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속에 빈 새장을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는 그 안에 무엇을 담게 된다.
1#
일상에서는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게 시간이지만 여행을 떠나서의 시간은 순순히 내 말을 따라준다.
3#
거기 한쪽에 두고 가. 그냥 내가 바라보게....
10#
허기를 달래기엔 편의점이 좋다.
시간이 주는 묘한 느낌을 알기엔 쉬는 날이 좋다.
몰래, 사람들 사는 향내를 맡고 싶으면 시장이 좋다.
사랑하는 사람의 옆모습을 보기엔 극장이 좋다.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서기에는 파도가 좋다,
가장 살기 좋은 곳을 생각할 필요 없이 내가 태어난 곳이 좋다,
조금이라도 마음을 위로 받기엔 바람 부는 날이 좋다.
여행의 폭을 위해서라면
한 장 보다는 각각 다르게 그려진 두 장의 지도를 갖는 게 좋다.
세상이 아름답다는 걸 알기 위해선 높은 곳일수록 좋다.
세상 그 어떤 시간보다도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시간이 좋다.
희망이라는 요리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두근거릴수록 좋다.
고꾸라지는 기분을 이기고 싶을 때는 폭죽이 좋다.
사랑하기에는 조금 가난한 것이 낫고
사랑하기에는 오늘이 다 가기 전이 좋다.
11#
창문을 열어 놓고 맥주를 한 병 마시는데 몸이 물을 마시지 말라고 하네요.. 이야기 할 사람이 없으면 술을 마시지 말라고 몸이 말을 걸어옵니다. 그럼요 술은 정말 정말 좋은 사람이랑 같이 하지 않으면 그냥 물이지요. 수돗물.
15#
비가와도 빗소리가 들리지 않는 바닷가 모래밭... 이토록 모래에 스미듯 내리는 족족 가슴을 저미는데 무슨 소리가 들리겠는가.
27#
말 한마디가 오래 남을 때가 있다. 다른 사람 귀에는 아무 말도 아니게 들릴 수 있을 텐데 뱅그르 뱅그르 내 마음 한 가운데로 떨어지는 말. 한마디 말일 뿐인데 진동이 센 말, 그 말이 나를 뚫고 지나가 내 뒤편의 나무에 가서 꽂힐 것 같은 말이,
29#
나는 물들기 쉬운 사람.
많은 색깔에 물들었으며 많은 색깔을 버리기도 했다. 내 것인 듯하여 껴안았고 내 것이 아닌 것 같아 지워 없애거나, 곧 다른 색으로 이사 가기도 했다.
얼마 전부터 술을 마시고 있는 촉촉한 나의 상태를 즐기게 되었다. 내가 술을 마시는 건 순전히 사람이 좋아서 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사람보다 더 믿을 수 있는 건 술이라는 생각이다. 술은 착하며 솔직하다, 확실히 인간보다는 그렇다. 혼자서는 마시지 못하는 술 습관을 힘들게 고쳐 혼자 앉아 술을 마시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 혼자 술을 마신 상태에서는 다른 색깔에 물들기 쉬운 상태가 된다. 그 상태처럼 평화로운 시간도 없다. 인간적이고 싶을 때 술을 찾는 솔직한 상태 . 단언컨대 술은 마음에 몸에 색을 밀어 올린다.
당신이 좋다, 라는 말은 당신의 색깔이 좋다는 말이며, 당신의 색깔로 옮아가겠다는 말이다. 하지만 당신 색깔이 맘에 들지 않는다, 라는 말을 무의식적으로 했을 경우, 당신과 나는 어느 정도의 거리를 지켜야 하는 사이라는 사실과 내 전부를 보이지 않겠다는 결정을 동시에 통보하는 것이다. 색깔이 먼저인 적은 없다. 누군가가 싫어하는 색깔의 옷을 입고 있다고 해서 그를 무조건 싫어할 수 없듯이 서로가 서로의 마음에 어떤 색으로 비치느냐에 따라 내가 아무리 싫어하는 색깔의 옷을 입었더라도 그 기준은 희생될 수 있으며 보정될 수 있다.
32#
나는 누군가가 좋아지면 왜 그러는지도 모르면서 저녁이 되면 어렵고, 밤이 되면 저리고, 그렇게 한 계절을 한사람을 앓는 것이다.
34#
조금은 바보 같기로 한다. 눈을 감고 잠시만이라도 모르기로 한다.
