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의 포도와 레몬빛 가스등

영원한 물음 '당신은 어디서부터 왔는가'에서 도망하고 싶었다


내가 독일의 땅을 처음 밟은 것은 가을도 깊은 시월이었다. 하늘은 회색이었고 불투명하게 두꺼웠다. 공기는 앞으로 몇 년 동안이나 나를 괴롭힐 물기에 가득 차 있었고 무겁고 척척했다. 스카프를 쓴 여인들과 가죽 외투의 남자들이 눈에 띄었다.
아무도 없는 비행장 뮌헨 교외 림(Riem)에 내렸을 때 나는 울고 싶게 막막했고 무엇보다도 춥고 어두운 날씨에 마음이 눌려 버렸었다.
뮌헨하면 그 이후 내 머리에는 회색과 안개로 가득 차게 된 것도 그의 독특한 나쁜 날씨보다도 내가 에어 프랑스에서 내렸던 그날 오후의 첫 인상과 나의 걷잡을 수 없었던 외로움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트렁크를 들고 비행장행 버스에 올라 운전사에게 돈을 다 내어 보이고 그 중에서 1마르크만 가져가게 한 일, 힘 없이 혼자서 하숙을 찾아갔던 일. 나는 정말로 내가 파리에 있는 말테나 된 듯한 서글픈 마음이었다.
우선 고국에서부터 연락해 놓았던 '아스타'라는 학교 사무국에 가서 벽에 붙은 벽보를 찾아야 했다. 'Zimmerfrei(빈방있음)'의 광고를 보기 위해서였다. 모두 값이 비싸다(내 생각보다). 또 학교에서 멀었다. 그리고 뮌헨은 나에게 마치 라비린트(미궁) 그 자체처럼 보였었고 학교에서 5분 이상 더 가는 곳에 가서 살 자신은 나에게 없었다.
그 중에서 나는 겨우 '빈방 있음, 전기 있음, 학교에서 도보로 5분, 월세 50마르크'라는 꼬불꼬불한 연필 글씨로 쓰인 광고지를 찾아냈다. 그 집은 정말로 학교에서 5분쯤 가면 있는 영국 공원이라는 광대한 공원에 임해 있었다. 공원의 호수 바로 뒤에 서 있는 끔찍하게도 낡은 잿빛 4층 건물이었다. 첫 인상이 포(Poe)의 어셔(Usher)가를 연상시켜서 유쾌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수가 어디 있으랴? 다른 빈 방들은 대개가 'Nor fur Amerikaner(미국인에게 한함)'이거나 또는 엄청나게 비쌌던 것을......
나는 억지로 닫겨진 문 앞으로 가서 초인종을 눌렀다. 60세 가량 된 극단적으로 비만한 단발머리의 할머니가 나왔다. 키는 작았고 차림새는 누추했다. 나는 "방을 빌리고 싶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방을 빌릴 수 있습니까?" 라고 물었던 것 같다. 할머니의 표정은 의외로 상냥했고 입가에는 구수하다고 형용할 수 있는 미소를 띄어 보였다. "학교 광고를 보셨습니까?" 할머니는 또 무어라고 말했던 것 같다.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악의는 없는 말투였다. "방을 볼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네, 네, 어서 들어오세요."
방, 내 방인 것이다. 나는 그 할머니를 따라서 긴 낭하(복도)를 지나갔다. 낭하는 어두웠고 방이 많았고 방마다 사람의 이름이 작게 써 붙여 있었다. 맨 끝에서 할머니는 멎어 서더니 주머니에서 열쇠 뭉치를 꺼냈다.
"여기 살던 사람이 이틀 전에 자기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페르샤 사람이었지요."
열쇠가 돌려지고 문이 열렸다. 나는 주저하면서 할머니 뒤를 따라 들어갔다.
방도 마루처럼 어두웠으나 의외로 깨끗했다. 초록빛 도자기로 된 커다란 난로가 한편 구석에 서 있었고 전기 곤로가 놓인 받침대와 흰 요와 이불이 덮인 침대가 하나. 그리고 경대와 찬장이 달린 콤모데가 있었다. 창은 두 개가 영국 공원과 반대되는 포도로 나 있었고 이중 창에 이중 커튼이 둘러져 있었다.
"하시겠어요?" 할머니가 물었다.
"네."
"방세는 한 달분 미리 내셔야 됩니다."
할머니가 나간 후 나는 덧문을 열고 유리창을 활짝 열었다. 돌로 포장된 좁은 골목은 완전히 잿빛 안개로 덮여 있었고 물기가 촉촉히 방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나는 언제까지나 창밖을 보고 있었다. 사람도 별로 안 지나가고 여기는 뮌헨에서도 가장 오래된 지역이고 폭격도 안 맞은 1920년대 그대로의 문명의 이기만을 쓰고 사는 마을인 것 같았다.
트렁크를 침대 밑에 넣고 나는 침대에 누웠다. 그러나 피로했음에도 불구하고 잠은 안 왔다. 열쇠로 방문을 잠그고 거리로 나갔다. 그때 마침 가스등을 켜는 시간이어서(5시경이었던 것 같다) 제복 입은 할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좁은 돌길 양쪽에 서 있는 고풍 그대로의 가스등을 한등 한등 긴 막대기를 사용하면서 켜 가고 있었다. 더욱 짙어진 안개와 어둑어둑한 모색 속에서 그 등이 하나씩 켜지던 광경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짙은 잿빛 베일을 뚫고 엷게 비치던 레몬색 불빛은 언제까지나 내 마음 속에 남아 있다. 내가 구라파를 그리워 한다면 안개와 가스등 때문인 것이다.
다음 날 아침에 나는 근처의 '생활 필수품점'에 가서 빵 두 개와 마가린 한 통을 샀다. 전기 곤로에 주전자를 올려놓고 나는 빵을 먹었다.
학교의 개강은 아직 한달이나 남아 있었다. 나는 원래 돌아다니거나 걷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었고 외국서는 더구나 무서웠다. 그러나 낮에 나는 큰 마음을 먹고(사실 도착이래 식사다운 식사를 못해서 배도 고팠다) 바로 근처에 있는 제에로오제라는 음식점에 들어갔다. 메뉴를 보았으나 별로 눈에 익은 게 없었다. 단 돼지 커틀릿이라는 것은 나도 알 것 같아 그걸 시켰다. 그러나 후로일라인(종업원)이 가져온 것은 우리 개념의 커틀릿이 아니고 돼지고기를 큰 덩어리째로 그냥 삶은 것 같았다. 실제로 그렇게 요리하는 모양이다. 나는 힘없이 먹기 싫은 음식을 앞에 놓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마실 것은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Was zum Trinken)?" 라는 물음의 뜻도 파악 못하고 그냥 웃어 보였더니 작은 컵에 맥주를 따라서 갖다 주는 것이었다. 나는 그냥 잠잠히 앉아 있었다. 말을 하면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느낌을 안고......
