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듯이 살고 싶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 떨어지는 모래, 시간, 햇빛......
이런 것 이상의 아무것도 아닌 육체,
그러나 그것의 미가 얼마나 우리를 현혹케 하는 것인가.
 

1월 1일

지금은 밤 12시 정각, 막 새해에 들어간 시각이다. 흥분이 된다. 체념에 넘친 1960년은 지나가 버렸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새해가 잿빛일지 파란색일지는 예측할 수 없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좀더 애쓰고 모색하면서 괴롭게 살아야 하겠다는 것뿐이다.
인생이란 어린이 놀이터가 아닌 것이며, 우리는 웃고 뛰놀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닌 것이다. 주어진 짧은 시간내에서, 단 한 번인 이 삶에서 우리는 우리의 존재의 맨 끝을, 맨 속을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아는 데까지 알아보고 그 과정에서 죽는 것 ― 애써서 노력하다 쓰러지는 것, 이것이 삶의 참 모습이다. 그 이외의 지식이나 생활이란 다 부차적(副次的)인 것에 불과하다.
우리에게 가장 긴급하고 근본적인 유일한 생(生)의 테마는 우리의 현존재(現存在)의 비밀과 유한성(有限性)의 고뇌의 극복을 탐지하는 것뿐이다. 정말로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인간과 인간 사이의 올바른 관계는 괴로움을 같이(mit-leien)하는 데서 오는 이해(Verstehen)인 것 같다.
죽음을 씨(種)로서 속에 지닌 과실로의 삶을, 우연적(偶然的), 일회적(一回的)으로 주어져 있는 우리들 누구나의 공통 운명이고 괴로움인 죽음을 갖고 사고(思考)의 거리에 놓고 거기에서 파생한 모든 허무감을 나누어 느끼고 동정하는 것 ― 이것은 약(弱)함은 아닌 것 같다. 이 공감(共感)에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실존에의 돌입을 용이케 하도록 도와주고 계기가 되어 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식하는 나와 생활하는 나, 내 손의 상부 구조와 하부 구조, 내 의식 속의 남의 의식, 남의 의식 속의 나의 의식, 커뮤니케이션의 너무나 드물고 너무나 짧은 데서 오는 단절감(斷絶感), 비애, 영혼과 영혼이 완전한 고독 속에서 맞부딪치는 해후(邂逅)만이 진실한 것인 타자(他者)와의 관계(Bezog)의 어려움, 쉬운 길, 만인(萬人)의 길, 자기를 내던지고 유한성과 탁월성에 눈 감는 길의 크나큰 유혹, 나만이 어떤 오식 활자같이 거꾸로 박혀 있는 것 같은 콤플렉스...... 기타 삶의 메카니즘이 요구하는 의무(Devoir)반감(反感) 및 무력(無力)이 모든 갈등(Konflikt)에 넘친 가시밭 같은 길이 우리의 삶의 길이다. 매일 우리는 그 길 위에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땀과 피를 흘리는지 모른다.
공동 사회는 우리의 의식이 실존하는 것에 반대밖에 되지 못하고 세계는 개체(個體)와 분쟁 상태로 대립해 있는 것이고 또 우리는 타자 존재(他者存在) 없이는 생각할 수도 없는 세계 속의 존재인 것이다.
얼마나, 얼마나 모순에 넘친 가엾은 존재(Dasein)가 인간인 것일까? 언제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살아야 한다. 그것이 소제기같이 우리를 분말화(粉末化)하는 것에 불과하고 삶(生)이란 풍화작용의 일종에 불과한 것일지라도 우리는 이 무서운 허무감에 눈을 뜨고 응시해야 한다.
무(無)를 견딜 수 있는 경지를 내 속과 내 주변에 만들어야 한다. 우리의 삶이란 결국 부단히 나에 이르는 길 외의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이것을 잊지 말고 올해는 보다 나에 성실하게, 보다 진정한 실존으로서 존재하고 싶다. 나와 내 죽음의 본질을 파악하려고 모색하고 싶다. 온갖 정신의 게으름이나 낭비를 두려워하자. 무엇보다도 속화(俗化)에의 그것은 방지되어야 한다. 나의 생활을 시작하면 곧 등장할 내 속의 속물(俗物)을 미리 공포스럽게 혐오하고 멀리 하자. 언제나 언제나 너 자신이어야 한다. 아무 앞에서도 어디에서도...... 우리의 일회성(一回性)을 명심하고 일순간을 아끼자. 미친 듯이 살자.
이성(理性)이 선(善)이라는 것은 더욱더 믿어진다. 알고 있는 것과 행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일치하고야 마는 것이다. 그것이 속인(俗人)의 경우가 아닐 때에는...... 철저하고 싶은 의지, 완성에의 의지가 우리의 내부에는 주어져 있는 것이니까......
1961년은 좀더 성실하게 생을 살기 위해서 철학을 더욱 공부할 것을 자정(子正)에 맹세한다. 나를 찾자. 나에게로 돌아가자!
아침 7시다. 엄숙하리만큼 찬 아침 공기 속에서 새해를 실감한다. 모든 새로운 시작과 마찬가지로 한 해의 시작도 몹시 어렵고 고난에 찬 것임을 예감시켜 준다. 1961년이 품고 있는 무언지 어둡고 무시무시한 새 맛, 긴장미가 새벽의 냉기와 함께 심장부를 압박한다. 필연코 행복이나 기쁨이 기다리고 있는 해는 아닌 것이다.
그러나 여지없는 성실한 노력을 바친, 후회도 애석함도 없는 일념으로 만들어야겠다. 생명이 타오르는 실감이 있는 팽팽한 활줄같이 귀중한 순간들의 연결선으로 된 1년을 만들어야겠다. 과감할 것, 견딜 것, 그리고 참 나와 참 인간 존재와 죽음을 보다 깊이 사색할 것을 계속할 것, 가장 사소한 일에서부터 가장 큰 문제에 이르기까지 자기 성실을 지킬 것, 언제나 의식이 깨어 있을 것, 이것만이 어떤 새해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올해도 나의 의무(Sollen)인 것이다.
밤 10시 30분이다. 즐거운 하루였다. 무엇에도, 무엇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아름다운 것이다'라는 생각이 내 가슴을 덮고 있다. 깊디깊은 안도감과 따쓰한 정다움이 나를 즐겁게 한다. 모두가 외계(外界)나 타자 의식(他者意識)까지도 나를 따스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고, 나에게 몇 명의 정다운 사람의 심편(心片)이 내려 덮어 나를 미소케 하는, 이유없이 즐겁게 만드는 날...... 아무에게나 다정하게 부드럽게만 대하고 싶고 거지 아이의 머리도 쓰다듬어 주고 싶은 내려앉은 마음......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는 정말로 표현적이다. 그 중에서도 <기분 잡쳤어요!(I got a dirty, dirty feeling)>는 멋있고 피가 약동하는 느낌이나 폴 앵카의 <다이아나(Diana)>는 실감이 있는 유니크한, 박력 있는 노래다. 재즈가 정말로 점점 좋아진다. 지금 모든 것을 잊게 하는 그 음악에만 열중시키는 절대적인 무엇(etwas)을, 그것은 갖고 있는 것이니까.
오늘같이 모두가 웃고 즐거워하면서 마음 너그럽게 올해를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쁘랴! 나와 세계와의 관계는 필연적으로 '갈등 속의 존재'인 것을 생각할 때, 그리고 나와 남의 의식간엔 대립이 있음을 생각할 때 정말로 오늘 같은 쾌감으로만 점묘(點描)된 하루가 귀중히 느껴지는 것이다.
담담하고 따사한, 정답고 건강한 한 해가 되었으면!
 

1월 2일

어제보다는 좀 따스한 날이다. 오후에 채린(彩麟)이와 같이 단성사(團成社)에 가서 <협잡꾼들(Les Tricherus)>을 보았다. <서양의 붕괴(Untergang des Abendlandes)>가 생각나는 작품이다. 한국이 물질 문명에서 아직 봄이나 여름의 단계임을 축복하고 싶어졌다.
극도의 테크닉의 완성과, 개인주의의 모럴의 세련과, 보다 건강하고, 영양 좋은 육체를 가진 그들의 광분(狂奔)은 우리의 하이틴의 그것과의 사이에 몹시 거리가 있다. 우리는 아직도 동물적 성실성(Tierischer Ernst)을 가지고 있다. 무언지 애쓰고 일하고 당연히 고생하고도 가난하게 사는 운명을 수락하는 체념의 전통과 약간의 물질, 경멸 내지 초연주의(超然主義)가 남아 있다.
재즈와 춤과 스피드와 섹스의 엔조이만이 전 심신을 채울 수 있는 세대(Generation)가 앞으로는 있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직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모럴이 높아서가 아니라 우리의 생활이 얕아서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는 어느 편을 축복해야 좋을지 모른다. 카르네의 술회 ― '어떤 시대에도 공부하는 소수(少數)는 있다. 다만 강한 자만은......'에는 실감이 있었다. 약한 자는 결국 현실(Realife)을 직면 못하고 샛길로 도피하게 되고 그곳에서 허세와 콤플렉스와 순간적인 망각의 추구로 소일하게 되는 것이다. 대지(大地)처럼 질기고 건전한 젊은이는 필히 구식(Old Fashioned)이어야 한다. 모세(Mose) 때의 젊은 이들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니까......
현대의 돈키호테만이 참으로 실존하는 자이다. 현대인에게 조소와 경멸을 사고 대열에서 빠져 나오는, 멋이 조금도 없고, 우스꽝스럽고, 순정파인 젊은이...... 이런 캐리커처도 풍자(諷刺)로만 실존할 수 있는 것이다. 구라파의 일반적인 젊은이의 동향(Tendenz)은 이 영화가 파악하고 있는 것과 대동 소이할 것이다.

그러나 또한 구라파에는 한국의 전(全) 심각을 합쳐도 모자랄 만큼 심각한 사고와 의식으로 살고 있는 극히 순수한 몇 개의 두뇌가 있는 것이다. <장 크리스토프(Jean Chritope)>에도 나오는 다락방에서 공부하는 가난한 학생과도 같은 타입이...... 그리고 그런 사람만이 구라파의, 세계의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구라파인보다 심각한 생활 방식을 우리는 결코 자랑할 수 없다. 결국은 무(無)에 이르는 심각과 노력과 행동이라면 무가치한 것이니까...... 가치 창조적인 것인 아닌 고통이란 부인될 가치밖에 없는 것이다.
 

1월 3일

꿈에 베니스에 가서 다니엘리 호텔에 유람객으로 투숙했다. 기막힌 꿈이 아닐 수 없다. 하여간 기분 좋았다.오늘은 거의 하루 종일 눈이 내렸다. 크고 습기에 찬 눈이 많이 내렸다. 어수선히 눈 속을 거닐어 보았으나 마음은 쓸쓸하고 외로웠다. 이 고독은 어떤 벗이나 육친에게도 털어 놓을 수 없고 상호전달과 이해가 불가능한 단절의 상태임을 생각할 때 정말로 뼛속까지 외로웠다. 내가 혹시 유명해지고 지위나 돈이 있는 인간이 되고 저오하가 내가 바라는 대로 예쁘게, 곧게 자라난 후일지라도 이 고독은 내 손에 그대로 머물러 떠나지 않을 것을 생각할 때 정말로 피투성(被投性)이로서의 나의 존재를 실감했다.
살고 있는 것이 나인 것처럼 죽는 것도 나밖에는 없는 것이며 사람과 사람 사이는 친자(親子), 부부, 형제, 애인 등 모두 나무와 나무 사이만큼의 관계밖에는 없는 것이리라. 같이 비를 맞고 햇빛을 쬐면서 자라 이윽고 고갈하는 나무라는 공동 운명의 테두리 속에서 좀 가깝게 던져져 있는 나무들은 서로 볼 수 잇는 것이며 서로 미소를 교환하는 것이다. 그것이 전부다. 결코 지속될 수 없는 불꽃이고, 대화인 줄 착각한 환영(幻影)은 독백으로 에코하는 것이다. 갈수록 깊어가고 다양적으로 넓게, 깊게 뿌리를 뻗는다. 몇 겹의 고독이 나를 에워싸는지 모른다.
찰나에만 가능한 이해나 찬미나 친화력...... 그에 뒤따르는 보다 강한 고독의 쓴 맛, 사람은 결국 '고독한 존재'인 것을 생(生)이 나날이 나에게 가르쳐 준다. 따라서 우리는 대인 관계(對人關係)에 있어서 욕심쟁이어서는 안 된다. 고독을 초극시켜 준 것같이 느낀 일순간(一瞬間)을 우리는 언제나 감사해야 한다. 그 뒤에 온 공허(空虛)나 허무감은 인간의 던져져 있는 상태에서 온 본연의 감정이지, 누구의 과오나 악의는 아닌 것이니까. 이해, 공감, 감사, 이것만이 우리와 타자 존재(他者存在) 사이의 감정이어야 한다. 깊은 애증이나 분개는 결국은 극단적(Bodenlos)인 것이고 불합리(Absurd)한 것이니까.
누구에게나 주어져 있는 것은 자기의 죽음에의 길을 걸어가는 것뿐임을 생각할 때 우리는 타인에 대해서 보다 관대해질 수 있다. 누구나를 따뜻이 포섭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이 되고 싶다. 훌륭하고 위엄 있는 교훈적인 인간은 못되더라도 ― 되고 싶지도 않지만 ― 동정에 있어서 ― 참 의미로 ― 풍부한 인간이 되고 싶은 것이다. 위선비판(僞善批判)은 안 하고 싶다. 아무도, 언제든지라도.

밤, 눈이 멎었다.
실존에의 돌입은 필연적으로 개개(個個)의 영혼의 고독 속에서 성취된다. 이 경우에 공동 사회는 그것에 도움이 될 수 없으며 다만 방해가 되기 쉬울 뿐이다. 야스퍼스(Jaspers)는 어떤 다른 한 개인과의 접촉이 우리의 실존을 각성시키는 데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여러 가지로 지적하고 있으나 그것은 언제나 한 영혼과 다른 한 고독한 영혼과의 만남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오랜 시간에 걸친 지속 상태에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짧은 접촉에서만 가능하다. 즉 실존 자체가 지속 상태로는 불가능한 것이며, 드물고 적은 특수한 순간에만 제한되어 있듯이 커뮤니케이션은 인간에게 선물 주어진 매우 드문 순간에만 제한되어 있다. 따라서 극단으로 말하면 각 순간에 있어서의 실존적인 공동 관계는 그 순간에 헌신함으로써 완전하며 절대적인 것이다.

