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H 로렌스의 정의에 따르면 그녀는 다른 사람, 다른 나라, 다른 연인 같은, '다른 것에 향수를 느끼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낭만주의자였다 - 그것은 랭보가 청춘시절 "la vie est ailleurs (인생은 다른 곳에 있다)" 라고 했던 말의 메아리와 같다.
p9 


우정은 비겁의 한 형태일 뿐이며, 사랑이라는 더 큰 책임과 도전을 회피하는 것이라는 프루스트의 [대단히 비아리스토텔레스적인} 결론에 찬성하고 싶었다.
p12


앨리스는 자신이 왜 이렇게 절망하는지 납득하지 못했다. 행복이란 즐거운 상태가 아니라 고통이 없는 상태라고 정의하던 자신이 아닌가. 괜찮은 직장이 있고, 건강하고, 살 집이 있는 마당에 왜 주기적으로 아이처럼 울고 짜고 난리람?
불만이 있다면 자신이 타인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 뿐이었다. 지구상에서, 그리고 거기 사는 사람들 속에서 그녀 자신은 불필요한 존재 같았다.
p13 


"나랑 세상 사이에 목도리 같은 게 끼어 있는 기분이야.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걸 막는 담요 같은 게 있어. 예를 들면 어느 날 가게에서 꽃을 봤어. 수선화였는데 평소 나는 꽃을 좋아하잖아. 그런데 그때는 외계에서 온 물건 보듯 꽃을 멍하니 봤어. 이런,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어. 진짜 안 좋은 예를 들었나봐. 하지만 뭐든 현실적으로 느껴지지가 않아.
내 말뜻을 알아들을지 모르겠지만."
p16


앨리스는 근사한 키스야말로, 솜씨 좋은 애인이 손[이나 입술]으로 빚는 사랑 행위 전부와 거의 대등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넘어서지는 못하겠지만. 남자가 시간과 공을 들여서 키스하는 것, 남자가 에로틱하고 대단히 섬세하게 입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을 앨리스는 높이 평가했다. 키스를 잘하려면 바이올린이나 피아노 연주자와 같은 기술이 필요했다. 입의 근육 하나 하나를 조절하고 표현할 줄 알며, 건반과 리듬과 템포를 알아야 했고, 언제 강하게 누르고 언제 가볍게 장난치듯 스쳐야 할지, 언제 입을 벌리고 언제 떨어져야 하는지 알아야 했다. 키스를 잘하려면 침과 호흡을 조절하고, 관능적으로 머리의 위치를 바꿀 줄 알고, 얼굴 전체에 키스하는 법을 알아야 했다. 입술 근처에서 하는 일과 손가락으로 귀, 목덜미, 관자놀이, 눈썹 탐색하는 것을 조화롭게 엮어내야 했다.
p25


플라톤은 예술이란 삶을 모방하고자 분투하지만, 결국 실패할 뿐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예술가들은 이상 사회에서는 잉여 인간이었다. 로댕이나 클림트가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그들은 이미 존재하기에 재생산 될 필요가 없는 것들을 모방할 뿐이니까. 실제로 침대가 옆에 있는데 침대를 스케치 하는 게 무슨 소용 있을까? 키스가 아주 흔한 마당에 무엇 하러 키스 장면을 영화로 찍는단 말인가?
오스카 와일드라면 정중하게 다른 의견을 주장했으리라. 지금은 진부해져 버렸지만 전설적인 그의 말에 의하면, 예술이 생활을 모방하는 게 아니고 생활이 예술을 모방한다. 이런 당황스러운 경구를 통해, 오스카 와일드는 무엇을 말하려 했을까? 그것은 예술이 생활보다 나은 점이 있다는, 3차원적인 애인에게 받는 키스는 영화에서 보는 키스보다 판에 박은 듯 형편없다는 것이다. 와일드의 '낭만적인 미학'은 토니 같은 남자들에게 그녀가 내리는 판결문과 같았다. 토니는 사무실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앨리스에게 키스했는데 토니의 입에서는 양파수프 냄새가 폴폴 났고, 행동거지는 오랜만에 돌아온 주인을 맞아 촐랑대는 개와 비슷했다.
p26-p27