그때 여러 명의 틴 에이저들이 들어오더니 쥬크 박스 앞으로 다가가서 판을 고르는 모양이었다. 그 중의 하나가 힐끗 나를 보더니 무슨 판을 눌렀다. 그에 이어서 뜻밖에도 일본 노래가 새어 나오는데 아연하여 보고 있었더니 그 중의 하나가 일본의 이별의 노래(Japanisches Abschiedsleid)라고 나에게 알려주듯 말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아마 나를 일본인으로 안 모양이었다. 그때만 해도 뮌헨에 한국인이라고는 거의 없었고 더구나 여자는 구경하려 해도 없었을 때니까 아마 그렇게 짐작한 모양이었다. 나는 역시 웃어 보였을 뿐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러나 왜 그런지 덜 서글퍼졌고 덜 혼자인 듯한 느낌이었다.
그 후도 나는 오후나 저녁 때 그 집을 자주 찾아갔다. 거리도 내 방에서 가까웠고 음식값도 다른 데보다 싼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후로일라인도 친절했다. 늘 말 없이 호의를 보여주었고 주간지도 내 테이블에 갖다 주곤 했었다.
그러는 동안에 나는 이 음식점이 그냥 음식점이 아니라 예술가들의 집합소인 것도 알게 되었다. 목요일에는 '시인의 밤' 이 있고 화요일에는 '화가의 밤' 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 집의 한쪽 벽에 더덕 더덕 붙어있는 사진이며 편지며 분필 사인이 토마(Ludwig Toma)니 링겔낫츠(Ringelnatz)니 케스트너(Kastner)니 좀머(Siegfried Sommer)니 하는 쟁쟁한 작가나 화가나 만화가들의 소행인 것도 알게 되었고 이 집이 한때 반나치 운동의 중심이었던 것도 알게 되었다.
이 집에서 나는 처음으로 일제 아이힝가라는 여류 시인의 존재를 그 여자의 특이한 용모와 매력적인 긴 흑발과 함께 알았다.
가을은 깊어만 갔다.
강의가 끝나면 나는 학우들(오스트리아 여학생이나 프랑스 학생)과 같이 근처의 다방에 가서 크림커피 한 잔으로 점심을 때우는 방법도 배웠다. 주립 도서관도 자기 집 내부처럼 환히 알게 되고 뮌헨 시내의 고서점이란 고서점은 다 알게 되었다. 헌 책방 주인과도 친해지고 이미륵씨 얘기도 듣게 되었다. 학교 정문 앞에서 파는 군밤 장사의 군밤을 50페니쯤 사서 교실에서 먹는 일에도 익숙해졌다.
그러나 마음은 몹시 허전했다. 고국에까지 뛰거나 걸어서 갈 수 없다는 사실이 이렇게 무서운 심연을 내 마음속에 열어 놓을 줄은 몰랐었다.
짙은 안개를 들이마시면서 나는 새파란 하늘을 그리워했다. 감나무와 대추나무를 꿈에 그렸다. 사실로 내가 그리워한 것은 황색 그림자였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감상이나 미학적인 어떤 음탄이 아니었다. 그것은 색이 있는 민족의 환영, 그들의 비극이 내 속에 담겨져 있고 그들의 대표자로 내가 여기에서 간주되고 있는 그러한 절실한 비전이었다. 걷잡을 수 없는 공포였다고 해도 좋다. 강의실 내에 교수의 방언과 노령에 의한 발음의 불명료 그리고 생활 필수품점 속에 진열되어 있는 셀로판지에 담긴 이탈리아 쌀 그 어디서나 비전은 나를 따랐다.
뮌헨 대학에서 내 하숙에 이르는 레오폴드 통은 거대하고 꼿꼿하게 높기만한 포플러 가로수로 줄지어져 있었다. 그 길이 온갖 빛의 낙엽으로 두껍게 깔리기 시작할 무렵에 가을이 가장 아름다웠다. 그 거리에는 작은 어항같이 생긴 '유리 동물원'이 있었다. 유리로 기막히도록 정교하게 만든 온갖 작은 짐승들, 도자기, 발레리나들...... 안데르센 동화 속의 나라 같았다. 나는 매일 그 앞을 지날 때마다 5분 이상이나 진열장을 들여다보곤 했었다. 갖고 싶고 애무하고 싶은 동물들이었다.
그 가게 뒤에 쓰러져가는 '노아 노아'라는 집이 있었다. 거기는 다다이스트의 집합소로서 늘 해괴하고도 기상 천외한 그림들이 잔뜩 붙어 있었다. 화가들이 수염을 늘어뜨리고 떠돌며 담론하는 살롱이기도 한 것 같았다. 때로는 에리카 만의 낭독회도 열리는 모양이었다.
그 무렵에 나는 제에로오제보다 더 싼 음식점을 발견했다.
서서 먹는 집이었다. 흰 소시지를 불에 구워서 겨자를 발라서 먹는 소시지 집이었다. 거기에다 신 오이 한 개와 레모네이드 한 컵을 먹어도 일 마르크가 안 되니 싸기도 하려니와 냄새만으로도 이끌려 들어가게 맛이 있었다.
먹는 것은 간단히 빨리...... 그리고 나는 걸어다녔다. 학교에서 내 방까지 사이의 골목, 골목, 그리고 영국 공원 속...... 이러한 곳이 내 산보지였다.
어떤 날 나는 백조가 마지막으로 떠 있는 것을 저녁 늦도록 지켜 본 일이 있다. 어둑어둑한 박명 속에 흰 덩어리가 여기저기 모여 있었고 때때로 바스락 소리를 냈다. 몹시 외로워 보였다.
나 자신의 심경 그대로였는지도 모른다.
내 마음속이 뒤흔들린 편지를 매장한 곳도 이 호수였고 내 꿈과 동경 ― 몇 년이나 길게 지속되었던 ― 을 던져 넣어 버린 곳도 이 호수 속이었다. 이 호숫가의 가스등 밑에서 나는 안개에 감싸이는 쾌감과 머리를 적시는 눈에 안 보이는 비를 맛보았다. 그리고 추위에 떨면서 귀로에 서곤 했었다. 도자기 난로 속에서 석탄이 붉게 타오르는 것을 지켜 보고 있으면 쓸쓸하지 않았다. 불이 타오르는 소리, 그리고 붉은 불의 혓바닥...... 이러한 것과 함께 하는 것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불길을 지켜 보면서 언제나 어떤 시의 구절을 생각했다.