― <볼로프(Bollnow)>에서 

우리의 고독은 그러니까 '마음의 전달(Kommunikation)'이 불가능한 데서 나오는 불안과 회의(懷疑)에 싹트는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이 순간에만 가능한 것이고 우리의 실존과 마찬가지로 매순간마다 선택되고 의식적으로 받아들여져야만 한다는 것, 이 발아들임, 선택함에 있어서의 결단성과 긴장성, 즉 '어떻게(wie)?'가 우리를 결정하는 전부라는 것을 안다면 사랑이나 기타 대인 관계가 얼마나 투명하고 시원한 맑은 관계가 될 것인가? 우정이나 사랑은 '무엇(etwas)'에 있어서(본질에 있어서) 파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방향으로 나의 의식을 내가 나날이 선택하는 내 태도(態度), 즉 내 의식의 강도(Intensitat)에 의해서만 그러한 것들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견지에서 보면 질투나 후회 같은 감정은 토대도 없는 망상(정신 착란, 병)에 불과한 것이며 선택되지 않아야 하는 것들이다.
고귀한 순간, 가득 찬 순간이란 자기 의식과 타자 의식이 완전히 융합되어 하나가 된 '대자 즉자 존재(對自卽自存在)'의 상태인 것이며 어떤 의미로는 'Fata Morgna', 환상(Illusion)에 불과한 것이다. 그 순간만이 바랄 가치(Erstrebenswert)가 있고, 그 순간은 포착되고 응결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생(生)의 가치의 전부인 것이다. 마치 생(生) 그 자체처럼 허무한......
정화의 살구 같은 뺨과 분홍빛 몸과 동그란 입, 동그란 눈, 빳빳한 속눈썹,...... 그리고 종알종알 하루하루 더 배워 나가는 말...... 노래...... 이런 것은 정말로 사랑에 의해서, 사랑을 위해서 만들어졌다고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다. 걔에게 쾌적(快適)한 생의 분위기를 만들어 주고 심신(心身)이 곧게 자라게 하는 것, 온갖 편견이나 콤플렉스로부터 자유로운 태양과 같은 아이로 만드는 것...... 이것이 앞으로 내가 가지고 있는 생과제(生課題)다.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의 말을 빌리면 '외부(外部)로 뻗어 나가려는 생과제(eine auβerst  ausstrengende Lebensaufgabe)' 이리라. 회고해 보아도 또 앞을 전망해 보아도 내 일생은 불행이다. 다만 그곳에 은총의 자국이 있다면 그것은 엘리자(정화)가 나에게 주어진 것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로 신(神)의 섭리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위태로운 선물이었다. 기적이었다. 따라서 나는 엘리자를 통해서 신을 보아야 하고 신에 이르러야 한다. 엘리자는 나에게 있어서 '눈에 보이게 나타나는 신의 사랑(sichtbar gewordene Liebe des Gottes)'이고 은총인 것이다. 엘리자 없는 나의 생(生)은 지금은 상상도 안 된다. 황무지(Wasteland)보다 더 황폐하고 삭막하고 공허하고 가난했을 것이다. 언제나 그것을 명심하자.
  

1월 6일

무언지 즐거운 기대가 예감되는 즐거운 아침이다. 무겁게 잿빛으로 꽉 잠긴 하늘조차 유쾌한 강설(降雪)의 약속으로밖에 안 보인다.
긍정(肯定)과 악황(樂況)에 넘친, 이런 새벽의 감상이란 나에게는 희귀한 것.

어젯밤 화장실 유리창을 통해 아스토리아 호텔이 보였다. 훤한 노란 빛으로 빛나는 몇 개의 창. 그 사이사이에 앓는 이처럼 검은 창들...... 창가에 떠오르는 실루엣(Silhouette)...... 나이프와 포크 소리도 들리는 것 같은...... 가볍게 웃으면서 하품하듯 소일하는 사람들도 이 세상에는 있는 것이다. 죽음이란 그들에게 있어서는 계산 밖의 일, 사고(思考) 밖의 일일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절대로 죽을 수가 없는 재인(在人)들이다.
우연히 S라는 아이를 길에서 보았다. 얼마 전에 미국서 온 아이다. 그애의 우월감(이유 없는)과 초연함, 머리 * 화장 * 복장에서만 과시하려는, 그곳에만 미국 갔다온 사람의 특성을 가냘프게 유지하려는 초조하고 혼자 거만하고 일반적으로 무례한 태도는 불과 몇 분 사이에도 완전히 감지할 수가 있었다. 그애가 나를 못 본 것을 요행으로 알고 나는 얼핏 피했다. 구토를 누르면서......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조금이라도 저런 냄새가 날까 봐 겁내면서...... 전에는 순수하고 소박해 보이기까지 했던 그애가 저렇게 속화(俗化) 된 것, 완전히 속물(俗物)이 된 것은 미국 때문일까? 또는 나이 때문일까? 문화나 문명이 발달시켜 놓은 그것의 노예가 되어 버린, 자기도 모르게 물질 숭배자, 따라서 배금주의자가 돼 버린 것이 구미인(歐美人)이다. 아주 극소수만이 아직도 정신의 편이다. 외국에 가서 물질만 배워 온다면 정말로 안 가는 편이 낫다. 여기서도 밍크와 다이아몬드, 자가용, 악어 백 등은 얼마든지 사고 즐길 수 있는 것이니까. 가능한 사람은......
사람은 자기 자신에 관하여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순전한 이기주의로 보더라도 안 된다. 왜냐하면 마음을 털어 버리고 나면 우리는 보다 가난하고 보다 고독하게 있게 되는 까닭이다. 사람은 속을 털면 털수록 그 사람과 가까워진다고 믿는 것은 환상이다.
생전 처음으로 느꼈다. 우리가 정신 속에서 우리를 구제하지 않는다면 삶이란 끔찍한 것에 불과하다고. 나는 내 생각에 더이상 잘 쓸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한 글이 아닌 것은 도저히 갖다 줄 수가 없다.

당신은 정신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아실 겁니다. 정신이 배고픔이나 더위와 마찬가지로 현실적이라는 것을, 정신에 쫓기는 것이 얼마나 불편한 일인가를 자신의 경험에서 아실 것입니다.
나는 그게 어떤 것인지 알고 있다. 사람이 완전히 고독하게 앉아서 다시는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은 느끼고 영원히, 다시는 한 사람과 만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아는 것이 지옥일 것이다.

― <생의 한가운데>에서
 

1월 7일

동해루 앞에서 어떤 젊은 청년하고 같이 그곳으로 들어가려던 동무를 만났다. 몹시 마르고 빈상(貧相)해져서 기이할 지경이었다. 눈은 더 나빠진 모양...... 나이가 어려 보이는 청년과 같이 들어가는 게 아마 직장의 동료인 듯했다. '독신 직업 여성'이라는 한 개의 문제를 안전(眼前)에 본 감이 있었다. 그리고 한국에서의 직업이란 생활의 쾌적은 커녕 필요한 것(das Notwendige)도 해결해 줄 수 없을 지경이니 더욱 기가 막힌다. 그렇다고 결혼이 언제나 누구에게나 최선의 바람직한 상태(bester und wunschenswerter Zustand)일 수도 또 없는 것이고......
무(無)에의 과정으로써 생물적으로 생(生)을 파악한다면 무엇 때문에 그렇게도 많은 노고와 땀과 눈물과 피가 필요한가? 하고 묻고 싶어진다. 정말로 '정신' 속에 우리를 구제하지 않는다면 삶이란 살아질 가치가 없는 무엇일 것이다. 아무리 생각을 되풀이해 보아도 인간이 순수 상태, 최고도로 승화한 상태란 의식이며, 단순히 인간은 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 같다. 따라서 의식을 매 순간마다 지키고 깨어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인간에게 적합하고 당연한 생과제(生課題)인 것 같다.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하는.......
사랑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정신에 의해서 빛나게 된 것이 아니라면 무가치하다. 우리가 뜨겁게 미친 듯이 사랑할 수 있는 것은 가장 순수한 의식의 상태에서 뿐이다. 그러나 그런 상태 ― 순수한 사랑이란 세상에서는 순간으로밖에 선사되어 있지 않다. 언제나 거기에 어떤 다른 무엇이 섞인, 혼합물(Mischung), 때때로는 싸구려 혼합물(billige Mischung), 심지어는 대용품만이 우리에게 주어진다. 우리의 의식이 지향하고 있는 것은 순수(純粹)뿐인데도 그것이 존재내에서 존재하기란 너무도 힘들다. 너무나 모험적(riskant) 고독한 경주(傾注)를 필요로 한다. 일상 생활과는 필연적으로 적대 관계에 있다. 순수의 반대의 타협(Kompromiss), 속물주의다.
정말이다. 지혜의 여신(Minerva)의 부엉이는 밤에 난다. 어둠 속을...... 즉 미학이 단념하는 곳에서부터 도덕이 비롯하는 것이다. 아름답지 않은 대상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냉정(stoic)해질 수 있는가만 생각해 보라! 비겁하게도 도덕에 두 팔을 들게 되는 우리들! 온갖 부덕(不德)은 미(美)와 미에의 우리의 숭배에 기인하고 유지되어 나가는 것이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 떨어지는 모래 * 시간 * 햇빛...... 이런 것 이상의 아무것도 아닌 육체, 그것도 때로는 아름다운 눈동자가 더 참되게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다. 육체에의 우리의 이러한 편견(미나 추의 개념도 하나의 편견이요, 경향인 것이니까)과 고착(Klammern)은 모두 우리가 육체를 하나의 비유로 보는 데서 생겨나는 것이다. 두 손에 잡히지 않는 대상의 영혼을, 의식을 우리는 그의 육체를 통해서 파악하려고 한다. 그때에 육체는 언어가 된다. 프리즘이 된다. 우주를 반영하는...... 그리고 우리의 매혹은 완전해지는 것이다. 순수한 매혹, 대상도 없이 자족(自足)한 매혹의 상태는 바로 나르시스의 상태다. 즉 불모(不毛) * 무(無) * 죽음의 숭배인 것이다.
자기의 육체와 자기의 의식은 필경, 초극(超克)되어야 할 무엇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그리고, 그 초극의 과정은 순간적으로만 가능한 단편(Fragmento)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삶은 기나긴 거리의 대부분의 무용성(無用性)을 느끼게 된다. 니힐을, 불합리를, 물거품, 무지개, 하루살이, 갈대...... 비유는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강한 허무의 비유는 우리의 저서다. 우리의 움직이기 쉬운 마음, 찰나적으로 사라져 버리는 감동, 공감, 찬미, 사랑이다.
숫제 기억에서 깨끗이 지워져 버리는 것이(기쁜 추억이든지, 슬픈 추억이든지) 우리의 허무의 가장 큰 징조일 것이다.
왜 모든 지적 발견(知的發見), 인식은 나에게 있어서는 필연적으로 부정(否定)의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일까? 지상에는 전적으로 완전히 무조건 영원히 긍정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까닭이다. 모두가 순간적으로만, 그리고 조금씩 큰 가마에서 한 숟갈씩밖에는 체험될 수 없는 까닭이다. 모든 것이 다 암시적이고 가상적이고 대용품격(대상도 우리에게는 근본적으로 보아 신의 대용인 것이다)인 까닭이다. 생각할수록 슬프기만 하다. 

저녁 기도

조용하거라, 공포여, 고통이여.
곧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다.
눈만 감고 가만히 있으면
너는 반드시 가루가 되어 부서질 터이니,
기다리거라, 분노여, 불안이여.
세계가 끝났다고 네가 생각하는 날,
참으로 끝나는 것은 다만 너의
작디작은 심장의 움직임뿐일 것이니,
나를 떠나거라, 애정이여, 동정이여.
네가 집착한 온갖 대상은
손가락으로 흘러떨어지는 모래보다
더 순간만의 것이고 더 무(無)인 것이니,
잠자자, 내 감각, 내 피부......
우주의, 신의, 사람들의 고통을
인공적으로라도 덜 느낄 수 있도록!
 

마치 현실에서의
나의 무용성(無用性)을
반증하려고
내 잠재 의식이
기를 쓰고 활동하는 것같이
내 수면은 반드시 꿈을,
그것도 특이한, 찬란한,
무서운, 달콤한, 뜻밖의,
무수의 에피소드를 담은
총천연색 대형 스크린의 꿈을,
수반하는 것이다.
 

대상에의 기도

앞으로 네가 있을지 나도 모른다.
다만 네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나는 너의 존재를 알고 있고, 내가
너의 존재에 무한한 감사를 빚지고 있음을
네가 있었으므로 해서 알고 있는 것이다.
 

나르시스가 죽은 뒤, 님프들처럼,
당신이 없음을, 없는 존재 세계의 무목적성과 절망을 견디지 못하고 머리를 풀고 울며 외친다.
우리는(신이여! 신이여!) 심연에서부터,
신이여, 우리를
이 뼈를 깎는 공포로부터 놓여나게 해주실 수 있는 유일한 신이여.
당신이 없다면 우리는 옛날에
기절했을 것입니다.
 

그리움

거리만이 그리움을 낳는 건 아니다.
아무리 네가 가깝게 있어도 너는 충분히, 실컷 가깝지 않았었다.
더욱 더욱 가깝게, 거리만이
아니라 모든 게, 의식까지도 가깝게
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움은.
 

배반

내 눈처럼 마음속처럼
암담했던 저녁
내 생각은 줄달음질쳤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다.'
기정 사실인데도'
'그럴 리가 없다.'
확증된 일인데도
'그럴 리가 없다.'
그때 나는 내 의식이
내 옆에서 소리를 죽이면서
우는 것을 들었던 것이다.
어떤 저녁에
 

형제

너희도 나를 선택하지 않았고, 나도 너희를 선택하지 않았고, 내 부모도 우리를, 우리도 부모를 각각 선택하지 않았다. 단편적인, 엄연한 사실만의 집합체가 우리다. 체계 없는 아마 의미도!
그럼 누가 우리를 모아 놓은 것인가?
묻지를 말라. 

