 일시적이고 사소한 맥락에서 생각한다면. 외국에서 만나는 장소의 매력은 새로움과 변화라는 단순한 관념으로부터 나온다. 예를 들어 고향에는 말이 있을만한 곳에 낙타가 있다거나, 고향에는 기둥을 세운 아파트 건물이 있을 만한 곳에 장식이 없는 아파트 건물이 있다거나. 그러나 좀 더 심오한 기쁨도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외국의 요소들이 새롭기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이나 신조에 좀 더 충실하게 들어맞기 때문에 귀중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이것은 고향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것일 수도 있다.

암스테르담에서 내가 열광한 것은 그런 경우였다. 그것은 영국에 대한 나의 불만과 관련되어 있었다. 현대성이나 미학적 단순성의 결여, 도시적 삶에 대한 저항, 그물 커튼을 걸어두는 심리에 대한 불만.

우리가 외국에서 이국적이라고 여기는 것은 우리가 고향에서 갈망했으나 얻지 못할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p106-109

 

 

매혹적인 사람이 이국적인 땅에 가게 되면 자신의 나라에서 가지고 있는 매력에 그 사람이 있는 장소가 주는 매력이 보태진다. 자신에게 없는 부분을 다른 사람에게서 찾는 것이 사랑이라면,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을 사랑할 때는 우리 자신의 문화에는빠져 있는 가치들에 좀 더 가깝게 다가가고자 하는 마음도 따라갈 것이다.

p125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 바람에 흩뿌려져 이 나라 저 나라에 태어났다. 그러나 플로베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어른이 되면 상상 속에서 우리의 충성심이 향한 대상에 따라 우리의 정체성을 재창조할 자유를 얻는다.

p138

 

 

'삶을 고양한다'는 표현은 원래 니체가 사용한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1873년 가을에 탐험가나 학자처럼 사실을 수집하는 일과 내적이고 심리적인 풍요를 목적으로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을 이용하는 일을 구별했다. 대학 교수로는 예외적인 일이었지만, 니체는 앞의 행동을 모욕하고 뒤의 행동을 찬양했다. 니체는 이 에세이에서 <삶을 위한 역사와 용도와 불리한 점들에 대하여>라는 제목을 달고, 유사 과학적인 방법으로 사실들을 수집하는 것은 헛된 일이라는 독특한 주장을 펼쳤다. 그는 진정한 과제는 '삶'을 고양하기 위해 사실들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괴테의 문장을 인용했다. "나는 나의 활동에 보탬이 되거나 직접적으로 활력을 부여하지 않고 단순히 나를 가르치기만 하는 모든 것을 싫어한다."  

여행 중에 '삶을 위하여' 지식을 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니체는 몇 가지 제안을 한다. 그는 독일 문화의 상태에, 또 그것을 개선하기 위한 어떤 시도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 우울함을 느끼는 사람이 이탈리아에, 예를 들어 시에나나 피렌체에 갔을 경우를 상상한다. 이 사람은 그곳에 가서 이탈리아 르네상스라고 널리 알려진 현상이 사실은 소수의 개인들의 작업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들은 운, 인내심, 적당한 후원자가 있었기 때문에 사회 전체의 분위기와 가치를 바꾸어 놓을 수 있었다. 이 여행객은 다른 문화에서 "과거에 '인간'이라는 개념을 확장하고 그 개념을 좀 더 아름답게 만들었던 것"을 찾게 될 것이며, 그 결과 "과거의 위대함을 숙고함으로써 힘을 얻고, 인간의 삶이 영광스러운 것임을 느낌으로써 영감을 얻는" 사람들의 대열에 합류하게 될 것이다.

니체는 또 두 번째 종류의 여행도 제안한다. 이는 우리의 사회와 정체성이 과거에 의해 형성되어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과정에서 연속성과 소속감을 확인하게 되는 여행이다. 이런 여행을 하는 사람은 "덧없고 개별적인 존재를 넘어선 시야를 가지게 되며, 자신이 자신의 집, 자신의 종족, 자신의 도시의 정신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는 오래된 건물들을 보며 "자신이 완전히 우연적이고 자의적인 존재가 아니라, 과거로부터의 상속자이자 꽃이자 열매로서 성장해왔으며, 따라서 자신의 존재는 용서받을 수 있고 또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행복"을 느끼게 된다.