     휴식과 포도주에 넘친 어둠,
      슬픈 기타 소리가 흐른다.
      그리고 방안의 부드러운 등불로
      꿈 속처럼 너는 돌아간다.

공기에서는 서리와 안개와 낙엽 냄새가 섞여져 났다. 눈이 내리기 사작하자 공원에 가는 일도 드물어졌다. 11 월 중순, 아직 한국은 가을이지만 여기서는 눈이 큰 송이로 내렸다. 눈이 내리는 소리, 그리고 난로의 석탄이 타오르는 소리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날이 계속되었다. 눈이 와도 무섭게 왔다. 세워 둔 자동차가 푹 파묻혀 안 보이게 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나는 한국서 가져온 얇은 천으로 된 학생용 검은 오버를 입고 오들오들 떨면서 학교에 다녔다. 점심은 커피 대신 그록크(펄펄 끓인 포도주)와 수프로 했다.
그래도 추웠다.
때로는 눈이 멎고 다시 영원한 뮌헨의 하늘빛이 회색 구름장이 덮이거나 안개비가 촉촉히 내렸다. 나는 두터운 색양말을 신고 두꺼운 머리수건을 쓰고 다시 공원으로 갔다. 사람이라고는 없고 나뭇가지가 앙상한 해골을 노정시키고 있었다. 벤치에 앉아서 검은 나무 가장이들 사이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 변함 없는 회색일까? 하고...... 아는 얼굴이나 목소리가 하나만 있어도 이 하늘이 이렇게까지 우울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원한 물음 '당신은 어디서부터 왔는가?(Woher sind Sie?)에서 도망하고 싶엇고 황색 비전을 나는 좇고 있었다. 낮이나 밤이나 우울한 회색과 안개비와 백일몽의 연속이었다. 악몽처럼 혼자라는 생각이 나를 따라 다녔고 절망적인 '고국까지의 거리감(Pathos der Distanz)'에 나는 앓고 있었다.
지금도 나는 뮌헨의 가을하면 내가 처음 도착한 해의 가을이 생각나고 그때의 심연 속을 헤매던 느낌과 모든 것이 회색이던 인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무 것에도 자신이 없었고 막막했고 완전히 고독했던 내가 겪은 뮌헨의 첫가을이 그런데도 가끔 생각나고 그리운 것은 웬일일까? 뮌헨이 그때의 나에게는 미지의 것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인지 또는 내가 뮌헨에 대해 신선한 호기심에 넘쳐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안개비와 구라파적 가스등과 함께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그때의 나의 젊은 호기심인지도 모른다.
나의 다시없이 절실했던 고독인지도 모른다 .



