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동안 살고, 죽는 동안 죽어요. 살 때 죽어있지 말고, 죽을 때 살아있지 마요. 그냥 그렇게 살면 돼요. 과거 돌리면서 추억하지도 말고, 미래 예상하면서 걱정도 말고. 지금 사는 것처럼 지금을 살아요. 네?"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에서 전경(이나영)의 이 대사는 얼마나 많은 청춘을 구원했을까.?진짜 사랑을 하고 진짜 삶을 산다는 것. 간단한, 그러나 우리가 거의 잊고 사는 진리를 그렇게 절절한 말로 들려준 이는 작가 인정옥이었다.
영화판에서 일하다가 "돈이 너무 안 돼서"영화 <여고괴담>의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던 인정옥은 방송국 코미디 작가를 거쳐 드라마 작가가 되었다. 과작인 탓에 아직도 한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의 작품들이 전부지만 이미 <네 멋대로 해라> 한 편만으로도 그는 드라마의 새로운 어법을 제시했다. 모나고 외로운 사람들, 그러나 사랑과 죽음 앞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주인공 전경과 복수에게 수많은 시청자들은 열광했다. 그리고 <아일랜드>에서 인정옥은 또다시 상처투성이 고독한 인간들의 만남과 소통의 이야기를 펼쳐 보였다. 낯설면서도 친근하고, 쿨하면서도 따뜻한 그의 드라마에는 항상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습기가 감돈다.
<매거진 T>에서는 지난 6월 9일 창간 기념 이벤트로 인정옥 작가와 만남의 자리를 마련했다. 특유의 솔직한 말투로 '현재'의 진심을 담아 성실하게 이야기했던 인정옥 작가의 이야기를 여기에 모았다.
“대본은 저의 놀이터예요. 이렇게도 놀고, 저렇게도 놀고 싶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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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 ; <아일랜드> 끝나고, 그 사이에 잠깐 <떨리는 가슴>을 하셨지만 굉장히 오랜만에 외부로 나오셨어요. 그 사이에 어떻게 지내셨는지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인정옥 ; 요즘은 열심히 살림을 하고 있구요, 스쿠터 사서 타고 놀고 있어요. 부럽죠? (웃음)
T ; 혹시 7월 3일이 무슨 날인지 아세요?
인정옥 ; 글쎄요, 누구 생일인가?
T ; 2002년, <네 멋대로 해라>(이하 <네멋>)가 처음 방영됐던 날이에요. 그땐 월드컵이라는 축제로 인한 흥분이 살짝 남은 시기였는데, 그래서 우리도 삶에서 새로운 가능성들, 우리도 재미있게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마침 그때 <네멋>이 나왔기 때문에 우리가 좀더 그들의 삶에 관심을 가졌던 게 아닐까.
인정옥 ; 맞아요. 월드컵 때의, 누구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분위기 덕을 본 것 같아요.
T ; <네멋>의 복수나 전경 같은 캐릭터는 어떻게 만들어진 건가요? 혹시 작가님 주변에 그들과 비슷한 인물들이 있었는지.
인정옥 ; 그냥 제 머릿속에서 태어난 거였어요. 그 전에 <해바라기>라는 드라마를 할 때는 감독님의 주문이 굉장히 많았지만 <네멋>의 경우 연출자였던 박성수 감독이 시간이 부족하다고 저한테 일임한 상태였어요. 그럼 그냥 제 속에 있는 얘기를 써줘도 시간이 없으니까 작가를 자르지는 못할 것 같아서. (웃음)
T ; 원래는 방송국에 코미디 작가 공채로 들어갔었다던데, 본인이 재밌다고 생각해요?
인정옥 ; 저, 되게 웃겨요. (웃음) 사실 작가가 된 건 돈 때문이었어요. 원래 영화 연출부를 하고 있었는데 일을 하면 밥은 먹여줘도 돈은 1년에 100만원, 150만원… 이렇게 줬어요. 그러다가 다리를 다쳤는데, 누가 <여고괴담> 시나리오를 쓰면 900만원을 주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와! 하고 썼는데 200만원 받고 회사가 망해버렸죠. 그땐 방송국에서 코미디 작가로 <테마게임>을 3개월째 쓰던 중이었는데, 그래서 그 시나리오는 망한 영화사에 계시던 PD한테 드리고 나중에 영화 만들게 되면 나머지 돈을 달라고 했죠. 결국 3년 뒤에 투자를 받아서 영화가 나왔고 나머지 돈을 받았어요.
T ; 처음 시작이 영화였는데, 영화에 대한 포부 같은 건 없었는지.
인정옥 ; 전 포부 없어요. 쇼윈도에서 옷 보면 나한테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영화도 나한테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거죠. 그런데 옷은 잘 골랐지만 돈이 없어서. (웃음) 저는 장기적인 계획이 없는 사람이라 돈이 없으면 돈 되는 일을 해요. 예전엔 작가들을 보면서 왜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서 저렇게 사나 했는데, 제가 지금 작가가 됐어요. (웃음)
T ; <해바라기>는 메디컬 드라마였잖아요. 사람이 죽고 사는, 극단에 이르는 병원이라는 장소를 배경으로 진짜 드라마 작가 일을 시작하셨는데 사실 <네멋>도 굉장한 로맨스지만 결국 이것도 주인공 복수(양동근)가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이야기잖아요.