니체의 논리에 따르자면, 오래된 건물을 바라보는 목적은 '건축 양식들이 보기보다 유연하며, 건물의 용도 역시 그러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팔라시오 데 산타 크루즈<"이 궁은 1629년에서 1643년 사이에 건설되었으며, 함스부르크 건축의 보석 가운데 하나이다">를 바라보면서 '그때는 이것이 가능했는데, 그 비슷한 것이 지금은 왜 가능하지 않을까?'하고 의문을 품을 수 있다.

우리는 1만 6000점의 새로운 식물종을 가지고 돌아가는 대신, 저녁 초대를 받을 만하지는 못하지만 우리의 삶을 고양해주는 작은 생각들을 가지고 여행에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p156-158

 

 

호기심은 몇 가지 크게 뭉뚱그려진 질문들로 이루어진 중추로부터 밖으로, 때로는 아주 먼 곳까지 확장되는 작은 질문들의 사슬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어린 시절에 우리는 이렇게 묻는다. '왜 선과 악이 있을까?' '자연은 어떻게 움직일까?' '나는 왜 나일까?' 상황과 기질이 허락한다면, 우리는 어른이 되어서도 이런 질문들을 중심에 놓고 살아간다. 우리의 호기심은 세계의 점점 더 많은 부분을 포괄하다가, 마침내 어느 지점에서는 어떤 것에도 지루함을 느끼지 않는 오묘한 경지에 이를 수도 있다. 뭉뚱그려진 커다란 질문들은 언뜻 보기에는 남의 관심을 끌 수 없을 것 같은 작은 질문들과 관련을 맺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산속에서 파리에 대해 궁금해하기도 하고, 16세기 궁전의 벽에 그려진 특정한 벽화에 대해 궁금해하기도 한다. 우리는 오래전에 사라진 이베리아 군주의 외교정책이나 30년 전쟁에서 토탄의 역할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기도 한다.

p163-165

   

 

여행의 위험은 우리가 적절하지 않은 시기에, 즉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물을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새로운 정보는 꿸 사슬이 없는 목걸이 구슬처럼 쓸모없고 잃어버리기 쉬운 것이 된다.

p172

 

 

시인은 도시가 생명을 파괴하는 여러 감정을 만들어낸다고 비난했다. 사회 위계에서 우리의 지위에 대한 불안, 다른 사람들의 성공에 대한 질투, 낯선 사람들의 눈 앞에서 빛을 발하고 싶은 욕망. 워즈워스의 주장에 따르면, 도시 거주자들은 뚜렷한 관점이 없기 때문에 거리나 저녁 식탁에서 이야기되는 것에 귀를 곤두세운다고 한다. 그들은 먹고 살기가 편해도 자신에게 진정으로 부족하지도 않고 또 자신의 행복을 좌우하지도 않는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요구했다. 이런 혼잡하고 불안한 곳에서 다른 사람들과 진지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어려워보였다. 고립된 농가에 사는 것이 오히려 유리했다. 워즈워스는 런던의 집에서 이렇게 썼다. "한 가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점이 있다. 어떻게 이웃에 살면서도 서로 낯선 사람으로 살아갈까? 심지어 어떻게 서로의 이름도 모를까?'

p190

 

 

워즈워스는 자연이 우리로 하여금 삶에서, 그리고 서로에게서 바람직하고 선한 모든 것을 얻게 한다고 주장했다. 자연은 올바른 이성의 이미지로서 도시 생활에서 나타나는 비꼬인 충동들을 진정시킨다는 것이다.

p201

 

 