시릴 코널리가 저널리즘은 한 번만 고민하는 것이요 문학은 다시 보는 것으로 정의한 데 따르면, 통조림은 저널리즘적[액체를 담은, 한번 쓰고 버릴 용기]이었다가, 워홀이 액자에 넣음으로써 문학 반열[벽에 진열하고 반복해서 관람하는 것]로 격상된 셈이었다.
워홀이 물감으로 한 일과, 오랫동안 있는 줄도 몰랐던, 코나 손의 점들을 애인이 칭찬해주는 일은 비슷하지 않을까? 애인이 “당신처럼 사랑스런 손목/사마귀/속눈썹/발톱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다는 거 알아?” 라고 속삭이는 것과 예술가가 수프 통조림이나 세제 상자의 미적인 성질을 드러내는 것은 구조적으로 같은 과정이 아닐까?그렇게 사소한 것에 감탄하는 것은 수프 통조림이 벽에 전시 되는 일만큼이나 우스꽝스럽지만, 그런 사소함이 더 크고 중요한 전체, 이를테면 온전한 한 사람을 향한 사랑의 일부이기에 찬탄 받을 만한 것이다. 어떤 것을 큰 그림의 일부로 보면, 그것은 그저 사소한 것이 나이라 그 자체를 넘어선 어떤 것이 되었다.
p30 


'난 불행해' 라는 생각이 '지상에 존재하는 것은 무익한 활동' 이라는 생각으로 확장되기란 어찌나 쉬운지.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아' 라는 경박한 불평이 '사랑은 환상'이라는 우아한 경구로 승화되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흥미로운 점은 존재와 사랑이 무익하냐 아니냐가 아니라 [일개 인간이 그런 걸 어떻게 알겠는가?] 어떻게 본래의 촉매제는 사라지고 아주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좌우명만 남느냐 하는 것이다.
p49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1분 전만 해도 그랬는데, 앞일은 모르는 법이잖아요. 제가 넥타이를 매고 와야 했을까요?"
그 남자가 물었다. 남자는 검은 정장 바지저고리에 목이 긴 진회색 스웨터 차림이었다.
"모르겠는데요."
"그래요? 이런 모임에는 어떻게 입고 와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런 적 있어요? 뭘 입어야 할지 모르거나, 입고 싶은 게 있지만 남들이 어떻게 입고 올지 몰라서 다들 입을 것 같은 옷을 입었는데, 결국 분위기에도 안 맞고 입고 싶은 옷도 못 입은 경우 말이에요."
p55


"지금 이 시간을 즐기며 웃음을 터뜨리지만, 나를 믿어도 될지 몰라서 신경이 쓰이지요? 당신은 이렇게 생각해요. '이 남자가 진짜 괜찮은 거야, 아님 형편없는 자식이야? 몽땅 다 농담이야, 아님 진지한 구석이 있는 거야?' 어떻게 대응할지 모르겠죠. 다 농담이라면 상관할 바 없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장난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죠. 유혹하는 남자를 믿느냐 마느냐는 여성들의 영원한 고민이지요. 남자를 믿지 못한 채 좋아할 수도 있지만, 또 상처받은 것은 피하고 싶을 테구요."
p60


유혹을 받아들이기란 매우 어렵다. 너무 빨리 넘어가면 헤퍼보일 수 있고, 너무 미적대면 상대가 흥미를 잃을 수도 있다. 앨리스는 자존심을 구길 위험을 무릅쓰고, 집에 가서 이야기나 하자는 제안을 받아들여야 할까? 아니면 다시는 못 만날 위험을 감수하면서 예의 바르게 작별 인사를 해야 할까?
얌전빼는 태도와 모호한 태도에는 공통적으로 초조함이 배어있다. 머뭇거리면 상대의 관심을 잃을까봐 당장 잠자리로 가는데 동의하는 사람도 있고, 그 다음에 버려질까봐 두려워서 잠자리로 가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p62-p63 