홀로 걸어온 길

아스팔트 킨트의 계보


나에게는 고향이 없다.
아스팔트 킨트(아스팔트만 보고 자란 도회의 고향 없는 아이들)라는 단어는 나에게도 쓰일 수 있는 명칭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부임지를 따라 이북의 끝인 신의주에서 보낸 2년간은 내 어린나이와 함께 잊혀지지 않는 그리움 때문에 고향이라는 글자를 볼 때면, 언제나 내 뇌리에 떠오르는 것은 신의주다. 초등학교 1학년을 수료했을 때 나는 서울을 떠나서 그곳으로 갔다.
신의주는 소위 신흥 도시로서 일본인들이 계획적으로 만든 합리적이고 관념적인- 지금 생각하면 숨갑갑한 도시였는지도 모른다. 도로가 꼭 자를 대고 그린 듯 정확하고 구획이 정연했으며 집의 크기도 똑같았고 재료는 모두 붉은 벽돌이 사용되어 있었다. 그러나 내가 좋아한 것은 그 깨끗하고 체계적인 주택가가 아니었고 중국인촌과 압록강이었다.
중국인촌은 도심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고 갈대밭이 무성해서 물이 흐르는 것도 보이지 않게 덮여 있는 폭이 좁은 강이 흐르는 곳에 있었다. 강가의 갈대를 헤치면서 따라 올라가면 중국인들의 오두막들이 죽 즐비하게 서 있었고 신비스러운 억양의 중국어가 대소음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학교에 갔다 오면 늘 그곳으로 갔다.
그리고 하늘 높이 솟은 포플러 나무 밑에 앉아서 사탕 수수를 씹으면서 공상에 잠겼었다.
지식을 높이 평가하는 이상주의자인 아버지는 언제나 나를 자랑스럽게 여기시고 귀여워해 주셨다. 아버지는 장녀인 나를 학교에도 종종 데리고 갔고 이발소에도 꼭 데리고 가서 머리를 깎는 것을 지켜 보셨다. 백러시아계의 양복점에서 꼭 소공녀가 입을 것 같은 레이스 원피스를 사 준 것도 아버지였다.
3- 4세 때부터 한글 책과 일본어 책을 전부 읽을 수 있도록 손수 가르쳐 주신 아버지는 내가 공부 이외에 딴 일을 하는 것을 허락 안 하셨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계실 때는 나에게 심부름 한 번 못 시켰다. 손에 물 하나 안 튀기고 내 방에서 공부만 하는 것, 아버지가 한없이 아낌없이 사다 주는 책을 읽는 것이 내 생활의 전부였다. 이 유년기의 습관성은 중*고*대학생 시절을 통해 죽 견지되었다. 내 한마디는 아버지에게는 지상 명령이었고 나는 또 젊고 아름다웠던 남들이 천재라 불렀던 아버지를, 그리고 나를 무제한으로 사랑하고 나의 모든 것을 무조건 다 옹호한 아버지를 신처럼 숭배했었다.
나는 응석받이 어린애였다. 나에 대한 편견 때문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자주 말다툼한 것을 보아도 그것을 알 수 있다.
물질, 인간, 육체에 대한 경시와 정신 관념, 지식에 대한 광적인 숭배 그리고 내 내부에서의 그 두 세계의 완전한 분리는 그러니까 거의 영아기부터 내 속에서 싹트고 지금까지 나에게 붙어 있는 병인 것이다.
아버지는 가끔 나를 데리고 부둣가에 가셨다. 내 눈에 바다보다도 더 넓게 보였던 압록강이 녹색으로 흐르는 것을 바로 눈 앞에 볼 수 있는 곳엔 백러시아인이 경영하는 다방이 많았다. 벽돌 페치카가 놓인 다방에서는 축음기를 틀고 금발이 허리까지 오는 러시아 처녀가 음악에 따라서 노래하고 있었다. 스텐카라진 같은 러시아 민요였던 것 같다. 거기에서 나는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어떤 날 나는 부둣가에서 뗏목이 떠 내려 오는 것을 본 일도 있었다. 집채보다 큰 뗏목에는 수 명의 남자들이 타고 있었는데 모두 검붉게 탄 건강한 체구들이었고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뗏목이 안 보이게 될 때까지 부둣가의 콘크리트 바닥에 앉아서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지 전신이 뒤흔들리는 듯한 감동이 내 어린 마음을 찔렀다.
먼 데에 대한 그리움, 어디론지 멀리 멀리 미지의 곳으로 가고 싶은 충동은 그때부터 내 마음 속에 싹튼 것 같다.
그때부터 내 눈은 실향병의 눈, 슬픈 눈으로 된 것 같다.