워즈워스는 자연 속에 이런 작지만 중요한 순간들이 있다는 믿음 때문에 자신의 많은 시에 매우 구체적인 부제를 붙이기도 했다. 예컨대 <턴턴 사원>의 부재 - '1798년 7월 13일 여행 중에 와이 강변을 다시 찾고' - 는 정확한 날짜를 명기하고 있는데, 이것은 산골에서 골짜기를 굽어보며 보낸 몇 순간을 한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고 쓸모 있는 순간으로 꼽을 수 있으며, 따라서 생일이나 결혼기념일만큼 정확하게 기억할 가치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나 역시 시간의 점을 부여받았다. 그 일은 우리가 레이크디스트릭트를 찾았던 둘째 날 늦은 오후에 일어났다. M과 나는 앰블사이드 근처의 한 벤치에 앉아 초콜릿 바를 먹고 있었다. 우리는 각자 어떤 초콜릿 바를 좋아하는지를 놓고 몇 마디를 나누었다. M은 캐러멜이 가득 찬 것을 좋아한다고 했고, 나는 바삭바삭하여 비스킷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이어 우리는 입을 다물었고, 나는 들판 너머 냇가의 덤불을 보았다. 나무는 다양한 색깔을 드러내고 있었다. 녹색은 조금씩 섬세하게 변하고 있었다. 마치 색깔 차트의 표본을 부채처럼 펼쳐놓은 것 같았다. 이 나무들은 건강하고 충만한 인상을 주었다. 세상이 낡았고 또 자주 슬프다는 것에는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나는 그들 속에 얼굴을 묻고, 그들의 냄새로 힘을 회복하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자연이 벤치에 앉아 초콜릿을 먹는 두 사람의 행복에는 아무런 관심 없이, 홀로 아름다움과 비례에 대한 인간적 감각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장면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이 매우 특별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 장면을 내가 온전히 받아들인 것은 불과 1분뿐이었다. 곧 일에 대한 생각이 침입했고, M이 전화를 걸러 여인숙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말을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그 장면이 내 기억 속에 고정될 줄은 몰랐다. 그러나 어느 날 오후 중반 런던에서 여러 가지 근심으로 마음이 짓눌린 상태에서 교통 체증에 걸려 있는데, 그 나무들이 나에게 돌아왔다. 수많은 모임들과 답장을 못한 편지들을 밀쳐내고, 내 의식 속으로 뚫고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수많은 차량과 군중을 떠나, 이름은 모르지만 바로 눈앞에 서 있는 것처럼 분명하게 보이는 나무들에게로 돌아갔다. 이 나무들은 내 생각들을 올려 놓을 수 있는 선반을 제공했다. 이 나무들은 근심의 소용돌이로부터 나를 보호했고, 그날 오후 나에게 거창하지 않지만 살아야 할 이유를 주었다

p211-212

 

 

도시의 "떠들썩한 세상"의 차량들 한가운데서 마음이 헛헛해지거나 수심에 잠기게 될 때, 우리 역시 자연을 여행할 때 만났던 이미지들, 냇가의 나무들이나 호숫가에 펼쳐진 수선화들에 의지하며, 그 덕분에 "노여움과 천박한 욕망"의 힘들을 약간은 무디게 할 수 있다.

p213

 

 

만일 세상이 불공정하거나 우리의 이해를 넘어설 때, 숭고한 장소들은 일이 그렇게 풀리는 것이 놀랄 일은 아니라고 이야기 한다. 우리는 바다를 놓고 산을 깎은 힘들의 장난감이다. 숭고한 장소들은 부드럽게 우리를 다독여 한계를 인정하게 한다.

p216

 

 

내가 차지하고 있는 작은 공간을 ····· 생각해본다·····.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또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무한히 광대한 공간들이 이 작은 공간을 삼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생각을 하면 내가 저기가 아니라 여기에 있다는 것이 무섭고 놀랍다. 나는 저기가 아닌 여기에 있을 이유도 없고, 다른 때가 아닌 지금 있을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누가 나를 여기에 갖다 놓았는가?

<팡세>, 단장68.

p217

 

 

어떤 장소에서 느끼는 감정이 적절한 한 단어로 표현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초가을 저녁 날빛이 희미해지는 것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 또는 빈터에서 전혀 움직임이 없는 물웅덩이와 마주쳤을 때 느끼는 감정을 전달하려면 이런저런 말들을 어색하게 잔뜩 쌓게 되기 마련이다.

p220

   

 

우리는 사막에 있지 않을 때도 다른 사람들의 행동과 우리 자신의 결함을 보고 스스로 작다고 느끼는 경향이 있다. 굴욕은 인간 세계에서는 항상 마주칠 수 있는 위험이다. 우리의 의지가 도전받고 우리의 소망이 좌절되는 일은 드물지 않다. 따라서 숭고한 풍경은 우리를 우리의 못남으로 안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익숙한 못남을 새롭고 좀 더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생각하도록 해준다. 이것이야말로 숭고한 풍경이 가지는 매력의 핵심이다.