인정옥 ; 사람들이 “죽음은 삶의 연장이다”라는 말을 하는데, 사실 의학드라마 현장인 병원에서 느낀 건 “죽음은 일상이다”라는 거였어요. 병원에서는 죽음을 막으려고 하는 것도 일상이고, 누군가를 놓아주는 것도 일상이었기 때문에 죽음 자체가 갖는 진지함이나 심각함에서 좀 벗어나게 됐어요. 철학적으로 본다면 죽음은 존재가 사라지는 것인데, 과연 존재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했어요. 죽지 않고도 사람들은 자기의 존재를 느끼며 살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죽음을 앞두고 자기의 존재를 다시 바라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래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죽음이 우리한테 상징하는 바가 뭘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T ; 그러면 살아 있는 존재들이 모여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인정옥 ; 우는 거죠. 죽으면 정말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죽기 전에 어떤 법칙에 얽매여서 자기를 희생시키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적어도 내가 어떤 패배감을 가지고 죽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 같은 것. 이건 성공을 하고 안 하고의 차이는 아니에요. 내가 나를 더 빛나게 할 수 있는 여지들은 아주 작은 데서 찾을 수 있거든요.
T ; 그래서 복수가 자기를 사랑해주고 영원히 지켜줄 것 같던 미래(공효진)라는 여자에서 어쩌면 내일 떠나버릴지도 모르는 전경(이나영)을 선택하는 이유가 그냥 연애의 문제라기보다는 죽음의 단계에서 본인이 스스로 해야 하는 삶에의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네멋>이 끝난 지 4년이 지났는데, 그 사이 그런 철학적인 문제나 선택에 대한 생각에 변화가 있었는지.
인정옥 ; 지금도 바뀌지 않은 것 같아요. 사람들은 죽음 직전의 숭고함을 보려고 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죽음 직전의 이타성이나 숭고함은 남 보기 좋은 얘기고 남을 위한 일인 것 같아요. 하지만 이걸 선택하지 않으면 내가 죽는 순간 그 공허감을 달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면, 저는 그 선택은 가장 이기적이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T ; 사실 처음에 <네멋>을 봤을 때 가장 놀랐던 건 주인공 이름이었는데, 어쩜 고복수라는 이름이 나올 수 있을까. ‘민’도 아니고 ‘준’도 아닌, 우리가 응당 주인공 이름이라고 믿어왔던 게 아닌…. (웃음)
인정옥 ; 불치병 청년이라는 설정을 해놓고 이름을 ‘복수’라고 지으니까, 감독이나 스탭들은 “얘가 무슨 복수를 하나 보다” “죽음의 본연에서 복수를 하려고 하느냐”라고 하는 거예요. 나는 “세상에 내 식대로 복수를 하겠다”는 거라고 했는데, 그걸 좀 웃기게 생각들을 하셨어요. 근데 그게 내 식대로의 복수였어요. “나, 내 멋대로 살래.”
T ; <네멋>이 보여줬던 것 중에 가장 반가웠던 것은 성공한 사람들이 아니고, 혹은 성공을 향해 치닫는 사람들이 아니고 ‘루저’ 캐릭터의 집합체 같은 사람들이었거든요. 전경이라는 애도 큰 미래가 있거나 아주 훌륭한 뮤지션이 되겠다는 애도 아니고, 복수야 결국 날 받아놓고 있는 애니까….
인정옥 ; 소매치기만 벗어나도 뭐…. (웃음)
T ; 그런데 왜 굳이 성공한 사람들이나 뭔가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아닌 그런 캐릭터를, 한두 명도 아니고 등장인물 넷 다 그렇게 만들었는지.
인정옥 ; 제가 성공의 느낌을 잘 몰라요. 성공을 하는 과정이나 성공의 그림이 잡히질 않았어요. 그러니까 사실은 그래서 이런 캐릭터를 만들고 시놉시스를을 줬을 때 박성수 감독도 굉장히 걱정을 했어요. “뭐 하는 거냐”고 그랬었죠. (웃음) 그래서 설명을 드릴 수는 없어서 “그럼 대본을 보시면 안 될까요?” 했어요. 그래서 대본을 드렸더니 감독님이 읽어보고 대박이래요. 속으로 “대박 아닌데” 그랬죠. (웃음) 박성수 감독도 이런 건 자기가 받아본 적이 없는 대본이라고 했어요. 그 신선함이나 문체 자체를 좋아했어요. 그런데 사실은 방송이 4회까지 나갔을 때, 박감독은 대박이라고 생각했지만 시청률이… 그래서 저한테 이거 방향 수정을 해야겠다고 오셨는데, 제가 보기엔 “제가 뭘 고쳐서 되는 게 아니라 작가를 바꾸는 게 좋으실 것 같다” 그랬어요. (웃음) 싸운 게 아니라 저도 간절하게 감독님이 너무 불쌍해서 아무래도 작가를 교체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얘기를 드렸는데. 그 시기였던 것 같아요. 그 당시에 저는 네티즌이 어떤 일을 하는지 그런 걸 잘 몰랐어요.
T ; 여러 일을 하시죠. (웃음)
인정옥 ; 하여간 그때 이상한 현상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 시청자 게시판에 올려진 글들이 언론 기사에 소개가 되고, 방송국 사람들에게 전달이 되고, 박감독이 그 얘기 있고 나서 며칠 뒤에 씩씩하게 오더니 “쓰고 싶은 대로 쓰세요”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이게 무슨 일인가 했고 의아했어요. 박감독이 시청자 게시판에 들어가 보라고 해서, 한 번도 그런 데 들어간 적이 없어서 물어보고 들어갔어요.
T ; 실제로 컴맹 수준이시잖아요.
인정옥 ; 그렇죠. 그런데 네티즌의 덕을 먹고 살죠. (웃음)
T ; 가끔 그 이후 전경과 복수, <네멋>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생각해보신 적 있으세요?
인정옥 ; 잘살 거예요. 그 생각은 더 안 하죠. 까먹어요. (웃음)
T ; <네멋> 이후에 굉장히 극단적인 설정의 드라마들이 많이 나왔어요. 실질적으로 모방을 했다기보다 <네멋>의 영향을 받았다는 느낌이었는데 그 후 일련의 드라마들에서 극으로 치닫는 상황들을 보면서 어떤 느낌을 받으셨는지.
