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서진

침묵속의공감 2008. 3. 25. 14:38



?를 채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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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채울 ?

국어사전을 뒤적인다, 한 단어 한 단어            

그들의 이름을 불러준다                  

그 소리를 듣고 반갑게 뛰쳐나올 나를 기다린다                  

나의 마음을 1mm의 오차도 없이 말해줄 ?를 찾는다                  

슬픔은 13˚ 사랑은 35˚  기쁨 12.9˚ 미움 7˚ 행복…       

많은 말들이 크고 작은 각을 이루며 내 마음을 비껴간다                  

1mm는 작지만 그 틈을 메꾸기 위해서는 많은 말들이 필요하다                  

국어사전 백 개로도 완벽한 내 모습을 쌓아올릴 수 없다                

몇 자 쓰다가 구겨버린 종이, 종이 가득한 쓰레기통에                  

불만스럽게 입을 내밀지는 않는다                  

두 세 개의 단어로 표현되지 않는 ‘나’ 는 많은 말을 품고 있다는 것



항체, 생기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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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체, 생기셨나요?
사랑이란 별 게 아니더라구요 대뇌에서 옥시토신, 도파민, 페니레시라민이라는 세 가지의 화학물질이 분비돼 형성되는 일종의 정신 상태이죠 이 화학 물질이 분비된 뒤 2년 쯤 지나면 대뇌에 항체가 생성 되지요 그러면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거예요

여자의 경우에는 남자보다 화학 물질 생성이 느리다고 하지요 당신 남자의 대뇌에서 옥시토신, 도파민, 페니레시라민이 분비되고 있을 때 당신의 뇌는 지극히 이성적이지요 2년 뒤 당신 남자의 대뇌에 항체가 생성되고 있을 때 당신의 뇌에서 옥시토신, 도파민, 페니레시라민이 분비되고 있는 거예요

슬퍼하지 말아요 사람들이 흔히 말하잖아요 시간이 약이라고 그래요
시간이 약이에요 2년 뒤에는 당신에게도 항체가 생성될 테니까요
   

“2년이 지나면 사람에게서 사랑에 대한 항체가 생긴다는 군. 호감이 생길 때는 도파민, 사랑에 빠졌을 때는 페닐에틸아민, 그러다가 그 사람을 껴안고 싶어지고 같이 자고 싶어지면 옥시토신이라는 호르몬이 분비되고, 마침내 엔도르핀이 분비가 되면 서로를 너무 소중히 여겨서 몸과 마음이 충만해진다는 거야 하지만 그 모든 게 2년 정도가 지나면 항체가 생겨서 바싹바싹 말라버린다구. 그럼 도파민이든 엔도르핀이든 모조리 끝장이고, 아무 것도 없이 싫증난 남자와 여자만이 있을 뿐이지.”

“그런적이 있었다. 이 세상의 주인공이 나였던 시절,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아득하고 항상 울렁거렸다. 그 느낌이 좋았다. 거기까지 사랑이 가득 차서 찰랑거리는 것 같았다. 한 남자가 내게 그런 행복을 주고 또 앗아 갔다. 지금 내가 울고 있는 건 그를 잃어서가 아니다. 사랑..그렇게 뜨겁던 게 흔적도 없어져 사라진 게 믿어지지 않아서 운다. 사랑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는 걸 알아 버려서 운다. 아무 힘도 없는 사랑이 가여워서 운다.”

<내이름은 김삼순> 대사 중




틈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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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틈이 있다
작지만 깊은 틈이 있다
세상은 틈투성이고
나는 늘 틈새로 무언가를 빠뜨리고, 잃어버렸다

―우리 역은 승강장과 열차 사이가 넓습니다
타실 때 발이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 주십시오

틈새 속으로 나는
장갑 한짝을 떨어뜨렸고, 승차권을 빠뜨렸고, 열쇠를 놓쳐버렸다
늘상 나는
한손이 시렸고, 역무원의 눈치를 봤고, 누군가 문 따는 소리를 듣는 가위에 눌렸다

―우리 역은 승강장과 열차 사이가 넓습니다
타실 때 영혼이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 주십시오

조심스럽게 발을 내뎌 틈새 위를 지난다
틈서리에 서서 틈새를 한참 들여다본다
장갑, 승차권, 열쇠, 지갑, 아무것도 없어진 것은 없다.

그렇게 보인다

그러나
나는 늘 틈새로 무언가를 빠뜨리고 잃어버린다
세상은 틈투성이고, 그 틈은 작고 깊다



끈적함에 대하여━━━━━━━━━━━━━━━━━━━━━━━━━━━━━━━━━━━━━━━━━━━━━━━

껌이 신발 밑창에 붙었다 붐비는 종로를 걸으며 럭비하듯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던 수요일 오후, 신발을 보도블럭에 비벼댄다 검게 된 껌의 일부가 떨어진, 다, 몇 차례 더 문댄다 말끔하니 떨어진 듯 보인다 한걸음 내디디자 끈적함, 보이지 않는 껌의 잔해가 느껴온다 파이로트… 종로서적… 우바리… 맥도널드… 유리창에 내 모습이 비친다 껌 따위는 잊은 듯 걷고 있다 그 걸음걸이를 덩달아 따라 걷는다 보이지 않는 끈끈함은 스멀스멀 번져 올라 종아리허벅지가슴어깨팔목머리머리카락온몸을뒤덮는다마음까지 도망치듯 집에 뛰어들었다 세차게 내뿜는 물줄기를 신발 밑바닥에 겨누고 박박 씻어낸다 밑창 개운한 신발을 베란다에 널고 크게 한 번 심호흡, 모든 것, 이렇듯 씻어낼 수는 없는 일이다
 


출애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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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찢어졌을 따름이야. 스카치테이프로 살짝 붙였지. 다른 곳이 찢어지자 그곳 역시 붙였지. 하루는 카페에서 친구들과 잡담을 하다 발에 무언가 채였어. 발밑에 보니 어라, 내 살점이잖아, 언제 떨어졌지? 갸우뚱하며 원래 자리에 붙였어. 역시 스카치 테이프로. 날마다 날마다 조금씩 더 사용하게 됐어 꿈이 찢겨지기도 하고 혼이 떨어져 뒹굴기도 했어. 걸을 때마다 먼지처럼 내가 부스러져 떨어지곤 했어. 결국은 남김없이 다 스카치 테이프로 붙여야 했어. 지금처럼. 내가 안 보인다구? 이 밑에 어딘가 붙어 있다고. 간당거리면서..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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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가 잘 안 들리는 남자를 알고 있다.

그는 귀에서 뇌까지 가는 길이 남들보다 훨씬 길다. 뱅글뱅글 꼬여서 한참을 돌아가야 뇌에 이른다. 그래서 그는 말을 잘 이해를 못한다. 누군가 그에게 내뱉은 말을 이해하려면 남들보다 더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이다. 때로는 1년 전에 들었던 말을 뒤늦게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한다. 그래서 1년 전의 일들에 대해 1년 후에 고민하고 상처받기도 한다.

내가 물었다.
“1년 정도 걸리면 소리가 다 들려요?”
그가 대답한다.
“아냐. 내 귀는 보통 긴 게 아닌가봐. 10년이 걸려서 소리가 도착할 때도 있어. 영영 도착하지 않는 소리도 있고, 알다시피 사람은 살면서 너무 많은 소리를 들어. 모든 소리를 이해하긴 힘들어.”

그의 부음을 들었다.
활짝 웃으면서 죽었다고 했다.
달팽이관처럼 구불구불한 生의 길을 통과해
드디어 모든 소리들이 그에게 다 도착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