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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힘으로 노저어 갈 수 있기를

정오가 조금 넘은 시간.집 근처 찻집에서 약속 시간을 또 지키지 않는 친구를 기다리다가 나는 창가에 홀로 앉아 있는 남자를 보았다. 그 남자의 눈은 퀭하고, 눈 그림자는 너무 짙게 그늘져 있었다.

그의 입술은 심하게 부르터 있었고 그의 피부는 너무 꺼칠꺼칠했다. 그는 커피를 마실 생각이 없는지 커피잔만 매만지다가 볕이 잘 드는 창문 밖을 자꾸만 쳐다본다. 나는 한눈에 그가 사랑을 잃은 사람임을 직감했다. 그의 얼굴과 그의 표정에는 사랑이 머물다 간 흔적이 역력하다.

그는 담배를 피우가 말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뛰쳐나가려고 하더니 이내 멈칫거리며 자리에 앉는다. 아마, 헤어진 사랑과 비슷한 사람을 보았던 것 같다.

아니, 지나가는 모든 행인들이 떠나간 그녀일 것이다. 그의 손에서 담배가 끊이지 않는다. 그는 연신 담배를 피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의 표정에서 안도감이 느껴졌다. 아니, 행복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는 창문 너머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데...

그건 아마 현실이 아니라, 추억이거나 그가 꾸었을 꿈의 영상일 것이다. 그 영상 속에서 그는 그녀와 해후하고 있을 것이고, 어쩌면 서로를 한없이 바라보고 있을지 모른다.

나는 잔인하게도 그의 사랑에 뜻밖의 해후는 없었으면, 하고 바란다. 섬세한 사랑일수록, 그렇게 불꽃 같은 사랑일수록, 잃어버린 사랑의 자리에 시간이 남기고 사라진 풍화의 흔적은 너무 크다. 그 뜻밖의 해후 뒤에 올 허전함을 어쩌겠는가. 사랑이 함께 한 시간만큼이나 추억의 달콤함도 소중할텐데...그 추억의 힘으로 그의 마음이 새로운 사랑으로 노저어 갈 수 있기를, 그를 행복하게 하는 추억만큼은 훼손되지 않기를, 그 안에서 그가 오래도록 행복하기를 나는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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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호 <생-섬> 2000
인물 중심의 채색화를 그려온 화가 이은호.
다소 복잡했던 그녀의 그림들은 많이 절제된 여백의 미를 살려가고 있다.
인간의 복잡함과  혼란스러움을 표현하고 싶어서였는지 그림 속 인물에 많은 색면들이 중첩되어 있고 그 인물은  넓게 펼쳐진 바다를 바라본다. 그렇게 인간은 자연을 동경하며 융화를 꿈꾸는 것이다.


모든 연인들은 위태롭다
  

함께 있는 그들은 언제나 위태위태해 보였다. 외면적으로는 늘 좋은 관계였고, 항상 연인다운 말과 몸짓이 따라다니곤 했지만, 때론 채워지지 않는 거리, 그 둘만의 공허앞에서 망연해지곤 했다. 그와 그녀는 서로 이해할 수없을 때마다 마음속에서 요동치는 불안과 다양한 무늬의 고뇌로 움츠러들었으며.그럴때마다 그는 언제나 멀찍이 물러섰고 그녀는 눈물을 보였다.
어느날 그는 내게 물었다. "왜 사랑한다면서 서로를 이해하기가 이렇듯 힘든 거지?"
그의 빈 잔에 술을 따라주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많은 인간이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그 문제 앞에서 나 역시 힘이 없었다.'그래 하지만 해답이 있겠니...
다만 때로 인내하고 해답을 만들어가는 거겠지 , 두 사람만의 해답을 말야' 
연인들도 때론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며 이야기한다. 똑같은 것을 다르게 보는 것은,
하지만 인간의 특성 아닌가? 문제는 그와 그녀가 서로 자신이 바라보는 대로 상대방이
따라와주길 기대하는 바람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 많은 연인들이 상대방를 오래도록
바라보려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모든 문제를 너무 가볍게 해결하려는 조급함으로 헤어지곤 한다

사랑은 혼자 하는 게 아닌데 , 둘이 하는 것인데.... 이런 생각들은 대부분 너무 때늦다
그래. 사랑하는 연인들은 그 행복만큼이나 언제나 위험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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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익(소나기) 1999




순식간에 왔다가 사라지는,
사랑은 소나기 같은 것

아름답고 고요하고, 무엇보다 순결한, 세상에 막 탄생한 듯한
시골 풍경이 있다.
그 눈부신 풍경속에 창백한 소녀가 있고, 그 소녀를 넋 놓고 바라보는
소년이 있다. 소년은 괜시리 물수제비 따위로 소녀에게 심술을 부리고,
소녀는 그 심술을 싫지 않은 듯 미소로 받아들인다. 그렇게 가까워지던
소년과 소녀의 어느 한낮 갑작스럽게 소나기가 쳐들어오고 그 둘은
나무 아래로, 동굴 속으로 소나기를 피해 다닌다. 그리고 이 순결한
연인들은 사랑의 떨림을 느낀다.
우리네 이야기 속에서 소나기는, 즉 뜻하지 않은 자연 현상은 사랑의
메신저로 흔히 활용되곤 한다. 이는 사랑의 우연성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랑이란 갑자기 왔다가 갑자기 사라짐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랑이란 하루종일 땡볕이 들다가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처럼, 내내 우중충하다가 비치는 햇살처럼 왔다가 떠나가기
마련이다. 단지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사랑의 흔적뿐이다. 그 흔적을
추억이라고 우리는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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