오늘 저녁은 유난히 파토스(Pathos)가 넘치는, 터질 것같이 감정(Emotion)이 충만한 저녁이다.
무엇의 자극이었을까? '마틸다?' 또는 엘비스의 <당신은 오늘 밤 고독하십니까?(Are you lonesome tonight?)>, 또는 포도주?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아무튼 안개가 깊이 덮여 달도 없고 별도 없고 가로등만 있는 저녁이다. 마치 어딘지 정처 없이 가는 집시같이 남김 없고 숨김 없이 방랑하는 느낌! 고독! 생이 지나가는 것을 첨탑에서 내려다 보는 듯한 느낌....... 모험과 뜨거운 센세이션, 과감한, 순수한 체험에의 갈망이 조수처럼 뜨겁게 밀려 왔가닥는 다시 싸늘하게 식는다. 무언지, 무언지 이룩해야겠다. 이 모래를 가지고.......
이 나에게 주어진 시각성을 가지고....... 그렇지만 무엇을? 지금 나의 내면의 순수한 명령은 <<생의 한가운데>> 같은 책을 쓸 것을, 아니면 번역할 것을 명한다. 그렇지만 인쇄딜 수 있을 것인가? 지금은 일본소설 붐인데! 무엇이든 좋다. 직접적이고 수공업적인 나날의 땀, 집중과 하루에 적어도 7, 8시간이라는 노동시간을 요구하는 그런 일을 맡고 싶다. 노동하고 싶다. 꿈꾸는 것 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인텔리는 되고 싶지 않다.
땀을 흘리고 입수한 빵은 반드시 더 달지는 않다. 미각상으로 보아....... 그러나 그것은 확신(내면적인)과 안전을 준다. 세게에서의 나의 위치를 의삭하게 해준다. 마치 한 개의 의자가 어디에 속해 있는가에 대해서 이론이 없듯,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 명확한 무엇이 된다. 모든 것이 다 단순해진다.
내 시야는 몹시 좁고 낮고 아늑해져서 나는 일상성 속에 네 활개를 펼 수 있는 것이다. 아, 일상성, 일일(하루)의 노동이 그립다! 내 의식을 파헤치고 내려가도 대답은 제로일 것이니까! 내 존재나 바로잡고 내가 어디에 현실적으로 속해 있는가는 이론의 여지없이 알고 싶은 것이다.

학생을 가르치는 일은 싫다.
첫째, 학생의 순수성이나 지성에 신뢰가 안 간다.
둘째, 가르치는 사실이 나에게 우선 흥미가 없다. 학생한테도 따라서 물론.......
셋째, 나보다 낫게(더 알기 쉽고, 외기 쉽게) 가르칠 수 있는 인간이 얼마든지 있으리라는 확신에서 나오는 불안(Unsicherheit)과 콤플렉스.
넷째, 어려서부터 선생과 교사의 직업을 나는 경멸해 왔고 지금도 그렇다.

나의 소망의 직업이 있다면 역시 쓰고 싶은 것뿐!
나의 소망의 생방식은 사색(Philosophieren)이고.......
아무리 보아도 공명심이, 생에서 어떤 확실한 한 자리에 도달하려는 더러운, 또는 가엾을 것인 욕망으로밖에는 나에게는 안 보인다.
모든 것에 도달하고 나도 나에게 남은 것은 역시 유한성 시간, 죽음인 것은 마찬가지인 것이니까! 황소같이 목표를 향해 달리는 야심적인 사람에게 나는 묵묵히 고개를 돌리고 발걸음을 멀리 하는 수밖에 없다.
정치에 의한 사회기구 개혁과 사회와 인간의 개선도 나에겐 결국 헛된 노고로 달리는 길로밖에는 안 보인다.
온갖 지성의 최고 영역으로, 가령 내가 답사하고 난 후 일지라도 나에게 낙인(Zeichen)처럼 남은 건 회의론뿐일 것은 너무도 확실하다.
부모의 사랑도 못 믿고(그리고 그 불신은 정당한 근거 위에 있다) 내가 어떻게 신의 사랑을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신은 왜 파스칼에 있어서처럼 나에게도 구현해 보여주시지를 않는 것일까? 그의 조카의 옴병이 면류관을 만지자마자 사라진 것 같은 그런 이적(異蹟)이 왜 나아게게는, 내 눈앞에는 안 일어나는 것일까? 신의 총아(favarte)는 다만 구파라인인 것을까? 아시아, 아프리카는(회교도도 물론) 잊혀진 잃어버려진 대륙(vergessene, verlorene Kontinente)이란 말인가?
생각하면 할수록 괴로울 뿐이다. 마치 지혜의 사과는 나 혼자 먹은 양 왜 나만 괴롭힘을 당해야 하는가? 그것도 스스로 사서?
단순한 어린애만이 행복하다는(천국에 간다는 확신은 즉 행복이니까) 예수의 말은, 그럼 우리는 유년기에 있어서만 무죄하고, 무죄에 있어서만 불행하지 않다는, 즉 무와 죽음의 의식이 주는 강박관념과 공포로부터 자유롭다는 말인가?
그림책같이 한없이 길게 느껴진 어린 시절! 세상이 이런 줄은 꿈에도 모르고 하루하루가 신비스럽고 기대되었던 때! 즉자 존재(Ansichsein)!
일단 자기의 내던져진 상태를 반성해 보고 자기와의 사이에 거리를 두루 알게 되었을 때부터, 즉 자기가 자기의 흥미거리가 되고 연구 대상이 되었을 때부터, 즉 우리에게는 풀 수 없는 모순과 상처와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 지옥(Holle)은 시작된 것이다. 즉 우리의 지옥이란 우리의 대자 존재(Fursich Sein)이고 우리의 의식성(Bewu βtsein)이고 우리의 지성(Intellekt) 이외의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다시 즉자(卽自)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는 한(즉 미치거나 백치가 되는 은총이 베풀어지지 않는 한), 우리는 영원히 불행한 것이다.
대개의 작가의 창작 의욕이란 이 불행을 의식 속에서만이라도 종이에라도 초극해 보려고 한, 다시 즉자로, 유년기로 돌아가려고 한, 무리한 또는 다만 순간적인 발버둥치는 노력이었던 것이다. 그 보수는 불행의 의식과 고통이 평인보다 수배로 강하게 깨어나고 계속된 것밖에는, 생각할수록 불행하고 불가사의한 것은 우리 인간이다.
가끔 무지개처럼 주어지는 짧은 매혹(Verzauberung), 환상(Illusion), 만남...... 이런 선물은 너무 드물고 너무 찰나적이고 그외에는 인생은 길고 긴 항로이다. 의식의 이 팽팽한 긴장과 심장의 이 아픈 충일(充溢)과 예지의 이 텅 빈 공허, 그게 전부다. 양심 있는 성인이 획득할 수 있는 인생 수학은......
따라서 인간에게 가능한 전부는 태도(Haltung), 즉 포즈(Pose)뿐인 것이다. 시지프(Sysiphe)의, 또는 랭보, 또는 보들레르(Baudelaire), 또는 니체(Nietzche), 또는 릴케...... 아무튼 양심있게 용감하게 운명과 대면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 그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인 것이다. 새로운 공포가 솟아난다. 새로운 허무와 공허감이! 결국 생은 무이고 인간이 이룰 수 있는 최고의 것은 포즈 이외에 아무것도 아님을 생각할 때......
 

1월 8일

미래와 연결되지 않은 과거란 잇을 수 없다. 그것은 무(無)다.
밤이 왔습니다. 이제 모든 샘솟는 우물들은 큰 소리로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내 영혼도 하나의 샘솟는 우물입니다. 밤이 왔습니다. 이제야 모든 연인들의 노래 소리가 커져 옵니다. 그리고 내 영혼도 하나의 연인의 노래 소리입니다.
채워지지 않는, 가라앉지 않는, 어떤 것이 내 마음속에 있습니다. 그것은 큰 소리를 내려고 합니다. 사랑을 그리는 내 욕망이 내 마음속에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언어로 말합니다.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너

그리고 영혼과 영혼이 맞부딪칠 때
우리는 거기서 영원을 본다.
 

1월 9일

나의 모든 과오와 죄악은 한마디로 태만인 것 같다. 의식과 정신과 감각이 하나같이 무의욕과 게으름의 늪에 빠져 있다. 내 영혼을 완전히 점령하는 나의 24시간의 심신을 충만시킬 그 무엇은 없는 것일까? 무슨 일이라도 하고 싶다. 못견디게 공허와 싸우고 지쳐서 잠자는 노동자가 되고 싶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das ewige Weibliche)이라는 것은 조소할 만한 개념만은 아닌 것 같다. 어머니가 유명하거나 바쁜(외형적으로) 아이들, 즉 등한시되고 있는 아이들은 온갖 물질적 혜택과 사치에 젖었음에도 불구하고 잘못된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모자간의 원적의(原敵意)는 무엇에 기인하고 어디에서 끝날 수 있는 것일까?
여자도 남자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긴장한 일 끝에는 자연스런 긴장 완화(Entspannung)에의 욕망이 있고 그것은 만족스럽게 충족될 수 있는 것일까? 루이제 린저와 지 샌드는 그렇다고 하고 보브와르는 아니라고 한다.
엄밀한 의미로 모럴이나 지조(Constancy)의 한계 여하(限界如何)?
또 세계 여행을 떠나게 되는 아버지가 몹시도 부럽다. 콜로라도, 네바다, 멕시코...... 가 보고 싶은 곳이 너무 많고 너무 불가능하다. 아무 의미나 돈의 제한 없이(비교적) 그저 관광 여행을 하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것일까?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8형제의 한 명으로서, 외국에서 4년간 공부할 수 잇었던 것을 부모에게 감사드려야 한다. 그리고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다만 보은할 수 있는 날이 언제가 될지는 미정이지만......
거리가 그리움을 만드는 경우도 있지만 그와 정반대의 경우도 있다. 잊었던 모든 결점, 약점, 불쾌한 에피소드들, 학대 등이 생생히 상기되고 고정되는(의식 속에) 수도 있다. 거리는 때로는 브레히트의 소외 효과(Entfremdun-gseffekt)와 같은 작용을 한다.
온갖 우정이나 애정의 토대는 존경(그의 야심, 의욕, 능력에 대한)과 신뢰(도덕적인, 인간으로서 기본적인)다. 이 두 개만 있다면 육체적 매력이나 소위 성적 매력 같은 것은 문제도 안 되는 것이다.
거리는 공포다.
지옥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공포다. 그리고 이 공포는 우리가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 사랑도 받지 않는 데서 생겨난다.
범속화(凡俗化)에의 강렬한 욕망이 때때로 질식할 듯이 엄습한다.
모든 즉자 존재를 부러워하는 것은 그런 순간이다.
 

1월 10일

인간 속에 있는 극단적인 이기주의가 좁은 생활 범위 내에서 나날이 폭로되어야 하는 체계(System)가 가정인 것 같다. 모든 인간이 늑대로 보인다. 고독한, 완전히 홀로 자기의 생존과 모이를 찾아서 으르렁 으르렁 헤매고 있는 방랑하는 늑대, 그것이 인간이다. 사랑 같은 건 인생의 첫번 언덕(분홍빛 유년기)에서 피었다가 어느덧 꺼져버리는 안개 같은 것, 환각에 불과한 것이다. 그 짧은 일순간을 빼놓고 인생은 지루하고도 무섭게 짧은 가시밭이다. 이 가시밭을 또 영원히 갈망하는 인간의 생명에의 애착이야말로 온갖 비참보다 더 비참한 것이고......
끝없는 불신, 대자와 신에 대한 이 믿을 수 없고 의지할 수 없는 허망한 느낌, 공포가 이윽고는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 것인가? 모든 것 속에서 악의 씨를 본다. 비극의 싹과 끝없는 무를 본다. 너무나 불가능한 과제가 삶이다. 마치 어디에 굳게 의지할 무엇이 있기나 한 것처럼 자기의 삶을 건설하고 하루하루를 조각하듯 이룩해 나가야 한다는 것, 모래로 해안에서 집을 만드는 데 가장 열심히 성실히 만드는 것과 같은 것, 이런 과제, 이런 나날의 초극과 자기 극복과 어떤 눈가림을 요하는 작업이 삶이다.
모든 것이 불안정하고 유한한데 무엇을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인간과 인간의 영혼이 부딪치는 것은 어떤 귀하고 드문 순간에만 제한되어 있을 때 우리의 정서의 정주란 가능한 것일까? 신앙이란?
회의(懷疑)밖에는 남는 것이 없는 검은 무(無)하고.... 괴로울 만큼 터무니 없는 깨달음을 위해서 약 30년이나 이미 살아온 것일까?
밝음이란 언제 가능한 것일까?
정말로 나의 상황은 오스왈드(Oswald)의 <나에게 태양을 다오>라고 할 수 있다.
행복하게 시민적 가정을 이루고 있는 사람을 볼 때 그 속에서 안분(安分)하는 지성과 깨달음과 겸허, 인간의 근본적인 따스함을 볼 때 부럽고 존경의 염(念)이 일어난다. 나는 영원히 그런 사회로의 문이 닫힌 것 같은 어두운 체념과 절망과 함께......
니체의 <밤의 노래>는 맑고 차갑고 투명한 고독의 극치에서 외친 탄성 같다. 감탄할 만한 언어의 구사, 이미지의 맑음, 표현의 매력, 도취시키는 법......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의 하나다.
니체도 역시 외로웠던 것이다. 한 여자와 부엌, 식탁, 아이...... 이런 시민적인 영상이 그의 뇌리를 아마 잠시도 안 떠났을 것이다. 그것을 안 했으니까 니체가 있는 것이지만 그가 그만큼 무서운 고독의 대가를 지불했던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무엇에도, 무엇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한 쌍의 남녀가 만나서 자족하고 행복을 느끼는 생활 분위기를 구성하면서 일생을 보내도록 되어 잇는 동물인 것 같다. 그것이 정상이다. 만약 그렇지 못할 때, 즉 어딘지 병적일 때, 그 인간과 세계와의 대립은 극단화되고 그 대립의 고뇌에서 예술이나 철학이 창조되는 것이고, 그것을 창조하고 있는 사람의 나날은 몸서리치는 고독감에 뒤덮여 있을 것이다.
몇 개의 개념이나 작품을 남기는 것과 태고 때의 사람과 똑같이 순박하고 선량한 인간으로서 삶의 자국을 남기고 죽는 것은 어느 편이 보다 옳은 것일까? 생(生)도 작품도 다 소멸해 버리는 것임에는 다름이 없는데......
자기 탐구며, 진정시킬 수 없는 인식욕과 철학적 고뇌 같은 것은 결국 한 푼의 값어치도 없고, 자기에게도 타의 아무에게도 이득이 없는 시간 낭비 내지는 우주에 대한 부당한 거만, 분수를 지킬 줄 모름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결국 깨끗하게 살려면 캐러밴이 되는 수밖에는 없었던 것일까? <지옥의 계절(Saison en Enfer)>도 쓰여질 가치가 없었던 책인가? 분명히 그 책은 객관적으로 가치가 있는 책이다. 그러나 랭보라는 인간의 일회적 삶 속에서 그것은 어떤 역할을 연기했던 것인가? 가능하면 목판 장사를 하고 싶다. 그래서 번 돈으로 가족과 굶지 않을 만큼 먹고 살고 싶다. 그게 제일 깨끗할 것 같다.
모든 전달 불가능(nicht Kommunikation-konnen)에도 불구하고 인간과 인간은 서로 만나도록 운명지워져 있는 것일까? 만남의 짧은 매혹 끝에는 기나긴 상처의 길밖에 남겨져 있지 않음에도 왜 인간은 만남에 황홀해 하는 것일까? 인간은 거의 만남에 의해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이 지속 불가능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다.
언제나 가능한 것은 독백뿐이다. 대화의 메아리(Echo)는 언제나 독백으로 공허하게 울린다. 언제나 '너'를 찾으려던 우리의 시도는 '나'를 다시 찾은 것으로 끝나고 만다. 그리고 고독은 깊어지고 넓어지고 무섭게 어두워진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Seele)은 몹시도 목말라 있다. 한 개의 자매혼(Schwester-seele)에, 이해하는 마음에, 눈에 그것은 떨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영혼과 영혼이 부딪칠 때, 그 찰나에 우리는 영원을 본다. 시간성을 느낄 수 없게 꽉 찬 순간,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감득될 수 있는 유일한 영원이다. 그 영원의 순간을 위해서 우리의 영혼은 언제나 목말라 있는 것이다.
새 출발, 새 결심, 새 일기장, 새해, 그러나 새 습관은 너무나 빨리 헌 습관에 합류하고 우리는 언제나 과거에 그랬듯이 똑같아진다.
삶에서 큰 것을 기대하는 우리의 건방진 착오라는 것을 잘 안다. 그래도 요즈음의 삶은 너무나도 자잘한 불쾌나 불안과 공포에 모자이크 되어 있다. 좀 큰 날은 없을까? 큰 대낮은?
정화는 병아리같이, 참새같이, 인형같이 귀엽다. 지금이 제일 예쁜 나이다.
 