타인과 사랑을 나누는 일은 어찌보면 과거에 같이 잔 사람들의 습관이나 기억과 충돌하는 것이다. 사랑을 나누는 방식에는 우리의 성생활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키스는 과거에 했던 키스들의 종합형이고, 침실에서 하는 행위에는 과거 거쳤던 침실의 흔적이 넘쳐난다.
p65 


순전히 기술적인 관점에서는 성생활의 역사가 있는 편이 바람직하겠지만, 심리적으로 그것은 복잡 미묘한 영향을 미쳤다. 성생활 역사가 있다는 것은 여러 사람과 성행위를 했다는 의미일 뿐 아니라, 잠자리를 같이한 사람을 차거나 그 사람에게 채였다는 뜻이다. 좀 어두운 면에서 보자면 섹스 기교의 역사는 실망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p
66


에릭이 이런 사람이라는 증거가 되기도 하니까.
-일에서 성공했고
-재미있고
-자신을 잘 알고 솔직하고
-상냥하고 관능적이고
-미남이고 현명한 사람. 
앨리스가 지금 에릭을 (신중하게 말해서) 사랑하는 것일 리가 없다면, 그녀는 아마 사랑을 사랑한 것이다. 동어 반복적인 묘한 감정은 무엇인가? 이것은 거울에 비친 사랑이다. 감정을 자아내는 애정의 대상보다는 감정적인 열정에서 더 많은 쾌감을 도출하는 것을 뜻한다. 사랑을 사랑하는 연인은 단순히 X가 멋지다고 여기지 않고, 'X처럼 멋진 사람을 찾아냈다니 대단하지 않아?' 하는 생각을 먼저 한다.
p73-p74 


에릭과 함께 맞은 첫 아침,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랑 같이 있으니 정말 좋아요.”
그녀가 말을 싫어할 만도 했다. 그 못난 입에서 튀어나온 느낌 표현이란 게 기껏 “당신이랑 같이 있으니 정말 좋아요.”라니, 하느님 맙소사! 무엇이 잘못됐을까? 말은 커다란 체 같아서 앨리스가 아침에 느낀 짙은 행복감을 쏟으면 가여운 에릭에게 남는 것은 그녀의 기분이 아주 좋다는 사실뿐이었다.
p78-p79


그녀에게 사랑은 언제나 감탄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녀는 “감탄스럽지 않은 남자는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하곤 했다. 감탄스럽다는 말에는 그녀뿐 아니라 타인의 감탄도 받을 만하다는 뜻이 들어 있었다. 앨리스는 자신은 가난해서 이탈이아제 구두와 수제품 정장을 입는 남자에게 외면당할 수도 있지만-남자는 많은 찬미자 중에서도 그녀를 선택한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갈망하는 남자가 바로 그녀를 원했다는 사실이 그녀의 허약한 자존감을 붙들어주었다.
p95 


잡지는 앨리스를 불행하게 만들어야 했다. 잡지는 지금 입은 옷을 한 해 더 입어도 된다든지, 외모는 중요하지 않다든지, 유명한 사람을 안다거나 침실 색깔이 무엇인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 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녀는 의상 난을 보면 자신의 옷장에는 없는 옷 때문에 서글펐고, 여가 난을 보면 자신이 가보지 못한 세계 곳곳의 햇살 눈부신 장소들이 떠올랐다. '삶의 스타일'이라는 난을 보면, 자신에게는 아마 제대로 된 삶도 없고 스타일은 틀림없이 없다는 느낌이 확고해져서 자존심이 상했다.
p102