인정옥 ; 글쎄, 극단적 설정이라는 건 그동안 많이 있었기 때문에 저 이후인 것 같지는 않고, 구현 방법에 있어서 <네멋> 이전에는 그 방법이 너무 계산적이었던 것 같아요. 그 이후로는 오히려 다양해진 것 같아요. 그래서 사실 그런 극을 보면서도 별 생각을 안 해요.
T ; 남의 작품에 관심이 없으세요?
인정옥 ; 관심이 없다기보단 ‘나보다 못 써야 되는데…’ 하는 생각이 들죠. 남들이 잘 쓸까봐 겁이 나요. 어떤 건 좀 못 쓰는 것 같아서 기분 좋아요. (웃음)
T ; 그동안 젊은 작가들의 드라마에서 부재했던 것이 가족이라는 존재였던 것 같아요. 주인공은 늘 오피스텔 같은 데서 집 구해 살고 엄마는 돌아가셨다는 식으로. 젊은 작가들에게는 가족이 너무 배제되어 있고 나이 든 작가들에게는 가족으로부터 발목을 잡혀 있는 상태의 드라마들을 보아왔는데, <네멋>이나 <아일랜드>에서는 젊은 주인공들이 계속 가족 안에서 북적거리고 있잖아요. 본인에게 있어 가족은 어떤 의미인가요.
인정옥 ; 그게 제일 어려운 질문인 것 같아요. 가족은 제가 아무리 몸부림쳐도 떨어질 수는 없는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사실 객관화되어 있기 때문에 가만 보면 개별적으로 그 사람들이 보여요. 우리 엄마, 아빠, 오빠들로… 이 사람들이 ‘내 게’ 아니라. 가족이 힘든 부분이 서로 “내 꺼” “내 소유”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저는 좀 소유욕이 없는 편이라 그런 것 같아요. 이 사람들은 ‘내 게’ 아니라 나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 어려서부터 객관화가 되어 있었던 것 같아요. 가족들하고 대화를 잘 안 해서 그런 것 같아요. 우리 가족들은 자기네끼리 대화 많이 하는데…. (웃음) 저는 가족간에 뭉쳐서 대화를 별로 많이 안 했어요. 우리 집은 장사꾼 집안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어느 가게에나 밥만 먹여주면 일을 봐주는 가정부 언니와 종업원 아저씨들이 있었어요. 저는 그분들과 함께 자랐기 때문에 오히려 가족간의 유대를 그분들과 나눴던 것 같아요.
T ; 그런데 드라마에서 가족을 소외시키지 않고 계속 등장시켰던 이유는 무엇인지.
인정옥 ; 드라마 속에서 가족은 나를 귀찮게 굴잖아요. 그런데 그건 귀찮다고 해서 없앨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에요. 가족과 화를 내고 싸우고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얼굴이 못났잖아요, 그러면 이 못난 눈코입이 싫어도 떼어버릴 수는 없잖아요. 물론 성형이나 개보수는 가능하죠, 가족도. (웃음) 가족은 내가 받아들이고 거부하고의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나라는 사람에게 딸려오는 거죠. 사실은 그런 가족들의 성향과 모습이라는 게, 가족은 내가 보기엔 굉장히 비슷해요. 내가 나를 파악하는 방법에 있어서 가족들을 보면서 나한테 저 지점이 있음을 파악하죠. 나한테는 거울 같다고나 할까.
T ; <네멋>이 시청률 같은 부분을 떠나서도 작가로서는 굉장히 큰 성공을 이룬 작품이었잖아요. 모든 사람이 그렇지만 첫 번째 성공을 이루고 나면 소포모어 신드롬이라는 게 있는데, 아일랜드를 시작하기 전에 “이런 글을 써달라”는 마니아들과 주변의 기대가 스트레스는 아니었는지.
인정옥 ; <네멋> 끝나고 나서 한 달 정도가 굉장히 스트레스였어요. 저는 좀 지은 죄가 많기 때문에 어디에 드러나는 게 굉장히 무서웠어요. (웃음) 그리고 <네멋>에 대해서는 저에 대해 기대하는 바를 느꼈어요. 그런데 오히려 작품에 있어서는 그런 부담감은 없었어요. 차라리 이런 것들은 있어요. 저는 <해바라기> 때부터 대본을 쓸 때 “이번 대본에서는 이것만 하자”는 게 있다. <해바라기> 때는 처음 시작하는 드라마였으니까 “공식대로 가자, 공식대로 가되 민망하지 말자”라고 생각했어요.
T ; 예를 들어 민망하다는 건 어떤 것?
인정옥 ; 남자역과 김희선을 뽀뽀를 꼭 시켜야 된다던가, 아니 병원에서 어떻게 뽀뽀를 해요? (웃음) 민망해서 그런 건 못하겠더라구요. 그때 이진석 감독님이 저를 작가로서 좋아하긴 하시면서도 “너는 분위기를 띄워 놓고 찬물을 끼얹는다”라고 말씀을 하셨어요. 그 작품은 공동 집필이었는데, 사실 그 드라마 하자고 저를 꼬실 때 정말 한국적인 의학드라마를 하자고 했거든요. 한 4, 5회까지는 의학 드라마 냄새가 좀 났어요. 그런데 이게 시청률이 좀 좋았나봐요. 시청률이 좀 나빴어야 되는데 좋으니까 감독님이 이 시청률을 유지하려면 예전의 방식을 쓰기로 하신 거죠. 그게 나쁜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민망한 주문 같은 것들은 제가 많이 비켜갔던 것 같아요.
그리고 <네멋> 때는 그 전까지의 드라마가 너무나 책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어서 드라마에 일상성을 부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은 그냥 그것도 민망하지 않으려고 한 건데, 그 이전의 드라마와 얼마나 달랐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네멋>이 끝나고 나서 보니까 드라마들에서 모든 게 또 일상화되었더라구요. 가장 자연스런 것들이 주가 되는 드라마들이 제가 쉬는 동안 많이 생겨난 거죠. 그러다 보니까 그걸 보기가 귀찮더라구요. 그래서 <아일랜드>의 하나의 목표는 “그럼 이제 문어체를 좀 가지고 놀아보고 싶은데”라는. 사실 작가로서의 쾌락이랄까, 유희였던 거죠.