숭고한 장소는 일상생활이 보통 가혹하게 가르치는 교훈을 웅장한 용어로 되풀이한다. 우주는 우리보다 강하다는 것, 우리는 연약하고, 한시적이고, 우리 의지의 한계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는 것, 우리 자신보다 더 큰 필연성에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다는 것.

p229

 

 

여기에는 엄격하게 종교적인 메시지가 있다. 하느님은 욥에게 모든 일이 그를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고 가끔 그의 이익과 반대되는 쪽으로 흐른다 해도, 그의 마음에는 하느님이 있지 않느냐고 묻는다. 신의 지혜가 인간의 이해를 넘어설 때, 의로운 사람은 숭고한 자연 광경을 보고 자신의 한계를 깨달은 다음 우주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을 계속 신뢰해야 한다는 것이다.

p241

 

 

우리가 관객으로서 어떤 화가의 그림을 좋아한다면, 그것은 어떤 특정한 장면에서 우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 특징을 그 화가가 골라냈다고 판단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화가가 어떤 장소를 규정할 만한 특징을 매우 예리하게 선별해냈다면, 우리는 그 풍경을 여행할 때 그 위대한 화가가 그곳에서 본 것을 생각하게 되기 마련이다.

p248

 

 

아름다움에 대한 느낌은 어떤 장소 자체에 내재한 특질들에 의해 또는 우리 심리의 내부 회로에 의해 결정이 나는 것 같다. 따라서 어떤 아이스크림이 특히 맛있다고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듯이, 아름답다고 여기는 장소에 대한 느낌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한다.

p251

 

 

나중에 반고흐는 동생한테 파리에서 아를로 이사 온 이유를 두 가지 댔다. 첫째는 '남부를 그리고' 싶었던 것이고, 또 하나는 자신의 작품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이 남부를 '보도록' 돕고 싶었던 것이다. 그가 자신의 능력으로 그런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지에 의심을 품었을지는 몰라도, 이 기획이 이론적으로 가능하다는 믿음은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즉 화가는 세상의 한 부분을 그릴 수 있고, 그 결과 다른 사람들이 그것에 눈을 뜨게 해줄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반 고흐가 예술이 사람의 눈을 뜨게 해준다고 이렇게 굳게 믿게 된 것은 그 자신이 관객으로서 이런 힘을 자주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고향 네덜란드에서 프랑스로 오면서 특히 문학과 관련하여 이 힘을 강하게 느꼈다. 그는 발자크, 플로베르, 졸라, 모파상의 작품을 읽었으며, 이 작품들을 통해 프랑스 사회와 심리의 역동성에 눈을 뜨게 된 것에 고마워했다. 그는 <보바리 부인>을 통하여 지방에 사는 중간 계급의 생활에 대하여 배웠으며, <고리오 영감>을 통하여 파리의 가난하지만 야심만만한 학생들에 대하여 배웠다. 그는 이제 사회 전체에서 이런 소설의 등장인물들과 유사한 인물들을 알아보게 되었다.

p255-256

 

 

원래의 모습에는 감탄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닮게 그린 그림에는 감탄하니, 그림이란 얼마나 허망한가.

<팡세>, 단장40

p282 

 

 

가보았지만 제대로 보지 않았던 곳 또는 무관심하게 지나친 곳들 가운데 어떤 곳들이 가끔 눈에 번쩍 띄면서 우리를 압도하거나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그런 곳들은 서툴게나마 아름다움이라고 부를 수 있는 특질을 소유하고 있다. 이런 곳은 예쁘지도 않고, 안내 책자에 아름다운 곳을 설명할 때 흔히 꼽는 분명한 특징 같은 것도 없다. 우리가 여기서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그 장소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또 하나의 방법일 지도 모른다.

p293

 

 

아름다움을 만나면 그것을 붙들고, 소유하고, 삶 속에서 거기에 무게를 부여하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끼게 된다. "왔노라, 보았노라, 의미가 있었노라"라고 외치고 싶어진다.

그러나 아름다움은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 우리가 결코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르는 곳에서만 자주 나타나거나, 계절과 빛과 날씨가 보기 드물게 조화를 이룬 결과로 나타나곤 한다.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 소유할 것인가? 어떻게 공중에 뜬 열차를, 할바 사탕처럼 생긴 벽돌을, 잉글랜드의 골짜기를 붙들 것인가?