그녀의 자신감은 늘 확인을 받아야만 자라는, 불안전한 구조였다 - 원하는 걸 얻거나, 누군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의 사랑을 받으면 자신과 타인에 대한 믿음을 쌓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믿음은 바람이 빠지는 타이어 같아서 늘 다시 채워줘야 했고, 그게 불가능해지면 이전의 낙관이 오만한 허위로 보이는 상태로 급속히 빠져들었다.
p114 


그녀는 실내 장식에 대해 기능보다는 감정을 중요시했기에, 물건의 가치도 얼마나 제 기능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기억이 담겨 있느냐로 판단했다.
p127 


감정적인 벌거벗음은 남에게 자신의 약함과 모자란 부분을 드러내는 데서 시작된다. 거기에 의존하면, 우리는 존재라는 엄연한 사실 외의 다른 방법으로 어떤 인상을 심어줄 능력을 빼앗기게 된다. 더는 거짓말하거나 허세 부리지 못하고, 뽐내거나 미사여구 뒤로 숨지 못한다 - 몽테뉴는 감정적으로 벌거벗게 되는, 죽음을 맞는 순간에는 단순한 프랑스어[자신의 모국어]로 말해야 한다고 했다.
내 필요를 고백할 때는 감정적으로 벌거숭이가 된다 - 당신이 없으면 헤매게 될 거라고, 독립적인 사람처럼 보이려 애썼지만 꼭 그렇지도 않으며, 인생의 방향이나 의미도 모르는 형편없이 유약한 인간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내가 울면서 이야기 할 때, 남들이 그 사실을 알면 끝장이지만, 나는 당신이 비밀을 지켜줄 거라고 믿는다. 파티에서 유혹적인 시선을 던지는 게임을 그만두고 내게 관심 있는 사람은 바로 당신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면, 나는 조심스레 빚어온, 단단한 허상을 벗어버린다. 나는 무방비 상태가 되어, 서커스 묘기에 나선 사람처럼 판에 묶인 채 상대방을 믿어 버린다. 그는 내 피부를 스칠 듯 비수를 던진다. 내가 자의로 그에게 내준 비수를. 나는 당신 앞에서 초라하고 자신을 믿지 못하고 동요하며 자신감을 잃고 자신을 증오하는 모습을 보였으므로, [필요한 경우] 그 반대 모습이 되리란 걸 당신에게 설득할 수가 없다. 새벽 3시에 겁에 질린 얼굴을 당신에게 보일 때면 난 약한 사람이 된다. 저녁 식사를 하면서 뽐내던 허세도, 낙관적인 철학도 없이 존재 앞에서 불안하다. 나는 엄청난 모험을 받아들여야 한다. 내가 평소 자신감 넘치는 미인이 아니더라도, 당신이 내 두려움과 공포를 줄줄 꿰고 난 뒤에도, 당신은 날 사랑할 것인가.
그러면 감정의 옷 입기란 무엇인가? 그것은 무른 속, 상징적인 생식기의 약함, '당신이 필요하다'는 엄청난 비밀을 남에게 들키지 않도록 만든 옷장 전체로 이루어진다. 옷을 입는다는 것은, 내가 조종할 수 없는 사람, 곧 전화를 받지 않거나 다른 사람과 시시덕거림으로써 우리를 미치게 하거나 상처 입힐 수 있는 사람의 손아귀에 잡히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p136-p137


경제의 세계에서는 빚이 나쁜 것이지만, 우정과 사랑의 세계는 괴팍하게도 잘 관리한 빚에 의지한다. 재무 정책으로는 우수한 것이 사랑의 정책으로는 나쁠 수가 있다. - 사랑이란 일부분은 빚을 지는 것이고, 누군가에게 뭔가를 빚지는 데 따른 불확실성을 견디고, 상대를 믿고 언제 어떻게 빚을 갚도록 명할 수 있는 권한을 넘겨주는 일이다.
p143-p144 