그래서 이전에 내가 썼던 것에 대한 부담감이 있었다기보단 나는 워낙 변덕이 심하니까. 내것도 금방 질려 하고. 그러다 보니까 지금 드라마의 추세, 트렌드들이 이 변덕의 추이를 어떻게 맞춰야 되는지가 부담이었어요.
T ; 그래서 <아일랜드>에는 독특한 말투를 쓰는 사람들이 많이 등장을 했죠.
인정옥 ; <아일랜드>를 쓰기 직전의 제 언어 생활이 그랬어요. 사실 제가 일상의 생활 주기대로 글을 쓰다 보니 많이 쓰지 못하고 한 2년에 한 편 쓰게 되죠.
T ; <네멋>보다 <아일랜드>를 훨씬 더 좋아하는 분도 계시고, 작가 본인도 <아일랜드>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셨다고 들었어요.
인정옥 ; 사실 <네멋> 같은 경우에는 대본뿐 아니라 그때가 사람들의 멘탈이 좀 바뀌어 있는 시기였어요. 그러다 보니 굉장히 기현상이 되어버린 거죠. 나는 작가와 감독이 회의해서 조율하는 것을 싫어하는데 박감독은 모든 걸 자기 통제하에 두는 버릇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때 박성수 감독은 시청자의 입장에서 대본을 받았어요. 감독이라면 이후에 어떤 상황이 될지 궁금해하잖아요. 하지만 그때는 박감독이 그냥 무리하지 않고 놔버리고, 오로지 “이건 재밌다, 아니다”에 대한 평가밖에 없었어요. 그 당시에는 감독이 감독이 아니라 배우였고 저는 뒤에서 원격조종을 하는 사람 같았어요. 그래서 그때 <네멋> 같은 경우에는 한 해의 기현상이 만들어낸 아우라가 있었어요. <아일랜드> 같은 경우는 사실 정반대의 상황이었죠.
T ; 그때 사실, 다들 얼마나 잘 쓰나 보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고….
인정옥 ; 그랬겠죠. 왜냐하면 사실 내가 미니시리즈를 <아일랜드> 전에 딱 두 편 써봤고 <해바라기>는 공동 집필이었잖아요. 그러니 사실 <네멋> 같은 경우도 MBC 내에서 젊은 감독 몇 분 외에 데스크에 계신 분들은 보지도 않았다고 해요. 인기가 있다는 현상은 아는데 봐도 재미가 없고 잘 알아듣지도 못하겠다고. 그래서 저게 지금 대본을 잘 쓰는 건지 뭔지 헷갈리셨던 거죠.
T ; 우리가 대본체라고 하는 기본적인 대본에서 벗어나 있는 식으로 많이 쓰셨다고.
인정옥 ; 그래서 사실 대본 지문들에 코미디가 많았어요. 원래 대본은 그렇게 쓰는 게 아닌데 쓰다가 지루하니까 괄호 치고 지문에 쓸데없는 얘기 쓰고 그랬었죠. 나중에 박성수 감독이 자기 혼자 깔깔대고 웃더니 “배우들 보니까 지워달라” 그러고. (웃음) 그리고 시놉시스랑 대본이 많이 달랐어요. 왜 그런가 했더니, 저는 다른 사람이 쓴 드라마 대본을 본 적이 없었던 거예요. 대본이 그냥 저의 놀이터니까.
T ; 그런데도 드라마를 쓰는 게 가능한 건 천재성인가요? (웃음)
인정옥 ; 자꾸 그러면 그렇다고 그런다? (웃음) 드라마 작가든 소설가든 예민한 감수성이 있는 것 같아요. 남들 눈에 보이는 것과 다른 걸 볼 수 있는 감수성 같은 건 타고난다기보다 집안 환경과 성격인 것 같아요. 그리고 전 우리나라에서 이상 빼놓고는 천재인 줄 모르겠어요. 이상은 정말 천재인 것 같아요. 사실 저는 어렸을 때 제가 천재인 줄 알았어요. 요절을 할 것 같았거든요. (웃음) 그랬는데, 저도 참 오래 살고 있어요.
T ; 그러면 인정옥이라는 소녀의 어린 시절, 십대에는 어땠나요? 학교 다닐 때 어두운 사람이었다던데. (웃음)
인정옥 ; 소녀였던 적은 없고, 그냥 십대라고 할게요. 어려서부터 저희 엄마 아빠가 조그만 가게를 하셨는데, 장사꾼 집 딸은 시장에서 자라잖아요. 내가 무슨 말을 하면 나한테 붙는 사람들이 많다는 자의식이 있었어요. 어차피 장사라는 게 알고 보면 사긴데. 내 피에는 사기꾼의 피가 흐른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말 한마디는 어쩌면 사기일 수도 있어, 라는 것들이 마음에 좀 많이 걸렸어요.
제가 창작이라는 것에 대해 그닥 관심을 안 기울였던 것도 뭔가 사기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기 때문이에요. 이를테면 남이 만들어놓은 걸 주무르는 기술자인 것 같고, 내가 뭘 처음부터 만드는 건 사기 같고.
T ; 본인이 사기를 잘 치고 있는 것 같은가요?
인정옥 ; 사기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언뜻언뜻 해요. 어떤 면인지는 모르겠어요. 그게 저의 어두운 면이에요. (웃음)
“저도 작가님처럼 양아치들과 연애를 많이 해봤지만 어떻게 그들을 그렇게나 미화시킬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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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 ; 저는 직장에 다니면서 취미처럼 시나리오를 몇 편 써보고 있습니다. 돈을 떠나서 작가님은 글쓰기가 즐거운지, 얼만큼 즐거운지, 힘들면 얼마나 힘드신지 궁금합니다.