카메라가 하나의 방법이다. 사진을 찍으면 어떤 장소의 아름다움을 보고 촉발된 근질근질한 소유욕을 어느 정도 달랠 수 있다. 귀중한 장면을 잃어버릴 것이라는 불안은 셔터를 누를 때마다 줄어든다. 아니면 아예 우리 자신을 물리적으로 아름다운 장소에 박아놓을 수도 있다. 우리 자신이 그 장소 안에 좀 더 확실하게 존재한다면, 그 장소도 우리 안에 좀 더 확실하게 존재할 수 있을지 모르니까.

p295

 

 

러스킨은 아름다움과 그 소유에 대한 관심을 통해 다섯 가지 중심적 결론에 이르렀다. 첫째. 아름다움은 심리적인 동시에 시각적으로 정신에 영향을 주는 수많은 복잡한 요인들의 결과물이다. 둘째. 사람에게는 아름다움에 반응하고 그것을 소유하고 싶어 하는 타고난 경향이 있다. 셋째. 이런 소유에 대한 욕망에는 저급한 표현들이 많다. 넷째. 아름다움을 제대로 소유하는 방법은 하나뿐이며, 그것은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스스로 아름다움의 원인이 되는 요인들[심리적이고 시각적인]을 의식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의식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자신이 그런 재능이 있느냐 없느냐에 관계없이, 그것에 대하여 쓰거나 그것을 그림으로써 예술을 통하여 아름다운 장소를 묘사하는 것이다.

p298

 

 

눈앞에 놓인 것을 우리 손으로 재창조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아름다움을 느슨하게 관찰하는데서 부터 자연스럽게 발전하여 그 구성 요소들에 대한 깊은 이해를 얻게 되고, 따라서 그것에 대한 좀 더 확고한 기억을 가지게 된다.

한 장인은 강의를 끝내면서 러스킨이 자신을 포함한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자,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데생을 가르치려 한 것이 아니라, 단지 보는 것을 가르치려 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p300

 

 

한군데 가만히 앉아 시속 150킬로미터로 달린다고 해서 우리가 조금이라도 튼튼해지거나, 행복해지거나, 지혜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아무리 느리게 걸어 다니면서 본다 해도, 세상에는 늘 사람이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빨리 간다고 해서 더 잘 보는 것은 아니다. 진정으로 귀중한 것은 생각하고 보는 것이지 속도가 아니다. 총알에게는 빨리 움직이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그가 진정한 사람이라면- 느리게 움직이는 것이 해가 되지 않는다. 사람의 기쁨은 결코 가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p301-302

 

   

사막을 건너고, 빙산 위를 떠다니고, 밀림을 가로질렀으면서도, 그들의 영혼 속에서 그들의 본 것의 증거를 찾으려 할 때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사비에르 드 메스트르는 먼 땅으로 떠나기 전에 우리가 이미 본 것에 다시 주목해보라고 슬며시 우리 옆구리를 찌르고 있다.

p328

 

 

그러나 돌아와 런던의 모습을 보자, 세상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에서 전개되는 일에 무관심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나는 집에 있다는 것에 절망을 느꼈다. 나의 삶을 보내야 할 곳 가운데 지구상에서 이보다 나쁜 곳은 찾아보기 힘들 것 같았다.

 

인간의 불행의 유일한 원인은 자신의 방에 고요히 머무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팡세>, 단장 136.

p329

 

   

우리가 여행으로부터 얻는 즐거움은 여행의 목적지보다는 여행하는 심리에 더 좌우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여행의 심리를 우리 자신이 사는 곳에 적용할 수 있다면, 이런 곳들도 훔볼트가 찾아갔던 남아메리카의 높은 산 고개나 나비가 가득한 밀림만큼이나 흥미로운 곳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여행을 하는 심리란 무엇인가? 수용성이 그 제일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수용적인 태도를 취하면,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새로운 장소에 다가가게 된다.

어떤 것이 재미있고 어떤 것이 재미없다는 고정관념은 버리게 된다.

p334

 

 

혼자 여행을 하니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함께 가는 사람에 의해 결정되어버린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맞도록 우리의 호기심을 다듬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하여 특정한 관념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으며, 따라서 우리의 어떤 측면이 나타나는 것을 교묘하게 막을 수도 있다.

p341

 

 

우리에게 먼 땅으로 떠나기 전에 우리가 이미 본 것에 다시 주목해보라고 슬며시 우리 옆구리를 찌르고 있다.

p3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