ひとり日和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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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이 미워서. 평생분의 증오를 그때 다 써버린 느낌이야."
"평생분의 증오를 다 써버리다니, 무슨 뜻이에요?"
"이젠 난 아무것도 미운 게 없어."
"어떻게 해서 다 써버리셨는데요?"
"잊어버렸어."
"전, 젊을 때 허무감을 다 써버리고 싶어요. 노인이 됐을때 허무하지 않게."
"치즈 짱, 젊어서 그런 걸 다 써버리면 안 돼. 좋은 것만 남겨두면 나중에 나이 먹어서 죽는 게 싫어져."
"싫으세요, 죽는 거?"
"그럼, 당연히 싫지. 괴롭거나 아픈 건 몇 살을 먹어도 두려운 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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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로 나서면 누구와도 친밀하게 살을 부대끼는 일이 없어 몸이 점점 순화되어 가는 느낌이다. 사람들의 물결 속에 눈을 감으면 나 하나만 투명해져서 모든 것을 스윽 통과시켜 버릴 것 같다. 손톱도 머리도 단지 내 자신을 위해 가꾸고 있을 뿐이다. 거리의 녹음이 짙어지고 공기가 농후해지고 사람들의 옷차림이 거리낌 없이 얇아진다. 목욕을 마치고 가볍게 바디 로션을 바르고 나면 이 좋은 향기를 누군가에게 맡게 하고 싶단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런 나날이 이어지던 어느 날, 나는 사랑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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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정도 나이를 먹은 사람을 대하고 있으면 그 사람은 그 이상 늙지 않고, 자신만이 거기에 있는 늙음을 향해 초스피드로 굴러떨어져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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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자기 나이 같은 거 안 잊어버리세요? 전 가끔 제가 몇 살인지 까먹을 때가 있어요."
"자기 나이 같은 거야 안 잊어버리지."
"몇 살인데요?"
"일흔하나."
나는 내년에 스물한 살이 된다. 이 사람은 나보다 50년이나 오래 살았다. 내가 그 50년의 역사를 알게 될 일은 아마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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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일흔 살이 돼서도 말쑥하게 꾸밀 줄 알고, 자기만의 작은 집을 가지고, 밸런타인데이에는 초콜릿을 사러 가고, 그런 생활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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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왜?"
"저, 나가요."
"언제?"
"다음주요. 사원 기숙사에서 살게 된다나 봐요."
"그렇게 갑자기? 게다가, 남 일처럼 말하네?"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깅코 씨가 뒤를 돌아보고 웃었다.
"죄송해요."
"뭐가? 사과할 일이 아니잖니?"
"그건 그렇지만."
"혼자 사는 것도, 해볼 만해."
질냄비 안에 당근을 꼼꼼하게 늘어놓으며 깅코 씨는 말했다.
"그래, 젊었을 때, 집을 나가야지?"
나는 말없이 듣고 있다.
"젊었을 때는.... "
현관의 벨이 울린다. 오늘도 호스케 씨가 오는 것이다. 이젠 굳이 현관까지 나가서 맞이하지 않아도 그가 알아서 들어온다.
"고생을 배우는 거야."
그 '고생'이라는게 언제, 어떤 식으로 찾아오는 건지 나는 깅코씨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그리고 혼자서 어떻게 그걸 맞아들이면 좋은지 가르쳐 줬으면 싶었다.
지금 혼자가 되보고 싶다는 이 기분을 무시하면, 나는 언제까지고 여기 눌러앉아 아무것도 모른 채 평생을 마치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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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일 코너의 바나나 앞에서 깅코씨가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 이 사람은 어떤 사고 체계을 가지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우리는 서로에 대해 아직 극히 일부분 밖에 알지 못한다 나는 그녀의 배 속 검은 부분이나 야비한 부분을 끝까지 보지 못했고, 그녀도 내가 더 못되질 수 있다는 걸 모르겠지. 그런 관계로 좋았던 건지 나는 알 수 없다. 보다 나은 관계가 있었던 건 아닐까 생각했다. 누군가 옳다 그르다를 가르쳐주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불안한 것이다. 산처럼 쌓인 바나나들 속에서 한 송이를 골라내는 일에도 나는 '이걸 고르길 잘한 걸까' 하고 먹을 때까지도 끙끙 고민을 하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모든 걸 죄다 까발려도 상관없을것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내 심술궂음, 허무감, 불안, 그리고 '지난 1년 동안 당신의 소중한 보물일지도 모를 물건들을 몇 개 슬쩍했어요' 하는 것 등등 모두 다. 그녀가 그것을 어떤 식으로 생각할지 듣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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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양이들 사진 옆에 깅코 씨의 영정 사진이 나란히 걸리는 걸 상상했다. 언젠가 깅코 씨도 그 이름을 잃어버리고, 죽어버린 것들 가운데 하나로 그 개성을 상실하게 되는걸까? 아무도 그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게 되고, 뭘 먹었다든가 뭘 입었다든가 그런 자잘한 일상같은건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깨끗하게 사라지고 마는걸까?