어쩌면 내 천성에 유랑 민족 집시의 피가 한 방울 섞여 있는지 모르고, 그것이 이국적 도시에서 보낸 유년기로 인해 눈뜨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혼자 살고 싶었다. 내 일생을 바치고 싶었다. 자유롭게......
대학생이 된 후에도 나는 그런 결심을 되풀이했었다.
그러나 운명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곳으로 우리를 데리고 간다. 우리의 의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자유롭지는 않다. 우리가 생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생이 우리를 형성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기치 않았던, 때로는 소망치 않는 방향과 형식 속에 생이 형성해 놓는다.
논리의 수미가 일관된 생을 우리는 희구한다.
그러나 생의 테제와 안티 테제는 논리에서처럼 당연한 일의적 단계를 밟지 않는다. 그러기에는 생은 너무나 혼돈적이고 어두운 밤의 측면과 꿈과 동경 등으로 가득 차 있다.
작은 우연이 일생을 결정하기도 한다. 인간은 유리알처럼 맑게, 성실하고 무관심하게 살기에는 슬픔, 약함, 그리움, 향수를 너무 많이 그의 영혼 속에 담고 있다.
의식과 무의식이 일체가 되고 그와 객체 관계가 지양되는 투명한 순간은 우리에게 그렇게 자주 주어지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분열된 의식과 전우주에 대한 고독감에 앓고 있다. 인식과 플라톤이 말하는 에로스와 합하려는 노력만이 우리를 고독에서 구출한다.
그러나 우주선이 달세계로 가는 시대에 사는 인간은 영혼의 소박함을 잃은 지 오래된다. 사랑도 변형된 호기심인 경우가 많고 사랑의 행위에서도 지적인, 너무도 지적인 것이 현대인이다. 누구나가 자기의 원칙과 독백 속에 감금되어 있다. 자아에 망집하고 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진공관 속을 꿰뚫는 것은 현대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다. 기적같은 희귀한 몇 개의 순간에서만 우리는 변신을 한다. 헌신과 희생이 가능해진다. 그 순간이 지나면 생은 다시금 어두운 것, 무표정한 것으로 된다. 그 속에서 아무 관련도 없이 제각기 인간은 산다. 고독한 탐구를 계속한다. 죽음을 과학적으로 탐구한다. 몽상한다.
생은 슬픈 것인지도 모른다. 회한, 모든 후회는 결국 존재의 후회로 귀결된다.
태어났음의 비극은 피조물성 속에 있는 균열 즉 시간과 공간으로 제한된 일정 기간의 생명이 신비한 힘에 의해서 우리의 의식 없이 우리에게 부여되어 있다는 불가지성 속에 있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짧은, 그러나 주관적으로는 지루하게 긴 우리의 생에서 그래도 진주빛 광채를 지닌 기간이 있다면 그것은 유년기리라.
유년기 그것은 누구에게나 실락원이다.
'더 이상 어린이가 아니라는 것은 부도덕한 일이다'라고 어떤 시인은 말했다. 어린 시절은 의외의 놀라움, 신비와 호기심, 감동에 넘친 지루하지 않은 한 페이지다. 그리고 우리는 몇 살이 돼도 그 장을 펼쳐 보고 싶어진다.
영원한 그리움, 그것은 고향에 대한 것이다. 원류에 대한 동경, 영원의 고향에 대한 거리감에 앓는 것, 그리고 그곳으로 귀향하려는 노력을 플라톤은 향수라 했다.
어릴 때 우리는 모두 초시간적이고 불사신이었다. 존재의 상처를 모르는 이상주의자였다. 성장한 뒤에도 어린 마음을 상실치 않는 이상주의자, 즉 영원한 유아는 현실과 부딪칠 때 늘 생사를 건 모험을 하게 된다. 키에르케고르는 말했다.
"어린애로서 즉 이데알리스트로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은 지난한 일일 뿐더러 종종 카타스트로프(파국)를 가져 온다."
생에 좌초한 '어린애들' 위에 디디고 서서 개가를 올리는 것은 어느 세대에나 영원한 속물들, 인간을 목적으로 알지 않고 수단으로 아는 바리새인들, 현명한 준법자들, 투철한 리얼리스트들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마음의 고향이, 이데아가 없다.
따라서 유년기가 없다.