인정옥 ; 힘들 땐 죽을 것 같다, 한마디로 “이러다 죽겠다”는 생각이 들고 즐거울 때는 “난 천잰 거 같애” 할 정도로 즐거워요. 사실 글을 쓰는 동안에는 즐겁다, 힘들다는 감정 자체가 잘 안 들어요. 그저 어떤 바다에 뛰어든 기분이라 내 글의 퀄리티를 생각할 정신 자체가 없어요. 지금 내가 헤엄을 치고 있다, 죽기 살기로 헤엄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그런 상태에서는 즐겁거나 힘들다는 감정들을 분리해내기 힘든 거죠. 쓰는 내내 “나는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은 들어요. 그런데 재미난 건, 대본 하나를 넘기고 나면 “나는 천잰가 봐” 이런 상태가 된다는 거예요. (웃음)
피플 ; 작가 지망생입니다. 작가님의 작품에는 과감한 대사나 지문이 많은데, 수위 조절을 하면서 “이것만큼은 감독으로부터 지키겠다”는 생각을 하신 적이 있으신지.
인정옥 ; 일단 감독과 싸움을 크게 해본 적은 없어요. 그런데 <네멋>에서 전경(이나영)이 한기자(이동건)와 춤을 추다가 “나 남자랑 자봤어요”라고 하는 대사에 박성수 감독님이 밑줄을 그어온 적이 있어요. 박감독님의 입장이 아니라, 한국 시청자들이 보기에는 사랑스러워야 하는 여주인공이 남자랑 자봤다고 말을 하는 건 천박해 보일 수 있다는 거예요.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때 제가 굉장히 긴 시간 동안 촬영장까지 가서 바꾸지 말아달라고 부탁을 드렸죠. 다른 부분은 다 바꿔주겠다, 그 대사만은 바꾸지 말아달라고. 그건 사랑을 하는 전경의 캐릭터에 꼭 필요한 부분이었기 때문이에요. 전경이 그냥 청초한 여자가 아니라 굉장히 보편적이고 보통 여자애였다는, 그래도 자기가 지켜야 되는 영혼의 울림에 충실한 여자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결국 나중에 일부러 토를 달아 “나는 예전에 그 남자를 사랑했기 때문에 자도 된다”는 대사를 넣었지만 사실은 그 말도 필요 없었다고 봐요.
피플 ; 매력 있는 배우들과 함께 작업하신 적이 많은데 그 중 본인의 타입은 누구였나요?
인정옥 ; 전 잘생긴 분들은 다 좋아해요. 양동근은 그때 음반을 냈을 땐데 거기 실린 뒷모습 사진에서 제 눈에는 엉덩이가 굉장히 섹시해 보였어요. 원래 <네멋>은 다른 스타급 배우가 캐스팅될 뻔했는데 계약관계 때문에 안 됐어요. 그래서 이나영, 양동근 카드를 넣은 거고. 저야 제가 좋아했으니까 좋았죠. 사실 연기력에 대해 다른 분들은 걱정했는데, <네멋>은 모델이 있는 드라마가 아니었기 때문에 굳이 연기를 잘하는 사람이 필요하지는 않았어요. 못해도 된다 싶었는데, 연기를 굉장히 잘하더라구요.
그리고 현빈이라는 배우는 정말 예뻐서 캐스팅했어요. 저는 원래 남의 드라마는 안 보고 남의 코미디는 보기 때문에 현빈이 나오던 시트콤을 봤는데 너무나 예쁘게 생기고 어투가 좋았어요. 그래서 김진만 감독에게 추천했고, 지금도 참 예쁜 배우라고 생각해요. 김민준 같은 경우 너무 남성미가 풍겨서 제 스타일은 아니었어요. 그리고 제가 <다모>를 못 봤기 때문에 연기하는 걸 본 적이 없었는데 김진만 감독이 적극 추천해서 캐스팅하게 됐죠. 아직 연기력에 있어서는 미흡한 부분이 있지만, <아일랜드>를 보는데 그냥 얼굴만 봐도 좋은 거예요. 김민준의 그 공허한 표정들이 저한테는 남달랐어요. <아일랜드>의 이재복 캐릭터는 소화하기 힘든 배역이었기 때문에 양동근과 비교가 되면서 초반에 욕을 좀 먹었어요. 그런 점은 가슴이 아팠죠. 자꾸 양동근과 비교되니까 미안했고, 내가 좀더 노력하면 김민준이 욕먹지 않고 그 사람의 반짝이는 매력들을 사람들이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했어요. 저는 배우가 연기를 못한다고 하는 건 전적으로 작가와 감독 탓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아일랜드>에서는 이나영한테 가장 미안해요. 나쁜년이라고 하도 욕을 먹어서. (웃음) 그리고 제 스타일은… 남자면 다 좋은 것 같아요. (웃음)
피플 ; 제 스무살의 드라마를 선물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도 우울한 날에는 <네멋> 대본을 가끔 보는데, 읽고 나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걸 느끼게 돼요. 작가님이 추구하시는 건 정말로 쿨함인지 절제된 따뜻함인지, 그게 만약 절제된 것이라면 그 이유가 있는지 궁금해요.
인정옥 ; <네멋> 끝나고 왜 그렇게 저한테 쿨하다고 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아마 제가 감정 표현을 잘 못하는 성격이라 그런 것 같은데, 사실 저더러 쿨하다고 하는 이유도 모르겠고 쿨한 척한다는 것도 잘 이해가 안 가요. ‘쿨’은 제 머릿속에 있는 단어가 아니거든요. 그건 아마 그냥 다른 사람들이 저를 가장 쉬운 단어로 설명하려고 할 때 그 단어가 떠올랐던 건 아닐까 해요. 저는 쿨하다기보단 무책임하죠.
