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은 고통의 화산에서 흘러나온 듯 핏빛을 띠고 있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고해를 해야한다는 것을 위미한다.
신의 은총으로 다시 구원받을 수 있다는 희망 속에 죄값을 치러야 한다는.
나는 조용하게 숨쉰다. 그러나 시끄럽다. 나는 내 자신, 병신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무엇이 진정이고 허위인지, 죄이고 정의인지는 여전히 모른다.
그걸 구별하지 못하는 것 또한 나의 무능력이니까.
그 말과 그 함의를 나는 인정한다. 그건 나의 정체성에 호흡만큼 절대적 진실이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때리거나 걷어차거나 오줌을 싸갈기거나 강간하거나 죽여달라고 부탁할 것도 아니다. 그러지 않는 한 나를 비웃지 않을 테니까.
언젠가 처음 에스프레소 머신을 샀을 때 메탈로 된 필터에 커피 가루를 꼼꼼히 다져 넣는 것을 즐기면서 몇 시간을 보내곤 했었다.
얼마나 세게 눌러 담아야 할까? 그냥 눌러야 하나 아니면 눌러서 돌려야 하나?
위에 눌려진 커피 가루가 너무 편편하고 부드러우면 어쩌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 나는 이런 집착들이 비정상적이고 약간은 미쳤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사는 건 에스프레소를 만드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하나라도 잘못되면 맛은 완전히 엉망이 된다.
후배는 나의 증세가 개방형 자폐증이라고 말했다. 재미있는 말이었다.
언젠가부터 모든 자리, 모든 모임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
사람 많은 데가 무섭다. 왜 그런 모든 게 산패한 기름을 뒤집어 쓴 채 햇빛 아래 씻을 곳을 찾지 못한 기분을 줄까.
나는 가족 외에는 누구하고도 사적인 관계를 만들지 않는다는 후배가 부러웠다.
아침 출근길에 오토바이 아저씨가 내 차 문짝을 긁었다.
어제도 주차장에서 소나타가 내 차 범퍼를 패이게 만들었지.
모두 그냥 가라고 손짓하면서 그 뒤꽁무니를 쳐다보며 나는 화염방사기로 다 태어 죽여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줄기차게 양들의 머리를 베는 연습을 하던 기요틴이 되고도 싶었다.
사악하다고들 하는 모든 현대적인 것들, 그러니까 매춘, 술집, 극장, 마르크 시즘, 유대인, 스트리퍼, 춤, 현대예술에서 생겨나는 모든 파생물들에도 나의 광포한 생각들이 포함돼 있을까?

방금 한 벤처 회사의 CEO인 채 클라이언트 접대 전문인 친구를 만났다.
찾아와 커피 한 잔이나 하자는 제안만큼 하릴없는 게 뭘까.
바쁘다는 말은 하기도 싫었다. 그래도 바쁘다고 말했다.
그는 바빠도 커피는 마셔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커피가 싫다고 했다.
그는 자기가 커피를 좋아하게 만들어줄테니 걱정 말라고 했다.
8층 테라스에서, 그는 아이스크림을, 나는 페리에를 시켰다.
그는 통풍문을 통해 들여다보는 듯한 각도로 나를 쳐다보더니,올해 안으로 100억의 돈을 쥐게 될 거라고 말했다. 스타트가 나빴다.
난 자신의 재산에 대해 떠드는 걸 삼가도록 배웠다.
하지만 그렇건 아니건 상관없다. 나는 신념을 가진 부류도 아니고. 자신이 옳다는 확신을 위해 노력한 적도 없지만, 그래서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다시 두 걸음 후퇴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뒤로 물러난 두 걸음의 보폭은 앞으로 내디딘 한 걸음의 천 배쯤이라고 느끼지만, 그래도 좋다. 벌거벗은 듯한 기분만 아니라면. 그는 그가 만난 모든 클라이언트들은 하나 같이 룸살롱에서의 술과 여자가 얽힌 2차를 원했다고 말했다.
그는 술집에서 얼마나 가공할 일들이 '해결'되는 줄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의 두툼한 광대뼈 윗부분 깊숙이 숨겨둔 그 의무와 쾌락을 읽는 대신 "빌어먹을 놈들"이라고 말했다. 그는 웃었다. 그 웃음이 나를 궐기하는 대신 나에겐 그보단 엄청난 양의 엑스터시가 소비되는 윤락한 풍경이 더 맞는지도 몰라, 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어차피 사랑 때문에 사경을 헤매거나 기쁨의 은총을 맛보고 싶지도 않다.