타인을 상대할 때, 대개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상대의 반응을 예상하고 행동한다. 상대방의 특성을 머릿속으로 그리고, 이것을 이용해서 어떤 말을 할지, 어떤 행동을 할지 선택한다. '내가 X라고 말하거나 행동하면, 이 사람은 Y라는 반응을 보이겠지' 라는 전제하에 움직이는 행동의 틀이다. 이 틀이 웬만큼 복잡한 상황까지 아우를 수 있을 만큼 풍성해지면, 우리는 누군가를 안다고 다소 가설적인 주장을 할 수 있게 된다.
p146 


앨리스는 사랑하는 남자에 대해 아는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그 남자의 행동은 여전히 수수께끼였다. 에릭은 처음 만난 날과 똑같이 복잡해 보였다. 그 첫 만남에서 그녀는 그 남자를 ‘안’ 줄 알았지만 이제는 그렇게 주장할 수 없었다. 그 남자는 멀리서는 잘 보이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백만 개나 되는 파편으로 나뉘어 있었다. 앨리스는 이토록 서로 화해할 수 없는 요소들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 신기했다. 그리고 예상할 수 없고, 끊임없이 질문과 해석이 뒤따르는 불안정 상태에 힘이 빠졌다.
p153-p154


단순히, 스스로 의식하지 못한 채 사악한 사람들이 있다. 개념적인 [도덕적인 것과 반대되는] 관점에서 그들을 이해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데 남들이 싫어할 만한 점을 어느 정도 자각하기 때문에 쉽게 버릴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스스로를 비판함으로써 외부의 공격을 대부분 피할 줄 안다.
p160


사랑의 연속성이란 무엇인가? 상대가 당장 관심의 징표나 신호를 보내지 않아도 사랑이 지속되리라는 믿음, 상대가 밀라노나 빈에서 주말을 보내더라도 다른 정인과 카푸치노를 마시거나 초콜릿 케이크를 먹지 않으리라는 믿음, 침묵은 단순한 침묵일 뿐 사랑의 종말을 암시하는게 아니라는 믿음.
p164 


평소에는 멀쩡한 사람도 사랑을 하면 편집증에 걸리고, 별별 최악의 생각을 다 한다 - 그 남자/그녀는 이제 나를 사랑하지 않아, 싫증 내고 있어, 적당한 때가 되면 이 사람은 모든 걸 없던 일로 돌릴 거야...... 편집증은 사랑이라는 감정에 따르는, 극히 자연스런 현상일 것이다. 상대를 높이 평가하니 내가 버려질 가능성이 점점 커질밖에. 하지만 일단 재앙의 시나리오에 끌려들면 사랑은 상처를 악화시킬 뿐이다.
p165 


사랑의 영속성 시나리오는 현수교에 비유할 수도 있다. 다릿기둥은 사랑의 확인을 상징하고, 냉담한 기간은 기둥 사이에 몇 미터씩 늘어진 케이블이다. 머리에 하는 키스, 애정 어린 눈길은 다릿기둥이고, 말 없는 식사, 응답 없는 전화는 기둥 사이의 케이블이다.
p167 


나는 나를 사랑해가 부족함을 벌충하므로 당신을 사랑해란 말이 덜 필요하다. 당신이 왜 날 사랑하지 않겠어? 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에 빠졌을 때의 기본 태도다. 내가 나한테 느끼는 감정을 당신이라고 못 느끼겠어?
p168


신뢰란 '부재'를 합리적으로 해석하는 방식이라고 정의 할 수 있다.
p169


힘이란 단어는 사전적으로 행위 능력을 의미한다.
사랑에서는 권력이 훨씬 수동적이고 부정적인 정의에 의존하는 것 같다. 사랑에서는 권력이 무엇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능력으로 간주된다.
p175


