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얼마나 잠을 쫓으려고 안간힘 쓰며 먹물 같은 커피를 연상 마셨던가를, 그리하여 밤의 고요와 적막 속에서 홀로 깨어 있는 정신으로 광기처럼 책 속에 빠져들었던가를 보여주는 흥미 있는 글이 있는데, 그것은 그녀가 대학 3학년 때(1954년) 서울 법대학보(창간호)에 발표한<MONOLOGUES(독백)>란 수필로서 이 글 속엔 이미 혜린의 모든 정신적 특성과 향방이 뚜렷이 나타나 있다. 이 글은 활자화된 혜린의 글 가운데서 최초의 중요한 작품이라 할 수 있지만, 아마도 거의 대부분의 독자들은 이 글을 읽을 기회가 없었으려니와 그 존재조차 모르고 있겠기에(유고집에도 안 실렸다)다음에 전문을 소개한다.

 

 

 

단상(斷想)

MONOLOGUES

 

 

자정이 넘으면 참 시각이다. 전등이 돌연 환해지고 책장이 서슴지 않고 넘겨지고-아름다운 말들, 언어, 표현이라는 것..... 전혀 LOGIK으로 빚어낸 말할 수 없는 휘황찬란한 세계가 여기 놓였나니 너희들 모름지기..... 있으니까 있는 것이 아니며 있어야 하니까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요는.

왜 있어야 하는지는 묻지 말 것. 또한 물음을 낳을 뿐이니까.

묻지 말고 그저 그저 집어 삼킬 것. 눈동자의 빛이 달라질 때까지 집어삼켜버릴 것-그러면 아마 있어야 할 것밖에 할 수 없는 무기력자가 확실히 될 수 있을 터이니-

뇌수의 주름의 갈피갈피마다 SOLLEN을 꼭꼭 집어넣어두자. 그러면 자알 SEIN할 수 있을 터이니..... 아무렴.

허나 이 권태! 확실한 것은 SOLLEN은 SEIN만큼 흥미진진하지 못하다는 것이다-유감히도 SEIN만큼 생생한 무서움이 없다는 것. 무서움이 있어도 다 옛날의 그것이고 손때와 양피지와 곰팡이 냄새만이 난다는 것이다. SOLLEN은 원래 점잖은 것이니까...... 책이 덮여졌다. 눈이..... 어느새-졸지는 않았어야 할 텐데..... 조심스럽게 먹물 같은 가배를 미리 세 사발이나 마셔뒀으니까.

땡땡땡, 덮인 눈이 금붕어를 보고 있다. 금붕어가 있다. 내가-.(나는 생각한다. 그러니까 나는 있는 것이로다. 내가 생각하고 있음이 바로 내가 있음이니라. 나는 생각이다. 나의 존재는 나의 의식 때문이다. 나의 의식이 나의 존재를 결정한다. 거짓말! .....금붕어는 존재한다, 사람은 존재하니까 금붕어는 존재하니까-내가 있으니까 나는 생각한다. 나는 먹고 자야만 생각한다? 나의 존재가 나의 의식을..... 다 물론 거짓말이다. 아무도..... 언어란.....)

잠시 졸은 모양. ‘먹물’을 또 삼킨다.

그리고 또 SOLLEN SOLLEN.....

너희들 ‘모름지기’의 기막힌 테마를 판에 박은 듯이 교묘하게 변조한 이 곡은-웅장한 일대 행진곡이긴 하나-확실히 졸립게만 하는 이상한 마력의 소유자다.

아름답기 짝이 없는 이들 개념을 무수히 삼켜먹은 까닭에 식상되어 좀 어질어질하다. 구토!

괜찮다. 내일 설사해버리면 깨끗이 씻겨져버릴 것이니까-.

땡땡땡땡땡. 나를 존재시키는 새벽이여! 하고 어떤 공화국 시인은 노래했으나-나를 부재시키는 새벽이여!-SEIN만으로된 꿈을 꾸기나 했으면 다행이련만.....

빗소리만이 요란하게 들려오는 밤이란 춥다. 비맞고 걸어다닌 사람에게는,

무엇 때문에?

le printemps?