1월 12일

허황한 듯한 나날들, 태엽을 잃은 기계 같다. 꼭두각시들...... 샴페인이 펑 터지는 것 같은 나날은 영원히 다시 없는 것일까? 매일매일이 마개를 일은 지 오래되는 사이다같이 맛 없이, 흥분 없이, 열정 없이, 비약 없이 흘러가고 없어지는 것일까? 인공적으로라도 열정을 만들고 싶다. 억지로라도......
인공적인 열정(Elan artificiel), 강요한 열정(Elan force)......
'그리고 너의 사랑의 발작을 주의하라! 고독한 자는 그가 만난 자에게 너무도 빨리 손을 내민다. 너는 많은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서는 안 되고 단지 앞발을 내밀어라. 그리고 네 앞발에 발톱도 있기를 바란다.'
 

1월 14일

생의 카펫은 때때로 극도로 불쾌한, 때로는 기분 좋은 실을 섞어서 무늬를 짠다. 오늘 같은 날은 후자에 속한다. 자살에의 욕망을 조금 감퇴시킬 만한 생에의 약간의 집착을 순간으로나마 느낄 만한 날은 나에게 있어서는 길일(吉日)인 것이다. 정신 속에서 나를 구제하지 않는다면 생이란 제로인 것이다. 존재에, 욕망에, 매커니즘에 빠져서 응결되어 흐름이 없는 생이라면 계속할 이유가 없다. 어떤 순간에라도 정신의 비약이 느껴지는 순간이면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타인의 의식 속에 있는 내 의식을 문득문득 생각해 보면 기절할 것 같은 현기증과 공포에 사로잡힌다. 어떤 형태로 그것이 있든지 간에 최량의 경우라 해도 그것은 한 오해한 만화, 한 희화일 것이 명백하니까!
나는 어딘지 사람에게 쉽게, 또는 관대하거나 너그럽게, 부드럽게 보이는 데가 있는 것 같다. 별로 가깝지 않은 친구 중에도 신상의 깊은 일까지 의논해 와서 나를 당황케 한 케이스가 한둘이 아니었다. 지금은 그에 익숙해져서 누구의 신상 상담도 담담히, 예사롭게, 그러나 친절한 관심을 보이고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럴수록 내 내면의 마음의 갈등, 나의 괴로움이나 초조는 아무에게도 말 못하게 되고 만다. 누구나 다 괴롭게 사는 것인데 나까지 사람을 더 괴롭히고 싶지 않고 또 오해받을까 봐 두렵기도 한 것이다. 이것은 겁쟁이(Coward)인 것일까? 내가 아주 아주 부자가 되면 살롱을 열고 싶다. 19세기 중엽의 그것과 같은 것, 언제나 맛잇는 음식과 음료와 모든 것을 손님의 쾌적을 위해서 설비해 놓고, 수많은 방에 맘대로 가서 자유스럽게 앉게 설비해 놓고, 크디큰 수풀과 노래하는 분수가 있는 정원도 해놓고, 정신의 귀족들, 아름다운 영혼(schone Seele)들을 전부 모아서 드나들게 하고 싶다. 대화에 의해서 우리의 의식이 잠드는 것을 방지함으로써 완존(完存)에 돌입할 수 있는 것은 중요한 일이니까! 그리고 모든 사람의 신상 상담이나 하소연을 다 듣고 같이 괴로워하면서 타개책을 생각해 보고 싶다.
아무튼 풍요한 생활, 손님을 초대하고 즐기는 것, 남에게의 봉사...... 이런 것은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것이 강요된 것이 아니라 기분 좋은 분위기에 자발적으로 생겨나는 욕망인 경우에는......
밤 1시다. 정화가 울어서 깼었다. 착한 아이인데 왜 울까? 바에 종종 같이 놀고 있다.
지금 그림책을 보고 그 설명이 걸작이다. 요새는 전기불을 구경하기가 힘들다.지금도 촛불 밑에서 쓰고 있다. 다시 잠들게 해야겠다.
 

1월 16일

새벽 같은 추위와 파란 공기지만 사실은 지금이 오전 7시다.
내 속에는 커다란 모험의 정신과 또 가장 진부한 타협의 정신이 언제나 싸우고 있다. 질서와 무질서, 혼돈과 맑음, 대자(對自)와 즉자(卽自), 아폴로와 디오니소스...... 비유는 많을 수 있다.
아무튼 어떤 환희나 즐거움의 찰나에도 내 의식은 그러한 것이 근본적으로 보아서 무가치한 것이고 모래에 모래를 더한 것만한 의미밖에 없다는 것을 잊을 수가 없다.

어떤 내 형제와 나 사이에도 빙하(氷河)가 흐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아연했다. 그 빙하의 이름은 이기주의(Egoism), 생존 경쟁(Strugle for existence) 등일 수 있다.
빙하 없는 우정, 빙하를 용해할 만큼 더운 동정(Sympathie)은 온갖 커뮤니케이션과 마찬가지로 순간에만 가능한 것, 형제 사이에도, 부부 사이에도, 모자 사이에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아이만은

이 작은 분홍색 육체, 영혼이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것 같은 눈동자, 천사와 교환하는 것 같은 혼자 짓는 미소, 이 귀여운 것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1월 17일

어둠이 다가오면서부터 무섭게 마음이 불안해진다. 미칠 듯한 공포(내가 인간으로 태어난 것에 대한), 심장이 터질 것같이 압축되어 고통을 느낀다. 아무것도 손에 안 잡히고 누구와도 얘기하고 싶지 않고 어느 책도 눈에 안 들어온다. 미칠 것같이 불안하고 고통스럽고 무엇보다도 무섭다. 시간이, 영원이, 헛됨(Neant)이, 죽음(la Mort)이...... 모든 것이 나를 놀라게 하고 나를 매혹케 했다. 왜 나는 태어난 것일까? 인간은 무엇인가? 왜 인간은 태어나야 하고 그리고 왜 죽어야 하는가? 죽음 후엔 무엇이 올 것인가? 신은 존재하는가? 어떻게 해야 우리는 신을 알 수 있을까? 도대체 삶이란 의미를 지닌 것인가? 언제, 어디로? 이 모든 의문은 나를 떨어지지 않고 추격한다. 괴롭힌다. 나는 너무도 깊게 슬프다.
나를 가득 채우고, 취하고, 끓게 하는 한 과제가, 완전한 과제가 없는 데서 나의 이런 니힐이 나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쁘고 숨막히는 생활을 굴레 바퀴 속에 깔리운다면, 의식은 까무러쳐서 치인(痴人)의 흰 잠을 자게 될 것이고 나는 미소할 것이다! 그렇지만 결국 속이면서 눈 감고 사는 것보다는 미쳐도 괴로워도 눈을 부릅뜨고 응시하면서(현실을) 살아야 하는 것이고, 그런 삶의 방식 속에 인간의 본질이 있는 것이다. 결국 제일 쉽고 제일 행복한 상태는 온갖 의욕이 없는 것(삶의 의욕조차도), 즉 정지, 죽음의 상태인 것 같다. 의욕이 있는 곳에는 아픔도 있는 것이니까! 의욕, 발전, 음직임, 흐름...... 이 모든 것은 필경은 고통의 어머니다. 고통이 없어지려면 우선 생각하는 내가 없어지든가(死), 내 속의 사고가 없어지든가(狂 * 痴), 그 중의 하나밖에 길이 없다. 그 둘 다 극단의 길이고 따라서 실행해 들어가기가 곤란한 길이므로 그 중간에서 인간은 여러 가지로 타협한다.

① 관조(觀照) ― 인생을 미학적으로 정관(靜觀)한다. 그 자체로서 완성된 것으로 본다. 소설을 보듯 이데아를 추출해서 본다. 아나톨 프랑스(서재의 창에서 인생을 본다), 상아탑, 순수시, 순수미의 절대치의 탐구에서 의욕이나 고통을 잊는다.
② 도취(陶醉) ― 디오니소스적 생의 구가(謳歌), 우선 술이나 기타 마취제로 고통의 의식을 진정시키고 거세한다. 정치(사회주의, 공산주의, 나치스 등), 연애, 도박, 알콜 중독, 아편, 마취제 등등. 결국은 중추 신경이 마비돼서 백치나 광인으로 행복하게 일생을 문닫게 되는 길.
①의 길을 걷기에는 두뇌가 모자라고 ②의 길을 걷기에는 매개물이 모자라는 것이 범인(凡人)이 아닐까? 아무것에도 철저할 수 없는 것, 그게 범인의 이명(異名)인 것이니까.
재즈는 ②의 길을 암시하고 약속하기는 하지만 완성시키지는 못한다. 언제나 길 어귀에까지밖에 못갖다 준다. '재즈의 장막(Jazz curtain)' 은 싫다. 이왕 장막일 바에야 '철의 장막(Iron curtain)' 이어야지.

수일 전 신문에는 법대생(바로 내가 독어를 맡은 반) 10명이 한라산에서 조난되고 1명은 사망한 기사가 나 있었다. 처음 등산에 안내도 없이 올라간 무모는 비난받고 있으나 역시 소년다운 맑은 대담과 우주에의 거만한, 그러나 악의 없는 도전이 아닐까? 죽은 아이의 최후의 말이 '여기가 만주 같다......' 였다고.
안데르센의 동화에 있듯이 인간은 동사(凍死) 직전에 기상 천외의 아름다운 꿈을 꾸면서 죽어가는 것인 것 같다. 역시 죽는다면 빙산에서의 동사가 제일 기분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모든 추위와 얼음에도 불구하고 그 학생들이 산정에서 받은 센세이션과 경치의 장관은 아무도 그네들한테서 뺏을 수 없는 그들의 재산인 것이다. 역시 위험한 체험이 가장 귀중한 체험인 것이며 체험만이 우리의 영혼의 양분이 되는 것이다.
 

1월 19일

한 가정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아이이고, 아이여야 한다. 다음 세대, 내가 죽은 뒤에 다시 살 내 생명으로 알고 다듬고 가꾸는 길보다 중요한, 보다 절대적인 것이 있겠지만 피안(彼岸)만을 믿는 보통인에게는 아이밖에는 신앙의 대상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부부도 귀중하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가 아니며, 잔인하게 보아서 대체 가능한 관계이다(죽음이나 다른 원인에 의해서). 그러나 아이만은, 나의 피와 생명으로 내 몸 속에서 만들어 낸 이 작은 생명만은 절대적인, 모든 것을 뛰어 넘는 관계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 본성을 파고든 존재론적 의문에 부딪침 없이도 다행히 우리는 이 새 생명을 사랑하도록 본능으로부터, 마음으로부터 명령받고 있는 것이다. 이 작은 분홍색 육체와 영혼이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눈동자와, 천사와 교환하는 것 같은 잠자면서 혼자 짓는 미소...... 이 귀여운 것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것이 커서 자기의 길을 찾아도 그리고 그 길이 종종 해괴하고 이해할 수 없는 길일지라도 우리는 그 생명 속에 계승되는 나의 현재 때문에, 나의 생명 때문에 그것을 미워하거나 거부할 수는 도저히 없는 것이다. 그건 이치에 어긋나는 일이니까!
마리 다골은 여자의 모성애를 여자 속에 있는 암컷(Tierweibchen)이 승리하는 것으로 보고 경멸하고 거부했다. 다산(多産)이었고 모성애가 전연 없었던 가엾은 마리, 그 여자는 리스트에 미쳐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차가운 여자, 자기깐에는 논리적인 줄 아는 원시적 이기주의자를 열정의 리스트가 오래 참을 리가 없었고, 마리의 이런 왜곡된 생활 태도의 결과가 별리(別離)로 끝났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온갖 아이에 냉담한 어머니, 아이를 학대하는 어른들같이 내 속에 뜨겁디 뜨거운 분노의 불길을 일으키게 하는 존재는 없다. 길에서도 그런 장면을 보면 거의 미쳐 버린다. 객관이나 냉정을 곧 잃고 만다. 내가 차가운 유년 시절 모성애에의 굶주림에 물들여진 추억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있는 증거가 바로 그것이리라. 의무를 포기한 어머니만큼 비참하고 가련한 존재가 또 있을까? 자기가 없고, 세계 속에 타락해 있고, 속인으로서 공담(空談)과 호기심과 허영심으로 시간을 쫓고 있는 가련한 피조물(Kreatur)!
 