36#
살면서 모든 것을 털어 놓아도 좋을 한 사람쯤 있어야 한다. 그 한사람을 정하고 살아야 한다. 그 사람은 살면서 만나지기도 한다. 믿을 수 없지만 그렇게 된다. 삶은 일방통행이어서는 안 된다. 살아온 분량이 어느 정도 차오르면 그걸 탈탈 털어서 누군가에게 보여야 한다. 듣건 듣지 못하건 무슨 말인지 알아듣건 알아듣지 못하건 그것도 중요하지 않다. 무조건 다 털어 놓은 한 사람.
41#
늦어지는 시간의 느낌을 만지게 된다.
43#
당신이 황망히 떠나고 당신의 빈집을 찾았을 때 당신은 없었다. 당신의 집에 당신의 표정이 없는 것은 처음이었다. 당신이 없으니 당신의 집이 벼랑에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당신은 거짓말 같다. 당신이 없어 졌는데 ‘나라’가 없어졌다. 당신이 떠났는데 내 신발 모두가 사라졌다. 당신은 우리와 이별한 것이 아니라 그저 전화가 고장난 것이다. 잠시 연락이 어려운 것이다. 멀리 한번 던진 공을 잃은 것이며 여행 가방을 잃어버린 것이다. 사랑이 아려서 사랑이 저물어 이별한 것도 아니다. 당신은 곧 저먼 곳 반환점을 돌아 도착 할 것 같다. 그리고 기운이 조금 더 남았다는 듯 한 번 더 큰 원을 그리고 달려와 ‘나, 잘했지’ 할 것 같다, 당신, 여행 가방을 찾아 돌아올 때는 길을 잃지 말기를. 당신, 잠시 거짓말이었다며 얼른 우리 앞에 나타나기를.
그래도 당신에게 하나만 묻겠다. 이 벌판에서 당신은 도대체 얼마나 외로웠던가. 마당에 풀 번지듯 번지는 외로움이었을까. 탁해진 눈가를 닦을 때에도 컴컴하게 쳐들어오는 외로움이었을까. 그 외로움에는 그래도 단맛이 섞였을까. 그래서 당신은 나에게 그런 말을 했던가.
‘외롭지 않으면 또 무엇으로 살아요?’
당신은 그 외로움의 힘으로 가장 멀리 가겠다는 것인가. 훨훨, 당신이 가고자 했던 곳들을 당신은 지독히 밟으며 다닐런가. 어쩌면 우리는 그곳에서 외로움의 힘으로 마주쳐 그렇게 술한잔 나눌런가.
44#
모두에게는 쉬어갈 곳이 필요합니다. 어느 한 시간, 푹 젖어 있는 마음을 말리거나 세상의 어지러운 속도를 잠시 꼭 잡아매두기 위해서는 그래야 합니다. 하루를 정리하는 어느 시간의 모퉁이에서 잠시만이라도 앉아 있을 수 있다면 그곳은 천국이겠지요. 천국 별거 있나요.
들뜬 기분들을 차분히 누를 수 있다면, 얹힌 기분들을 잠시 정리할 수 있다면 그곳이 어느 곳이든 무조건 잠시 앉아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고요한 마을에 하루 한 번 기차가 오는 시간은 그 마을 사람들에게 시장 골목이고 작은 극장이며 나무 그늘입니다. 그 시간은 맛있는 풍경을 나눠 먹는 저녁식사 시간입니다.
이 마을은 백년이 지나도 자신들만의 속도와 온도를 유지하면서 살 것만 같은데. 내가 여행에서 돌아가 만나야 할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들어나 줄런지요. 잠시 스친 느림보마을.
46#
당신이 맘에 든다. 내가 누군가를 맘에 들어 한다는 것은 푸른 바다 밑, 심연 속으로 당신을 끌어내리고 싶어 한다는 것, 그러면 당신은 눈을 뜨고 나를 보는지 아니면 두려움에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눈을 감고 마는지 실험하고 싶은 것, 그러니까 다시 말해 고속도로에서 속력을 내면서 옆자리에 앉은 당신에게 키스를 하고자 했을 때 당신이 나를 따라 눈을 감는지 아니면 두려워 정면을 보고 있는지 알고 싶은 거다.
밤하늘의 별을 세며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밤하늘의 푸르름을 싫증날 정도로 노려보고 있자니 어느 순간 이마가 시큰해질 정도의 슬픔이 찾아왔다. 아름다움은 슬픔을 부른다. 유난히 눈부신 아름다움은 밤에 더 빛난다.
47#
당신의 머리카락을 스쳤던 바람의 질감까지도..