그리고 다 한 요소인데, 저는 절제라기보단 감정 과잉이 잘 안 돼요. 슬프거나 힘든 일이 있으면 “아, 좀 힘드네”, 그러고 돌아서서 그냥 자요. 아니면 술을 먹든가 손톱을 깎든가. 그래서 드라마상의 표출 방법이라는 게 감정 과잉이 나에게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저절로 그렇게 되는 거예요. 전 감정이 과잉되질 않기 때문에 함축적이고 압축적인 걸 좋아해요. <해바라기>의 이진석 감독님이 저더러 “잘 가다가 왜 찬물을 끼얹냐”고 한 것이 저를 잘 표현한 것 같아요. 그냥 거기까지만 제 감정이 가거든요. 아마 그런 성격들이 드라마상에서 어떤 사람한테는 계산적으로 보일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 같아요.
피플 ; 드라마 안에서 자신이 구현할 수 있는 작품 세계의 매력과 타 매체와 구분되는 장점은 무엇인지.
인정옥 ; 드라마가 갖는 장점은 장편이라는 것과 한 회 한 회 검증이 가능하다는 거예요. 제가 생각하고 있던 것들을 계속 발전시켜나가는 과정들이 재미있어요. 그리고 지금 같은 제작 환경에서는 현재, 2006년 6월에 일어나고 있는 일이 대본상에 많이 가미가 되는 식의 동시성이 있어요. 아마 사전제작이 활성화되면 그런 부분은 계산을 해서 써야 하겠죠. 그리고 감독과 배우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으로 생명감을 느끼기도 해요. 감독까지 포함해서, 작가가 보는 보석이 있거든요. 어떤 배역이 1회에서 이만큼의 크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남들은 몰라도 나만이 보는 이 사람의 장점과 빛나는 부분이 있다면 그걸 집중해서 키워낸다는 매력이 있어요. 저는 작품에서 구현하려는 이야기가 제일 중심에 있지는 않아요. 오히려 지금 이렇게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사람들이 어떤 형태로 더 빛나게 보일까가 더 재미난 작업이죠.
피플 ; <아일랜드>에서 주인공들이 손바닥으로 우산을 만들어 씌워준다던가 하는 장면 연출 같은 것들은 연출자와 어떻게 상의하셨는지.
인정옥 ; 저는 영화 연출부를 했기 때문에 영화적 언어에 익숙해져 있어요. 영화적 언어는 대사 중심이 아니라 영상 중심이거든요. 대본상에서도 그런 영상지문을 좀 구체적으로 써줘요. 감독님들도 그런 지문이 있으면 카메라 앵글 같은 것을 일일이 물어오기 때문에 그런 것들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는 편이에요.
피플 ; 저는 <아일랜드>에서 가장 감명 깊었던 부분이, 주인공들이 어릴 때의 자기 트라우마들과 만나서 화해하는 장면이었어요. 어떻게 생각하신 건지.
인정옥 ; 저는 미리 그런 걸 쓰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아일랜드>에서 흘러가다 보니 배우와 캐릭터를 일체화시키는 경향이 생겼어요. 그래서 그 네 명의 주인공, 배우들을 어루만지고 싶다는 마음이 더 강했는데 그 방법을 내가 모르니까 각자 자기를 닮은 어린애들을 데리고 나와서 한번 볼이라도 쓰다듬어주면 되지 않을까. 사실은 머리가 나쁘기 때문에 그렇게 단순한 부분에서 영상들이 출발하는 것 같아요. (웃음)
피플 ; 작가님의 작품을 보면서 쿨하다는 느낌보다, 20대의 정서를 어떻게 그렇게 알콩달콩하게 표현하실까 하는 감탄을 많이 했어요. 일상보다 일탈 쪽에 사는 젊은이들의 언어를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시는지.
인정옥 ; 저는 주위에 젊은 사람이 없고, 20대를 싫어해요. 20대를 아는 게 아니라 그냥 인간이 라는 게 그래요. 나이 들어보세요. 인간이 그렇게 다르지 않고 비슷해요. 단지 나이가 들면 어린 사람들이 모르는 걸 알게 돼요. 단지 20대가 모르는 얘기를 “너네 이거 알아야 된다”고 들이밀지 않을 뿐이에요. 그건 그 사람이 어떤 시기에 닥쳤을 때 결국 알게 되는 문제인데 미리 너네들이 이러는 건 다 소용없다고 얘기하는 건 아니라는 거죠. 사실 제가 나이 드는 과정에서 알게 되는 것들이 굉장히 재미나요. 하지만 재미날 뿐이지 조언할 부분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이가 들수록 더 답은 모르겠는데, 내 얘기는, 아마 내 나이가 되어본 사람들은 더 잘 알 거예요. 옳고 그름의 문제, 내가 20대에 행했던 것들은 나한테 어떻게 작용했을까 하는 것들도 사실 언젠가는 다시 다 해체되는 단계에 이른다, 그러니까 그냥 모두 다 죽을 때까지 불안정하고 불안한 인생이라면 조언할 게 아니라 지금 이 시간 이 순간에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감성들에만 충실하면 된다고 보는 거죠.
아마도 그냥 제가 감성적으로 단발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행했던 것들을 보고 제가 20대의 정서를 많이 체득하고 있다고 오해하는 것 같아요. 사실은 그게 아니라 저 자체가 감성적으로 단순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보였던 것뿐인데.
피플 ; 작가님과 비슷한 연배인 저에게는 방금 하신 말씀이 잘 와닿습니다. 사실 제가 정말 궁금한 건, 작품에서 남자 주인공들이 항상 양아치들인데, 저도 작가님처럼 양아치들과 연애를 많이 해봤지만 그들의 더럽고 찌질한 모습들은 다 어디 갔나 싶거든요. 어떻게 그렇게 그들을 미화시킬 수 있나 해서.