1월 22일

한 어머니는 그의 남편이 싫어졌을 때 그의 아이도 미워하게 되는 것이 보통일 것이다. 아이 속에서도 남편을 보는 까닭에......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아이는 무력하고 어머니 밖에 아이를 보호해 줄 사람은 없는 것이니까. 아버지라는 것은 우연적일 수도 있다(요셉과 마리아의 전설을 보라). 그러나 어머니는 아이에게 절대인 것이다. 지구가 열 번 뒤집혀도 이것은 진리임을 계속할 것이다.
 

1월 25일

너는 마땅히 그것에 도달해야 한다(Du muβes erreichen)!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미지수다. 다만 지금 이 현상유지는 아닌 좀더 다른 것, 좀더 생동하는, 좀더 진지하게 공부하고 사색하는 것, 좀더 '철학하는 것', 근원(Ursprung)의 향수를 가진 생활 태도가 필요하다.
환경이나, 모두 다 어느 퍼센트까지는 구실이다. 우리는 어디서든지 자기의 최대 한도를 다해서 살 수 있는 것이니까. 게으름(Idlness), 이것이야말로 너의 적이다.
어제 야스퍼스의 책을 조금 읽고 감동했다. 철학하는 생활 태도는 명상과 초월성의 욕망과 전달(Kommunikation)에 의해서 우리의 나날과 연결되고 그 태도가 매일매일 반복됨으로써 하나의 생활 분위기(Lebensstimmung)를 낳기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다.
성실이 결국 반복의 의욕과 그것을 견디는 것일 줄이야! 정말로 권태가 들어올 여지없이 성실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자기는 혼자서 자기가 되는 것이 아니니까 필연적으로 전달이 요청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있어서 우리의 순수성과 영혼의 대담성은 나날의 시련을 겪고 있는 것이다. 목표를 가지고 그 목표에 의해서 24시간 통일된, 정돈된 생활을 갖는 것, 근면할 것, 그것밖에 내가 할 최고의 것은 결국 없는 것이다. 반복(Wiederholung), 똑같은 고통스러운 작은 일, 일, 일의 똑같은 반복을 견디자. 아니 나아가 그것을 사랑하자. 거기에 네가 있다!
<고관들(Mandarins)>을 다시 조금 읽어 보았다. 루이(Lewis)와 로벨(Robert) 같은 사람, 그런 관계란 존재 가능한 것일까?
내 마음은 워낙 다감했던 것 같다. 그것을 가정 교육과 환경이 굳게 굳게 만들어 버린 것 같다. 이제의 나는 아무것에도 감동이 약하다. 어떤 고통에도 곧 이긴다(잊으니까). 행복에도 불행에도 도대체 집착이 안 가는 것이다.
인간에의 동경(Sehnsucht)은 가끔 일어난다. 동생들과 맘이 안 맞을 때 누구든지 같이 얘기해 줄 사람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난다. 그래도 정화의 귀여운 모습을 보는 것과 안아 주는 것으로 곧 그런 슬픔은 사라지고 나는 충족하게 된다. 끈기 있게 반복하자.
나의 평범한 사색과 노력을 좀더, 좀더 깊게 본질에 닿는 것 같은 태도로 살자. 경박이나 천한 것은 소름끼치게 싫다. 어느덧 나도 정신의 귀족 사상이 머리에 밴 모양이다. 손소희의 <리라기>에 좋은 말이 꼭 하나 있었다.
"여자는 약하다. 그러나 어머니는 강하다. 특히 미사(리라의 딸이름)의 어머니는......"
나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여자는 약하다. 그러나 어머니는 강하다. 특히 정화의 어머니는......" 이라고!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행복이냐!
내가 정화를 낳았다니! 이렇게 크고 예쁜 정화를!



그 비밀의 운하에는

나를 공포케 하는 것이 죽음이라면 나를 불안케 하는 것은 사랑인 것 같다.
 

1월 31일

벌써 말일이다. 그리고 보름달이 떠 있다. 음력 12월의...... 새파란 하늘, 노란 공 같은 달, 몇 개의 별, 싸늘한 냉기......
인간보다 자연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르겠다.
학교에 나갔었다. 강의는 없었다. 이제는 4월에야 개강할 것이다. 즉, 1,2,3월은 경제적으로 영(Null)임을 뜻한다. 그렇지만 학교 선생이라는 직업에 회의가 더욱더 커가는 나에게는 그 공백기간이 오히려 다행이다. 학교 선생이란 지식 외에도 어떤 사명감을, 전인격적(全人檄的)으로 무엇을 주려고 하고 줄 수 있는 무엇을 가졌어야 한다. 어떤 선생 속에도 공자나 페스탈로치가 들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없는 인간은 학교와는 무연지사(無然之事)인 것이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쉽게 인간의 의욕을 꺾는가를 지난 일 년 반 동안 뼈저리게 체험했다.
지식의 소매 상인보다는 내의(內衣)의 소매 상인이 낫다. 왜냐하면 그는 정신(Geist)은 더럽히지 않을 수 있으니까. 학문이나 학생을 목적으로 대하지 않고 수단(생활수단)으로 아는 모든 사람은 소매 상인이며 대상을 비하함으로써 사실은 자기가 내려 떨어지는 것이다.
그런 것을 생각할 때 몹시 반성이 된다. 내가 학생을 목적으로 할 수가 있을까? 하나 하나를 한 개의 영혼으로 보고 대할 수가 있을까. 의식이 서로 만나 이해하는 전달이 없는 빈 관계라면 그것은 아무도 아닌(Niemand) 자의 아무도 아닌 자와의 관계이고 거기서 생겨나는 것은 수다(Gerede), 호기심(Neugier) 등의 붕괴의 징후(Symptome)뿐일 것이다. 우리의 궁극의 목적은 결국 현존재(現存在)의 의미와 가치를 아는 것 뿐이다. 그것의 과정 속에 항상 자기를 두는 것 뿐이다. 그외에 모든 것은 본질에 부가되는 형용사에 불과한 것이다.
크리스트나 루터와 똑같은 생의 목적 이외에 우리는 가질 수가 없다. 즉, 이 비참한 지상에 묶여 있는 몸을 정신 속에서 규제한다는 과제밖에는...... 다만 범인(凡人)인 우리는 그들처럼 순수하고 열정적으로 무아(無我)할 수가 없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들은 육체를 걷어차고 영생을 택했다.
그러나 우리는 지상과 천(天) 사이에 타협하고 있다. 거기에서 모든 갈등은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후에도 그것은 더 깊어질 것이다. 크리스트처럼 하나의 이념(Idee)과 정신과 의식에 소진할 수만 있다면! 그러나 지상은, 가족과 애기는 너무나 감미롭게 따스하고 정답고, 육체는 슬프다. 모든 책에도 불구하고, 조금이라도 돈이 생기고 모인다면 작은 장사를 시작하겠다.
그리고 나의 존재를 생각하고 살겠다. 사명감 없이 남을 가르치는 입장에 자기를 두는 것보다는 나 자신을 좀더 알아야겠다.
 

2월 11일

며칠간의 흐리고 어두운 날씨를 끝맺는 것같이 오늘 저녁에는 어둠이 덮인 후부터 눈이 펑펑 내려 덮이기 시작했다. 지금은 벌써 발이 묻힐 정도다. 훤한 눈이 밝음 속에 흰 수목들과 엷은 곤색하늘과 전등불을 바라보면 문득 동경(Sehnsucht)을 느낀다. 누군지 마음속을 다 터는 것 같은 뜨거운 침묵의 공감 속에 같이 눈 속을 거닐 사람...... 그런 사람이 그립다. 어린애 같은 마음으로 순수해질 수 있을 것이다.
 

2월 12일

사랑이란 끝없는 겸소노가 신뢰와 회의(懷疑), 투쟁(패배와 승리)과 오해의 총체인 것 같다.
그것을 감정적으로 본다면 '불안'일 것이다.
콕토(Cocteau)의 말대로 한 얼굴이 나를 불안케 하는 상태가 사랑인 것 같다. 한 이념이 나를 공포케 하는 것이 죽음이라면, 나는 그것의 실체를 느낄 수 없을 테니까 내가 먼 발치로 느낄 수 있는 것은 죽음이라는 관념뿐일 것이다. 끊임없는 공포의 시련 속에 내던져져 있는 상태, 죽음에의 과정이 인간이다.

정말로,
'이 무서움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허공에 꽃씨를 뿌리듯
내 속에서 번식하는 의식.'
'한 사람 한 사람씩
커다란 죽음 앞에 향불을 피워 놓고
얼굴을 가리고 돌아서는 것은 웬일일까?'
'땅에서 하늘로 뚫린 비밀의 운하엔
지금은 물이 없고
물이 차기엔
만 년을, 억 년을 기다려야 하는지 모를 일이다.'

라고 밖에 인간은 표현될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의 상태를 한 장의 그림으로 묘출한다면 뭉크의 <외침> 밖에는 없다. 무서운 공동(空洞)의 무한대한 원 속에서 두 귀를 막고 눈을 부릅뜨고 외치고 서 있는 작은 인간, 어렸을 때는 인생이 그림책같이 끊임없이 보였고 하루하루가 길었는데(억 년보다도 어른이 되는 날이 멀어 보였는데) 지금은 인생이 검은 장부로밖에 안 보인다. 곧 끝장에 와 있고 곧 마지막 날이 예기되는...... 사랑은 의지이고 이성임을 더욱더 명석히 의식한다. 불꽃은 무수히 가능하다. 다만 불꽃을 지속시킬 수 있는 것은 나의 내면의 의지, 성실에의 의지뿐인 것이다. 그리고 그 의지는 촛불같이 한 대상만을 향하는 것이다. 정열을 꺼버리는 것은 정열을 불러 일으키기보다는 용이하다.
사랑, 물질, 이 중에서 어느 하나가 빠진 가정에서는 어린아이란 다만 불평을 참거나 투덜대면서 참고 양육될 부담에 불과하다. 과연 몇 개의 가족(세계에서)이 자기의 아이를, 일생 미혼인 채 요절한 노바리스처럼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나타나 있는 사랑(die sichtbar gewordene Liebe)'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까? 나는 의심하다. 어떤 순간적인 감정의 고조(高調)나 자기 만족이나 마약자적(魔藥者的) 관대의 배화(倍化) 작용 없이 정상적인 관계에서 그 말을 자타 앞에서 할 수 있는 '영웅'이 과연 세계에 몇 사람이나 될까?

부모가 아이에게 품는 기본 감정은,
첫째, 그릇된 의식
둘째, 책임감
셋째, 감사의 마음
넷째, 어떤 근본적인 안정감(생명에 대한)

남편이 아내에게 품는 감정은,
첫째, 그릇된 의식
둘째, 의무감
셋째, 어떤 압박감과 중량감

아내가 남편에게 품는 감정은,
첫째, 불안
둘째, 의무감
셋째, 그릇된 의식

긴 소설(또는 짧더라도 소설)을 쓰고 싶다. 올해 안에 꼭 한 개는 써 보겠다. 희곡이라도...... 또는 방송극......
 

2월 19일

온갖 사람들이 온갖 종류의 근심들을 안고 초조히 길 모퉁이를 돌아가는 것이 보이는 것 같은 저녁.
 

2월 21일

몹시 우울에 잠긴 하루였다. 저기압 때문인지? 오후 5시 넘어서부터야 생기가 나고 정신이 밝아지니......
하루 종일 헌 신문을 뒤져 보고 스크랩 했다.
어떤 새 사건도 나를 이미 더 기쁘게, 또는 더 불행하게 만들 수는 없다. 납처럼 가라앉은 마음이 조금 더 무거워지는 것뿐이니까...... 눈에 안 보일 만큼만.
오늘 같은 날은(요새는) 죽음의 공포 대신 삶의 공포를 느낀다. 계속해야 되는, 이 끝날 것이 결정적인 생의 지속이 무섭고 귀찮아서 콱 내던져버리고 증기가 되고 싶은 무(無)에의 갈망이 순간적으로 성냥불같이 켜졌다가는 꺼졌다.
우리의 내면에 있는 양극은 생의 갈망과 사의 갈망이다.
아무도 보고 싶지 않고 아무와도 말을 주고받고 싶지 않을 때가, 종종 있는 것이 아니라 하루의 80퍼센트를 점하고 있다. 나의 일상생활에서......
생각할수록 생각할수록 엘리자가 불쌍한 아이로 생각된다. 동시에 엄마의 말, '기를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안 낳아야 한다'가 생각난다. 밥 먹이고 학교 보낼 수 있었던 능력과 기르는 능력과는 차이가 있다. 교육이라는 견지에서 본다면 심*신 양면에 있어서 그는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도 안 주었다. 변덕(Laune)과 방임(放任)과 새디즘(Sadism)의 계속에 불과했고 그 기조(基調)는 냉혹한, 금속 소리 나는 에고이즘이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 세상에 참으로 부모다운 부모가 몇 있는지 의심스럽다. 확실한 것은, 만약 부모의 능력이 있는 자만이 애기를 낳는다면 인류가 곧 종말을 고하리라는 것(3차 대전의 도움 없이도) 뿐이다.
근본적으로 내가 어떤 인간에게 끌리는 것은 그 사람의 정신에 있어서 뿐이라는 것을 새삼 느낀다. 어떤 미모나 매력도 순간 외에는 내 마음을 잡지 못한다.
정신, 영혼, 지성이 결여된 곳에서는 곧 이윽고 미(美)도 끝나버리는 까닭에......
지(智)가 시작하는 곳에 미(美)가 그친다고 누가 말했다지만, 그 지가 계산이나 처세술을 뜻하는 게 아닌 다음에는 나에게 있어서는 맞지 않는 재담이다.
또한 미란 반드시 루벤스의 물기에 찬 장미빛 고깃덩어리 속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니까.