아까부터 오른쪽 뺨에 깅코 씨의 시선이 느껴진다. 나는 눈치채지 못한 척 딸기 꼭지를 하나씩 뜰에 던진다. 깅코 씨는 "아아,춥다" 하고 중얼거리며 모포를 푹 뒤집어썼다.
먹을것도, 할 얘기도 다 떨어지자 나는 "아아,목욕물이나 받아둬야겠다"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순 시야에 비친 깅코 씨의 눈이 추위 때문인지 약간 젖어 있는 듯했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예정된 이별은 예기치 못한 이별보다 어렵다.
"울지 마요."
그렇게 내뱉고는 욕실로 뛰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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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자안의 물건들은 요즘의 나를 위로해주지 않는다. 마음을 추억으로 되돌려놓을 뿐이다. 괴롭거나 달콤했던 기억을 홀로 즐기는 걸 도와줄 뿐이다. 그래도 나는 상자를 버리지 못한다. 오랫동안 너무 의지해왔다. 상자를 들어올려 흔들어보자 안에 든 잡동사니들이 달그락달그락 마른 소리를 낸다.
깅코 씨의 머리맡에 앉아본다. 이 자그마한 할머니가 더이상 슬퍼하거나 허무해할 일이 없었으면 좋겠지만, 무리겠지. 다 써버렸다고 생각해도, 슬픔이나 허무감 따위는 끊임없이 솟아나는 법이겠지.
"가서 자라."
나는 깜짝 놀라서 큰소리를 냈다.
"안잤어요?"
"응"
"언제부터....?"
"처음부터."
"........."
"예전에 저 인형들을 가지러 여기 왔을 때도 안자고 있었어. 늙은이 들은 잠이 얕으니까."
그녀는 눈을 감은 채 말한다.
"역시 .... 안자고 있을 줄 알았어요. 전부 제자리에 가져다놨어요"
"늙은이를 바보취급하네?"
"네, 그랬어요."
"바보구나?"
"네, 바보에요."
"안가져가도, 달라고 하면 줄텐데."
"하지만 필요없는걸요?"
그렇게 말하자, 깅코 씨는 눈을 뜨고 짧게 웃었다.
"할머니."
"왜?"
"저, 이대로 좋을까요?"
깅코씨는 대답하지 않았다. 조용한 시선이 내 얼굴이며 어깨며 가슴이며 다리 위에 붓을 가져다대듯 순서대로 움직여 갔다. 그때마다 엷은 색이 입혀져 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한번더 물었다.
"글쎄, 모르겠네"
깅코 씨는 조용히 미소를 짓고는 돌아누워버렸다.
"할머니, 세상밖은 험난하겠죠? 저 같은건 금방 낙오되고 말겠죠?"
"세상엔 안도 없고, 밖도 없어, 이 세상은 하나밖에 없어."
깅코 씨는 딱 잘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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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도 중반에 접어들자 혹독한 추위가 약간씩 누그러드는 날이 생겼다. 그런 날은 아침부터 기분이 좋다. 샤워를 하고 팔뚝의 털을 밀고 좋은 냄새가 나는 바디 로션을 바르고 출근을 한다. 약간이긴 하지만 호감이 가는 사람이 생겼다. 이사한지 얼마 안 돼서 안도 씨에게 이끌려 참석한 옆 부서의 술자리에서 알게됐는데, 유부남이었다. 지금까지 없었던 패턴이다. 이 호감이 잘 풀리면 불륜이 되는 거겠지. 연락처를 교환하고, 술김에 역까지 손을 잡고 걸어갔다. 다음주 일요일에는 같이 식사를 하고 경마장에 가기로했다. 저 쪽도 내게 마음이 있는 건지 모르지만, 아무리 허둥대도, 걱정해도, 기대해도, 어차피 다 제 갈데로 흘러가겠지.
후지타 때처럼 죽 지켜보고 있고 싶다든가 같이 있고싶다든가 하는 생각은 아직 들지 않는다. 그런 열렬한 사랑법은 더 이상 불가능할 것 같다. 하지만 노력하면 제법 근처까지는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일을 하다 문득 고개를 들면 그가 멀리서 나를 보고있다. '일이나 하지' 하고 생각하지만, 기분은 그리 나쁘지않다.
미래가 없어도 끝이 보여도 어쨌든 시작하는 건 자유다. 이제 곧 봄이니까, 다소 무책임해지더라도 용서해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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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은, 지금도 변함없이 그곳에 있었다.
코앞에 보이는 나무 울타리도 여전히 높이가 들쭉날쭉하고 새로 돋아난 가지들이 여기저기 삐죽삐죽 불거져 나와있다. 바지랑대에는 앞치마며 목욕타월이 널려 있다. 그 너머로는 여기서는 반쪽밖에 보이지 않는 창문이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그 안에 있을 깅코 씨의 모습을 찾았다.