괴물이 길러낸 최하층 천민은 나인지도 몰랐다.
"그래봤자 <아메리칸 파이> 축에도 못끼는 걸." 내가 비웃었다.

페리에의 탄산가스가 목구멍에 걸렸다.
그건 그냥 세상일이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니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어떤 반복일 뿐이다.
그는 딸의 여자친구 팔을 두르고 일요일 아침 호텔 브런치를 먹는 상사에 관해 들려주었다. 그 말은 안들어야 했다.
그 자는 연못에 무엇을 던져 넣었을까? 무엇을 잡게 해달라고 빌고 있는 걸까?
포획물을 끌어당기면서 자신의 본능으로 비밀스럽게 찾던 건 무엇인가?
검은 가디건이 하악골이 발달한 그의 얼굴 윤곽을 두르러져 보이게 만들었다.
나는 검은빛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당신을 괴롭히지 않고, 당신도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는 의미를 담고있는 빛 그건 거짓말이다.
방안이 푸줏간이 되어도 좋을 내 성격인채로 나는 그를 견디기 힘들었다.
일어서면서 내가 말했다. "이런 얘기 할 거면 다신 전화하지 맙시다."

이 사회는 죄를 본질적인 이데올로기로 변형시킨다.
어쨌든 섹스는 다이너마이트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히스테리는 퍼져나가고 변형되고 왜곡된다.
결국 그 이야기는 남자 비뇨기 중심의 문화, 또는 휘황찬란한 부자동네 바로 앞에 있는 도심의 빈민촌과는 상관없는 문제가 되어버린다.
나는 펄럭이는 그것들을 냉소와 무지로만 바라볼 뿐이다.
힘없는 것. 하지만 냉소는 약하고 대책없는 사람들의 쉴 곳. 삶을 수용하는 가능성이다.
내 책상, 노동요를 부르며 면화 따는 흑인들의 내적 본향으로서의 나의 책상에 앉았다.
이 모든 지긋지긋한 것들을 어서어서 끝장내고 싶다는 생각들은 무엇일까?
매달 마감을 해야하는 이 거룩한 예배당에서?
어렸을 때 놀이용 찰흙으로 빚었던 내 마음의 형상도 이런 것이었을까?
내가 맡은 건 사소한 일에 의해 변화를 겪는 착하고 무기력한 사람의 배역이겠지.
내 나이…. 어느새 프레피 같은 모습은 다 잃어버렸다.
그래도 지금이 나에겐 좋은 시절이겠지. 후배가 그랬다.
"인생은 복잡해요. 사람들은 복잡한 세상. 복잡하게 살면 복잡한 결과가 나올 거라고 생각하지만
저는 복잡한 생각 속에서 뭔가 정리돼 간다는 거 느껴요. 심사숙고해서 얻은 결론과, 단순하게 생각해서 얻은 결론은 격이 달라요. 가끔 해결되지 않는 복잡한 일을 해결하고 나면 결론은 아주 단순해져요.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위해 복잡한 상황을 단순하게,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정리하니까요. 살아 있기 때문에요."
선(善)에는 구취가 나고 악(惡)이란 너무 보편적이다.
그것들을 구별하려고 하는 나의 반발과 자조 또한 웃기는 일이다.
그러나 나의 고문단은 길 밖에 숱하게 흩어져 있다.
이제는 신촌에 사는 것도 싫다. 골목마다 썩은 달걀 냄새가 풍긴다.
아드레날린의 열기를 포카리스웨트로 식히며 착 붙어 다니는 년놈들, 특수유격대원 출신인 남자유모의 보살핌을 받는 듯한 졸렬한 구라들, 테스토스테론이 향수처럼 온몸을 감싼 수컷들의 몸놀림,
처녀와 매춘법의 이분법을 교묘하게 설정해 자기만의 방식을 주장하는 여자들,
그녀들이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빈정거리는 대신
"난 멋진 배 밖에 볼 게 없어요"라고 말하는 브리트니 스피어스도 아니건만, 개처럼 누린내를 풍기는 꼰데들의 거리도 싫다.
모두 죄를 짓는 곳. 빈약한 껍질에 둘러싸인 죄가 아니라 공증된 이데올로기로서의 죄.

책상 위에 엎드려 졸다가 전화를 받았다.