새로운 사랑의 뜻

바하만의 <만하탄의 선신> 속에 있어서의 사랑의 문제


영적 체험의 안테나로서의 독일 현대시는 특수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소위 현대시라고 불리는 일련의 시의 특징이 우리 시대의 다이나믹에 의해서 뒤흔들렸을 뿐만 아니라 그것과 싸우고 그것에 괴로워하고 그것을 포기하고, 도피하고 하나의 새로운 질서를 동경하는 점에 있는 것 같다.
우리의 세계상과 생과 감정의 완전한 변화를 알고 있는 이 현대시는 새로운 인식-시간 의식과 공간 의식의 변화, 자연 과학에 의한 자연과 세계의 분리, 기술과 기계에 의해서 개인적 개성적인 것이 발하는 위협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 현대시의 일부는 트라클 하임 등이 시초한 표현주의의 길을 가고 일부는 전연 새로운 길을 간다. 이 현대시의 핵심은 자아와 다각적인 외부 세계와의 접촉에 의해서 복잡한 현실 개념에 도달하려고 노력하는 데 있다. 따라서 현대시 속에서는 르네상스 예술관과, 고전시의 기초가 되어 있는 단순하고 일의적인 주체 객체의 관계가 지양되거나 또는 근본적으로 변형되어 있다.
즉 자아와 시간과 공간의 관계는 이미 규정적인 것이 못 된다. 따라서 현대시는 보수적인 시보다 문제성을 많이 가졌고 진짜와 가짜, 연속적인 것과 유행적인 것을 가르기가 매우 어렵다. 다음에 나는 전후 독일 시인 중에서 특히 연속적인 가치를 가진 시인으로 인정받고 있는 여류 작가 잉게보르크 바하만의 최신작에 관해서 써 보기로 한다.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빈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은 여류 시인인 바하만의 시는 릴케 등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초현실주의의 신낭만파에 접근되어 있다.
작품으로는 센세이션을 일으킨 몇 개의 시집 외에 지금 취급하려는 방송 시극 <만하탄의 선신>-1958년 5월에 방송, 9월에 출판이 있다.
이 방송극은 전후 독일 문학에 있어서 특수한 지위를 갖는다. 왜냐하면 이것은 시의 일부며 또한 다이얼로그를 통해서 뚜렷하게 대답을 주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만하탄의 선신>은 사랑과 사랑하는 사람에 관한 뚜렷한 정의의 시도로 전후 독일 문학에서 별로 중시되고 있지 않은 테마인 사랑을 취급한 점에서도 또한 특별한 주목이 요구되는 작품이다.
뉴욕 여대생인 제니퍼는 여행 중에 있는 구라파인 얀을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되고 죽기로 결심했으나 얀이 잠깐 바람 쏘이러 나간 도중에 혼자 죽고 만다.
그것을 선신과 법관이 대담적으로 재판하는 형식으로 '어디서나 다시 시작되는' '미소와 함께 일어나는' 카오스인 사랑을, 질서를 망치는 불가능한 무엇으로써 부정하는 것이 내용을 이루고 있다.
사랑은 이 극 속에서는 커다란 포기의 모험, 즉 현실과의 접촉의 포기,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살 사회 질서 내에서의 생활의 포기, 사랑에 의해서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 의해서 강제되는 자기 자신의 개성의 발전과 완성에 대한 포기, 그리고 끝에는 생 자체의 포기로써 표현되어 있다.
사랑은 일종의 영구적 예외의 상태이며 사랑하는 사람 사이의 또 자기 자신에 대한 또 자기들 이외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투쟁 상태다.
사랑하는 사람의 최고의 행복은 개성의 발휘가 아니라 상실 속에 있는 것이다.
'나는 이것밖에는 모르겠다. 내가 여기서 너와 함께 살다가 죽고 싶다는 것과 너에게 새로운 언어로 이야기 하겠다는 것과 내가 어떤 직업도 가질 수 없고 어떤 일에도 종사할 수 없으며 결코 소용되는 인간이 될 수 없으며 모든 것과 끊겠다는 것과 다른 모든 것과 헤어지겠다는 것밖에는.'
사랑하는 사람은 일각 일각 세계 밖으로 밀려 나간다.
'너의 편이고 모든 것에 반대해서 반대 시대가 시작된다.'
이와 같은 정열의 불에 몸을 태운 사람에게는 온갖 자유는 내재 속에 떨어져 버리고 죽음만이 해결의 길이 된다.
그들은 큰 걸음으로 세계에서 멀리 떨어지고 온갖 현실적인 것과의 교섭을 거부하고 사회에 있어서, 세계에 있어서 자기의 지위를 만들 것을 포기하는 단념자가 되고 말기 때문이다.
'후에 의사한테 걸린 어린 시절의 여동무, 또 이미 다섯 명의 아이를 가진 시골의 이웃.'