인정옥 ; 참 찔리는 질문이네요. (웃음) 사실 제가 양아치들과 사귀어봤기 때문에 알지만, 정말 양아치는 김민준이나 양동근 같지 않죠. 그런데 작가 중에는 자기의 경험들이 그대로 하나의 극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에 자기의 경험과 현실을 그대로 서술하는 작가가 있고, 그렇지 않은 작가가 있어요. 저는 제가 겪었던 일들을 그대로 기술하는 데에서는 의미를 찾지 못하거든요. 그건 나만의 경험이고 일기로 써서 끝날 일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겪었던 단편적인 경험들은 드라마 작업에서 저에게 다른 의미를 부여하죠. 그래서 사람들은 제 작품에서 리얼리티에 점수를 많이 주는 편이지만, 사실 예민한 사람들은 그게 리얼리티가 아니라는 걸 알아요. 작가가 재밌는 건 바로 그 지점이기도 해요. 확률적으로 그런 상황에서 이런 행동을 한다는 건 사실 말이 안 돼, 그런데 그래도 내가 이걸 왜 말이 되게 하려고 하는가가 더 중요한 문제인 거죠. 어쩌면 현실에 있을 수 없는 일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이를 테면 백 명 중 단 한 명에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면, 그런 것들이 내 사색에 어떤 의미를 주는가 하는 고민을 많이 해요.
피플 ; 드라마 시청자 게시판에는 주로 “누구랑 누구 이어주세요”, 이런 식의 글이 많았는데, <아일랜드> 쪽에 가 보니 “강국이 포도씨를 뱉고 삼키는 건 무슨 뜻일까?” 하는 식으로 사람들이 굉장히 분석적인 소감을 올리곤 하더라구요. 시청자들이 해석하는 것처럼 비유와 상징 같은 걸 생각하고 글을 쓰시는지, 만약 그렇다면 그것 때문에 매니악하다는 평을 많이 듣는 것 같은데, 그러면 누구나 어떤 계층의 사람이 봐도 받아들일 수 있는 드라마를 쓸 생각은 없으신지.
인정옥 ; 어느 순간 영상이나 소재가 어떤 의미를 주는가는 계산이라기보다 제 마음속에 있는 부분이에요. 모든 장치들이 저한테는 함축적인 의미가 있어요. 그래서 제 드라마에 대해 보는 분들이 “저게 또 뭔 짓을 했을까” 하고 분석하시는 게 버릇처럼 된 것 같아요. 한편에서는 그렇게 보시지 말고 가볍게 받아들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그런 욕구 자체는 이해를 해요. 문제는 분석을 하고 안 하고에 있는 것 같지는 않아요. <아일랜드>의 경우에는 제가 보기엔 연기와 작가와 감독의 호흡이 약간 부족했는데, 그 부분이 잘 어우러졌다면 사람들이 그것에 매달려 있지는 않고 그냥 흘러갔을 수도 있어요. 그 부분은 제가 여러모로 미안한 부분이죠.
그리고 제가 대중성을 무시하는 건 아니에요. 기본적으로 드라마 작가는 대중적인 작가니까요. 사실은 내가 차라리 시청률 3, 40%를 기준으로 해서 대중성에 초점을 맞춘다면 쉬운 작업일지도 몰라요. 그런데 그건 쉬울 뿐만 아니라 포기해야 될 것들이 굉장히 많죠. 민망한 짓을 해야 한다는 거니까, 제가 그걸 극복해야 하는 문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어요. 사실 못하겠거든요.
차라리 15~20%의 시청률을 유지한다는 게 제일 힘들어요. 어느 정도의 퀄리티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대중성을 잡아야 하는 부분이니까. 그건 나한테 숙제 같은 거예요. 사실 이번에 썼던 <내가 나빴다> 같은 경우엔 장르성이 강하기 때문에 제 생각엔 시청률이 좋을 것 같은데 잘 모르겠어요. 일반 대중들 탓을 할 건 아니고, 내가 풀어야 할 문제인 것 같아요.
몇 달 전에 이나영이랑 통화하는데 “언니도 시청률 높은 거 쓸 수 있잖아. 30% 넘는 거 쓸 수 있잖아” 그래요. 그래서 제가 “나한테 그러지 말고 30% 넘는 거 해”, 그랬더니 “언니, 그래도…” 그러기에 “너… 언니라고 그러지 마. 이모야 이모”그러고 끊었어요. (웃음)
사실 나는 배우를 만나서도 나만 믿으라는 말을 못 해요. 누가 “저는 작가님만 믿어요”, 그러면 “니가 왜 나를 믿어? 나도 못 믿는데” 이렇게 돼요. 시청률에 대해 아무것도 보장할 수가 없는 거죠.
피플 ; 작가님이 생각하는 사랑이란.
인정옥 ; 저는 지금 당장 생각하는 애정 전선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이를테면, 가족의 요구나 다른 이유로 마지못해 어떤 남자와 결혼을 했다고 해요. 저는 그게 그렇게 쉬운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가족의 요구 때문에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했다는 게 잘 이해가 안 가는 거죠. 저는 그건 당시에 그 남녀가 동물적인 본성을 가지고 사랑을 한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영원한 사랑’이라는 테마가 나오면 저는 주춤하고 주뼛하게 돼요.누가 그걸 규정내릴 수 있겠어요. 섹스다 아니다, 한 달을 사귀었다, 하루를 사귀었다, 10년을 사귀었다는 게 저한테는 중요한 의미가 아니에요. 그러다 보니 과거의 사랑이나 첫사랑에 대한 로망스가 존재하지 않구요, 지금 현재 제 눈이 꽂히는 이성이 저의 사랑인 거죠.