언젠가 회사에서 딱 한 번 5초 동안 인사한 적이 있는 한 브랜드의 홍보실장이었다.
그녀는 이러저러한 일로 회사를 그만두고 독립해 조그만 회사를 차렸다며, 어쨌든 '충걸 씨'를 아주 잘 알고, 더 알고 싶다며, 저녁에 만나 술 한잔 하고 싶다고 말했다. 오래 전부터 그러고 싶었지만,
이제야 용기를 내는 거라고 덧붙였다.
나는, 마음 써주셔서 고맙지만, 안 챙겨주셔도 괜찮다고, 회사 금방 만들어 당장 많이 바쁘실테니, 다른 우선 순위에 마음 쓰시라고 말했다.
그냥 단지 얼굴만 보는 건데 뭐 어떠냐고 그녀가 말했다.
지금은 피곤하다고 내가 말했다.
잠깐, 진공같은 침묵이 머물더니 그녀는 그러는 게 아니라며 전화를 툭 끊었다.
나는 여자가 테이블을 떠날 때면 일어나서 문을 열어주고 차를 잡아주는 서양식 매너를 알긴 한다.
드레스 코드 같은 원칙을 비웃기에는 다른 지켜야 할 규범들도 많으니까.
나는 다른 사람을 화나게 만드는 말이나 행동은 조금밖에 하지 않는다.
나는 단지 예의바를 뿐이다. 나는 몇십년 동안 나를 보호해주었던 상식들이 뭔지 잘 모르겠다.
그녀가 거절의 의미를 되새길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런 대접을 받아도 싼 건 아니다.
싸다고 생각하는 건 별개의 문제지만. 사람들은 두 가지 대립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여자도 남자도 무작정 덤벼들다 떠나간다. 그들 자신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그런 여자들은 자신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지 않는다.
꽃과 감상적인 카드를 보내주고, 가끔 헌신을 약속하는 그런 남자를 만나는 게 낫다.
그게 비즈니스건 아니건 말이다.
나는 1300년대에 세워진 영국식 펍에서 대사를 읊조리며 사는 삶에 관해 생각해 보었다. 아니면 하루가 모스크의 5시 아침기도로 시작되는 곳이라면?
씨 뿌리는 일을 그만두고 엄청난 굴레 속으로 들어가기로 마음 먹는다면?
그럼 모든 남자들이 꿈꾸는 것을 명백히 현실화시키고, 그걸 보란 듯 사람들의 상판에 뿌려주는 공상을 하지 않아도 좋겠지.
늦은 오후, 메탈 컬러의 햇살이 창을 뚫고 들어와 바닥 위를 춤추듯 비추었다.
밤에, 커피를 테이크아웃하는 남자친구를 기다리기 위해 이대 앞길에 차를 댄 채,그녀때문에 늘어선 다른 차의 행렬을 비웃으며 앉아있던 여자애를 보았다.
되바라진 행실을 쿨하다고 여기는 시대에 주장이 있는 소녀로 살아가기
페미니즘의 두번째 물결이 낳은 대단한 딸네미들.
그녀들은 자신들을 위해 존재했던 옹호와 투쟁의 지난 세월에 감사하기나 할까?
그녀는 몸에 구멍을 낼 수도 있고, 갑옷을 입을 수도 있고, 대학 장학금을 탈 수도 있겠지.
그녀는 처녀일 수도, 걸레일 수도, 둘 다일 수도 있겠지.
새로운 여자애가 되는 건 언제 어디서든 자신의 성(性)을 소유하는 거니까.
그리고 그 장엄하고 고무적인 비웃음을 통해 자신의 오점을 덮어버리겠지.
친구는 그 모든 풍경이 클림트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지리멸렬한 얼룩들을 보면서 흐릿한 꽃다발 속으로 녹아드는 클림트의 남자와 여자를 연상할 재능이 나한테는 없다.
나는 사냥철이 아닐 때 사슴을 만난 사냥꾼처럼 날 대하던 사람들이 모두 헤르페스성병 보균자가 되라고 빌고 또 빌었다.
내 모든일들을 빨리 내 인생에서 닦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나 또한 세상을 더럽히는 그 밥에 그 나물의 일원이 되어 서로의 죄악을 광고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누군가 나에게 뭔가 말하고 싶어하는 건 모든 세월이 우리 모두에게 살아있는 지옥 같기 때문이다. 그걸 알기 때문에 오래 괴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