즉 타협하는 사람만이 '창조 이전과 같은 카오스인 사랑의 신비'에 상처 입지 않는다. 즉 그들은 사랑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대신 그들은 이 세상에 받아들여지고 이 세상의 인습에 의해서 지지되고 오래 살 수가 있다.그러나 무서운 사랑의 정열에 몸을 태우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서로가 자기의 초월을 상대방에게 맡겨 버리려고 생각하고 또한 그것을 영원화 하려는 무모한 의도를 갖는다. 이것은 여자에게 있어서의 자연스러운 일이다. 보통 여자의 사랑의 이상은 완전한 자기 포기,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 속에 융해되어서 무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자가 사랑이라는 말 밑에서 이해하는 것은 완전한 헌신, 육체와 영혼의 전혀 고려도 보류도 없이 하는 헌신이다'라고 니체도 말하고 있다. 즉 역사와 생활 상황이 우월한 존재보다 완성된 존재라고 끊임없이 가르쳐 준 남성이라는 존재 속에 (이에 관해서는 시몬 드 보봐르의 이론이 있다 : 제2의 성) 여자는 자기의 존재를 초월하고 융합하려고 한다. 그러나 남자에게 있어서는 사랑이란 인생 그 자체일 수는 없고 다만 많은 가치 속의 한 가치에 불과한 것이며 남자는 여자 속에서 자기의 실존을 포기하려고 하지는 않고 반대로 자기의 실존 속에 여자를 일체화하고 부속시키려고 할 뿐이다. 즉 행동에 의해서 실현하는 본질적 주체적 존재로서의 남자는 사랑에 의해서 세계 포기가 아니라 세계에 대한 행동을 확대하려고 노력할 수가 없다. '여자는 자신을 내던지고 남자는 그것을 가지고 자기를 풍부하게 만든다'라고 니체가 말하고 있는 것도 이 뜻인 것이다.
그런데 만약 남자가 여자와 똑같이 자기 포기의 의욕을 가지고 그것을 행동에 옮긴다면 그 사랑은 순간적인 것이 아닌 다음에는 타협성을 잃고 만다.
즉 여자는 남자가 완전히 자기에게 속해 있고 사랑에 속해 있기를 원하나 그와 동시에 자기의 초월을 맡긴 남자 속에서 자기가 포기한 세계 속에서만 온갖 기획과 행동과 성공을 기대한다.
즉 자기에게 속해 있으면서도 동시에 세계에 속한 것(즉 자기에게 속하지 않은 것)을 요구한다. 마치 신에서와 같이...... 이 요구는 전체적으로 이미 무리한 것이다. 따라서 보들레르도 그의 <여행에의 초대>에서 '사랑하면서 죽자!'라고 노래했으며, <트리스탄과 이졸데>, <로미오와 줄리엣> 등의 신화의 진리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즉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사랑을 생활의 서서한 파괴 작용과 둘만의 권태에 의해서 죽이느냐 또는 사랑을 지닌 채 죽느냐의 양자 택일 밖에는 남겨지지 않는다.
말하자면 지상과 피안의 양자 택일인 것이다. 제니퍼와 얀은 사랑을 살리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인디아나어로 '천국과도 같은 지상'이라는 뜻을 가졌다는 만하탄의 30층 위에서 피안으로의 모험에 몸을 던지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최후의 순간에 얀은 주저를 느낀다.
지상의 질서가 그에게 팔을 내민 것이다. '결정이 된 이후에 갑자기 그는 혼자 있고 싶어졌다. 30분 만 혼자서 조용히 앉아서 생각하고 싶어졌다. 그는 뒷걸음질을 친 것이다. 질서가 일순간 그에게 팔을 내밀었다. 그는 저녁 먹기 전에 한 잔의 술을 혼자서 마시고 애인의 속삭임을 귀에서, 애인의 체취를 코에서 쫓아버린, 또 눈이 검은 활자에 의해서 다시 생기를 띠는 남자와도 같이 정상적이고 건전하고 정당했다.
고독한 결단의 시간 속에서 제니퍼는 자기와 얀을 이와 같은 정열 속에서도 떼어 놓고 있는 거리...... 실존으로서의 차이를 깨닫고 절망하고 사랑 속에서 자기를 성취하려는 여자의 본능적 충동에 의해서 혼자서 죽는다. '그는 구제되었다. 지상은 그를 다시 가졌다.'
'나날의 질서'와 '위대한 인습'의 수호신인 선신은 괴테적 문체의 <파우스트> 일부에서 메피스토가 '그의 벌을 받은 것이다'라고 하는 말에 대해 천상으로부터 그는 구제되었다고 말하는 정반대의 내용을 가진 말을 한다.
다시는 순수한 초월의 행위의 순간도 없이 그는 자기가 속해 있는 곳으로 돌아가서 기대도 없이 오래오래 살 것이다.
전후의 신 독일 문학의 테마는 모두 존재론적 질서의 탐구와 생과 세계의 의식의 탐구에 몰두하고 있는데 반하여 바하만이 초시대적인 테마인 사랑을 취급하였다는 것은 특이한 일이며, 또한 간결하고 상징적인 다이얼로그를 통해서 왜 지상에는 사랑이 불가능한 것인가를 생생하게 표현한 것은 경탄할 만하다. 즉 바하만의 시도는 20세기에서 애인이라는 우화의 시도인 것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죽었으나 얀은 살아 남는다. 이것은 역사적으로는 제한되고 조건지어져 있는 남녀간 생의 상황의 자각의 반영인 것이다. 여기서 바하만의 현대성이 있다고 나는 본다. 구라파적 시어로 쓰인 매우 릴케적인 바하만의 문체는 거의 세계적 완성을 지니고 있고 바하만은 현대성에도 불구하고 요즘 독일에서 몹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마지막 편지