내가 아니고 싶다

가끔 엄습해 오는 긴박한 추억이 나를 질식케 한다. 오,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2월 23일

끝없는 지속의 과정으로밖에 신뢰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속에의 의지가 끊임없이 밖으로 표현되어 있을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 의지의 침묵 속에 신뢰는 종말을 고한다.
온갖 모녀간의 대화 중 가장 원시적인 모(母)가 자식에 대하여 부양을 근거로 압박하려 할 때일 것이다.
어떤 의미에 있어서도 부모는 아이에 진다. 왜냐하면 아이의 의견도 안 묻고 아이를 세상에 내놓은 그들의 과실 때문에......
큰 절망은 이미 내 것은 아니다.
큰 환희가 내 것이 아니듯이, 다만 잔잔한 나의 신경의 파동에 불쾌(不快)나 쾌(快)의 잔금이 올라갔다 내려갔다할 뿐, 오늘 같은 날은 전형적인 전자(前者)였다.
온갖 폭력적, 독재적, 고압적, 즉자적 인간은 나에게 참을 수 없는 구토를 일으킨다.
탄광의 불 없는 검은 아궁이가 입을 벌리고 있는 것 같은 이런 나날은 언제 지나가 버릴 것인가?
존재의 이러한 형식으로 계속해서 살아야만 한다는 것은 일종의 고역이다. 내 주위의 온갖 것은 나에게는 낯설고, 적의 있고 탐욕적이다.
길은 십자로로 갈라져서 나에게 손짓한다. 크게 사는 길과 위축해서 사는 길의 두 갈래가...... 대상을 경멸할 때(그 근거가 있을 때)처럼 큰 비애의 시간은 없다.
아무리 후회해봐도 내가 한 일이다. 이제 필요한 것은 결단뿐이다. 무거운 내 존재를 나 혼자의 몸에 짊어지고 쓰러질 때까지 걸어가 보겠다는 의지뿐이다.
정화는 영원히 나의 것, 나만의 것.
이 작은 영혼을 담은, 이 곧 끝나 흔적도 안 남을 형태는 왜 이리도 무거운 근심에 차 있는 것일까? 심장이 위축되는 아픔을 느껴야 할 만한 이 쇼크는 무슨 의의를 가진 것일까?
나 자신과 그 주변을 부단히 객관하는 것, 사건의 핵심과의 사이에 광조하는 거리를 갖는 것, 이것이 교양일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의 일은 자기 혼자서 처리할 수 있는 것이 요청된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중요한 것은 지상에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가끔 엄습해 오는 긴박한 추억이 나를 질식케 한다.
오,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달디단 젊은 육체여! 심장이여!
모든 사람에게 있는 일회적인 어떤 것은 그의 유산보다도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운명 자체보다도 그의 운명에 대하는 그의 자세를.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는 도주를 시도했다. 내가 자유로울 때 나는 밤에만 방을 떠났다. 나는 산보하는 도중이었다. 나는 말할 수 없이 내 존재를, 내 자신을 괴로워했다.
 

2월 23일

화려했던 59년, 60년에 이어서 올해는 무척 침울하게 열려 간다. 어떤 재앙(Katastrophe)이 내 앞에 기다리고 있는지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진다. 새해 처음부터 어떤 암울한 예감같은 압박이 느껴졌고 그것은 매일매일 더해갔다. 어떤 무서운 압박감, 또 나를 비소화(卑小化)해야 될 필연성 같은 것이 각일각(刻一刻) 다가오고 있는 것 같은 것이......
누구나가 하는 짓을 하기에는 나의 교육에 여태까지 들인 돈이 아깝지 않을까(패러독스이지만)?
1961년, 나의 젊음의 매장의 해가 비롯되는 느낌이다.

"분별과 사려와 결단만이 너의 벗이리라!
온갖 꿈이여, 낭만이여, 정열이여, 물러 가거라!"

무척 평온한 기분의 저녁이다. 시간이야말로 고뇌에 대한 가장 좋은, 그리고 유일의 치료법임을 느낀다. 부드러운, 아늑함을 주는 오늘 저녁이 기적과도 같다.
아무것도 나를 더이상 상처 입힐 수 없는 것임을 더욱더 느낀다.

모든 사랑이 원한으로 번져가는 새벽에 나는 단 하나의 얼굴을 가슴 깊이 간직했다. 파온이여! 아름다운 젊은이여! 너의 찬탄과 공손과 정열은 나를 도취시켰다. 나를 다시 나에게로 높여 주었고 내 손에 하프를 들게 해줬다. 내가 부른 아폴로의 노래는 너를 위한 시였다.
너의 검은 속눈썹과 뜨거운 시선, 너의 건강한 젊음에 대한 대답이었다. 아프로디테의 높은 신전에서 내가 시녀들에게 교시한 것은 바로 너의 찬미였던 것이다. 죽음의 래스로스의 바위에서 나에게 손짓했을 때까지, 내가 사랑한 것은 다만 한 젊은이, 파온이었다.

― <사포의 독백>
 

파온! 너 같은 희유의 소년이 어찌해서 멜리타를 사랑할 수 있단 말이냐? 너는 희귀하다. 왜냐하면 내가 너를 사랑하는 까닭에......

― <사포의 탄식>
 

사포! 그대는 나만의 여자가 아니었다. 나에게는 너무 컸다. 너의 명성과 너의 재능은 나를 눌렀다. 나는 천하에 나 하나만을 남자로 알고 주인으로 아는 어리석고 가난한 어린 계집이 사랑스러워진 것이다.

― <파온의 변명>
 

처음으로 안 분이었어요. 그리고 태양같이 높은 존재인 사포의 총애를 받는 분이었어요. 눈이 부셔서 올려다볼 수도 없었던 그가 저를 불렀을 때 저는 모든 것을 잊고 말았어요.

― <멜리타의 말>
 

아무도 원망하지 않으리라. 파온이여! 멜리타여! 내가 죽는 것은 생에 지친 까닭이다. 더이상 살 의욕을 잃었고 이런 무의욕한 상태에선 한 줄의 시(詩)도 나오지 않는 까닭이다. 녹슨 하프와 갈라진 심장을 내던지고 피안(彼岸)으로 나의 영혼의 고향에 휴식하러 돌아가고 싶어진 것이다. 너희와 나는 다른 고향의 사람이다. 그것이 우리의 죄의 전부이다. 따라서 나는 아무도 원망하지 않는다. 잘 있거라!

― <사포의 유언>
 

3월 11일

어떤 자연도 그것이 우리의 내면의 풍경과 일치되지 않는 경우에는 아무런 감정을 줄 수 없는 것이다.
베니스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우리 속에 있는 베니스에 불과한 것이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봄도 해마다 다른 뉘앙스를 가지고 우리에게 감득된다. 우리 속에 꽁꽁 언 빙산의 풍경이 들어 앉아 있을 때에 봄은 캐리커처로밖에 안 느껴진 것이다.
해마다 지구는 따뜻해지고 사람의 심장은 굳어진다. 냉기에 응결되고 석화(石化)된 무엇을 심장 대신에 갖고 있는 것이 평인의 대부분일 것이며 그들에게는 계절의 추이와는 관계 없는 겨울이 내면에서 지속되고 있다.
 

3월 24일

산다는 것의 의미를 매일 더 잃어가는 느낌이다. 모든 행위가 불가능하고 모든 인간이 괴이하게만 보이는......
온갖 것에 있는 근본적인 허위의 냄새만이 내 코를 찌른다. 극도로 취해서 모든 것을 잊고 모든 것에서 탈주하고 싶다.
 

5월 16일

새벽 4시경 간간이 계속되는 총성에 놀라서 들어 보니 매우 격렬해져서 온 집안이 깨고 온 마을과 도시가 깨었다. 약 20분 가량 격렬했던 총성이 멎고 방송에서 육 * 해 * 공군, 해병대 등이 합해서 쿠데타를 일으켰음을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의 이름으로 설명했다.
그리하여 '제3공화국'은 탄생한 것이고 아까의 총성은 그의 진통이었던 것이다.
 

5월 19일

온갖 슬픔과 절망 속에서 꽃은 크나큰 위안이 되어 준다.
지금 책상 위에 붉은 카네이션과 연분홍 카네이션 한 송이씩에 아스파라거스를 곁들이고 마거리트를 네 송이 섞어 꽂아 놓았더니 몹시도 아름답다. 자꾸자꾸 시선이 그리로 간다.
그리고 꽃을 보고 있는 순간만은 가슴의 아픔이 좀 가시는 것 같다.
 

5월 27일

무더운 흐린 저녁. 방안에 거의 검은 빛의 심홍(深紅) 장미가 미묘한 향기를 발하고 있다. 너무나 아름다워서 더 개화(開花)할까봐 두려운 6분(分) 가량 열린 봉오리와 단단히 맺어진 어린 봉오리, 이렇게 두 송이의 장미를 화병에 꽂아 놓았다.
말할 수 없는 미인의 혼이 꽃이 된 것 같다는 생각조차 문득 난다.
 

5월 28일

새벽부터 무섭게 소낙비가 퍼붓는다. 붉은 장미 두 송이에 흰 장미 한 송이를 또 부가했다. 굳은 봉오리를, 그리고 작은 꽃병에 분홍 월계 세 송이를 꽂아 놓았다. 비가 오니까 더 향기와 빛이 짙은 꽃들...... 꽃에 가득 에워싸여서 살고 싶다. 마당의 꽃보다는 방안의 꽃이 마음에 든다.
 

6월 6일

꿈 ― 새파란 새벽 하늘에 빛나는 눈썹같이 가느다란 달과 별 한 개가 있었다. 너무 아름다워서 바라보고 있으려니까 갑자기 모양이 변해서 달이 없어지고 별이 여러 개 생겨나서 그것이 전체로 별 하나를 이루었다.
이상한 꿈이었다.
어젯밤은 스리나를 안 먹고 자서 간헐적으로 약 한 시간 내지 두 시간마다 깨면서 잤다. 깰 때마다 파스테르나크를 2페이지쯤 읽으면 다시 잠이 왔다.
그것은 오늘 아침까지 반복했다.
 

6월 16일

오랜만에 흐린 날씨, 아침 일찍부터 비가 오고 있다. 어두운 쥐빛 포트 라이트가 방안과 신록이 짙게 번진 마당을 뒤덮고 있다.
초하(初夏)에서 성하(盛夏)에 이르는 이 시즌에 제일 인간으로부터 '생의 기쁨' 을 빼앗에 버리는 것 같다. 매미 소리도 멎은 정오 같은, 구제할 길 없는 혹서와 권태는 동일한 뉘앙스의 것인 것 같다.
 

6월 17일

부부 싸움이란 권태의 한계를 밀어가기 위한 공동의 액션인 것 같다. '행복'이라는 막연하고 불가능한 것에 지향하는 소치도 결국은 곧 사라질 한 개의 생명의 젊음의 발광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노란 등불 및, 흐린 벽에 마주앉아 무언의 대치(對峙)를 지속하는 우리도 얼마 안 있어 흔적도 없어질 약하고 우연한 생명체인 것이다.
얼마 동안 서로 만나서 한 솥의 먹고 한 방에 숨쉬도록 우연에 의해서 정해진 우리인 것이다. 결코 흔하거나 쉬운 일로는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이 공존이 가져오는 여러 마찰과 불쾌는 어떤 타인과도 장시간 있을 때 느껴지는 불쾌감의 한 긴밀화된 상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물건도, 대인 관계도 수선이 불가능한 데까지 성실하게 고쳐 보아야 하는 것이다. 우선 가능성의 한계의 절반은 자기 책임에 귀속하는 것이고 ―

모든 것에 눈에 감자.
그도 나와 마찬가지로 휴식과 위안을 요하는 한 피곤한 나그네임을 잊지 말자.
이 세상에 태어나서 아직 한 번도 어리광을 모르고 살아온 나니까, 웬만한 박해는 견딜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구박당함은 내 생리의 일부를 이룬 것이니까.
정화가 약하디 약한, 가엾디 가엾은 내 애기임을 잊지 말자.  

어떤 좀더 큰 과제(Aufgabe)에 불타고 싶다. 이런 사소한 부부간의 감정의 갈등(Konflikt)쯤은 초극할 수 있도록.
언제나 이런 데 걸려 있어 가지고는, 언제나 진흙에 발을 담그고는 나는 영영 헤어날 수 없을 것이다.
영혼만이 충만한 공간, 조금도 외롭지 않은 가득 찬 고독, 모든 것이(나의 외면도 내면도) 접촉하지 않은 훈련된 감수성, 이러한 것들이 지금 나의 동경의 초점이다.
내가 아니고 싶다.
생(生)이란 24시간의 의식적인 구성 속에서만 존재한다.



나의 도시 뮌헨

오늘은 이 도시, 내일은 저 해수욕장... 철새의 노래, 술 노래를 부르며...
 

6월 23일

가끔 몹시도 피곤할 때면, 기대서 울고 위로받을 한 사람이 갖고 싶어진다. 나는 생후 한 번도 위안자를 갖지 못했다. 어머니가 무엇인지 모르고 자라왔다.
고독이 가슴속에서 병균으로 번식했다. 모든 것에서 거짓을, 모든 사람에게 극단의 이기주의(Egoismus)밖에는 볼 수가 없다.
꽃향기만 무섭게 공기에 얽혀 있는 밤, 온갖 겪지 못한 생과 격동과 정열의 회한이 나를 엄습한다.
다르게 살고 싶다!
좀더 숨쉬면서!
좀더 나와 가깝게!
 

6월 24일

한마디로 불쾌한 하루(학교에서의)였다. 배구 연습하는 학생의 볼이 하필 나한테 맞아서 핸드백, 책, 시계, 모두 떨어져 흩어지고 핸드백 끈과 시계줄 등이 끊겼다. 겨우 다시 고치고 귀가했으나 불쾌감은 비길 데 없고 학교에 다니는 게 더욱 싫었다.
 