노란색 포스트잇에 ‘밥 꼭 챙겨 먹어요’ 라든가 ‘내일 오후에 잠깐 들를게요‘ 라고 써서 냉장고에 붙였던 글자들을 어느 날 하루아침에 ’이젠 그만 할래요‘라고 바꾸고 잠적해버린들 그것이 그만둘 수 있는, 버릴 수 있는 마음이던가. 그만 두겠다고 하는 순간부터 멀어져도, 헤어져도, 보이지 않아도 사랑은 여전히 사랑이질 않은가. 사랑이어서 일어난 그 많은 일들을 단번에 지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가.
사는데 있어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의 가치를 제대로 아는 것이지만 그것을 알기에 사랑은 얼마나 보이지 않으며 얼마나 만질 수 없으며 또 얼마나 지나치는가. 보지 못하고 만지지 못하고 지나치는 한 사랑은 없다. 당장 오지 않는 것은 영원히 오지 않는 이치다. 당장 없는 것은 영원히 없을 수도 있으므로,
그렇더라도 사랑이 없다고 말하지는 말라. 사랑은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불안해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고 믿으려는 것이다. 사랑은 변하는 것이 아니라 익숙해지는 걸 못견뎌하는 것이다. 사랑이 변했다, 고 믿는 건 익숙함조차 오래 유지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뿐이다. 사랑은 있다. 사랑이 없다면 세상도 없는 것이며 나도 이 세상에 오지 않는 것이며 결국 살고 있는 것도 아니질 않은가.
그렇다고 사랑만이 제일이라고 생각하지도 말라. 사랑은 한다고 해서 다가 아니라 사랑할 때의 행복을 밖으로 제대로 드러낼 수 있는 상태가 사람을 키운다. 애써 채우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넘치는 상태만이 사랑이이기 때문이다.
사랑으로 하여금 인간을 어려운 일에 빠지게 하는 일, 그것은 신이 하는 일이다. 그 어려움으로 하여 인간을 자라게 하는 것이 신이 존재하는 구실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랑이라는 어려운 고통을 겪어야만 행복으로 건너갈 자격을 얻는다.
신이 어떠한 장난을 친대도 사랑을 피할 길은 없다. 그냥도 오고 닥치기도 하는 것이고 누구 말대로 교통사고처럼도 오는 것이다. 사랑은, 신이 보내는 신호다. 사람은 떠나도 사랑은 남게 한다. 그것도 신이 하는 일이다, 죽도록 죽을 것 같아도 사랑은 남아 사람을 살게 한다.
그래, 사랑을 하자. 사랑을 하더라도 옆에 없는 사람처럼 사랑하자. 옆에 없는 사람처럼 사랑하는 일, 그것은 사랑의 끝이다. 완성이다.
인간적으로 우리 사랑을 하자. 인간의 모든 여행은 사랑을 여행하는 것이다. 사람은 사랑 안에서 여행하게 되어있다. 사랑을 떠났다가 사랑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사랑은 삶도 전부도 아니다. 사랑은 여행이다.
사랑은 여행일 때만 삶에서 유효하다.
51#
언젠가 다시 가야 할 곳이 있어서 다행이다. 여행은 직진하는 것도 아니고 백 미터 달리기처럼 백 미터 다 왔다고 멈춰서는 것도 아니라서 다음을 기약할 수도 있으니 다행이다.
그때까지 내게 아무도, 생기지 않을지도 모른다. 괜찮다. 오래 그리워했던 것을 찾아 나서기에는 언제나 처럼 혼자여도 좋겠다. 다만 겨울이면 좋겠다.
눈이 많이 내려 그곳에 갇혀도 좋겠다.
52#
세상 끝 어딘가에 사랑이 있어 전속력으로 갔다가 사랑을 거두고 다시 세상이 끝으로 돌아오느라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 : 우리는 그것을 이별이라고 말하지만, 그렇게 하나에 모든 힘을 다 소진했을 때 그것을 또한 사랑이라 부른다.
53#
알게 되는 것도 알아가는 것도 나이가 하는 일. 맞습니다.
나이만 있고, 나이 없는 사람이 되기는 싫다는 생각을 한 것도 그즈음이었습니다.
나이 든다는 것은 넓이를 얼마나 소유했느냐가 아니라 넓이를 어떻게 채우는 일이냐의 문제일 텐데 나이로 인해 약자가 되거나 나이로 인해 쓸쓸로 몰리기는 싫습니다. 그래서 나는 나이가 들어도「그리스인 조르바」에 나오는 문장처럼 늘 이정도로만 생각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우리는 시작에 머물러 있을 뿐, 충분히 먹은 것도 마신 것도 사랑한 것도, 아직 충분히 살아본 것도 아닌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