피플 ; <아일랜드>를 보면 모든 이에게 약간 이중적인 면이 있었는데 특히 강국(현빈)은 중아(이나영)한테도 다정하고 재복이(김민준)에게도 잘해주다가 어느 순간 이들에게 엄청난 폭력을 가하잖아요. 중아한테 너 미쳤다고 하고, 재복이한테는 죽어버리라고 하는. <아일랜드>에 대한 어떤 리뷰에는 강국이 가부장제를 나타내는 캐릭터고 작가가 전통적인 가정에 대한 냉소적인 시선을 보낸 거라고 했는데.
인정옥 ; 그건 아닌데 많이들 오해하신 것 같아요. 재복은 무책임하고 바닥을 긴 인물이고, 강국 같은 경우는 표준이라는 걸 대비시키고 싶었어요. 보수적인, 잘 자란, 반듯하게 자란 표상으로서 강국을 설정한 건 맞아요. 그런데 그건 그 사람을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와 함께, 그렇게 자란 사람이 가지고 있는 미덕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진보, 보수라는 건 솔직히 개인적 취향에서 오는 것 같아요. 제가 사실 보수적인 사람보다 진보적인 사람을 좋아하는데 그건 편하기 때문이에요. 저의 진보성이란 건 저 자신의 변덕스러움과 성향, 취향에서 나온 것이지 이데올로기적인 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보수적인 캐릭터로 강국을 설정했고, 강국이 보수성 때문에 갖는 미덕을 최대화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이나영이 연기한 중아 캐릭터가 욕을 많이 먹었고, 중아가 먹을 욕을 이나영이 다 먹었죠. 강국이라는 인물이 이중아라는 인물한테 직접적인 폭력을 행사한다거나 한 것도 아니었고, 강국으로서는 할 바를 다 했어요. 정말 중아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했을 텐데 이 나쁜 년이 싫다고 하는 거죠.
그런 점이 객관적으로 굉장히 미덕이고, 예쁘기까지 한 남자에요. (웃음) 그런데 그것을 자꾸 뿌리쳐내는 여자의 문제는 뭐냐, 그건 소통의 문제였던 거예요. 강국이 재복이와 비교했을 때 훨씬 많은 강점을 가지고 있고, 현실에서 보면 중아가 이재복에게 가는 건 말이 안 될 수가 있어요.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연이라는 것이 달라지는 부분은 분명 소통이라는 거예요. 동물적인 본능과. 그래서 사실은 <아일랜드> 네 명의 주인공들한테 좀더 다른 것들을 제외한 동물적 본능과 소통의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솔직히 말한다면 그렇게 안정적이고 보수적인 성향의 사람들이 사실 미덕이 더 많아요. 책임감의 문제가 얽혀 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그래요. 그런데 왜 나는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매력을 느낄까 생각한다면 그게 바로 사랑인 거죠. 동물적인.
그리고 사람들이 제가 마이너 작가라고 그러는데, 그건 정말 잘못된 거예요. 기자가 저한테 “마이너 기질이 있냐”고 해서 “네” 그랬더니 “나는 마이너 작가다”라고 기사가 나간 거죠. 사실 그건 틀린 제목이죠. 기자 입장에서 쓴 거니까 “너는 마이너 작가다”가 되어야 하는 거죠. (웃음) 그런 단어들 때문에 사람들이 나에게 갖는 선입견이 있어요. 물론 네, 아니오로만 얘기하면 그게 틀리진 않아요. 맞아요, 저는 마이너와 메이저 중에는 마이너에 더 가까워요. 하지만 그건 제 활동 반경, 삶의 반경이 거기에 가깝다는 의미지 제가 주먹 불끈 쥐고 “나는 마이너 작가다, 싸이코 작가다”라고 하는 게 아니에요. 그런 건 저한테 맞지도 않으니까. 그래서 그런 걸 볼 때마다 ‘난 투사가 되어버렸네…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들죠.
피플 ; 혹시 자기 시나리오나 대본을 연출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한번이라도 있으셨는지.
인정옥 ; 연출부를 했으면 감독은 못 했을 것 같고, 연출부 하다가 노숙자가 되었을 것 같아요. 저는 어떻게 하면 돈을 벌어야 하는지도 몰랐고, 가족을 꾸리는 사람들이 너무 대단해 보였거든요. 그래서 서울역 가서 노숙자들을 보면 정말 남의 일 같지가 않았어요. 연민이 아니라, 곧 저게 바로 나라는 기분이었어요. 지금 이게 사실 잘 된 건지 안 된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작가라는 내 직업은 미정인 것 같아요.
그리고 연출을 하자면 무엇보다 내가 이 게으름을 극복할 수 있을까부터 고려해봐야 할 것 같아요. (웃음)
피플 ; 차기작으로 알려져 있던 <내가 나빴다>의 제작이 한번 무산되었고, 얼마 전에는 MBC <태릉 선수촌>의 이윤정 감독과 함께 작품을 할 거라는 얘기도 들었는데 앞으로의 활동 계획이 궁금해요.
인정옥 ; 그건 전혀 모르겠어요. <내가 나빴다>는 지금 엎어진 상태인데 제 생각엔 이 작품의 시청률이 좋을 것 같은 거예요. (웃음) 내용이 센 편이라 방송 3사에서 다 거절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러면 방송 4사를 한번 찾아봐야 하나. 아니면 누가 출판하겠다고 하면 대본집을 내서 자족을 한번 해볼까… 그래서 지금은 아직 <내가 나빴다>의 미련에서 못 벗어난 상태예요. 아무것도 결정된 바 없고, 이윤정 감독과 같이 뭘 한다는 얘기는 지금 처음 듣는 거구요. 그리고 저와 관련되어 기사화되는 내용의 7, 80%는 다 가짜예요. 그래서 연예인들이 자기 기사가 뻥이라고 하면 예전에는 안 믿었는데 제가 그런 입장이 되니까 ‘나도 이제 연예인인가 보다’ 하고 있어요.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