6월 27일

어제 <버터훨드 8 (Butterfield 8)>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별로 감명이 없었다. 얄팍한 심리 묘사와 어설픈 사회 풍자와 리즈의 무섭게 살찐 가슴과 엉덩이 이외에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오늘은 하루종일 찌는 듯이 덥다. 한국의 무서운 여름이 닥쳐온 것이다.
언제나 생각나는, 그리고 언제나 그리운 '나의' 도시는 내가 만 4년을 살았던 뮌헨이고 그 중에서도 내가 만 3년을 기거했던 뮌헨의 일구(一區) 슈바빙이다.
슈바빙에서처럼 내가 자유로운 느낌으로 숨을 쉬고 활보할 수 있는 장소는 아마 세계 아무 데도 없을 것 같다. 고향 도시인 서울은 더구나 그것과는 거리가 있다.
뮌헨에서는 여름의 감각을 여기서처럼 혹독하고 극단적인 방법으로 느낀 일이 없다. 언제나 절도 있게 더웠고 충분한 습기가 공기를 무겁게 축이고 있어서 한 주일 중 엿새는 흐리거나 비가 내렸으니까. 그래서 학생들은(가난한 학생들) 일 년 내내 같은 옷으로 지내는 것을 멋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 많았고 그것이 생리적으로 가능했던 것이다.
어느 도시의 여름의 시초도 같겠지만 뮌헨의 여름은 백화점의 쇼윈도에서부터 왔다. 온갖 해변을 연상시키는 장치와 복장, 모자, 밀짚주머니, 코르크 샌들...... 등이 진열장을 장식하기 시작하면 뮌헨의 대담한 아가씨들은 아직도 싸늘하게 시원한 기온에도 불구하고 경주용 요트를 연상시키는 멋지게 바람을 머금은 우산형 베티 코트와 원색이 혼돈한 개성적인 도안의 넓은 치마를 받쳐 입고, 관대하게 깊숙이 패인 얇은 스웨터를 찰싹 입고 넓은 금속 벨트로 허리를 맨다. 그러고는 밀짚 백에 밀집 샌들이나 옛날 로마 사람을 연상시키는 납작한 가죽 짚신(?)을 신고 여름의 예고편을 시위하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온갖 카페(Cafe)에서는 좌석을 보도에까지 확장시키고 작은 테이블 곁에는 해변용 파라솔을 펴서 세워두는 것이다. 예쁜 색채의 메뉴 종이에는 '오늘의 특별 요리'란에 십여 종의 아이스크림을 여봐라는 듯이 인쇄해 놓는다. 그러나 학생들이 먹는 것은 언제나 판에 박은 듯이 게미쉬테스 아이스크림(혼합 아이스크림)이다. 그게 제일 싸니까. 그리고 그걸 먹어 봐야 그 집의 아이스크림의 표준을 알게 되니까.
한국의 삼복 더위에 해당되는 7,8월도 뮌헨은 서울의 5월 정도의 기후를 지키고 있다. 그 관계로 부채, 냉방 장치, 얼음, 이런 풍경이 전연 보이지를 않아서 가끔 한국의 발, 주렴, 태극선, 모시적삼, 모기장, 냉면, 빙수, 배탈, 땀띠 등으로 상징되는 여름이 그리워질 때까지도 있었다.
그처럼 비오는 뮌헨의 여름밤은 추웠고 쓸쓸했다. 방의 난로에는 불을 지펴야 했고 서늘한 맥주보다는 곧 몸이 더워지는 와인이 더 구미에 맞을 정도였다.
방학을 뮌헨에서 보내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 모두 귀성(歸省)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여행을 떠났다.
돈이 없어도 뮌헨에서는 그것이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남녀 학생들은 싸고, 헐어빠진 1920년제 자동차(아마 한국 박물관에 두는 것이 훨씬 제격이리라)를 색색가지로 칠을 해서는 타고 밀고 교외로 놀러 나갔다.
물론 합해서 1백 불을 모을 수 없는 학생에게는 그것도 큰 재산이기에 그냥 엄지손가락으로 여행한다. 그건 다른 사람의 자동차를 엄지손가락으로 세워서는 목적지까지 갈아 타는 것을 말한다. 오토 스톱(Auto stop)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먼 함부르크며 북해에 간 사람도 많고 또 빈이나 로마까지 무일푼으로 여행하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 있다. 남녀 학생이 여행할 때면 으레 여자만이 주차장 입구에 서서 차를 세우고는 남자를 데리고 가서 태워준다. 그래서 그들은 무전으로 여름 여행을 즐긴다.
목적지가 없는 이런 여행에서 그들이 어디에 ― 바다에, 산에 ― 도착하면 젊은이들의 값싼 숙박소(Jugend Herberge) 신세를 지거나 그렇지 않으면 캠프 생활을 한다. 이 값싼 숙박소는 독일의 철새(Wandervogel)들을 위한 숙박 시설로 여기에는 엄격한 소장이 있어 밤 10시까지는 들어와서 자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담을 넘고 유리창을 넘어서 재미있게 지낸다.
그러나 그들에게 더 흥미로운 것은 학생들의 단체 여행이다. 대학교에 가면 학생들이 꾸민 단체 여행 프로그램이 전시되어 있다. 아주 싸구려 여행이나, 정부나 학교가 많은 보조를 해주기 때문에 10불로도 1주일간의 국내 여행을 할 수 있게 조직되어 있다. 이것은 대부분의 독일 학생과 외국 학생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 원래 목적이었으나, 이 단체 여행은 특히 재미있다. 숙소는 대부분 학생 기숙사나 작은 여관이지만 그들은 이 여행에서 서로가 친해져서 즐겁게 일주일을 즐긴다. 오늘은 이 도시, 내일은 저 해수욕장으로 몰려 다니면서 학생들은 학기 내의 공부에 시달린 몸을 푼다. 그들은 버스에서나 거리에서나 합창을 좋아한다.
남성과 여성의 합창으로 철새의 노래며, 기타 학생들의 노래, 또 술노래를 부르며 흥겨워한다.
이러한 단체 여행은 독일 각지에 걸쳐 있을 뿐 아니라 10불이면 1주간의 빈 여행, 파리 여행이 가능하고, 20불이면 2주간의 이탈리아 여행(1주간 로마 체재 포함)이 가능하므로 학생들의 천국을 이루어 준다.
그러나 모든 학생들이 이렇게 방학을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도 먼 푸른 리비에라의 바다를 그리워하면서 다음 학기의 등록금을 걱정하는 나머지 아르바이트를 하는 학생수도 상당하며 그들은 대개 시(市) 소년과에 임시 취직되어서 도시의 소년들을 데리고 소풍을 가며 그들에게 즐거운 여행을 마련해주고 또 알프스 산중에 있는 저 많은 산정에 관한 역사, 전설을 이야기해 주며 어린애들과 즐거운 생활을 보낸다. 물론 이 소년들의 여행 비용은 국가에서 전담하는 것이고 또 지도 학생에게는 숙식이 제공되는 외에 80불 정도의 월수입이 있다. 미국처럼 노동력은 비싸지 않으나 그래도 물가가 싸기 때문에 다음 학기의 수업료가 마련된다.
그들도 물론 일요일이나 토요일 주말에는 단기 소풍을 간다. 어쨌든 여름은 학생들의 천국이다.
무릎을 다 내어 놓은 털보 학생들이 가죽 반바지를 입고 학교에 나다녀서 여학생들에게 난처한 구경거리가 되는 것도 이때이고, 거리마다 미국이나 외국 관광객이 뮌헨으로 몰려 들어서 쇼트의 범람을 보여주는 때, 이것이 뮌헨의 여름이기도 하다.



여자의 본질

여자의 태도는 미리부터 신비스러운 근원을 갖고 있어야 한다. 남자에 맞추어지지 않은......
 

7월 9일

글라디올러스의 계절이다. 흰 것과 오렌지 빛의 꽃을 꽂아서 책상 위에 얹어 놓았다. 멋진 굴곡을 이루고 있다.무언지 호사스러운 느낌을 주는 꽃이다.
저녁 때 <전쟁과 애욕>이라는 지나 롤로브리지다와 프랑크 시내트러의 영화를 보았다.

인도네시아 ―
달밤의 검은 그림자의 대열이 강을 건너는 모습.
돌격, 고함 소리, 중국군, 낙하산 보급, 방갈로, 화려한 집, 아무 데나 수두룩한 오랑캐 꽃, 기타 진기하고 수없이 많은 꽃, 진(gin).
무거운 천을 드리운 옷을 입은 여인들.
갈색 피부와 커다란 눈, 여윈 뺨, 붉게 칠한 관골, 뾰죽한 입술, 우아한 갈색 여우와도 같은 지나 롤로브리지다......
"나하고 결혼해서 애를 많이 갖고 가난하게 살자."(프랑크)
"나는 당신을 가두어 둘 거예요. 하루 종일. 그리고 감시하겠어. 질투를 가지고......"(지나)
이것이 결국 리얼리티에 있어서의 남녀의 사랑의 대화(Love dialogue)가 아닐까?
 

7월 21일

남자와 비교할 때 여자는 보다 일반적이며 본능적, 숙명적으로 남자보다 훨씬 더 많이 인간의 자연, 감정, 꿈, 수면, 출생, 죽음 등, 우리를 포괄하고 있고 우리의 경적(景的)인 생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온갖 현상과의 관련을 대표하고 있다(여자의 모습).
금일의 여성은 자연적인 운명을 완화하거나 그것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 과학과 사회가 제공하는 온갖 기회를 포착한다. 출산과정과 육아와 노령과 사랑과 육욕의 견해에 있어서 그러하다. 그럼으로써 여자는 일반과의 연관에서 풀려 나와 원래는 남자의 본질에 속해 있던 개인적인 고립에 서서히 빠지게 되었다.
금일의 남자가 점점 지적으로, 사실적으로, 그리고 동시에 점점 원시적으로, 그리고 어린아이 같은 영혼 상태로, 추상적으로, 무정신적으로, 무의식적, 무개성적으로 되는 데 반해서 여자에게는 그와 정반대의 음직임이 일어났다.
여자는 시대정신에 의해서 찬미되는 이상형으로서 점점 의식적으로 되고 개인적으로 되고 감정적으로 되어 고독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여자는 남자로부터 라이벌이나 생존 경쟁에서의 결혼적 지주(結婚的 支主)로서 인정받기는 하나, 남자의 본질의 대칭이나 보충으로서 존경받지 못하고 있다. 양성간의 관계의 즉물성(卽物性)은 진보가 아니라 다만 온갖 존경의 제일 전제인 수치심이 얼마나 많이 잃어졌는가 하는 표시가 될 뿐이다.
기술적 세계는 '비기술적'이고 찰나에 의해서 지배되고 우연에 의해 규정된다.
여자가 그의 본질과 세계 감정에 있어서 완전히 남자와 판이한 존재임을 보일 수 없다면, 여자가 남자의 존경을 기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영혼의 희생의 가능성을 합리적인 사고와 물질적인 안정 요구와 바꾼다면, 여자에게 있어서도 에로스가 깊고 소원을 지우는 생의 심각한 면이 아니라 하나의 모험이라면, 남자는 자신을 완전히 사업인이나 기술자로 타락시키지 않기 위한 유일의 치료제가 무엇인가를 스스로 물을 계기를 잊게 될 것이다.
남자의 여자에 대한 태도는 여자와 신의 태도에 의해서 좌우된다.
여자의 태도는 미리부터 남자의 그것에 맞추어져 있어서는 안되고 여자 자신의 견해와 자기 존중 속에, 그 태도의 첫번 뿌리와 신비스러운 근원을 갖고 있어야 한다.
이 요청은 현대의 노동 기식(勞動機式)이 여자에게 있어서 남자에게 훨씬 부자연하다는 것을 승인하지 않을 수 없으면서도 부인될 수 없다.
직업과 개인의 틈새를 다시 극복하고 매번 새로 하나의 전적인간(全的人間)이 되는 것은 한 여자로부터 그 여자의 전발전사(全發展史)의, 어떤 때보다도 강한 영혼의 힘을 요구하는 것이다.
내가 현재 갖고 있는 행복 중에 내가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다하지 못하는 행복이 있다.
그것은 정화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나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신 것이다. 정화라는 모습을 통해서.
정화같이 끝없이 사랑스러운 아이가 나에게 주어져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는데 주어진 것은 인생의 '덤'으로써의 우연이거나, 또는 높은 질서에 속하는 우주의 의사였으리라.
정화의 늘 웃음에 가득 찬 빛나는 검은 눈, 빳빳하게 긴 자랑스러운 속눈썹, 온갖 표정이 풍부하게 나타나는 귀여운 장미빛 입술, 꽤 긴 솜털이 소복히 덮인 살구빛 뺨, 얕게 볼우물이 패이는 미소, 깔깔거리는 웃음소리......
모든 것에 대한 한 없는 식욕, 싱싱한 생기, 생명감, 지상의 무엇보다도 나에게는 정화가 중요하다. 고귀하다. 정화는 나의 생의 질서요, 근원이요, 목적이다.
어떤 고귀한 이데아보다도 정화의 끝이 살짝 올라간 몹시도 작은 귀엽디귀여운 코가 나에게 있어서는 더 중요하다.
내가 만약 근년(近年)에 죽게 된다면, 그리고 후에 정화가 이 글을 읽게 되면 얼마나, 얼마나 웃을까?
정화는 내가 죽어도 침울해질 아이 같지 않다.
태양 같은, 해바라기 같은 아이다.
 

7월 22일

죽음은 언제나 등장할 수 있는 것이므로, 만약 사람의 생에 어떤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시간적 지속과 성공의 도달에는 관계 없고 순간 속에 놓여 있어야 한다.
생에 어떤 의미를 주는 일정한 어떤 내용도 죽음의 작용 밑에 붕괴되어 버린다.
 

7월 26일

비늘 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다. 노을이 장미빛으로 하늘을 붉히고 있다.
무언지 허전하고 가슴이 답답한 느낌이 난다.
나무라도, 돌이라도 굳은 것을 안고 엉엉 울거나 막 취해 웃고 싶은 느낌!
아무것도 믿을 수 없는 데서 나오는 허망.



따스한 회신(灰燼)만이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고 아무것도 하고프지 않다. 누가 죽인대도 모든 것이 귀찮다.
 

8월 2일

긴 황혼이다. 7시가 넘었는데도 아직 태양의 여명이 환하다. 늦은 오후보다 조금 회색과 보라색이 섞인 듯한, 음영 띤 아름다움이다.
하루종일 바람이 몹시 불었다. 태풍 '헬렌 호'라고......
마루에 발을 올리고 앉아서 푸르른 마당을 바라보고 솩 솩 나무줄기가 휘게 부는 바람을 맞고 있으니까 사는 것도 과히 싫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특히 꽤 큰 파초 나무잎이 흔들리는 것이 보기에 유쾌하다. 점점 노랗게 변색하고 저녁의 빛과 엷게 푸른 하늘과 그 위의 연분홍 보트들, 구름이 아름답게 보인다.
 

8월 6일

문득문득 격렬한 충동을, 투쟁 의욕을 느끼곤 한다.
무엇에나, 아무에나.
그럴 때 나는 혼자서 동굴 속에 있고 싶다.
지금은 저녁, 창 위로 거짓말같이 새파란 하늘이 보인다.
사파이어같이 검게 새파랗다.
 