사랑의 권력은 아무것도 주지 않을 수 있는 능력에서 나온다. 상대가 당신과 같이 있으면 정말 편안하다고 말해도, 대꾸도 없이 TV 프로그램으로 화제를 바꿀 수 있는 쪽에 힘이 있다. 다른 영역에서와는 달리, 사랑에서는 상대에게 아무 의도도 없고, 바라는 것도 구하는 것도 없는 사람이 강자다. 사랑의 목표는 소통과 이해이기 때문에, 화제를 바꿔서 대화를 막거나 두 시간 후에나 전화를 걸어주는 사람이, 힘없고 더 의존적이고 바라는 게 많은 사람에게 힘 들이지 않고 권력을 행사한다.
스탕달은, 애인 사이에서는 언제나 한쪽이 상대방을 더 사랑하며, 그래서 두 사람 관계의 권력이 인지되기 마련이라는 비판적인 견해를 밝혔다. 양쪽이 저울의 수평을 유지할 때에만, 한쪽이 "사랑해요."라고 말하면 상대도 자연스럽게 "나도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말할 때에만, 권력의 존재를 잊을 수 있다.
p176-p177


특정한 학문 영역에는, 명쾌한 설명에 편견을 갖고 난해한 글을 존중하는 오랜 경향이 있다. 칸트나 헤겔, 후설, 하이데거의 빡빡한 글에 몰두하는 학자들은 그들의 뛰어난 발상에만 끌리는 게 아니다. 학자들은, 문외한은 알아들을 수 없는 배배 꼬인 언어를 헤치고서 그 사상을 찾아내는 작업의 순수한 어려움에 매혹을 느낀다.
p193-p194 


학구적인 자기학대는 은유적인 편견을 반영한다. 진실은 얻기 어려운 보물이며, 쉽게 읽고 배울 수 있는 것은 경박하고 중요하지 않다는 편견이다. 진리는 올라야 할 산과 같아서, 위험하고 모호하며 품이 많이 든다. 도서관의 환한 불빛 아래에 학문의 좌우명은 이렇게 쓰여 있다. 읽기 힘든 책일수록 진리에 더 가깝다.
p1
95


그 남자가 곧잘 무심해지거나 딴청을 부리거나 앨리스의 전화에 응답하지 않는 것은 [예의 바르지 않는 것은 둘째 치고] 자신이 그만한 애정을 받아 마땅하다고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 남자는 감상에 뜨악해서 제대로 대응을 할 수가 없었고, 상대의 애정에 받아들이기 힘든 [그리고 못마땅한] 역겨움을 경험했다.

p197


그녀에게 고충이 있다 싶으면, 그 남자는 나서서 옹호하는 목소리를 높이고 도전 의지를 북돋웠다. 하지만 그 남자는 직장의 불화나 친지의 병과는 관계없는, 감정의 혼란 따위 문제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 남자는 속절없는 슬픔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기분이 울적해져서 원초적으로, 비합리적인 수준으로 위로받고 싶을 뿐 다른 이유가 없는 슬픔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앨리스 역시 이런 약한 면모로 그 남자에게 짐이 되기 싫었다. 그 남자는 그녀가 강할 때 스스로를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 - 하지만 그녀의 진정한 소망은 여전히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할 여지를 찾는 것이었다.
내가 겁을 먹어도, 고민이 있어도, 신경이 날카로워도 날 사랑해줘요. 내가 잘하지 못해도 있는 모습 그대로 나를 사랑해줘요.......
p218


"당신이 오렌지를 까는 모습이 보기 좋아요." 라고 에릭이 말하자, 그녀는 묘하게 마음이 따뜻해져서 웃음 지었다. '내가' 관련된 일들이 층층이 쌓여 있는 중에서 '그녀가 오렌지를 까는 모습'을 집어내다니 한층 가까운 느낌이 들었고, 그럴듯하긴 해도 구체적인 것이 없는 미사여구보다 훨씬 더 마음을 울렸다.
p221 


불안감은 사회적인 압력과 기대에 직면해서 개인이 겪는 두려움이다.
p221 


물론 행복한 감상주의야 바람직하지만, 유쾌증을 태평하게 행복감과 같은 것으로 취급할 수 없다. 행복한 영혼이 웃는 것은 그가 스스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일몰이 아름답거나 애인이 방금 전화를 걸었거나 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반면 유쾌증에 사로잡힌 이들이 행복한 것은, 단지 그들이 불행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유연하게 통합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p253 