장 아제베도에게

1965년 1월 6일 새벽 4시.
어제 집에 오자마자 네 액자를 걸었다. 방안에 가득 차 있는 것 같은 네 냄새.
글(내가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갑자기 네 편지 전부(그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것들)를 벽에 붙이고 싶은 광적인 충동에 사로잡혔다.
나는 왜 이렇게 너를 좋아할까? 비길 수 없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너를 좋아해.
너를 단념하는 것보다도 죽음을 택하겠어.
너의 사랑스러운 눈, 귀여운 미소를 몇 시간만 못 보아도 금단현상(아편 흡입자들이 느낀다는)이 일어나는 것 같다.
목소리도 좀 들어야 가슴이 끓는 뜨거운 것이 가라앉는다. 너의 똑바른 성격, 거침없는 태도, 남자다움, 총명, 활기, 지적 호기심, 사랑스러운 얼굴......
나는 너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Ich liebe alles an dir).
내가 이런 옛날투의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 좀 쑥스럽고 우스운 것도 같다.
그렇지만 조르주 상드(G.Sand)가 뮈쎄(Musset)와 베니스에 간 나이인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나는 좀더 점더 불태워야 한다고 분발(?)도 해본다.
나의 지병인 페시미즘(Pessimismus)을 고쳐줄 사람은 너밖에 없다.
생명에의 애착을 만들어 줄 사람은 너야. 오늘 밤 이런 것을 읽었다. '사랑? 사랑이란 무엇일까? 한 개의 육체와 영혼이 분열하여 탄소, 수소, 질소, 산소, 염 기타의 각원으로 환원하려고 할 때 그것을 막는 것이 사랑이다' 어느 자살자의 수기 중의 일구야.
쟝 아제베도!
내가 원소로 환원하지 않도록 도와 줘! 정말 너의 도움이 필요해.
나도 생명있는 뜨거운 몸이고 싶어. 가능하면 생명을 지속하고 싶어.
그런데 가끔 가끔 그 줄이 끊어지려고 하는 때가 있어. 그럴때면 나는 미치고 말아. 내속에 있는 이 악마(Totessehnsucht)를 나도 싫어하고 두려워하고 있어. 악마를 쫗아줄 사람은 너야. 나를 살게 해줘.

 
다시 장에게

1965년 1월 6일 정오경.
눈이 멎지 않고 내리고 있어. 눈 속을 헤메고 싶어. 너는 무얼하니?
모든 일에 구토를 느껴. 단지 의외로 <태양병(Sonnenseuche)>의 번역이 나를 몰두시키고 있어. 이런 내용 그리고 이런 느낌이란다.

태양병균―비정상적인 강한 열 속에서만 생존하는 / 나는 토오라는 표범과 사는 말레이 여자 마라와 만났다. / 토오는 나를 미워한다. / 나는 마라 몰래 토오에게 구하기 힘든 피가 뚝뚝 떨어지는 아직 따스한 암소고기를 먹인다. 다시 야생으로 돌아가 길들지 말라고, / 갈색 피부의 마라―이 여자는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이 여자를 소유하고 있기는 하나 / 나... '토오를 내쫓아' 마라... '나는 토오가 없으면 잠이 안와요' / 나는 토오를 미워한다. 토오는 마라의 애정의 일부를 뺏고 있다. / 우리는 대륙의 절반을 뒤덮고 있는 열파의 한가운데 있는데 춥다. / 흰 여자가 흰 남자를 사랑할 때는 어떻게 하나요? 갈색 남자가 갈색 여자를 사랑할 때는? / 내 심장은 전쟁을 원하고 있다. 나는 마라를 사랑한다. / 마라는 일어선다. 나체로 갈색으로 사랑하면서 / 나는 태양병이 무섭다. / 그리고 우리의 피는 소리를 지른다. / 호수 한가운데서 나는 세계를 향하여 소리질렀다. '마라!' 마라, 우리의 사랑은 안 죽어. / 태양은 나를 죽일 것이다. / 갑자기 광적인 생각이 엄습해 온다. 죽음이 구제를 갖다 줄는지도 모른다라는. / 그러나 숲의 호재는 광기다. 사랑하는 불, 사랑하는 숲이여, 너는 죽어야 한다. / 나는 마라를 고통 없이 사랑할 수 있으리라. / 나는 한계 위에 서 있다. 아, 마라.

진한 향내 나는 H·노바크의 이 열 같은 표현 속에 나는 서늘함을 느끼고 있다. 
                                                                                                                                                                                                               ― 전혜린
 

: 이것이 그녀가 이 세상에 남긴 최후의 편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