나에게는 그런 것은 없다. 내 방, 내 이불, 구토.

게으름투성이었던 내 몸과 거짓말투성이었던 내 마음이 그지없이 더럽다. 비오는 밤엔-먼 데, 아주 먼 데 살아 있기도 하고 죽어 있는 사람도 문득 곁에 놓아보는 것, 그리고 새롭게 보고 싶다고 말해보는것. 곰팡이 냄새를 맡아가며 옛 편지를 뒤져보는 것. 그리고 옛날을 심신에 잔뜩 스며넣고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

비오는 밤엔.

따뜻한 불 곁에 누워 피가 뚝뚝 떨어지는 짐승의 고기를 먹고프다. 동굴 속은 훈훈하겠지, 불길이 눈동자에 비치겠지-행복이 거기에는. 비오는 밤엔 거짓말한 내 전신을 뜯어먹어버리고 싶다. 가장 어리석은 내 마음을 흙탕 속에 내던지고 밟아 없애고 싶다.

비오는 거리, 흙..... 거짓말,..... 자기모독..... 흙에 뒹굴며 기며 자동차 불을 보았다.

나를 죽여라! 분격에 찬 나의 음성에 나 자신이 놀랐다.

 

하루가 이와 같이 지나도 좋은 것인가?

 

바람만이 깨어 있는 밤중, 무겁게 바람소리가 거세다. BEETHOVEN의 수기-멋있는, 통쾌한 인물도 이 세상엔 있었구나!

바보.....나는 무수히 내 위에 이 단어를 던졌다. 자기에 대한 과도의 신뢰는 과도의 불신보다 더욱 위태로운 것. 불건전한 것이 되는 수가 있다는 것. 이런 자명의 논리도 몰랐던 나에게 저주 있어라!

그렇게도 잘 알고 있었던 BEETHOVEN 같은 그런 강한자도 아니 그런 강한 자이니까 신을 그다지도 필요로 했던 것이다.

아-.

강한 체하는 자기기만자요 창피를 모르는 태만이다.

나는-.

아 불타오르는 자기혐오!

BEETHOVEN은 나에게 절망을 가르쳐줬다. 여지없는 절망을.....

허세는 무너져 흩어져나갔다. 남은 것은 약하디 약한 나혼자.....

이런 바람 부는 모진 밤에 너의 천재는 퍼덕였겠지...... BEETHOVEN이여!

너야말로 인간이다.

참된 인간의 단 한 사람이다.

나의 기도가 너에게 도달될 것을!

내 심장 소리밖에 안 들리는 이 밤중이 나는 두렵다. 내일에 맡겨버리고 내일에 기대하고 오늘을 낭비하는 화려치도 못한 투전꾼!

이런 밤엔 아, 흰 꽃의 향기가 무르익던 저 먼 국경도시가 그립다. 내 꿈이 초록색으로 거세게 물결치던 옥수수 냄새 나는 마을, 사탕수수처럼 공허하게 달았던 추억-일련의 진부한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달이 밝은 밤.

좀 아름다우냐? 쾌라는 것은-거의 선이다. “너도 나도 즐긴다”는 개념은 이기적이 아니고 무엇이랴? 거짓과 거짓을 비벼가면서 쾌를 서로 추구하기에 바쁜 것을 너희들은 일컬어 사랑이라 하느냐?

다 마찬가지다. 뭐라고 하든.-언어란 모두 한가지니까. 조금도 같지 않은 것을 표현하기 위해 발명된 기호니까-.

인간과 인간 사이의 안개. 제각기 지니고 있는 MASK, MYS-TIFICATION-이 언어라는 것. 다같이 거짓이다. 어떠한 언어도..... 나를 거짓에 내어맡기고 웃어보는 것도 이젠 흥미없지 않은가? 구토밖에 안 난다. 이젠 모두 끝장이다. 이젠 돌아가자.

저 멀리서 손짓하는 새파란 불꽃도 보이고-불길한 사이렌도 들려오니.....

너 눈감아라.

내 업어다줄게.

이 파행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