앨리스는 성탄 전야에 밥과 에릭, 데이지, 다른 투숙객들이 모닥불 가에서 춤추는 광경을 보면서, 자신을 지나치게 중요시 하는 사람들은 단지 해학적인 기지가 모자라기 때문에 웃음을 터뜨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그들은 남보다 더 크고 요란하게 웃어대지만, 그건 진정 풍요로운 해학의 원천에서 벗어난 - 자신의 어리석음을 자인하는 - 웃음에 불과했다.
유감스럽지만 앨리스에게도 기지로 받아넘기지 못하는 게 한 가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자신에 관련된 역설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었다.
p261 


진정calm dawn이란 개념에는 느긋해지라relax는 제안에는 없는 책임감이라는 요소가 뒤따랐다. 진정하는 사람에게는 사실 마땅히 흥분할 만한 이유가 있다. 느긋해지라는 말을 듣는 사람은 객관적으로 나쁘지 않은 상황에 과민 반응하는 것일 뿐이다.
p264 


자연주의자라면, 생각은 문제를 해결할 방책인 체하지만 실은 그것이 문제를 일으키는 질병이라고 볼 터이다.
p268 


몽테뉴는 수상록의 '고독에 관해'란 부분에서 이렇게 썼다. '한 사람이 소크라테스에게, 어떤 사람이 여행을 하고도 전혀 성숙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발전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자기 자신을 데려갔거든요.'
p290 


리넨 드레스를 산 일이나 카리브 해에서 휴가를 보내는 일이나, 앨리스는 고전적인 소비의 덫에 걸린 것이었다. 꼭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사는 행위에 무의식적으로 깔린 목적은 단순히 그것을 가지는 게 아니라, 그것을 소유함으로써 스스로 변하고자 하는 것이다.
p292


누구와 사귈 때, 사람만 달랑 올 수가 없다. - 어린 시절부터 축적된 문화가 따라오고, 관계를 맺은 사람들과 관습이 따라온다. 특정한 지역성이라고 할 수 있는 요소가 함께 온다. 이러한 성향은 민족성으로만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계층과 지역과 집안의 특성이 뒤섞여 구성된다. 본인은 이 무의식적인 요소들의 집합을 정상 상태로 여긴다. 그가 보는 번화가나 우체국 창구의 정상적인 풍경, 정상적인 저녁 뉴스와 세금 환급 신청서 양식, 친구와 인사하고 침구를 펴고 버터 빵을 먹고 집안을 청소하고 가구를 고르고 음식을 주문하고 차 안에 카세트를 배열하고 화장실을 사용하고 여행지를 결정하고 전화를 끊고 토요일 계획을 짜는 정상적인 방식들.
p298 


"하지만 행복한 가정에서 자랐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의심스러워요. 가능하지가 않잖아요. 적어도 우리 집은 내놓고 엉망이었어요. 누구든 우리 집에 와서 5분만 지나면 심각하게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거든요. 이를 북북 갈면서 상대를 죽이는 공상을 즐기는 집이었지, 다들 '정말 잘했구나, 아가' 하고 말하는 예의 바른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그런 집을 보면 이런 우스개가 떠올라요. 남자가 정신과 의사에게 이렇게 말하죠. '닥터 슈피겔라이어, 저번에 재미있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어머니랑 차를 마시는데, 저는 어머니, 설탕 좀 주시겠어요? 하고 말하려 했거든요? 그런데 기절초풍하게도 이런 말이 튀어나왔지 뭡니까. 어머니, 몹쓸 여자! 당신이 내 인생을 망쳤어.'"
p313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을 빌리면, 타인들이 우리를 이해하는 폭이 우리 세계의 폭이 된다. 우리는 상대가 인식하는 범위 안에서 존재할 수 밖에 없다 - 그들이 우리의 농담을 이해하면 우리는 재미난 사람이 되고, 그들의 지성에 의해 우리는 지성 있는 사람이 된다. 그들의 너그러움이 우리를 너그럽게 하고, 그들의 모순이 우리를 모순되게 한다. 개성이란 읽는 이와 쓰는 이 양쪽이 다 필요한 언어와 같다. 일곱 살 아이에게 셰익스피어 작품은 말도 안되는 허접쓰레기이며, 만약 그의 작품이 일곱 살 아이들에게만 읽힌다면 셰익스피어는 그 아이들이 이해하는 수준에서 평가받을 수 밖에 없다 - 마찬가지로 앨리스의 가능성도 애인이 공감해주는 한도에서만 뻗어나갈 수 있다.
p318-p319 