전철 안에서 보는 그 풍경은 무대 배경 사진처럼 정지돼있다. 거기에 있는 생활의 냄새나 감촉을 나는 이미 친근하게 느낄 수 없다. 내가 깅코 씨네 집에 살았던 것이 언제적일인지 문득 알 수 없어진다. 플랫폼에 나가 "여어" 하고 소리쳐도 그 소리가 저쪽 뜰에 닿을 때까지는 몇 년이나 걸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청춘'은 그런 것
도쿄와 이웃한 사이타마 현에서 엄마와 단둘이 살던 스무살의 여주인공 치즈는 엄마의 교환 유학을 계기로 도쿄에 혼자사는 먼 친척 할머니인 깅코 씨의 집에서 얹혀살게 된다. 그곳에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보내며 치즈는 '저축 백만엔과' 독립을 목표로 도우미와 역 구내매점 판매원, 사무보조 아르바이트를한다. 그 사이 연애를 하고, 그러다 차이고 상처받고 치유하기를 반복한다. 깅코 씨에게 온갖 심술과 어리광을 부리며, '어엿한인간', '무슨일에도 견뎌낼수 있는 그런인간', '매달 주민세도 연금도 의료보험료도 꼬박꼬박 내는 제대로된 사회인'을 향해 조금씩 성장해간다.
다들 좋아하는 건 밝고, 예쁘고, 친절한 사람인데 자신은 어둡고 못생기고 불친절해서 사람들에게 사랑받지 못한다는 컴플렉스에 빠져 있는 주인공 치즈는 애정을 갈구하면서도 "관계=상처"라고 지레 겁을 먹고 늘 고슴도치처럼 바늘을 세운 채 삐딱하고 퉁명스런 태도로 다른사람들과의 거리를 유지하며 살아간다. 그것은 자신을 낳아주고 15년 동안 홀로 키워준 엄마나, 신세를 지고 있는 깅코 씨에게조차 마찬가지다.
대신 그녀는 깅코 씨의 인형, 후지타의 담배, 호스케 씨의 은단 등 주변사람들의 자잘한 소지품들을 슬쩍해서는 상자에 모아두고 그것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자신이 맺어왔던(혹은 맺고 있는) 관계들을 기억함으로써 혼자가 아님을 확인하며 마음의 위로와 평안을 구한다.
기회가 있을때마다 나는 그 상자들을 들여다보며 그림움에 젖어들곤한다. 그리고 예전 주인들과 나와의 관계를
떠올리며 혼자서 킥킥거리기도하고 마음 아파하기도 한다. 그 속의 물건들을 만지고 있으면 왠지 마음이 놓였다.
버릇없고 심술궂고 유치하고 변덕이 죽 끓듯 하고 좀처럼 호감을 느낄 수 없는 주인공 치즈. 나도 그녀가 엄마나 깅코 씨에게 되바라진 행동을 보이는 대목에서는 스무살 치즈의 철없는 모습이 꽤나 밉살스럽다가도, 행간에서 읽혀지는 그녀의 여리고 따뜻한 마음, 외로움과 두려움에 금방 마음이 누그러진다. "괜찮아,괜찮아" 하며 그 안쓰러운 어깨를 쓸어주고 싶은 마음이 들고 마는 것이다.
한편 치즈의 온갖 히스테리와 심술에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그저 시치미로 일관하고, 일흔 한살의 나이에도 치즈의 화장품을 훔쳐바르고, 호스케 씨와 사교 댄스를 즐기고, 발렌타인 초콜릿을 선물도 하는 깅코 씨는 스무살의 치즈가 질투를 느낄 정도로 귀엽고 사랑스러운 할머니다. 그렇지만 결정적인 장면에서는 역시 "젊어서 그런 걸 다 써버리면 안 돼. 좋은 것만 남겨두면 나중에 나이 먹어서 죽는 게 싫어져". "틀에서 불거져 나온 게 인간. 불거져 나온 게 진정한 자기 자신" 이라든가 "추억은, 거기에 없어" 라고 하는 관록 넘치는 명대사에 '나이의 공력'이 느껴지기도 한다. 어쩌면 치즈가 시기했던 것은 자기와 달리 순조롭게 진행돼가는 할머니의 연애나 날로 에뻐지는 할머니의 모습이 아니라 자신이 꿈꾸던 "누가 무슨 소리를 하든 동요되지 않는" 여유와 강인함을 지닌 깅코 씨의 연륜이었는지도 모른다.
할머니, 세상 밖은 험난하겠죠? 저 같은건 금방 낙오되고 말겠죠?"
전철에 탄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들의 바쁜 일상을 부러워하면서도 좀처럼 사회로 한 발을 내밀지 못하던 치즈는, "세상엔 안도 없고 밖도 없어, 이 세상은 하나 밖에 없어" 하는 깅코 할머니의 조용한 응원을 받는다. 그리고 추억의 물건들과 작별을 하고 드디어 사회를 향해 자립을 위한 첫걸음을 내딛는다.
2007년 장마가 끝나길 기다리며
정유리 (옮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