8월 7일

몇 방울의 알코올......
그리고 내 세계는 새로워진다.
확 트이는 지평선, 흰 새벽, 닭 우는 소리, 솟아 흐르는 샘의 물 소리로 그것은 가득 채워진다.
갑자기 눈이 부시도록 강렬하게 내 시야에 들어오는 녹음, 대낮.
나는 나와 전 세계와 악수를 한다.
아무것도 나에게 불만이 없다.
마치 이 새 주정(酒精)을 담는 주머니가 낡은 것임을 잊은 듯.
아무 어둠도, 회의도 없이 피어나는 마음의 오후다.
오늘은 하루 종일 식욕이 컸다. 조반, 점심, 저녁 다 내 밥사발 이상을 먹었으니 기이한 일이다. 뱃속이 회충이나 촌충으로 찬 모양이지?
저녁 때 <폼페이 최후의 날>을 보았다. 크리스티네 카프만의 물망초 빛 눈의 매력과 가련함은 상당히 강렬한 인상이었다. 뉴스와 예고편 영화에서 두 명의 고인(故人)을 보았다.
란자와 헤밍웨이.
 

10월 1일

오늘이 '국군의 날'이라고 한다. 라디오를 틀면 '조국 행진곡', '반공 행진곡', '주부의 노래', '건설의 노래'...... 모두 하나같은 가사의 곡으로 귀에 못이 박힐 지경이다. 하늘은 아주 푸르고 공기도 깨끗하고 시원한데 마음만은 따분하다. 무일푼이니...... 마당을 수리하는 탁탁 치는 소리나 '나가라! 나가라!' 하는 것처럼 들린다. 동생들과도 별로 말을 주고받고프지 않고 따스한 회신(灰燼) 만이 느껴진다.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또 친척들, 시집 전부에 이렇게 조마조마 눈치만 보면서 살아야 하는가? 언제 끝날까? 좀더 맘 편히 푹 살고 싶다. 그 이외에 아무 야심도 없다.
독일에서 4년, 한국에서 2년은 나로서 완전히 온갖 것에의 의욕을 빼앗아 버렸다. 그저 오막살이라도 다리 뻗고 아무도 없는 데서 있고 싶을 뿐, 글을 쓴다니, 번역을 한다니, 학교에 나간다니...... 모두가 긴치 않은 나의 방해물로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아마 이것은 나의 퇴화(退化)를 뜻할 것이다. 아니 나의 종말일지도 모른다.
하여간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고 아무것도 하고프지 않다.
누가 죽인대도 모든 것이 귀찮다.
 

10월 13일

끝없는 회의의 숨가쁜 교차, 그리고 둔중한 단조(Monotenie), 이것이 생활의 리듬인 것 같다.
될 수 있는 대로 감정은 질식시켜 버릴 것, 오로지 맑은 지혜와 의지의 힘에만 기댈 것, 이것이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곡예사(Akrobat)인 것 같다.
그 상태에만은 야심(Ambition)을 느낀다. 다른 모든 것은 아무래도 좋다. 물같이 맑은 의식의 세계에서 늙은 잉어같이 살고 싶다.
니체의 말, '이 모든 괴로움을 또다시!' 가 얼마나 숨막히게 무서운 말인가를 느낀다. 온갖 싫은 일들, 너저분하고 후줄그레한 일들, 시시하고 따분한 일들이 깔려 있는 운명의 아스팔트지만 이 길이 끝이 안 났으면 하는, 또는 또 한번 하는 의욕을 실로 무겁고 기름진 삶의 욕구(Leben-wollen)의 사고(思考)일 것이다.



이 무서움에서 나를 놓으라

남자에게는 모든 여자가 아내로 생각될 수 있는데 왜 여자에게는 보통 한 남자밖에 남편으로 생각되지 않는 것일까?  

11월 2일

새벽 3시. 요새는 늘 새벽에 잠이 깨인다. 시간이 흘러 가는 것을 느꼈다.
아무 의욕도 안 느끼는 무기력의 극치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다.
알코올에의 욕망만이 강하게 치솟는다.
아무것도 아무 곳에도 안주(安住) 못하는 내 마음이 개탄스럽다.
아무 직업에도 질긴 욕망을 못 느낀다.
 

11월 9일

오늘 내년도 토정비결을 보았다.
무시무시하게 나빴다. 끔찍한 소리뿐이었다.
아무 의욕도 없다.
낮에는 끔찍하고 저녁은 무섭고 밤에는 공포의 고함만 지르게 된다.
술이든지 뭐든지 나를 이 무서움에서 놓여나게 해주었으면 다행할 것을......
아내는 남편에게 있어서 언제까지나 필연적인 무엇에 불과하다. 마치 아버지가 아이에게 언제까지나 그렇듯이. 모든 여자가 남자에게는 아내로 생각될 수 있는데 왜 여자에게는 보통 한 남자밖에 남편으로 생각되지 않는 것일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용서란 있을 수 없다. 상태의 완화, 또는 감정의 예리함이 무디게 죽는 것은 있을 수 있으나 맨 의식 밑에서 우리는 결코 있었던 일을 잊지 않는 것이다.
모든 것이 나를 위협하고 있는 것을 느낀다. 세계와 인간이 나에게 적대 감정을 품고 있다.
 

11월 10일

우리의 성격이 좋아질 수 있는 유일의 찬스는 행복(또는 행운)뿐이다. 불행은 우리의 성격을 보다 더 악화하는 데만 도움이 된다.
정화라는 선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시는 정상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정화조차도 종종 미워 죽겠으니까.
신이여! 내 마음에서부터 나를 해방시켜 주십시오. 내 마음을 자유로운 온갖 원망이나 회한에서부터 보호해 주십시오..
 

11월 13일

사람과 사람을 빙벽(氷壁)이 갈라 놓고 있다. 그 빙벽을 뚫을 길은 없다.
 

11월 14일

하루 종일 회색 하늘과 습기 있는 추위가 내려 덮여 있다. 뮌헨을 연상시키는......
오늘 내 손거울이(뮌헨에서 산 셀룰로이드 뒷판의) 깨져서 방석 밑에 들어가 잇는 것을 발견했다.
불길한 암시와 예감을 느낀다. 이 싸늘한 가을의 냉기가 점점 더 우리 사이에 스며 들고 막을 두텁게 해 가고 있는 것을 느낀다.
갈수록 삶은 힘든 것이다. '다만 늘 가면을 쓰고 다니는 것'만이 우리를 희극(제삼자 눈에)에서 해방시켜 줄 것이다.
이를 악물고 마스크를 쓰고 고독을 내보이지 않는 것, 그것뿐이다.
 

11월 15일

일상성의 막이 번개에 뚫린 듯 찢겨져 벗겨지려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때, 내가 잘 알고 있는 줄만 안 사람이 다른 육체와 다른 생활 질서와 사고 원리를 지닌 전연 생소한 덩어리로 되어 나를 경악케 한다.
먼 불쾌한 추억의 하나하나가 뚜렷이 나타나게 되는 건 그럴 때다. 사람에게는 망각이란 행복은 결코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누가 그런 말을 주장한다면 그는 위선자일 것이다.
나는 잊지 않았다. 내가 살아온 길을.
앞으로도 잊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를 두꺼운 안개처럼 덮어 씌우는 이 심장의 냉각이 굳어져 응고해 버리면 아마 나는 더이상 아픔도 고독도 느끼지조차 않을 것이다.
우리는 혼자 낳아져서 혼자 죽어가는 것이다. 고독이야말로 본연의 생의 자세인 것이다. 허위와 무리(無理)에 너친 불안한 두 존재(Zwei-sein)의 사회 습관적인 의무 같은 것은 우리의 영혼을 무시한 자의(恣意)의 습성이라고밖에는 생각이 안 된다.
어떤 끈을(마음의) 끊을 때도 아픔과 허탈은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극복되어야 할 감상주의적인 무엇에 불과한 것이다. 너는 혼자다. 아무도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 이것이 슬픈 상태가 아니라 당연한 상태라는 것을 나는 내 마음에 부각시켜야 한다. 통속 소설적인 가정의 목가적 생활 같은 건 믿지 말 것.
누구나가 불행한 것이다. 괴로운 것이다. 고독한 것이다.
부부 사이에는 암묵(暗默)의 규칙이 있다.
제삼자 앞에서는 공동 마스크를 지닌다는...... 그것을 한 파트너가 안 지켰을 때의 배반당한 느낌, 양심과 증오는 정말 어디다 호소할 데도 없으니만큼 더욱더 크다.
지금 나는 생활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개미가 모래 위를 지나가는 것보다 더 아무것도 아닌 일. 무(無)가 아닐까?
나를 집어 삼킬 절무(絶無)에 대한 공포를 어떻게 하면 잊을 수 있을까?
어둠과 함께 다가오는 이 허망, 이 무서움, 생생한 공포! 공포는 황혼에서 출발하는 것 같다.
매일매일 언제나 언제나 그것은 되풀이 된다.
 

11월 17일

개개인은 그의 열등 감정을 보상할 목적에 따라서 그의 '사는 방법', 그의 성격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열등 감정에 괴로워하는 것, 그리고 우월적인 위치를 향해서 가려는 것을 뜻한다(Adler의 말)."
건강하기 위해서는 이타(利他)의 감정을 길러야 한다.
언제나 자기를 넘고 나올 것, 용기와 합리적인 낙천주의로.
행위에의 공포, 생활에의 공포.
아들러(Adler) ― 열등성, 자네트(Jannet) ― 신경 쇠약.
프로이드(Freud) ― 거센 콤플렉스, 융(Jung) ― 내향성.
열등 감정은 소수 민족에 있어서도 발견된다.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우리보다 조금 더 재능이 있는 동배(同輩)다.
열등 감정은 감정적으로는 공포로 표시된다.

열등성
사회적 결과 ― 중상(中傷), 질투, 타인의 소유물에 대한 욕망, 간계(奸計), 또는 공격성.
도덕적 결과 ― 성(性)의 현실에 대한 용기의 결여, 직업의 선택에 대한 용기의 결여.
열등자는 자기의 예민한 상태에서 탈출하기 위해서, 말하자면 자기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 급격한 자극, 예를 들면 알코올이나 성적 충동이나 마취제 등으로 달려가는 일이 있다.

"약간 구라파적으로 세련된 미개인들에 있어서는 유럽*콤플렉스(Europa-komplex)라고도 부를 수 있는 것과, 그들의 피부색에 의한 열등 감정을 볼 수 있다(Jung의 말)."
열등 감정의 분위기는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이라는 두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지식' 속에서 우리를 끌어당기는 것과 우리에 적합한 것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는 없다고 생각되는 것을 몸에 갖추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찬탄하는 것 같은 류(類)의 사람을 우리는 도저히 모방할 수 없는 것이다.

열등 감정의 2,3의 동의어 ― 죄책의 감정, 무력의 감정, 불안정의 감정.
열등 콤플렉스는 외적인 속박(입장이 거북한 것, 몰이해, 박해 등)의 무의식적 고정 관념에서 생겨나온 억압의 한 방법이다. 자기 신뢰의 결여.
내면적 생활에의 도피, 내적으로는 맘대로이고 외적으로는 습관에 따른다.

열등자에 있어서 타인과의 협동은 심리적인 절도(節度)의 실마리가 된다.
어떻게 나를 현실에 대해서 적합시키고 그를 직면해 가야하나?
그들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은 냉정함과 현실적인 사고 방식이다.
우리의 기질적, 심리적 결함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자기 수련, 외적 성공의 가능성의 확정, 그 가능성에 대응하는 체계적인 목표를 세우고 언제나 그것을 염두에 두고 자기 자신이 하는 마음의 수련과, 정연하게 한 방식에 따른 노동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면 우리는 유유히, 그러나 확실히 목적에 가까이 간다.
나의 주위와 활동을 나의 적극적인 징후(徵候)에 집중하고 나 자신으로부터 최고의 능률을 끌어내도록 결심한다.
규칙적 생활, 일정의 성과, 책임을 갖는 것, 열등자에게는 기쁨의 분위기를 주고 기쁨을 다시 배우게 해야 한다.
기쁨은 생명력을 발산하고, 정신과 육체의 진환 활동(進還活動)에 자극을 주어 행동에 임하게 하고, 비애 속에 들어가 있던 인간을 외광(外光)으로 향하게 하고 수많은 억압을 치워 없애는 것이다.
 

11월 20일

오늘 <폼페이 최후의 날(The last day of Pompeii)>의 시를 완역.
강신재 씨 사진이 큰 것이 입수되어서(인쇄된 것이지만) 책상 앞에 세워 두고 늘 본다. 소녀같이 섬세하게 아름다운 여인이다. 특히 검고 큰 눈이......
 

11월 29일

아침 안개가 짙게 껴 있다.
회색 연기 같은 수중기가 꽉 피어 올라 모든 것을 가리고 있고 그 속을 뚫고 비치는 전등이 문득 뮌헨을 상기시킨다.
 

12월 12일

비, 따뜻한 날씨, 12월답지도 않은......
박귀희(朴貴姬)라는, 명창이라는 기생을 만났다. 한국식 여관 속에 있는 한국집 집이었다. 으리으리한 자개 장농......
30대 중간쯤 되어 보이는, 좀 잔인해 보이는 섹시한 자그마한 여자. 초록색 치마 저고리, 잘끈 동여맨 가는 허리, 쉬어 빠진 굵은 목소리, 대구 사투리......
이수재 씨가 그림을 한 장(수채화) 선사해 주었다. 조용한 갈색과 오렌지 색이 조화된, 아담한 반 추상화다. 너무 의외였고 고마웠다.
결국 우리가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정신에서뿐이고 정신의 자유란 예술을 뜻하는 것 같다.
언제나 자기의 성실한 생활, 가면이나 기만이 최소한도로밖에 스스로에 의해서 허용되지 않는 생활을 예술가는 해야 하니까.
 

12월 15일

오전 3시, 잠이 안 오는 밤이다. 단어장, 공부한 자국이 역력한 공책, 이러한 10년 전의 유물을 바라보고 느꼈다. 결국 이 속에 나는 살아 있는 것이라고...... 이것이 나의 전부라고......
그 때같이 또 한번 맑아지고 싶다. 인식욕(認識欲)에 불타고 싶다.
다만 아는 것을 위해서 아는 생활을 해보고 싶다. 또 한번만.
 

12월 19일

벌써 며칠째 못먹고 못잔다. 철저히 굶고 지내고 있다.
사고(思考)가 연결을 잃고 있다.
아무와도 얘기를 못하겠고, 글도 못쓰겠고, 번역도 못하겠다.
땅 속으로 온몸이 끌려 들어가는 것 같은 무거운 느낌이다.
몸도 마음도 극도로 불건강한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