관계의 기반은 상대방의 특성이 아니라, 그런 특성이 우리의 자아상에 미치는 영향에 있다 - 우리에게 적당한 자아상을 반사해주는 상대방의 능력에 기초해서. 에릭은 앨리스에게 어떻게 느끼게 하는가? 어떻게 그것을 알려주는가? 모든 게 머릿속 생각일 뿐인지 실제로도 그런지 모르지만, 그녀는 오래전부터 그 남자와 있으면 가치 없는 사람이 된 기분을 느꼈다. 그 남자와 함께 있는 앨리스는 돈을 함부로 쓰고, 지성적이지 않고, 감정적인 데 매달리고, 타인을 귀찮게 하는 의타심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이었다.
p319 


행복은 배타적이지만 불행은 끌어안는다. 그러므로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행복한 표정이 아니라 불행한 표정을 짓고, 명랑함에 수반되는 독립심, 고통에 대한 무감각을 피할 일이다. 불행을 추구하는 일은, 만족한 표정에 함유된 경쟁심을 피하려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p336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란 공유된 의사소통 체계라고 정의되므로 사회를 벗어난 곳에서는 상상할 수 없다며, 혼자만의 언어는 있을 수 없다고 했다.
p362 


불평을 표현하는 행동 뒤에는 상대가 잘못을 빌 거라는 낙관적인 믿음이 깔려 있을 것이다. 불평은 대화에 대한 믿음을 암시한다. 상처를 입긴 했지만, 이쪽이 화난 것을 상대가 이해해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다.
p364


문제가 있는 사람[사랑을 받기만 하는 사람, 질투가 심한 사람, 감수성이 무딘 사람, 다른 성에 더 관심 있는 사람, 결국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사람......]을 사랑할 경우, "문제는 그의 탓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게 가장 흔한 반응이다. 물론 그에게 문제가 있지만, 그것은 그 성격의 중심적인 특질이 아니라 우연히 생긴 일면일 뿐이라는 것이다. 살에 파고든 발톱처럼 제거할 수 있는 부분이고, 시간이 흐르면 없어질 장애다.
p371


보는 것은 항상 다른 요소에 의해 보강된다. 심지어 이미 알고 있거나 바라는 것에 따라 보는 것이 달라지기도 한다. 우리는 눈앞에 있는 것을 곧이곧대로 보지 않고, 이미 인식하고 있는 영상으로 눈을 가리고 힐끗 쳐다볼 뿐이다.
p372


그이도 다를 바 없는 인간이구나. - 조지 버나드 쇼가 말한 '사랑은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점을 과장하는 흥미로운 과정'이라는 유명한 경구의 진부한 메아리였다.
p375 


냉소적인 사람은 너무 많이 바라고 너무 오래 기다린 사람을 뜻했다. 그의 사랑 고백은, 앞으로 혼자 밤을 보내야 하고 또 신경질을 부릴 대상이 없어진다는 걸 깨달은 남자의 반사적인 반응이 아닐까?
p390


그녀는 감정적으로 너그러워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뭐든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믿었다. 그것이 언제나 앨리스의 자기 개념이었다. 흔히 자신을 성숙하게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이를 거부하지만, 그녀는 사랑을 희생의 ‘장’으로 여겼다.
p400